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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떡을 떼어 주시며 (눅 23:2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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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을 떼어 주시며 (눅 23:25~35)


부활절 두 번째 주일입니다. 오늘은 復活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聖餐聖禮의 자리로 불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성찬은, 고난주간 목요일 밤, 사랑하는 열두 제자들과 잡수셨던 ‘마지막 逾越節 晩餐’(흔히, 최후의 만찬)에서 由來합니다. 또 예수님은, “너희가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명하시고 하셨습니다(눅 22, 20). 오늘 이 성찬성례의 기원은, 최후의 逾越節 만찬에 그 분명한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서를 깊이 읽어 보면, 놀라운 사실을 또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復活하신 예수님께서 두 번에 걸쳐서, 최후의 유월절 만찬과도 같이 사랑하는 제자들과 떡을 떼어 주신 자리가 있습니다. 물론 그 식탁은, 떡과 포도주를 주시면서 이것을 먹으라, 이것을 마시라 하시던, 마지막 유월절 만찬과는 같지 않습니다. 떡만 떼어서 주신 식탁이셨습니다.

마가복음 14, 25을 보면, 예수님께서 마지막 유월절 만찬 잡수실 때, 떡과 포도주를 각각 주신 後에 이런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葡萄나무에서 난 것을 하나님 나라에서 새 것으로 마시는 날까지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과 같이, 復活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드셨던 식탁에서는, 떡은 떼어 주셨지만 포도주를 주신 적은 없으십니다. 그 이유가, 이 말씀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두 번에 걸친 대단히 중요한 식사 자리가 있으셨습니다. 그 한 번은, ‘엠마오 제자들과의 식탁자리’이고, 또 다른 한 번은 ‘디베랴 바닷가에서 일곱 제자들과의 식탁자리’입니다. 아시는 대로 예수님 공생애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 자리가, 어디입니까? 예수님과 함께 飮食 먹던 [밥상]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먹던 [밥상]은, 하나님 나라의 표상이었습니다. 

그 밥상식구들은, 열두 제자들 뿐만 아니라 갈릴리에서 예수님을 따르던 女弟子들이었습니다. 부활절 아침, 빈 무덤을 찾아갔던 女人들, 바로 예수님의 밥상식구들입니다. 일곱 귀신 들렸다가 고침 받은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살로메, 요안나,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야고보, 요한), 예수님의 어머니, 예수님의 이모,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 등은 [예수님 밥상식구들]입니다. 

예수님 밥상식구는 그들만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稅吏들과 세리들의 친구들인 죄인들도, 예수님과 함께 밥 먹던 밥상식구들입니다. 그러다보니, 예수님은 이런 비난도 받으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들이 말하기를 鬼神이 들렸다 하더니, 人子(예수님이 자신을 가리켜 쓰시던 용어)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貪하고 葡萄酒를 즐기는 사람이요, 稅吏와 罪人의 親舊로다”(마 11, 19). 

이와 같이 예수님과 함께 했던 다양한 밥상식구들을 가리켜서, 우리는 예수님의 ‘밥상공동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밥상공동체’가 왜, 비난받았습니까? 왜, 유별나게 두드러지는 사건이 되었습니까? 예수님의 밥상공동체는, 유대사회와 유대종교가 넘어서지 못하던 벽을 넘어서는 자리였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의 밥상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淨潔을 유지해야 하는 유대종교의 최후의 보류였습니다. 부정한 음식을 먹을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죄인들, 세리들, 이방인들은 유대인의 식탁에 함께 앉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밥상에는, 그런 유대종교적인 障壁, 율법주의적인 障壁, 전통의 障壁이 다 무너지는 자리였습니다. 오히려 禁忌되던 罪人들, 稅吏들, 異邦人들이 ‘예수님 밥상공동체의 주인공들’로 초대받던 자리였습니다. 금기되던 자들이 초대받은 바로 그 자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성취되는 ‘하나님의 나라’였던 거지요. 

그러면 부활하신 예수님께 초청 받은 밥상식구는 누구였을까요? 그 첫 번째 主人公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두 제자입니다(눅 24, 30). 예루살렘에서 약 11km 떨어진 시골 ‘엠마오’ 마을로 落鄕하던 예수님의 두 제자, 한 사람은 ‘글로바’였고, 또 한 사람은 글로바의 아내인 ‘마리아’로 (추정)합니다. 

