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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지혜 (고전 1:23~25, 고전 2: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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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지혜 (고전 1:23~25, 고전 2:6~10)


오늘 같이 읽으신 본문말씀에는 ‘하나님의 지혜’라는 말이 여러 번 반복하여 나오고 있습니다.  특히 1장 25절에서는 이 ‘하나님의 지혜’라는 말을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말과 함께 쓰고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 ― 이 둘을 동시에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지혜!―이 둘을 생각해 볼 때,  대체로 사람마다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는 의심치 않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그 능력을 믿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을 열심히 구하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병에 걸렸을 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서 낫게 해주시고, 내가 하는 사업이 있으면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 잘되게 해주시고, 여행을 떠나면 하나님의 능력 가운데 평안히 돌아오게 해주시고…… 그런 내용들 아니겠습니까?
   
이러고 보면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신앙, 또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는 기도와 그 소원이라고 하는 것들은, 사실 살펴보면 하나님에게가 아니라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하는 그런 것들이란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는 또 다른 속성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지혜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지혜에 대해서는 우리가 너무나도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노라면, 물론 하나님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런고로 이 하나님의 능력을 간구해야 합니다.  그러나 실제의 구체적 우리의 삶에 있어서는, 사실은 바로 하나님의 지혜가 훨씬 더 우리의 삶에 필요한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하게 되는 모든 고민이나 번민들을 한번 살펴보십시오.  왜 그런 것이 우리에게 있게 되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이 하나님의 지혜를 믿지 못하는 데서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이것은 아주 굉장한 것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우리 사람들은 미련해서 발등에 떨어진 것만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생각을 미처 하지 못하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는 우리가 모르는 바로 이 모든 것들을 다 보완시켜 주시는 것이기에, 그래서 우리가 고민하고 번민하는 거기서 오히려 더 훌륭한 결과로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탈무드에 보면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어떤 랍비가 나귀를 타고 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출발에 앞서 기도를 합니다.  “이 여행길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를 인도하시고 보호해 주시옵소서.”  그리고 여행을 떠났는데, 길을 잘못 들었는지 그만 가도 가도 인가(人家)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귀에서 내려 천막을 치고 들어가 자게 되었는데, 어두운 터라 등불을 켜고는 서둘러 천막을 칩니다.  그런데 그때 강한 바람이 불어와 켜 놓은 등불이 엎어지면서 기름이 다 쏟아지고, 그래서 등불이 꺼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보니, 자기 옆에 세워놓았던 나귀가 등불이 쏟아지는 순간에 놀라서 도망을 가버렸습니다.  문제가 하나 더 생긴 것이지요.  ‘할 수 없구먼, 내일부터는 걸어가게 생겼군!’  그리고는 더듬더듬 천막에 들어가서 잠을 잤습니다.
   
이 랍비는 평소 어디로 다닐 때 닭을 한 마리 가지고 다녔는데,  요즈음처럼 시계가 있던 시절이 아니라서 이 닭이 아침에 ‘꼬끼오’하고 울면 그 소리를 듣고서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 닭도 밤중에 여우가 와서 물어가버렸습니다.  낭패가 겹친 것이지요.
   
이렇게 밤중을 보내고, 아침에 해가 높이 뜬 다음에야 일어나서 주위를 둘러보았더니, 지난밤을 보낸 그곳이 바로 어느 마을의 동구 밖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세히 살펴보니, 그 동리 여기저기에서 연기가 납니다.  그래서 그 마을에 들어가 보았더니 이게 웬일입니까?  지난밤에 강도떼들이 몰려와서 사람들을 모조리 죽이거나 노예로 팔기위해 잡아갔고, 집들에는 불을 지르고 물건을 모조리 약탈해간 것입니다.
   
지난밤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자기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지 않았다고 원망하고 있었는데, 이때에야 이 랍비가 깨달았습니다.  만약에 닭이 있어서 ‘꼬끼오’했으면,  만약에 당나귀가 있어서 놀라가지고 ‘히이잉!’ 거렸다면,  만약 켜 놓은 등불이 그대로 있었다면,  꼼짝없이 강도를 만났더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를 다 잃어버렸거든요.
   
