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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기념비는 필요 없다 (마 23:2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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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비는 필요 없다 (마 23:27~31)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회칠한 무덤과 같기 때문이다. 그것은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지만,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이 가득하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의롭게 보이기만, 속에는 위선과 불법이 가득하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기념비를 꾸민다. 그러면서, ‘우리가 조상의 시대에 살았더라면, 예언자들을 피 흘리게 하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고 말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너희는 예언자들을 죽인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한다.”]

• 착함의 경계

오늘은 해외에서 평화 사역을 하고 있는 우리 청년 이민철씨 이야기로 말씀을 시작할까 합니다. 그는 예수의 길을 따르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던 중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고 평화단체인 개척자들(Frontiers)의 파송을 받아, 반다 아체에서 월드 서비스를 하고 있습니다. 분쟁과 자연재해로 말미암아 피폐해진 사람들이 자활할 수 있도록 돕고, 아이들의 가슴에 평화의 씨앗을 심는 것이 그와 동료들의 일입니다. 그는 예수의 이름을 전하는 선교사가 아니라, 예수 정신으로 사람들을 섬기는 평화운동가입니다. 

1년 가까이 평화사역을 하면서 그는 보람보다는 무력감을 느낄 때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투입하는 노력에 비해 열매가 적어보이기 때문입니다. 현지의 아이들이 이 험한 세상에서 못된 놈들을 만나 이용당하거나 짓밟히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아이들을 가르치지만, 아이들은 별로 반응이 없습니다. 이것이 그가 느끼는 무력감의 뿌리입니다. 그러던 차에 전우익 선생님의 책 <<혼자만 잘살면 무슨 재민겨>>를 읽다가 다음과 같은 구절과 만나게 되었습니다.

“사람도 착하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착함을 지킬 독한 것을 가질 필요가 있어요. 마치 덜 익은 과실이 자길 따 먹는 사람에게 무서운 병을 안기듯이, 착함이 자기 방어 수단을 갖지 못하면 못된 놈들의 살만 찌우는 먹이가 될 뿐이지요. 착함을 지키기 위해서 억세고 독한 외피를 걸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는 제게 “정말 착하게만 살면 안 되는 것인가요?” 하고 물어왔습니다. 착함을 지키기 위해서 걸쳐야 할 독한 외피가 뭐냐고도 물었습니다. 이건 그가 갈등 상황에 놓일 때마다 불끈불끈 솟는 분노를 다독이며 했을 법한 질문입니다. 이 질문을 듣는 순간 이야기 하나가 생각났습니다. 마을에 사는 뱀 한 마리가 많은 사람들을 물었기 때문에 아무도 들에 나갈 엄두를 못 냈다고 합니다. 성덕이 뛰어난 스승이 나서서 그 뱀으로 하여금 비폭력의 원칙을 실천하게 설득했습니다. 

머지않아 마을 사람들은 그 뱀이 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뱀에게 돌을 던지고 심지어는 꼬리를 붙잡아 끌고 다녔습니다. 심하게 두들겨 맞은 뱀이 어느 날 스승의 집에 기어와서 불평을 했습니다. 선생님의 비폭력 덕분에 이 꼴이 되었다고 말입니다. 그러자 스승은 혀를 차며 말했습니다. “해치기를 그만두라고 했지 겁주는 일을 그만두라고 하지는 않았네”(앤소니 드 멜로, <<일분지혜>>, 분도출판사, 59쪽).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도 무골호인이 되어선 안 됩니다. 그러다가는 뱀의 신세를 면할 수 없을 겁니다.

• 예수는 착한 사람인가?

여기서 조금 도발적인 질문을 해보고 싶습니다. “예수님은 착한 사람입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질문에 '네'라고 대답합니다. 하지만 이 질문을 주님께 돌려드린다면 예수님은 뭐라고 대답하실까요? 대답은 그때그때 다릅니다. 한 젊은 지도자가 예수님을 찾아와 “선하신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어찌하여 너는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나님 한 분밖에는 선한 분이 없다”(눅18:19)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나는 선한 목자이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린다”(요10:11)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태도는 모순적입니다. 하지만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한 이야기를 유심히 살펴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삶을 간결하게 요약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부어 주셨습니다. 이 예수는 두루 다니시면서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억눌린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행10:38)

예수님의 삶은 ‘두루 다니시면서 선한 일을 행하셨다’는 말과, ‘마귀에게 억눌린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는 말로 요약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문장의 앞뒤에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성령과 능력을 부어 주셨다는 말과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다는 말이 마치 괄호처럼 붙어있습니다. 다시 질문합니다. ‘예수님은 착한 사람인가?’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의 착함의 뿌리는 그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그렇기에 주님은 ‘선한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문제 삼으시는 것입니다. 

