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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머릿돌 신앙 (슥 4: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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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돌 신앙 (슥 4:1~14)


왕상2:14절에 보면 엘리사가 스승 엘리야를 따라가면서 
[ 당신의 성령의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내게 있게 하소서 ] 구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엘리야의 큰 기적은 일곱 번입니다.
그러면 약속대로 라면 엘리사는 14번을 행해야 합니다.
하지만 엘리사는 13번의 기적을 행하고 임종을 맞았습니다.
약속된 숫자가 하나가 모자랍니다.
그럼 엘리사는 미완성의 생애로 끝나고 말았나?

그렇지 않습니다. 
엘리사가 죽고 난 후에 왕하13:20절에 보면 사람들이 도망가다가
전투에서 죽은 사람을 엘리사의 무덤에 던졌는데
엘리사의 몸에 닿는 순간 다시 살아난 기적이 나타납니다.
그러니 14번째 기적이 기어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약속을 이루어 나가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죽음조차도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을 막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 머릿돌 신앙이란 말도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지니
시작할 때 완성을 바라보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사람은 귀중한 것일수록 소유하거나 누릴 때는 그 귀중함을 모르다가
그것을 잃었을 때야 그 귀중함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건강이 그러하고 물, 공기, 잠 등이 그러합니다.
특히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가장 귀중한 것이 있다면
좋은 환경 여건 속에서 교회 나와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
솔론몬을 통해 금, 은, 백향목으로 지은 아름다운 성전 주었는데
그 귀중함을 모르고 하나님께 바른 예배는커녕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우상숭배와 형식적 예배를 드리다가
바벨론 느브갓네살 왕에 의하여 
예루살렘 성은 훼파되고 성전은 파괴되고
금 은 놋으로 된 성전 성물들과 함게
유다 백성들은 바벨론에 포로잡혀 가게 됩니다.

포로 잡혀간 유다 백성들 그제야 깨닫고
시137편에 보면 바벨론 그발 강가에 예루살렘 성전을 기억하면서
버드나무에 수금을 걸어 놓고 울면서 다짐합니다.
[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지로다 ] 
[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아니하거나
내가 가장 즐거워하는 것보다 즐거워하지 아니할진데 내 혀가 입천장에 붙을지로다 ] 
그럴 때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을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게 합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
제일 먼저 한 일이 무너진 하나님의 성전을 재건하는 일이었습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총독 스룹바엘을 중심해서 성전 재건 공사를 시작했는데
역사적으로 이 성전을 스룹바벨 성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전건축하는데 있어서 마음만 가지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다백성들 마음은 앞섰지마는 역부족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잠깐만 계세요.

우리 힘 좀 얻어서 다시 시작할게요 하면서 잠깐만 한 것이 15년이 휘딱 지나가버렸습니다.
학개서 1:1절에 보면 다리오 왕 2년  여섯 째 달 그 달 초하루에 선지자 학개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했다고 하는데 바로 성전 기초만 놓고 역부족으로 15년이 지났다는 말씀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학개 선지자를 보내어 너희 소위를 한 번 살펴봐라, 
하나님 백성이 하나님의 일에 무관심하고 잘되는 것 봤느냐?

너희가 뚫어진 전대를 차고 있구나? 라고 하면서  먼저 유다 백성들의 신앙의 무관심을 깨우쳐 주면서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온 유다 백성들의 마음을 감동시켰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학2:19절에 성전건축에 다시 힘을 쏟는 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전 건축하는데 말로만 할 수 없잖아요.
성전 건축하려고 하니

1) 경제적 문제가 따릅니다.
2) 주변 이방 국가들의 노골적 방해 공작이 있습니다.
3) 내부적으로도 하나가 안 됩니다.
그런데도 성전을 건축하라고 합니다.
그럼 뭐 가지고 합니까? 바로 환상입니다. 비전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먼저 당신의 백성들에게 비전을 주십니다.
그래서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 유다 백성들에게 환상을 보여 줍니다.

