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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 성 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행 18: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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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성 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행 18:1~17)
  

1956년 미국사회를 발칵 뒤집어놓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기독교 명문 휘튼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짐 엘리엇을 비롯한 5명의 크리스천 젊은이들이 남미 에콰도르의 아우카 부족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들어간 후 실종된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아우카 부족 마을에 근접한 강가 모래톱에 경비행기를 착륙시켰습니다.
그리고 아우카 부족 마을을 향해 떠났습니다.
이후 소식이 끊어졌습니다.

청년 선교사들의 실종소식은 미국 전역으로 퍼졌습니다.
대대적인 수색작업이 벌어졌습니다.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엘리엇과 친구들은 모두 아우카 부족의 창에 찔려죽었습니다.
경비행기는 산산조각이 나 있었습니다. 
끔찍한 비극이었습니다.
미국 전역이 들끓었습니다.

언론에서는 ‘이 무슨 낭비인가(what a waist!)'라는 제목으로 대서특필했습니다.
전도유망한 청년들이 너무나 허망한 죽음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내들이 남편들의 뒤를 따라 아우카 부족에게 들어가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들은 정성껏 부족들을 섬겼습니다.
아우카 부족은 이들의 헌신에 감동했습니다.
부인들이 본국으로 돌아갈 때에 아우카 부족장이 물었습니다.
“당신들은 무엇 때문에 우리를 위해 이렇게 고생을 하십니까?”

엘리엇의 부인 엘리자벳이 대답했습니다.
“남편들이 그렇게도 여러분들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 ‘예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를 전해주기 위해서입니다.”
엘리엇 등을 창으로 찔렀던 5명의 아우카 부족 사람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습니다.
그 가운데 4명은 목사가, 한 명은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아우카 부족 전체가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헌신과 열정, 사랑과 용서가 낳은 기적이었습니다.
엘리자벳은 ‘이 무슨 낭비인가’라고 신문에 쓴 기자에게 남편이 휘튼 대학에 다닐 때 썼던 일기장을 보여주었습니다.
거기에는 이런 글이 쓰여 있었습니다. 
“영원한 것을 위해서 영원하지 못한 것을 버리는 사람을 어리석다고 말할 수 없다.”

1. 오늘 성경에 보면 바울 일행은 아덴에서의 전도사역의 좌절을 안고 고린도로 옵니다. 

행18:1절 “그 후에 바울이 아덴을 떠나 고린도에 이르러”
당시 아덴이 문화의 중심지라면 고린도는 상업의 중심지였습니다.
고린도는 에게 해와 아드리아 해를 잇는 고린도운하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이곳에 그리스인들, 로마인들, 그리고 아랍인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바울은 무역의 중심지인 고린도를 통하여 세계 복음화를 이루려는 큰 그림을 그렸는지도 모릅니다.

고린도에서의 바울의 설교는 아덴에서의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습니다. 
고대철학의 중심지인 아덴에서 사도 바울의 설교는 사변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낭패였습니다.
반면 고린도에서 사도 바울의 설교는 달랐습니다.
행18:5절에 보면,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했다.”고 했습니다. 
거칠고 투박했지만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전한 것입니다. 

세상풍조가 어떻게 달라지든, 사람이 어떻게 변하든, 오직 예수님만이 사람을 구원하고, 예수님만이 역사를 구원하고, 예수님만이 시대를 구원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 2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그 말씀을 통하여 얼마나 바울이 고린도에서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설교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이 사도 바울의 설교에 대하여 유대인들은 신경질적으로 반응했습니다. 
6절 “그들이 대적하여 비방하거늘.......”
이에 대한 사도 바울의 태도를 보십시오.
그는 옷의 먼지까지 털었습니다.
6절 “.......바울이 옷을 털면서 이르되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 하고”
이런 사도 바울의 태도로 보아 그가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얼마나 큰 고통을 겪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완전히 지쳐 있었습니다.
급기야 전도를 포기하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저는 본문을 묵상하면서 이런 다짐을 했습니다.
‘전도 안할 이유를 찾지 말자.’
전도 안할 이유를 찾아 말하려면 밤을 새워도 시간이 모자랄 것입니다.
그러다가 우리는 사탄의 전략에 속게 되어 완전히 의욕을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왜 수많은 교회가, 왜 수많은 성도들이 전도에 실패하는지를 눈여겨 봐야합니다.
우리 교회는 전도 안할 이유를 찾는 교회가 아닙니다. 
우리 교회는 전도 안할 핑계를 대는 교회가 아닙니다.
우리가 분명히 아는 것은, 주님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명령을 아직까지 취소하지 않았다는 사실뿐입니다.
저는 주님의 전도명령을 순종하고 싶습니다.

