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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충성(忠誠)과 그 대가(代價) (눅 19: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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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성(忠誠)과 그 대가(代價) (눅 19:11~27) 


1. 성도의 삶의 동기(動機)

어떤 일을 할 때 ‘그 동기가 무엇이냐’에 따라 그 일의 성공이 좌우된다는 것을 아십니까? 많은 학자들이 실험을 통하여 이것을 입증했습니다. 즉 어떤 일을 함에 있어서 성공의 열쇠가 되는 것은 동기라는 것이죠. 따라서 “동기”는 ‘성공을 이끄는 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ABC도 모른 채 중학교 1학년이 되었기 때문에 첫 영어 시간, 학교에서 가장 예쁜 처녀 선생님이 “1과 본문을 읽을 사람 손들어” 하시는데, 저는 손을 들 수가 없었습니다. 반 친구 중 하나가 본문을 읽자, 선생님은 정말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그때 저는 그 친구가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날 수업을 마치자마자 친구의 전과 책을 빌렸습니다. 그러고는 전과 책에 있는 영어발음을 제 책에다가 한글로 옮겨 적었습니다. 그리고는 달달 외웠지요. 그때 저는 영어를 외운 것이 아니라, 어떤 기호 혹은 그림에 한글을 맞추어 외운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드디어 제2과를 하던 날, “누구 읽을 사람” 할 때, 가장 자신 있게 큰 소리로 “저요”하고 외쳤습니다. 선생님은 제일 앞자리에서, 이때까지 손 한 번 들지 않던 학생이 손을 들고 외치니 당연히 시키셨지요. 

그때 저는 일어서서 더듬거리지 않고 유창하게 읽었습니다. 영어 읽는 법을 배운 것이 아니라, 한글을 외웠기 때문에 눈 감고도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때 제가 얼마나 칭찬을 많이 들었는지 아십니까? 그때 들은 칭찬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저는 ‘영어를 잘 하는 학생’이 되었습니다. 선생님의 영어를 잘한다는 말을 계속 듣고 싶어서 영어만 공부했었으니까요! 여러분, 이렇게 어떤 동기가 주어질 때 그 일을 더 잘하게 되어 있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신앙생활 역시 어떤 동기가 주어질 때, 더 열심히 하고 더 잘할 수 있다는 것은 상식적인 얘기입니다. 그리고 그 동기가 주님이 주시려는 상급이라고 한다면, 더더욱 열심히 신앙생활을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일까요? 성경에는 상급에 대한 약속이 정말 많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약속하신 상급은 많은 신앙의 선배들의 적극적인 신앙생활의 동기가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도 성도의 충성을 촉구하면서, 그 충성의 동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2.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자

1) <므나비유>의 배경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던 길에 하셨던 말씀입니다. 예수님과 그 일행들은 여리고의 구불구불하고 위험한 산길을 올라 예루살렘 가까이까지 오셨습니다. 그때 예수님과 함께, 혹은 그 뒤를 따르던 무리들은 예수님을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나라가 곧 나타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금까지 소경을 보게 하고, 문둥병자를 깨끗하게 하고,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일으키시는 등과, 어린아이의 도시락인 5병2어로 남자만 5천명을 배불리시는 등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치유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리고 서기관이나 어떤 랍비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권세 있는 가르침을 베푸셨습니다. 

이렇게 치유와 기적과 가르침 등,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 하나 하나는 왕으로서 손색이 없어보였습니다. 그동안 이러한 것을 쭉 지켜본 무리들은 예수님께서 이번에 예루살렘에 가시는 것은 ‘드디어 하나님 나라가 현실로 등장하는 시간’, 즉 로마를 물리치고, 새로운 이스라엘을 세우기 위해서라는 기대감에 부풀어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자신과 하나님 나라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분문의 므나의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므나 비유는 우리에게는 다소 생소할지라도 당시 사람들에게는 아주 실감나고 그 의미가 쉽게 이해되는 말씀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 므나 비유가 약 30년 전에 그 땅에 일어났던 사건과 관련되었기 때문입니다. 