스가랴서는 1-6장까지 8개의 환상으로 되어 있습니다. 
1) 1:7절- 화석류 나무 숲 사이에 홍마를 탄 사자를 보여 줍니다.
2) 1:18절- 네 뿔과 네 대장장이 환상이 나옵니다.
3) 2:1절- 측량줄 잡은 하나님의 사자가 나옵니다.
4) 3:1절- 천상 광경을 보여주며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모델로 삼아  이스라엘을 예표의 사람 삼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환상을 보여 주어도 아마 스룹바벨과 유다 백성들은 
“ 시작은 정말 좋았는데, 그러나 우리한테는 너무 역부족이야 그리고 방해꾼들이 너무 많아 ” 하고 
다시 시작할 용기를 갖지 못하고 있으니 여호와 하나님께서 선지자 스가랴에게 
다시 환상을 보여주게 되는데 다섯 번째 환상은 좀 더 강력하고 용기와 확신을 불러 일으켜 주는 
환상을 보여 줍니다.

1. 1절 말씀 보세요.
[ 네게 말하던 천사가 다시 와서 나를 깨우니
  마치 자는 사람이 잠에서 깨어난 것 같더라 ]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은혜와 위로를 한두 번 받은 것이 아니지요
그런데도 감히 일어설 용기를 가지지 못한 다면 
마치 잠에서 깨어나는 것 같은 더 강력한 성령의 은혜에 한 번 부딪혀서
눈이 버쩍 뜨여져야 합니다. 

저는 부흥회 나가면 첫날 첫 번째 시간 시작하는 기도의 레퍼토리가 같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부딪히는 성회가 되게 하옵시고, 하나님 말씀에 부딪힐 때 내가 깨어지게 하옵시고,
내가 깨어질 때 눈이 뜨여져서 이전에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하옵소서.
세상 살다보면 다 성공하고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실패 하고 나락에 떨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떨어지더라도 뒤로 넘어져 절망하지 말고  떨어져도 하나님 말씀 앞에 떨어져서 
눈이 뜨여지시기 바랍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지요? 아주 의미 있는 예화 한 토막 소개합니다.
어느 목사가 어느 날 공중 곡예사들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했습니다. 
`여러분은 한 번도 그네에서 떨어진 일은 없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도 때로는 떨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아하고 멋있게 떨어지는 방법을 익혔습니다. 
떨어질 때는 몸을 뒤로 솟구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런 행동도 서커스 공연의 한 부분인 줄로 생각하게 되죠.` 

그리스도인도 믿음의 줄에서 떨어져 실수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떨어지더라도 멋지게 떨어져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 앞에 떨어지면  하나님은 실수한 사람들이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그것이 회개입니다. 실수하지 않는 사람도 멋지지만,  말씀 앞에 떨어져 눈물 속에 눈이 뜨여진 사람, 더 멋진 사람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내 속에 잠자는 거인을 깨어라> 저자 조엘 오스틴이 이런 말을 합니다.
천사가 무엇이라고 말했기에? 
선지자가 잠에서 뻘떡 깨어나 무엇을 보았을까?
“다시 시작하시오, 즉 다시 일어나시오!” 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의역이지요
성전 건축뿐 아니라 우리의 신앙의 회복에 있어서도 
오늘 말씀 앞에 떨어져 다시 일어나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2. 그때 천사가 잠에서 깨어난 것 같은 선지자 스가랴에게 묻습니다.
2절 [ 네가 무엇을 보느냐? ]  [ 내가 보니 순금등잔대가 있는데 그 위에는 기름 그릇이 있고
또 그 또 그 기름 등대 위에 일곱 등잔이 있으며 그 기름 그릇 위에 등잔을 위해 일곱 관이 있고
그 등잔대 곁에 두 감람나무가 있는데 하나는 그 기름 그릇 오른 쪽에 있고 하나는 그 왼쪽에 있나이다 ] 잠에서 깨어난 것같이 눈이 뜨여진 스가랴에게 하나님이 보여 환상은 순금등잔대의 환상입니다. 
즉 은혜 받은 성도가 먼저 어디에 관심을 갖게 되는냐?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유다 백성들에게 선지자 학개를 보내어 주어진 멧세지는 하나님의 성전 즉 하나님의 교회에 눈을 뜨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는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 눈을 뜨게 하여 앞으로 완성될 하나님의 성전을 보여 줍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잠에서 깨어나는 것 같은 하나님의 은혜에 부딪치며 제일 먼저 말씀에 눈이 뜨여지고 그리고 교회에 눈이 뜨여집니다.