인간은 불사조가 아닙니다. 
바울사도도 결국 인간의 몸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가슴 속에는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 있었고 영혼에 대한 뜨거운 연민이 있었습니다. 그는 어떤 박해와 어려움도 이길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도 결국 지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실제로 믿음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피곤과 좌절과 실망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모습을 성경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뛰어날 정도로 성숙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도 지친 적이 있었습니다. 
시내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자기를 대적할 때 모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민수기 11장 11절, 12절, 15절입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여짜오되 어찌하여 주께서 종을 괴롭게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내게 주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게 아니하시고 이 모든 백성을 내게 맡기사 나로 그 짐을 지게 하시나이까? 이 모든 백성을 내가 배었나이까? 내가 그들을 낳았나이까 어찌 주께서 내게 양육하는 아버지가 젖 먹는 아이를 품듯 그들을 품에 품고 주께서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가라 하시나이까? … 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진대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내가 고난을 당함을 내가 보지 않게 하옵소서.”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내가 고난당함을 내가 보지 않게 하소서.’
모세가 얼마나 지쳤으면 이런 기도를 했겠습니까?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교우 서로를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오래 믿은 사람도 때로는 피곤에 지쳐 쓰러질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도 때로는 실망하고 좌절하고 낙심할 수 있습니다. 
계속되는 상황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물러설 수도 있습니다. 
누구나 한 번 두 번은 잘 견디고 이길 수 있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이 때로 너무 무겁고 어려운 시험일 때, 때로 주어지는 믿음의 시련이 너무 길고 고통스러울 때 우리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나가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4월 25일은 총력전도주일입니다.
총력 전도주일을 맞이하여 특별히 권면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3장에 보면, 씨 뿌리는 자의 비유의 말씀이 나옵니다.
씨를 뿌리는 자가 씨를 뿌렸는데, 더러는 길가에 떨어졌기 때문에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습니다.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졌기 때문에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싹이 나오자 말라버리고 말았습니다.
더러는 가시떨기 가운데 떨어졌기 때문에 가시가 기운을 막아 키만 삐죽 클 뿐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더러는 옥토에 떨어졌기 때문에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결실을 얻었습니다.

보통 이 비유에서 ‘밭’이란 우리의 마음을 뜻한다고 해석합니다.
즉 어떤 사람의 마음은 길가 같고, 어떤 사람의 마음은 돌밭 같고, 어떤 사람의 마음은 가시밭 같고, 어떤 사람의 마음은 옥토 같다는 것입니다.
의미 있는 해석입니다.
그런데 교회도 길가 같고, 돌밭 같고, 가시밭 같고, 옥토 같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교회가 옥토 같아야 새 신자들이 잘 정착합니다.
교회가 길가 같고, 돌밭 같고, 가시밭 같으면 아무리 많이 전도해도 정착할 수 없습니다.
교회가 길가 같고, 돌밭 같고, 가시밭 같다는 말은 어떤 의미입니까?

새신자에게 무관심할 때 길가 같을 수 있습니다.
새신자에게 과도한 부담감을 줄 때 돌밭 같을 수 있습니다.
새신자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을 가질 때 가시밭 같을 수 있습니다. 
새신자에게 분별력 없는 말로 상처를 줄 때 가시밭 같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누가 옥토 같은 교회를 가꿀 수 있습니까?
우리 모두가 가꾸어야 합니다.
더 사려 깊고, 더 참고, 더 보살피고, 더 배려함으로 우리 모두가 가꿔야 합니다.
새신자가 교회에 첫발걸음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여러분은 잘 아시잖아요?
이런 새신자가 잘 안착하여 신앙의 열매를 풍성히 맺도록 우리 교회를 옥토로 가꿔야 합니다.

2. 이 때 주님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다시 본문으로 돌아옵니다.
사도 바울이 옷의 먼지를 털기까지 하면서 전도할 것을 포기할 때 주님이 보인 반응은 무엇입니까?

9-10절입니다.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주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개입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하시는 주님의 말씀으로 받읍시다.

