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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계 3: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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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계 3:14~22) 
 
 
사람이나 사물을 겉만 보아서는 그 진가를 판단하기가 어렵습니다. 겉보기에는 화려해도 실속이 없는 경우가 있고, 반대로 겉으로는 볼품이 없어 보여도 알찬 내용을 가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계시를 통하여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는 지상 교회에 대한 주님의 경고입니다. 각 교회가 지니는 장점과 단점에 대하여 칭찬도 하시고 책망도 하셨습니다. 서머나 교회와 빌라델비아 교회는 칭찬만 받았으나 여기 라오디게아 교회는 책망만 받았습니다. 자기들은 부요하고 부족함이 없다고 자랑하였으나 실상은 가난하고, 헐벗고, 병든 자라고 하였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겉으로 화려하지만 실상은 능력을 잃은 상태가 오늘날 교회의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이들을 향하여 주님께서는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고 명령하십니다.

1. 적극적인 행위를 요구합니다.

15절에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고 하였습니다. 16절에는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고 하였습니다.

1) 타성에 젖어 있었습니다.

성도가 세상에서 물질생활이 부요해지고 육신생활이 안정되면 영적으로 나태해지게 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둠이 지배합니다. 어둠의 세상은 마귀의 활동무대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잠시도 방심해서는 안 됩니다. 사도 베드로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고 하였습니다(벧전 5:8). 사도 바울도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라고 하였습니다(롬 13:11). 이와 같은 말씀들은 우리에게 영적인 경각심을 일깨워 주는 교훈입니다. 서머나 교회 사람들은 핍박 가운데 믿음을 지키며 순교자를 배출했지만 라오디게아 교회는 오히려 편안한 가운데 세상적인 잠에 빠졌습니다. 그 신앙은 미지근한 상태에서 열심을 잃고 말았습니다.

2) 자기와의 싸움을 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을 예수님의 군사라고 하였습니다(딤후 2:3).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아니라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는 자입니다. 디모데후서 2:5에 보면 그리스도인을 운동장에서 경주하는 운동선수로 비유하였습니다. 운동선수가 경기에서 우승을 하기 위해서 자기의 몸을 쳐서 복종시키는 훈련을 해야 됩니다(고전 9:27).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자기와의 싸움을 통하여 영적으로 성숙되고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닮아가기 위한 노력을 뜻합니다. 아무리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라도 육신의 소욕이 있기 때문에 자기 속에서 내적인 싸움을 계속하게 됩니다. 이것을 겉사람과 속사람, 또는 육신의 사람과 성령의 사람과의 싸움이라고 합니다(롬 7:22-24).

3) 영적으로 둔감해 있었습니다.

라오디게아 성도들의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고 미지근한 상태의 신앙은 주님의 성향이 아닙니다. 빛과 어둠이 공존할 수 없는 것처럼 신앙의 세계에 중립지대는 있을 수 없습니다. 믿으면 구원을 받고, 믿지 않으면 멸망하는 것밖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요 3:16). 성경에는 그리스도인을 지칭할 때 ‘깨어 있는 사람’(마 25:43), 또는 ‘빛의 아들’(살전 5:5)이라고 표현합니다. 깨어 있는 사람은 시대와 상황을 정확하게 분별하고 민감하게 대처하지만 잠든 상태에 있는 사람은 영적인 분별력을 잃고 맙니다. 또 빛의 세계는 어둠을 용납하지 않습니다(고후 6:14). 진리와 비진리가 혼돈되고 하나님의 성전이 우상과 똑같은 개념으로 취급된다면 이는 영적으로 암흑시대의 상황이 되고 맙니다(삼상 3:1).

2. 신앙의 재정비를 요구합니다.

17절에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고 하였습니다.

1) 연단된 믿음을 가져야 됩니다.