마차를 타고 가는 사람에게 한 유태인이 물었습니다. 
[ 살렘 마을까지는 여기서 얼마나 될까요? ]
[ 예, 반시간쯤 가면 됩니다. ]
[ 미안하지만, 좀 함께 타고 가면 안 될까요? ]  [ 예, 타십시오. ] 
그리고 반시간이 지났는데도  살렘 마을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 살렘 마을은 아직 멀었습니까? ]  [ 예, 여기서는 한 시간쯤 걸립니다. ] 
[ 아니, 그게 무슨 말이오. 반시간 거리를 반시간 동안 왔는데 어떻게 아직 한 시간이나 남았단 말이오. ] 
[ 예, 이 마차는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으니까요. ]  

나는 지금 나의 인생 방향이 어디로 향하고 있습니까?
인생 방향을 잘 잡으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하나님 일에 무관심하고 내 방식대로 신앙생활 하다가 실패했지만 눈이 뜨여져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나의 영적 상태와 교회에 눈이 뜨여지시기 바랍니다.

3. 스가랴 선지자가 환상을 보고 천사에게 4-5절                      
[ 내 주여 이것들이 무엇입니까? ] 하고 물으니 
[ 이것들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느냐? ] 하고는 천사가 설명을 해 주지 않습니다.
왜 천사가 스가랴의 질문에 바로 답을 가르쳐 주지 않았을까요?
하나님은 자기가 보여 주신 그 환상의 뜻을 단번에 알게 하지 않았습니다.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오늘도 은혜 받은 성도에게 가끔 환상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그 때에 즉시 그 뜻을 다 깨닫지 못하는 환상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지마는 그 은혜를 다 깨닫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 칼빈은 “ 아무리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며 하늘의 이상을 보는 선지자일지라도
 이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이 무엇입니까? 라고  계속 하나님의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자세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가 은혜를 받았다고 해서 즉시 다 이해하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계속 그 은혜를 붙들고 기도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임을 말합니다. 

우리가 은혜 받았다고 다 된 것은 아닙니다.
환상을 보았다고 다 된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 은혜를 붙들고 그 환상을 붙들고 기도하고 또 기도하면 어느 날 바로 이것이로구나! 깨달을 날이 올 줄 믿습니다.
은혜 받은 성도일수록 계속 성령님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계속 탐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저도 여러 번 하나님이 보여 주는 환상을 본적이 있습니다.
어떤 환상들은 20년이 걸려 이해가 되는 환상도 있습니다. 아마 만만의 축복은 그 배나 걸리지 않겠나 싶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천사가 스가랴 선지자에게 순금등잔대의 환상에 대해 설명하고 있지 않지만 
성경 전체를 통해 순금등잔대의 환상이 무엇을 가리키는가 하면 하나님의 교회를 상징하는 환상입니다. 
등잔대는 기름을 부어 빛을 발하는 등잔대로서 촛대와는 다릅니다. 
순금등잔대는 솔로몬 성전에 있었던 전통적인 등대와는 다릅니다. 
이 말은 순금등대는 지상교회가 아니라 지상교회의 모형이 되는 천상교회를 보여주는 이상으로서 
오늘날 교회가 지향해야할 완성된 교회의 모습인 것입니다.