지난밤에는 원망했었지만, 이제 그는 다시 기도드립니다.  “하나님, 제 기도에 하나님의 지혜로 응답하심에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는 자! ― 사실 그 기도의 내용은 ‘내가 원하는 대로 되어야만 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자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사실 이 ‘하나님의 지혜’를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혜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지혜에 관하여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어떤 아주머니가 남편을 여의고, 아이 셋을 데리고 여인숙을 하며, 가는 사람 오는 사람들을 대접하면서 거기서 조금 남는 수입을 가지고 아이들을 키우면서 살았습니다.
   
어느 날 어떤 손님 두 사람이 왔습니다.  그들은 큰 보따리를 가지고 왔는데, 하룻밤을 자고나서 아침에 그 보따리를 아주머니한테 맡기면서 “이건 돈 보따리인데, 우리는 아주 중요한 일이 있어서 급히 좀 다녀와야 합니다.  그러니 이것 좀 맡아주세요.  그런데, 돌아올 때 우리 두 사람이 함께 오거든 이것을 내주시고, 한 사람이 오면 절대로 내주지 마세요.” 하는 것입니다.  보관료도 두둑이 주는지라 그러겠다고 대답을 하고는, 두 사람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고 기억해 두었습니다.
   
그리곤 두 사람이 떠나갔는데, 얼마 되지 않아서 그 중의 한 사람이 헐레벌떡 달려와서는, 계획이 좀 바뀌었다고 하면서 보따리를 돌려달라고 합니다.  이 아주머니는 분명히 보따리를 맡겼던 사람인가를 확인하고는, 무심결에 보따리를 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떠난 다음에야 아차 싶었습니다.  ‘두 사람이 함께 올 때에 내달라고 했는데……’  큰일 났구나 싶어 걱정이 되어 잠도 자지 못할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러든 어느 날, 어떤 점잖은 손님 한 사람이 이 여인숙에 들었는데, 이 아주머니가 걱정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무슨 걱정을 그리도 골몰히 하시느냐고 말을 걸고는, 그 아주머니가 걱정하는 사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얘기를 다 듣고는 그 사람이 이렇게 말해줍니다.  “아주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입니다.  나중에 다른 한 사람이 찾아와서 보따리를 달라고 하면 ‘두 사람이 같이 오세요. 그러면 주겠습니다.’ 그러십시오.  가져간 사람은 절대로 안 올 것이고 안 가져간 사람만이 올 것이니, ‘내게 처음 단단히 말한 대로, 같이 오면 준다.’ 그렇게만 대답하십시오.”
   
그제야 이 아주머니는 두 다리를 쭉 뻗고 잤다는 얘기입니다.  사실 사람들은 지혜가 없어서 고생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 같이 읽으신 본문 2장에서는 하나님의 지혜와 이 세상에 속한 지혜를 대조시켜서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소피아 데우’―하나님의 지혜!,  그리고 ‘소피아 투 아이오노스’―인간의 지혜, 세상의 지혜!

먼저 ‘세상 지혜’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 세상 지혜는 없어질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무슨 말씀인고 하니, 오늘은 지혜인 것 같으나 내일 보면 지혜가 아닌 것입니다.  오늘은 아주 잘하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어리석은 짓이더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최근에 그런 일이 많았지요.  그간에 권력을 얻으려고 갖은 방법을 다해서 권력을 얻었다가, 정권이 바뀌고는 감옥에 들락날락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권력!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야말로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요 추풍낙엽(秋風落葉)입니다.  그야말로 형편이 없는 것입니다.
   
또 돈 많이 벌면 좋을 줄 알았는데, 돈 놓고 아버지와 아들이 싸우고, 어머니와 아들이 피나게 싸우는 사람들의 얘기를 뉴스에서 그동안 수없이도 보았습니다.  어머니와 아들은 본디 사이가 좋은 것인데 말입니다.  그러니 돈이 원수인 것이지요.
   
돈푼이나 있으면 형제간도 없고, 부부간도 부자지간도 없고…… 이게 무슨 꼴입니까?  저는 장례식에서 이런 모습을 본적이 있습니다.  어느 병원의 장례식장에 문상을 갔었는데, 옆방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립니다.  아버지 장례를 치르는 자리에서 어머니랑―그 어머니가 서모였는지는 모릅니다만, 또 형제들끼리 유산분배를 놓고 고성을 지르며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걸 보고 사람들이 “그저 돈이 원수구나” 하더군요.