약 30년 전, 유월절 축제 기간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3천 명의 유대인들이 잔인하게 죽임을 당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일의 전후 사정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할 당시의 왕이었던 헤롯은 로마에 의해 왕으로 임명되어 주전 37년부터 주후 4년까지 유대왕국을 다스렸습니다. 그런 그가 죽으면서 유대왕국을 세 아들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안디바는 갈릴리와 베뢰아 지방, 빌립은 팔레스타인의 북동쪽 지방, 아켈라오는 팔레스타인의 남쪽 지역을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왕이 아니었습니다. 아직 왕으로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 팔레스타인의 남쪽 지역을 다스리던 헤롯 아켈라오는 잔인한 성격에다가 권력에 대한 지나친 욕심으로 얼마나 폭정을 일삼았는지 모릅니다. 그는 아버지의 나라가 삼등분된 것에 불만을 품고 세 나라를 하나로 통일하여 그 나라의 강력한 왕이 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의 유언장을 변경하여 강력한 왕이 되어 다스리고자 황제의 인준을 받기 위하여 로마로 갔습니다. 그러나 그 동안 아켈라오의 학정에 시달리던 유대인들이 가만있지 않았습니다. 

국내에서는 반란을 일으켰고, 그러면서 50명의 대표단을 구성하여 로마로 보내 아켈라오가 왕이 되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아켈라오는 아버지의 나라의 절반에 해당하는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의 분봉왕이 되는 것으로 만족하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돌아온 아켈라오는 곧바로 보복을 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 3천명이 학살된 것이죠. 그 후 이러한 아켈라오의 잔인성과 권력욕은 황제에게 알려졌고, 주후 6년 황제는 그를 파면하여 해외로 추방시켜버렸습니다. 그리고 그의 영토는 로마의 총독이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 사건 때문에 예수님의 비유를 듣고 있던 사람들은 왕위를 받으러 가는 귀인과 그의 왕위에 반대한 사람들의 결말에 대해서 아주 쉽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좀 더 구체적으로 이 비유를 살펴볼까요?

2) <므나비유>의 내용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기 위하여 먼 나라로 가게 되었습니다. 당시 왕이란 로마 제국 관할 하에 있는 어느 지역을 다스리는 자로서, 그 왕권은 반드시 로마 황제에게 인준을 받아야 했습니다. 조선시대 우리나라 임금들도 중국의 명나라나 청나라 황제에게 인준을 받아야 했지 않습니까? 중국 황제의 허락을 얻어야만 정통성이 있는 왕이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귀인도 로마 황제에게 가서 왕위를 허락받기 위하여 떠나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왕위를 받는 기념으로 그동안 자신에게 충성해온 종들에게 상을 주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그 상을 그냥 주기보다는, 므나를 하나씩 나눠주면서 자신이 왕위를 받아올 동안 그것으로 얼마나 남기는 지를 보고 그에 따라 상을 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10명의 종들에게 므나를 하나씩 나눠주면서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그것으로 장사하라고 한 것입니다. 

여러분, 종들이 받은 므나의 가치는 얼마나 될까요? 예수님 당시, 한 므나는 노동자의 하루 품삯인 1 데나리온의 100배였습니다. 그러면 그 액수는 대충 얼마나 될까요? 요즘 일용노동자들의 경우, 숙련된 사람은 12만원, 보통 사람은 7, 8만원, 그리고 좀 적게 받는 사람은 한 5만 원 정도라고 합니다. 계산하기 쉽게 8만원으로 했을 때, 한 므나는 우리 돈으로 800만 원 정도 되는 돈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800만원이 아니라, 이 돈은 당시 사람들의 100일치의 임금, 즉 연봉의 1/3 정도 되는, 결코 적지 않은 돈이었습니다. “귀인”은 이렇게 큰 액수의 돈을 종들에게 주면서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장사를 해보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고 왕위를 받으러 갔으나 그가 왕이 될 나라의 백성들이 그가 왕이 되는 것을 반대하여 황제에게 밀사를 보내어서 ‘우리는 이 사람이 왕 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라고 반대 운동을 하기도 했지만(14), 그 귀인은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왕위를 받아 왕이 되어서 돌아왔습니다. 