4. 그럼 하나님은 순금등대의 환상을 통해 무엇을 말씀하고자 하십니까? 
물론 하나님이 직접 이런 설명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환상의 목적은 바로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영광이 세상에 충만해 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설명 대신 6절에 [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 고 하십니다. 
사실 이것이 순금등잔대 환상의 설명입니다.
그러니 교회가 순금등대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힘이나 능으로 되지 아니한다고 합니다.
여기에 힘이라 말은 다른 성경에 많은 군대의 힘, 또는 많은 재물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그리고 능이란 인간의 내적인 기질을 나타내는 말로서 세상적으로 말하면 성공한 사람들 이면에 보면 
그 사람 끈질긴데가 있어, 아니면 지독한 면이 있다 고 하는 인간의 내적 기질을 말합니다.

그러니 이 말씀의 직접적인 교훈은 스룹바벨을 중심한 유다 백성들의 성전건축이 힘으로 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너희가 힘을 합하여 군대를 이룬다고 해서 너희가 재산을 모아 드린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너희가 또한 끈질긴데가 있어 지독히 부지런하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오직! 성전건축의 완공은 성령의 능력으로 될 것을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이래도 안 되고 저래도 안 되겠다고 생각이 들거든 성령의 능력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화창한 토요일 오후 아버지와 아들이 오랜만에 정원을 손질하고 있었습니다.
아빠는 잔디밭 가운데 있는 커다란 돌이 있는 것을 보고 아들에게 그 돌을 옮겨버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옮길 수가 없었습니다.
“ 아빠 도저히 너무 커서 돌을 옳길 수 없어요” 라고 하니
“ 애야 네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면 얼마든지 옮길 수 있단다”
그러나 아들은 안간힘을 써 보았지만 돌을 옳길 수 없었습니다.
그 때 아버지가 하는 말이
“ 애냐 네가 돌을 옮기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니 한 가지 사실을 잊고 있구나
너는 네 옆에 내가 이렇게 서 있다는 것을 잊고 있구나
나는 언제든지 아들인 너를 도와 줄 준비가 되어있다구나
너는 나에게 도움을 구할 생각조차도 않더구나.”
소년은 눈을 반짝이면서 아빠에게 도와달라고 부탁했고
그 큰 돌을 잔디밭 밖으로 옮겨놓고는 외침니다. “아빠 우리가 해냈어요!”

우리 교회도 다시 비전센터건축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주의 일은 우리가 마음 먹은 대로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야~! 이것 사람의 힘을 되는 것이 아니구나 하나님의 신, 즉 성령의 능력으로 되어지는 구나
정말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는 가족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비단 성전건축 문제만 아닙니다.                           
모세의 글 신명기에도 보면 신8:17-18절 [ 그들의 마음이 스스로 교만해져서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 
내일 소식지에 나오는 간증을 보면 어찌 그리 동일한 간증이 실리는지....
돈 잘 벌때는 하나님 등지고 자신의 힘과 능력을 믿다가 이상하게 재물 날리게 되면 
야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안되구나 하고 하나님 찾는 것 있지요.

그럼 어떻게 성령의 능력이 나타나는가 여기서 순금등잔대의 환상을 통해 천사를 통한 하나님의 해설은 
[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고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 는 것입니다,
교회가 순금등잔대같이 세상에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오직 성령의 능력 밖에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순금등대의 환상을 자세히 보면 먼저 순금등잔대의 환상은 
계1:20절과 2:1절에 나타난 주님의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 오른 손에 일곱별을 잡으시고 일곱 금 촛대 사이로 다니시는 이 ]  
그러니 순금등잔대는 예수님의 모형이라면 일곱 등잔은 하나님의 교회를 상징하는 모형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일곱 촛대를 일곱 교회라고 하며 주님이 붙들고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순금등잔대는 등대 꼭대기에 있는 기름그릇에 등대 곁에 서 있는 두 감람나무로부터 기름을 공급받아  일곱 관을 통하여 일곱 등잔에 기름이 채워져야만 등잔의 불을 밝힐 수 가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 교회는 성령의 기름을 공급받아야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군대같이 많이 모인다고 남다른 재능을 가진 교인들 있어서 빛을 발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기름으로 빛을 발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즉 성령의 사람을 통해 역사를 나타내십니다.