스스로 착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착한 이들이 아닙니다. 본래 착한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우리도 착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욕심이 많습니다. 누군가를 미워할 때도 있고, 화를 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자기의 감정과 생각을 뚫고 내려가 성령이라는 내적 원천에 닿기 위해 늘 마음을 엽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영성이고 겸손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분의 존재하심을 살아내는 것(to do what He is)입니다. 하나님을 자비로운 분으로 믿는다면 우리도 이웃과 피조물에게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정의를 세우시는 분이라고 고백한다면 우리도 무너진 공의와 정의를 세우기 위해 고난도 마다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거룩하신 분으로 고백한다면 우리도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레위기 19장은 거룩한 삶이란 부모 공경, 부정한 속임수 거래 그만 두기, 장애인에게 악담하지 않기, 앞 못 보는 이 앞에 걸림돌을 두지 않는 것, 이웃의 고통 앞에서 팔짱을 끼고 서있지 않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고백과 삶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지 않습니까? 신앙생활이란 고백과 삶이 오롯이 일치하는 삶을 향한 순례입니다. 순례길을 떠나는 사람의 행장은 단출해야 합니다. 과도한 욕망을 자꾸 내려놓고, 인생길에서 만나는 이웃들을 아주 귀한 길 안내자로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순례자들에게 꼭 필요한 것은 분별력입니다. 순례자들을 노리는 강도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이들에 대해서는 거침없는 분노를 쏟아내셨습니다.

• 입이 거친 예수

예수님을 아주 온유하고 부드럽고 수줍음 많은 분으로 생각하는 이들은 마태복음 23장을 읽지 말아야 합니다. 거기서 예수님의 태도와 언어는 매우 전투적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해석의 권위를 인정받고 있던 율법학자들을 싸잡아 비난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3장에는 그들에 대한 7개의 비판이 편집되어 있습니다. 그들을 일컫는 단어는 ‘위선자’입니다. 위선자라 할 때 ‘僞’는 거짓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그 단어는 ‘사람 人’ 변에 ‘할 爲’ 자가 결합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위선이란 사람을 의식해서 하는 선한 행위라고 새길 수 있겠습니다. 누구보다도 경건하게 살아가는 그들을 두고 퍼부으신 예수님의 비난은 다소 과도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들의 드러난 행동이 아니라 그들의 내심을 읽고 계십니다. 개에게 돌을 던지면 개는 돌을 따라 달리지만, 사자는 곧바로 돌을 던진 사람에게 달려든다 합니다. 예수님은 일종의 사자입니다. 문제의 뿌리를 보는 분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을 보고 하나님 나라의 걸림돌이라고 하십니다. 회칠한 무덤이라고도 하십니다. 겉과 속이 다르다고도 하십니다. 그들은 마치 잔과 접시의 겉은 닦지만 속은 닦지 않는 사람들과 같다고 하십니다. 겉은 깨끗한 듯 보이지만 속에는 탐욕과 방종이 가득 차 있다는 것입니다. 맹자는 ‘남의 선생 되기 좋아하는 것이 탈人之患在好爲人師’이라 했는데 그들은 가르칠 것만 있고, 배울 것은 없는 사람인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는 거짓 목자들입니다. 

“너희는 개종자 한 사람을 만들려고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하나가 생기면, 그를 너희보다 배나 더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린다.”(23:15b)

무시무시한 말씀입니다. 주님은 종교적 독선과 권위에 짓눌린 채 두려움과 죄책을 안고 살아가는 민중들의 아픔을 절절히 느끼고 계셨습니다. 사람들의 영혼을 치유하고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살도록 도와야 할 종교가 오히려 사람들의 질곡이 되고 있는 현실을 보며 주님은 분노하셨습니다. 칼릴 지브란은 1926년에 쓴 <<모래와 물거품>>이라는 책에서 예수님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옛날에 너무나 남을 사랑하고 그 자신이 너무나 사랑스럽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이 있었다. 기이하게도 나는 그 사람을 어제 세 번이나 만났다. 처음에 그는 창녀를 감옥에 보내지 말라고 사정하고 있었다. 두 번째는 부랑자와 술을 마시고 있었다. 세 번째는 교회 안에서 장사치와 주먹다짐을 벌이고 있었다.”