다 지혜롭지 못한 것입니다.  돈 벌면 다인 줄 알았지요.  출세하면 좋을 줄 알았지요.  집 나가면 다 될 줄 알았지요.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만 하면 모든 것이 다 될 줄 알았지요. ― 그런데 안 그렇습니다.  이런 것들은 전부가 다  없어질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은 다 지혜 같아 보이는 것일 뿐이지, 사실은 지혜가 아닌 것입니다. ― 순간적인 것입니다.  임시적인 것입니다.  가시적인 것입니다.  그런고로 믿을만한 것이 못됩니다!!

요새 보니까 ‘영원한 승자는 없다’ 하는 말들을 합니다.  정말로 영원한 승자는 없고, 영원한 영광도 없습니다.
   
얼마 전, 직전 대통령에 이어서 이번엔 그 분 아래서 총리를 지낸 분이 또 무슨 비리에 연루되어 불려 다니는 모습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우리 사람의 일생이 길지도 않은데, 한창 영광을 누리거든 그러다가 가버렸으면 좋을 것을 왜 더 살아가지고 감옥도 가고 하면서 부끄러움을 당하나 하고 말이지요.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고인이나 그 가족에게는 좀 안됐습니다만, 박정희 대통령이 바로 이 면에 있어서는 괜찮았다 싶었습니다.  그분이 그쯤에서 갔으니 망정이지, 만약 정권이 바뀌도록 오래 살아 있었다면 반민주니, 친일이니, 독재니 하면서 감옥에 갔을지도 모를 일이지 않습니까?  그 뒤를 이었던 사람들이 당했던 그 모습들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세상 지혜라고 하는 것은 다 사라지는 것이다!  없어지는 것이다!  일시적인 것이다!  순간적인 것이다!  있는 것 같으나 없는 것이다!  지혜로운 것 같으나 사실은 어리석은 것이다!’ ―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여기서 세상 통치자들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여기 ‘통치자’라는 말은 성경원어로 ‘알콘토스’라고 하는 말인데, 이 말은 지도자라는 뜻입니다.  교육적으로, 종교적으로, 정치적으로 지도자급에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정치적인 지도자, 명예를 가진 사람, 권세를 가진 사람, 경제적인 능력을 가진 사람! ―― 이런 사람들의 지혜라고 하는 것은, 세상적으로는 ‘높은 것’같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하는 말씀입니다.  나가서는 이 통치자들은 지혜를 알지도 못한다고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빌라도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데, 잘 아시는 대로 빌라도가 지혜 있는 척했지 않습니까?  예수님을 재판할 때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진리가 무엇이냐?  이렇게 비참하게 죽어가면서 진리가 무엇이냐, 이 사람 웃기누만” 그러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누가 누구를 웃기는 것입니까?  빌라도가 세상에 어리석은 짓을 한 것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지혜로운 척 하였지만, 그는 예수를―바로 하나님의 아들을 알아보지도 못하였습니다.

또 요한복음 11장 49절에 보면, 대제사장 가야바가 이런 말을 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버리자는 이야기를 하면서 공회에서 이렇게 큰소리를 칩니다.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무슨 소리입니까?  잘난 체 하는 것 아닙니까?
  
‘너희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구나.  한 사람이 죽어서 온 백성이 편하다면 죽여!  그게 잘하는 것이지 않느냐?’

한 사람이 죽어서 온 민족이 편하다면야 이유 불문하고 죽여 버려! ― 이것이 세상지혜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이 혁명을 할 때도 이렇게들 외치지 않았습니까?  소수를 죽여서 다수를 살리자고 말이지요.
   
그러나 알고 보니, 사실은 다수를 죽여서 소수의 자기들이 살자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북한을 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정치범으로 감옥에 있습니까?
   
그런데, 그런 소수의 독재집단에 아부하는 남쪽의 정치인들이 있습니다.  입으로는 민주를 말하지만 정작 북쪽의 독재에 대해서는 아부하지 않았습니까?
   
또 무슨 노조를 하는 사람들을 보세요.  사실 정직한 의미에서 노동조합운동은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노동자들은 피땀을 흘리며 일하고 있는데, 그 노조를 한다는 사람들은 그저 정치적인 파업만을 주동하면서, 노조 자체를 직업으로 삼아 누구 부럽지 않게 잘 살고들 있습니다.  무엇이 인권이고 무엇이 민주인 것입니까?