성령의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오늘 본문에 나타난 두 감람나무 같은 사람 즉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 같은 사람
학2:14절 [ 유다 총독 스룹바벨의 마음과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마음과 남은 모든 백성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 하나님의 말씀에 감동을 먹은 사람들입니다.

5. 이렇게 하나님의 성령에 감동 받은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즉 하나님은 성령의 사람을 통해 어떻게 역사하실까요? 
7절에 [ 큰 산아 네가 무엇인냐? 네가 스스로 스룹바벨 앞에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어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 찌어다 하리라 ] 
여기에 큰산은 스룹바벨의 성전건축에 방해하는 모든 대적들을 가리키는 말로서
넓게 생각하면 우리의 신앙생활의 모든 방해거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능력 받으면 문제가,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되려 큰 산이 평지가 된다고 합니다.
 성령의 사람은 바로 문제 앞에서 포기하는 사람이 아니라  불가능한 문제를 가능케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 그가 머릿돌을 내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지어다 하리라 ] 
오늘 말씀의 제목이 머릿돌 신앙입니다.
성령의 사람은 건축을 앞두고 머릿돌을 떠올리는 사람입니다.
머릿돌이란 성전건축에 마지막에 끼어넣은 기념돌로서 성전건축 완공을 의미하는 돌입니다.
그러니 성령의 사람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완성의 소망을 가지며 시작한 그 일에 성취의 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즉 빌1:6절의 사람을 말합니다.
[ 너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나라 ]
비단 성전건축 뿐만이 아닙니다.
머릿돌 신앙은 우리 신앙생활의 전반에 베여나야 할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확신의 신앙입니다.

어느 부부가 삶의 기도 제목이 꼭 하나 있는데
바로 아들이 교회에 나오지 않고 방탕하게 살아갑니다.
어느 날 머릿돌 신앙에 눈이 뜨여져 성경을 사서 표지에 아들의 이름을 적어서 식탁 위에 놓고는
식사할 때 마다 이렇게 기도로 외칩니다.
[ 아들이 돌아오는 것은 시간 문제다 하나님은 당신이 시작하신 일을 반드시 완성하실 것이다 ]  

9절에도 [ 스룹바벨의 손이 이 성전의 기초를 놓았은즉 그의 손이 또한 그것을 마치리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네가 알리라 ] 
 
비록 감옥 안에 갇혀 있는 선지자 에레미야이지만 렙33:3절에
[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같이 이르시도다 너는 네게 부르짖어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가 처음에는 사람들에게 적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10절 [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행하는 여호와의 눈이라
다림줄이 스룹바벨의 손에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 ] 합니다.
실제 스룹바벨 성전이 재건되는 그날에 스3:12절에 [ 여러 노인들은 첫 성전을 보았는고로 성전건축의 초라함을 보고 대성통곡 하였다 ]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학2:3절에도 [ 이전의 이전 영광을 본 자가 누구냐?  이제 이것이 너희에게 어떻게 보이느냐? 
 이것이 너희 눈에 보잘 것 없지 아니하냐? ] 합니다. 

그러나 학2:9절 말씀같이[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 고 합니다. 
비록 사람들은 스룹바벨의 손에 다림줄이 들리어져 있는 것을 보고 비웃을런지는 모르지만 
여호와의 일곱 눈 되시는 성령은 기뻐하신다고 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스룹바벨의 성전건축이 방해 공작과 사람들의 비웃음으로 보잘 것 없이 보이겠지마는 
하나님은 기뻐하시어 성령의 능력으로 완성케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처음에는 보잘 것 없는 것 같지마는 성령님이 함께 하면 큰 역사를 나타낼 줄 믿습니다. 

오늘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 우리에게 주는 하나님의 메시지는 하나니의 일은 
성령의 사람을 통해 역사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사람 앞에는 큰 산이 평지가 됩니다.
성령의 사람은 머릿돌 신앙을 가진 사람입니다.
일을 행하시면 성취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시기에
믿고 부르지는 머릿돌 신앙의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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