그 두 번째 밥상식구가 된 주인공은, 디베랴 바다에 고기잡이 나갔던 일곱 제자들입니다(요 21장). 시몬 베드로, 디두모라는 도마,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 세베대의 아들들(야고보, 요한), 또 다른 두 제자들(빌립과 안드레)입니다. 그들이 초대 받았던 예수님의 밥상은, 디베랴 바닷가에서였습니다. 좀 특별한 밥상자리지요. 그 자리가 어떤 자리였습니까?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이미 목격한 제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예수님 따르는 일, 내가 무슨 낯짝이 있다(벼룩도 낯짝이 있다)고 하던 자들을 초 청 하신 자리입니다. 그런 마음에 自己 絶望에 빠진 그들이, 3년 前에 하던 고기잡이나 할까 하고, 바다로 다시 나갔던 그들입니다. 그들을 초청하신 식탁입니다. 

주님은, 그런 일곱 제자들을 위해서 디베랴 바닷가에서, 핀 숯불 위에 구운 생선과 떡을 준비하셨습니다. 뭍으로 올라온 제자들을 부르시며, [와서 朝飯을 먹으라]며 예수님의 밥상식구로 다시 부르셨던 겁니다. 친히 떡을 가져다주시고, 숯불에 구운 生鮮도 주셨습니다.

復活하신 예수님의 밥상에 초청받은 자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하나 같이, 못난 사람들입니다(어리석고 아둔한 사람). 믿음 없이 절망에 빠졌던 弟子들입니다. 여전히, 문제투성이인 미완성 작품과 같은 弟子들 말입니다. 어디, 예수님의 제자들만 그렇습니까? 나도 그런 사람 아닌지요?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가, 바로 나 자신이 아닌지요? 

우리가 예수님 따른다고 하지만, 예수님 때문에 딱히 希望을 가져본 적도 없습니다. 있다면, 예수님 때문에 내 욕심, 욕망, 내 꿈이나 이뤄볼까 하는 정도 아니었습니까? 안 믿자니 그건 또 아닌 것 같고, 제대로 믿자니 그럴만한 용기도 없고, 포기할 수는 없기에, 그저 예배당만 왔다 갔다 하는 것은 아닙니까? 目的도 없이 방황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딱히 所望도 없이 살아온 것은 아닙니까? William J. Gaither의 찬송처럼, “목적도 없이 나는 방황했네–/ 소망도 없이 살았네–” 이 노래가 우리의 노래가 아닙니까? 

그러던 우리라 하여도, 어찌 거기 머물 수 있겠습니까? 계속되는 찬송, “그 때에 못 자국 난 그 손길/ 나에게 새 生命주셨네/ 험한 十–字架에 능력 있네/ 거기서 나의 삶이 변했네/ 찬양하–리, 主 이름 영원–히/ 主의 十字架 능력 있네–/ 나는 믿네 갈보리 언덕 十字架–/ 나는 믿네 그 누가 뭐라해도–/ 이 世上 다 지나고 끝 날이 와도/ 험한 十字架 붙들겠네–/ 아멘. 이 찬송 부르고 싶지 않으십니까?

오늘, 부활주일 지나고 두 번째 맞는 주일입니다. ‘엠마오’ 가던 두 제자의 모습이 내 모습이라고 생각되는 분이 계십니까? 그렇다 하여도 所望을 가지십시오. 김두완 장로님이 작곡하신, [엠마오 마을로 가는 두 제자] 찬송 아시지요?
엠마오 마을로 가는 두 제자, 절망과 공포에 잠겨 있을 때/ 엠마오 마을로 가는 두 제자, 절망과 공포에 잠겨 있을 때/ (이젠 우리에게로 돌아옵니다) 주 예수 우리들에게 나–타나–시–사, 참–되––신 소망을 보여 주셨네/ 이 세상 사는 길, 엠마오의 길, 끝없는 슬픔이 앞길을 막으나/ 이 세상 사는 길, 엠마오의 길, 끝없는 슬픔이 앞길을 막으나/ 주 예수 우리들에게 나–타나–시–사, 참–되––신 소망을 보여 주셨네/ 이 찬송이, 우리 모두의 찬송되기를 바랍니다. 아멘.