가야바가 하는 말을 보세요.  “너희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무엇입니까?  ‘나는 안다’ 그것입니다.  요것이 그의 지혜였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해서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정말로 온 민족을 편하게 했습니까?  2천년 동안 나라 없는 백성을 만들지 않았습니까?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렀습니까?
가야바가 천하에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지은 것입니다.  결국 그는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지혜 있다고 자처하고 있더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세상지혜입니다.  잘난 체합니다.  ‘너는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합니다.  마르크스나 레닌이나 히틀러 할 것 없이 모든 독재자들―우리가 기억하는 세상 지도자들이 하나같이 이런 이론을 가지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혜가 아니었습니다.  결국은 세상을 소란하게만 했고,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희생과 고통을 주었는지 모릅니다!  참으로 어리석었습니다!!


그러면 참 지혜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에 나타난 대로 살펴보면, 2장 7절에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십니다.  지혜가 감추어졌단 말씀입니다.  Hidden Wisdom―지혜가 감추어졌습니다!

죄인들의 세계관과 편견 속에 감추어졌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은 영혼이 어두워서 지혜를 알아볼 수가 없습니다.  듣고도 모르고, 보고도 모릅니다.  결국은 죄를 짓는 자마다 심령이 어두워져서 점점 더 미련해지는 것입니다.
   
우상숭배 하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심령이 어두워져서 지혜를 모릅니다.  언젠가 TV의 어떤 프로를 보니까, 산사태가 나서 바위가 굴러내서 안방 벽을 부수고는 안방을 차지하고 들어앉았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마을 사람들이 몰려와서 그 바위에다가 빌고들 있습니다.  그 집의 주인은 정작 골방에서 온 식구들이 비좁게 웅크리고 지내면서, 그 바윗덩어리에다 온갖 정성을 다 쏟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또 어떤 소가 되새김질을 하면서 입에서 무슨 소리가 나는데, 그 소리가 목탁소리와 비슷하다며 무슨 보살님이 오셨다고 하면서, 또 사람들이 몰려와서는 그 소에다 절을 하며 두 손을 비벼댑니다.  무슨 꼴들인 것입니까?!!

또한 인간의 교만에 의해 감추어집니다.  교만하게 되면 어리석어집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 이 사람들은 교만했기 때문에 예수를 몰라보았습니다.  예수를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교만하면 믿을 수 없고, 믿지 아니하면 모르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어리석어지고 마는 것이다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감추어졌던 것인데, 이제 나타났다 하십니다.  계시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이제 나타났는데, 특별히 오늘 본문은 이렇게 복음적으로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것이라고 말이지요!  얼마나 고마운 말씀입니까?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미리미리 준비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바로 그 지혜의 근본이 무엇이냐? ― 그것은 바로 십자가 사건이다 하십니다.  그래서 1장 24절에서 말씀하시기를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고 단정 지으며 말씀하십니다.
   
십자가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 모든 인류를 죄에서부터 구원하여 영생을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바로 여기에 대하여, 소위 세상의 지혜가 좀 있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하나님의 지혜라고 생각지 아니하며, 오히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보게도 됩니다.
   
창세기에 보면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이렇게 말들을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만드실 때 ‘죄 짓지 않는 그런 존재’로 만드시지 못했느냐는 것입니다.  왜 선악과라는 것을 만들어 놓고는, 또 만들었다면 그것을 보고도 먹고 싶다는 유혹조차도 받지 않게끔 해놓지를 못하고, 왜 따먹은 다음에야 죄지은 인간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하는 어리석은 일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과연 어리석음이었더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창세기를 살펴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시고는 어느 정도 ‘자유의지’를 주신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 인간을 로봇과 같은―기계와 같은 그런 존재로 만드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생각하고 판단하며 행동하는 그런 존재로 만드신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우리는, 우리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의 뜻을 조금이나마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스스로가 순종하며 하나님의 사랑에 자발적으로 응답하는 그러한 존재!―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으로 만드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을 만드시되 죄를 결코 짓지 조차도 못하는 존재로, 선악과를 보고도 ‘황금을 그저 돌처럼만 보게 되는 그런 존재’로 만드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서양 속담에 “불에 한번 데여 본 아이는 다시는 데이지 않는다.”하는 말이 있습니다.  불에 한번 손끝이라도 데여 본 아이는, 불의 무서움을 알게 되기에 불에 대하여 스스로가 조심하며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데여본 적이 없어 불의 무서움을 모르는 아이는, 부모가 아무리 주의를 기우려준다고 해도 언젠가는 데일지도 모르는 가능성과 위험을 항상 지니고 있지 않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선악과를 그 때 그 자리에서는 먹지 않도록 막으셨다고 해도, 우리 인간이 그와 같습니다.  언제나 죄를 범하는 가능성 속에 살게 되고, 죄에 대한 유혹을 계속 받으며 거기에 넘어갈 가능성 속에서 불완전하게 지내게 됩니다.
   