1)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저의 고향 교회는 이렇게 개척되었습니다.
55년 전의 얘기입니다.
최영환이란 26살의 청년이 읍 교회에서 예수님을 만나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는 투전에 젖고, 술에 젖고, 인습에 젖고, 미신에 젖은 고향 마을을 모른 체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향에 돌아와서 약방을 차려놓고, 그 약방 마루에서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어른 교인은 하나도 없었고,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아이들뿐이었습니다. 
여러분, 성미라는 것을 아시지요?

여자 아이들이 밥을 지으면서 가족 숫자대로 숟가락으로 쌀을 퍼서 교회에 가져오곤 했습니다. 
이게 발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영환이가 아이들에게 쌀 도적질을 시킨다.”는 소문이 났습니다. 
어떤 사람은 도끼를 가져와 죽이겠다고 문지방을 찍었습니다.
갓 시집 온 아내는 남편과 함께 전도하다가 동네 사람이 지게작대기를 들고 쫓아오는 바람에 놀라 도망가다가 돌다리를 잘 못 디뎌 물속에 쳐 박히기도 했습니다.
무지막지한 시골사람들의 행패를 상상할 수 있겠지요?

딸이 태어나서 5살 되던 해였습니다.
교회에 7-8미터 높이의 종각이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교회마다 종이 있어서 초종, 재종을 치면서 예배시간을 알렸습니다.
동네 개구쟁이들이 몰려와 종을 치고 놀다가 그만 종 방망이가 떨어져 밑에서 놀고 있던 딸, 윤희의 이마를 때렸습니다.
이마가 깨져서 피가 철철 흐르고, 아이는 금방 전신이 새까맣게 되었습니다. 

급한 대로 손수건으로 깨진 이마를 싸매어 들쳐 업고, “이 놈아. 죽지만 말아다오!” 외치면서 30리 길 읍내로 내달았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고등학교 3년 전 학년 우등생에다가, 중앙대 약대 4년 전 학년 장학생으로 선발되었습니다.
지금은 약사가 되어 대전에서 큰 약국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개척한 교회가 이젠 두 교회가 되어 200명, 100명의 교회들이 된 것입니다.
척박한 고향 땅에 울며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청년을 보고 하나님은 얼마나 기뻐하셨을까요? 
이제 원로 장로님이 되어 머지않아 주님 품에 안기겠지만 그가 누릴 영광을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합니다. 
그 분의 삶을 위대하다고 평가하는 것은 ‘복음’과 상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2)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바울은 모두에게 배척받은 것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환상 중에 말씀하셨습니다. 
“아니다! 이곳에는 너의 복음에 목말라하는 사람이 많단다.” 
“아니다! 이곳에는 네가 오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많단다.” 
“아니다! 이곳에는 네가 먼저 말해주기를 기대하는 사람이 많단다.” 

‘복음’을 희랍어로 ‘유앙겔리온’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전쟁을 끝내고 ‘승전보’를 알릴 때 사용되는 말입니다. 
남정네들이 전쟁터에 나갔습니다. 
아낙네들과 아이들은 성문을 굳게 잠그고 이제나 저제나 승전보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전쟁에서 승리하면 남편을, 형제를, 자식을 다시 만날 수가 있습니다. 
가족이 모여 오순도순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이 전쟁에 지면 성은 불타게 될 것이고, 여자들과 아이들은 노예로 끌려갈 것입니다. 
행복은 끝나고 참혹한 비극이 시작될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성루에서 “전령이 나타났다”고 소리칩니다. 
까만 점과 같은 사람이 언덕에 가려서 나타났다가 사라졌다가를 거듭합니다. 
사람들의 가슴은 점점 더 조여 옵니다. 
뽀얀 먼지를 일으키고 달려온 그 전령이 입에 손을 모으고 이렇게 외칩니다. 
“우리가 이겼다!” “우리가 이겼다” 
그 소리가 얼마나 복 되겠습니까? 
성중의 사람들은 그 소식을 얼마나 기다렸겠습니까?
그 소식을 듣고 모든 사람이 거리에 쏟아져 나와 북을 치고, 장구를 치고, 춤을 덩실덩실 추지 않았겠어요?
그 소식을 전해 준 발걸음이 얼마나 고맙겠습니까? 

그래서 사52:7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복음을 전하면 이렇게 기뻐하고, 이렇게 반가워하고, 이렇게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이 성 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이 아침에 이 말씀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게 되길 축원합니다.
구원의 소식을 갈망하는 가난한 마음들이 내 주변에 많음을 믿게 되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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