라오디게아 사람들은 물질적으로 부요하고 육신적인 삶이 윤택한 반면 영적으로는 매우 가난하고 헐벗은 상태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리석은 부자 비유에서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고 하였습니다(눅 12:21). 하나님께서는 믿음에 부요한 자를 부자로 인정하십니다(약 2:5). 여기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라”고 하셨는데(18절), 금은 부요의 상징입니다. 곧 믿음에 부요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믿음은 환난과 역경을 통과하면서 연단된 믿음입니다. 베드로전서 1:7에 “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2) 경건한 삶을 실천해야 됩니다.

18절에 또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흰 옷’은 세마포 예복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성도의 합당한 행실을 뜻합니다. 계시록 19:8에 “그에게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하셨으니 이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고 하였습니다. 벌거벗었다는 것은 수치를 드러내었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보실 때 물질의 부요로 화려한 의상을 걸치고 외모를 단장하였지만 그들의 내면적 삶은 경건을 잃어버린 상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향하여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하였습니다(레 11:45). 베드로후서 3:11-12에는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고 하였습니다. 

3) 영적인 안목을 가져야 됩니다.

17절에는 라오디게아 사람들을 ‘눈먼 자’로 진단했고 18절에는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고 처방을 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눈 먼자’ 라고 하신 것은 그들이 영적인 소경이 되어 신령한 세계를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눈이 밝아 사물은 볼 수 있어도 영적인 눈이 밝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세계를 보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눈먼 소경’이라고 하였습니다(마 23:16). 영적 가치관이 혼미된 사람은 매사를 하나님의 뜻과 반대로 생각합니다(마 23:17-22). ‘안약을 사서 발라 보게 하라’고 하심은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의도를 분별하라는 뜻입니다. 고린도전서 2:10에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 

3. 임마누엘의 삶을 요구합니다.

20절에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고 하였습니다. 마음에 담을 쌓고 예수님과 교통이 두절된 생활에서 온전한 신앙으로 회복하라는 뜻입니다.

1) 음성을 들어야 됩니다.

예수님께서 경고의 말씀을 선포하시면서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고 하였습니다(22절). 여기 ‘귀 있는 자’란 성령의 소리를 듣고 분별할 수 있는 사람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귀는 복이 있습니다. 엘리야는 호렙산 굴속에서 세미한 소리 가운데 들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하였습니다(왕상 19:13). 성령으로 거듭 난 사람은 주님의 음성을 분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목자가 우리의 문을 열고 양의 이름을 부를 때 자기의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고 따라간다고 하였습니다(요 10:4). 말씀의 가치를 알고 사모하는 사람이 쉽게 받아들입니다(시 1:2). 말씀을 들을 때 사람의 말로 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으면 그 말씀이 마음 속에서 역사하심을 체험하게 됩니다(살전 2:13).

2) 마음 문을 열어야 됩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 죄와 죽음 아래 얽매여 신음하는 인간들이 스스로 주님 앞으로 찾아 나아가야 마땅하지만 사람들은 자기의 분수를 모르고 찾아오시는 주님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옛날 솔로몬 왕은 술람미를 찾아가서 문을 두드렸으나 술람미는 그 소리를 듣고도 옷을 벗었다, 발을 씻었다는 핑계로 이를 거부하였습니다. 

결국 그가 문을 열었을때 솔로몬은 가고 없었습니다. 솔로몬을 잃어버린 술람미는 낭패를 보았고 병이 났습니다(아 5:2-8). 마음의 문을 닫고 빗장을 풀지 못하는 사람은 주님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교만함과 고정관념의 벽을 쌓고 그것을 허물지 못하는 사람도 주님을 모실 수 없습니다. 아이처럼 겸손한 사람이 주님을 모시게 됩니다.

3) 신령한 교제의 행복을 누려야 됩니다.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의 극치입니다. 또한 이것은 이상적인 교회의 모델이기도 합니다. 오순절 이후 설립된 예루살렘 초대교회 성도들은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행 2:46-47). 

삭막한 세상에서 교회를 중심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의 생활은 영혼의 풍요로움을 누리게 됩니다. 미지근하고 감각을 잃은 영적 상태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하기만 하면 새로운 세계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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