이렇게 볼 때, 선악과를 만드신 것과 또한 십자가라고 하는 것이 과연 실패한 것입니까?  우리 인간에게 자유를 주신 것이 과연 실패인 것입니까?

하나님의 자유와 인간의 자유가 전혀 별개인 것처럼 우리 인간은 느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유가 이루어지면 인간은 속박이 되고, 내 자유가 실현될 때에는 하나님의 자유가 침해되는 것처럼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깊은 지혜에서 보면, 하나님의 자유 속에 나의 자유가 있습니다.  거기에 온전한 나의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이해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참된 지혜인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과 재림!!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능력이 있고, 하나님의 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방법으로 우리에게 계시하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 2장 10절에서 말씀하시는 바와 같이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 성령 안에서 우리는 그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왜 십자가를 졌는지 그 때는 알 수 없었지요.  또 부활은 왜 있는지, 부활은 무슨 관계가 있는지……
   
그러나 여기에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 뜻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창조의 근본 뜻을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완성하셨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왜 선악과를 만드셨느냐?’느니, ‘왜 십자가가 있어야 했느냐?’ 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때 그 순간에 선악과를 먹지 못하도록 하였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불평만 하고 원망만 하고,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워도 하며, 죄에 언제든지 넘어가고자 하는 그런 존재로만 있었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하여 이 땅에는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이 교회에 대해서 여러분, 곰곰이 생각해 보세요.  이 교회는 자발적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원 계획 그대로  자발적으로 순종하며, 자발적으로 죄에서 떠나려는 노력을 하며,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사람들이 교회를 형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오늘 주일날!  세상 사람들은 그저 ‘일요일—공휴일’이라고 생각하며, 자기의 뜻대로 오늘 이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우리들 가운데 누가 위협하기 때문에 마지못해서 이곳에 나오신 분들이 있으십니까?
   
이 자리에서 예배하는 우리 모두는 오늘 이 시간 모두가 자발적으로 주의 전으로 모인 것이며,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며 예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원 계획이 십자가를 통하여 이렇게 완성되고 있는 것이지요!!  세상 사람들은 십자가를 어리석은 것이라고 하였지만, 그러나 바로 여기에 놀라운 하나님의 지혜가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지혜!!

이제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서, 이제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지혜를 믿고 살 때, 우리 인간의 참된 행복이 열림을 오늘 본문은 말씀하여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를 온전히 믿는다면, 내가 무슨 걱정을 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 지혜에는 플러스알파, 사랑까지 있습니다.  그 지혜로 나를 사랑하시는데 내가 무슨 걱정을 하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본문말씀에 참 좋은 말씀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10절 마지막에 보면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하십니다.  아주 깊은 것,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것, 잠깐은 무엇인지 알 수가 없는 것, 깊은 것, 아주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그러니 이제 슬퍼할 것이 없습니다.  낙심할 것도 없습니다.  성령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읽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알게 됩니다.  이 하나님의 지혜는 십자가 사건 속에 계시되고, 현실 속에 나타나고, 저 앞에 있는 종말 거기에 약속된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그 무궁무진한 지혜를 배워나갈 것입니다.  믿고, 배우고, 성령 안에서 깨닫고……  그리할 때에 하나님의 지혜의 세계―그 깊은 세계를 알게 되며, 우리는 그 속에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럴 때, 아무 문제도 없게 됩니다.  그대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 ― 그러나 더 귀중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고, 하나님의 지혜를 찬양하고, 하나님의 지혜를 믿고 ― 그것이 바로 성도의 생활입니다.  그것이 바로 여러분의 생활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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