지브란의 예수는 연약하고 상처 입은 이들 앞에서는 한없이 친절하고 겸손하지만 자기 의에 사로잡혀 안하무인인 사람들, 사람들의 영혼을 노략질하는 종교인들에 대해서는 폭풍처럼 분노를 터뜨릴 수 있는 분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제대로 믿고 있는지를 확인하려면 우리가 어떤 이들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됩니다. 위선과 탐욕과 절제를 모르는 권력 앞에 분노할 줄 모르는 사람, 사회적 루저들에 대한 연민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기독교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19세기 유대교 갱신운동의 지도자였던 렙 메나헴 멘들은 불꽃같이 살다간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예언자들의 타오르는 분노가 그의 속에서 되살아났다고 말할 정도로 불의에 대해서 엄격했습니다. 그의 어린 시절의 일화가 하나 전해 내려옵니다. 

“한번은 시장에서 사과를 파는 한 여자를 보았다. 바구니의 윗부분에는 맛있게 생긴 잘 익은 사과를 얹어 놓았고 설익은 것들로 아랫부분을 채워 놓은 것을 보고 아홉 살 된 소년은 바구니를 둘러엎어 그 여자의 장사를 망쳐버렸다. 여자는 화가 치밀어 올라 그를 마구 욕하며 때렸다. 그는 욕설과 매질을 감수하였다.”(아브라함 요수아 헤셀 선집7, <<진리를 향한 열정>>, 종로서적, 1985, 128쪽)

• 사람을 아끼는 세상

이런 의분이 없어 교회는 무기력해졌습니다. 우리는 예언서를 읽으며 속 시원함을 느낍니다. 그들의 언어는 거침이 없습니다. 미풍의 언어라기보다는 폭풍의 언어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거칠거칠합니다. 점잖은 이들이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릅니다. 어느 시대에나 예언자들은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자들은 기존 질서를 향해 ‘아니오’라고 말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을 향해 “너희는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기념비를 꾸민다”고 말합니다. 요즘 말로 하면 동상을 만들고, 기념 예배당을 만들고, 기념사업을 벌이는 것입니다. 예언자들이 좋아할까요? 그럴 리 없습니다. 예언자들은 자기들을 통해 세상에 선포되는 주님의 말씀이 경청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예언자들은 어쩌면 무덤 속에서 ‘기념비는 필요 없다’고 외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경배하는 이들이 아니라, 당신의 길을 걷는 이들을 찾고 계십니다. 아픔이 있는 곳에는 어김없이 주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은 땅에서 울부짖은 아벨의 소리를 외면하실 수 없는 분입니다. 지금 우리는 세계 도처에서 수많은 아벨의 죽음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테러와 분쟁이 그치지 않습니다. 이 나라 산천에서도 대형 참사가 거듭해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가히 참사라 이름 붙일만한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납니다. 

그런 참사를 통해 죽어간 이들은 저마다 유일한 생명들입니다. 그들의 삶의 이야기는 낯모르는 이들에게는 무의미할지 모르지만, 자기 자신과 가족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합니다. 이런 일이 벌어질 때마다 지도자라는 이들은 몇 마디 위로와 애도의 말을 합니다. 그들은 우리의 아들이고 동생이라고 결코 잊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진상을 철저하게 규명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리고는 책임을 면하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입니다. 정치적인 손익 계산에 분주합니다. 

국민 여론이 잠잠해지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일상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그들의 희생은 허비되고 맙니다. 무덤을 잘 꾸미고 기념비를 세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시스템을 정비하고, 모든 생명을 귀히 여기는 세상을 열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해야 합니다. 

여러분, 눈을 뜨십시오. 우리는 부활의 첫 열매이신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부활을 믿는 이들은 눈이 흐리멍덩하면 안 됩니다. 가슴속이 바르면 눈동자가 맑다 합니다. 활짝 피어난 벚꽃을 보며 사람들은 기뻐합니다. 벚나무가 봄바람과 만나 꽃을 피웠습니다. 꽃이 피자 그 아래를 걷는 이들의 표정도 밝아졌습니다. 우리도 꽃을 피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숨결이 우리 속에 머물 때 우리는 생명과 평화의 새 세상을 열 수 있습니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는”(계21:4) 세상은 하나님 나라에서 완성되겠지만, 그런 세상은 지금 우리의 헌신을 통해 시작될 것입니다. 착하되 무기력하지 않은 사람들, 한 없이 다정하지만 분노할 줄도 아는 사람들, 성도들은 그런 이들이 되어야 합니다. 부활절 이후의 시간을 살아가는 우리를 통해 세상이 조금은 더 아름다운 곳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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