냉철하게 돌아보면, 우리 역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所望이 있다면, 무엇입니까?(엠마오에?) 그들 자신이 所望이겠습니까? 落鄕하던 行路에 찾아가신 부활하신 주님이 소망 아니십니까? 그들은, 부활아침(주일아침)에 일어났던 일–예수님 屍身에 香品과 香油를 바르기 위해서 갔던 女人들이, 예수님 시신은 보지 못하고, 빈 무덤만 본 사건, 빈 무덤에서 천사를 만났다는 일, 동산지기인 줄 알고 보이지 않던 예수님 시신을 찾았는데 그 분이 바로 예수님이셨다는 이야기, 또 성미 급한 베드로가 무덤까지 달려가 몸을 구푸려 무덤 안을 확인해 보았지만, 그 역시 壽衣만 보고 예수님 시신을 보지 못했다는 이야기–부활의 아침에 이루어진 ‘온갖 이야기들’ 주고받으며 얼굴에 수심 가득한 슬픈 빛을 띠고, 落鄕하던 자들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들에게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온갖 소식이, 기쁜 消息도 아니었고, 希望도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그들을 완전히 혼란에 빠뜨려버리는 소식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동행하던 예수님께 한 이야기 보십시오(21, 22말씀).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사흘째요, 또한 우리 中에 어떤 女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우리를 완전히 혼란에 빠뜨렸다)”합니다. 예수님의 復活消息, 빈 무덤 이야기, 그 모든 것들이, 희망과 기쁨이 아니었던 거지요. 도리어, 그들을 完全히 混亂에 빠뜨리는 이야기에 불과했습니다. 이것이,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어찌 그 두 제자만의 일입니까? 따지고 보면, 나의 모습입니다. 우리들의 모습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 말씀 들어도, 우리를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들어도 크게 기쁘지 않습니다. 행복하지도 않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말씀은 이 時代의 大勢, 時流를 쫓아 살아가고 있는 내 人生 길을, 完全히 混亂에 빠뜨리고 마는 말씀이지 않습니까? “아니, 정말 이 세상에서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可能하기는 해? 그 말씀이, 진리 맞기는 맞아? 그 말씀대로 살아도, 망하지 않는 걸까?” 도리어 우리를 혼란에 빠뜨려 놓는 말씀은 아닙니까? 葛藤만 일으키는 말씀이지 않습니까? 그게 솔직한 우리 속마음, 본모습 아닙니까? 

만일, 그렇다 하여도 落望하지 마십시오. 그런 내 人生 길에 찾아오신 분이 계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 말씀에 다시 한 번, 귀 기울여 보십시다. 뭐라 말씀하시는 지, 들어 보십시다. 주께서 말씀하실 때, 마음이 뜨거워지면 그렇습니다. 주님! ‘아멘입니다’ 고백 하십시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 모르게 엠마오로 落鄕하고 있던 두 弟子의 발걸음 내내 동행하셨다는 사실, 잊지 마십시오. 그들의 엠마오 집까지 가셨습니다. 그 집에 유하러 들어가셨습니다. 그들과 함께 飮食까지 잡수셨습니다. 떡을 가지사 祝謝하시고, 떼어 주셨습니다. 축사하신 것은, ‘엄숙한 기도로써 거룩(區別)하게 하셨다’(예수님께서 오병이어를 들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신 것처럼)는 말씀입니다. 축사하신 후, 친히 떡을 떼어 주셨습니다. 

여기, 떡을 떼어 ‘주셨다’(‘에페디두’, evpedi,dou ; 미완료 능동태 직설법) 것은, 그저 한 번 떡을 떼어 주신 것이 아니라, 繼續해서 反復的으로 그들이 배부르도록 떡을 떼어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 떼어 주시는 떡을 받아먹던 엠마오의 두 弟子, 어찌 되었습니까? 그들의 눈이 밝아졌습니다(영적 무지가 열렸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을 열어 주셨다). 떡을 떼어 주시는 그 분이, 부활하신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자, 예수님은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셨습니다. 눈이 떠졌으니, 부활의 증인 되라는 말씀이지요. 그 길로 일어나,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제자들을 만납니다.

이 성찬은, 지금 나의 人生 길에 同行하고 계시는 예수님께서, 내 인생의 식탁에까지 찾아와,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주시려고, 主님의 밥상식구로 우리를 초대하신 성찬의 자리입니다. 이 성찬을 받으실 때, 우리의 눈이 밝아지기를 원합니다. 復活하신 主님 만나는, 축복의 사건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절망의 발걸음을 돌이켜 다시, 부활의 증인의 자리로 나아가는 능력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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