왕으로서 귀환한 그가 제일 먼저 한 일이 무엇입니까? 자신이 왕이 되는 것을 반대한 무리들을 처단하는 것보다 먼저 자신의 종들을 불러 자신이 나눠주었던 한 므나로 각각 얼마를 남겼는지를 결산하는 일을 먼저 했습니다. 이제는 “귀인”이 아니라 “왕”으로서 자기 종들을 불러 그동안 그들이 한 므나로 어떻게 하여 얼마를 남겼는지를 보고받은 것입니다. 먼저 첫 번째 종은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습니다. 그러자 왕은 그에게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고 상을 주었습니다. 

두 번째 종은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고, 왕은 그에게 “다섯 고을”을 주었습니다. 반면에 받은 그대로 한 므나를 가지고 온 종이 있었는데, 왕은 그를 크게 꾸짖은 후, 그 므나를 빼앗아 버렸고, “죽이라”고까지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왕의 임직을 반대했던 자들을 처단했습니다. 27절, “나의 왕 됨을 원치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러한 <므나비유>를 통하여 말씀하시려는 것이 무엇일까요?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우리 주님은 장차 재림의 주로, 온 세상을 심판하실 왕으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 날은 온 인류의 결산의 날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날이 오기 전에 개인적으로 주님 앞에 서는 성도들도 있을 것인데, 그 자리 역시 그 사람의 결산의 시간이 될 것입니다. 그러한 결산의 날에, 모든 성도는 자신이 받은 것에 대해 결산하게 될 것인데요. 

그 ‘결산의 날에 칭찬과 더불어 열 고을, 혹은 다섯 고을을 다스리는 상을 받을 것인가, 아니면 있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냐’ 하는 것이 지금 이 땅에서의 삶을 어떻게 사느냐 하는 동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즉 장차 주님으로부터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과 더불어 상을 받기 위하여 지금 여기서의 삶에 최선을 다해 충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도의 충성의 동기는 주님의 칭찬과 상급입니다. 

3) 므나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여러분, 오늘 본문이 말하는 “므나”는 오늘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에게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➀ 첫째로 생각할 것은 본문의 <므나 비유>는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달란트 비유>와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달란트 비유에서는 종들이 각각 그 재능에 따라 한 달란트,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은 다섯 달란트를 남겼고, 두 달란트 받은 사람은 두 달란트를 남겼고,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땅 속에 묻어 두었다가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그때도 역시 남긴 사람들에 대해서는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하셨지만, 받은 대로 한 달란트를 되가져온 사람에겐 “악하고 무익한 종”이라고 책망하시며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곳에 집어넣으라”고 명했습니다. 이러한 달란트 비유에서 달란트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각자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재능이나 은사 등을 말합니다. 각자가 다 다르고, 또 같은 것이라도 조금 많게 받았거나, 적게 받은 자가 있다는 것을 전제한 비유입니다. 

➁ 이러한 달란트 비유와는 달리 오늘 본문의 <므나 비유>는 어떻습니까? 주인이 먼 길을 떠나면서 종 열 명을 불러 모두에게 똑같이 한 므나씩 맡깁니다. 똑같이 한 므나씩을 받은 종들은 세 부류로 나누어져서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긴 종도 있고,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남겼고, 또 한 종은 한 므나를 땅에 묻어 두었다가 가져와서는 주인에게 말하기를 ‘주인님은 돈을 잃어버리면 큰일 나는 분이기 때문에 내가 잘 보관했다가 가져왔습니다.’라고 했고, 그 결과 그는 므나를 빼앗겼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므나비유>가 말하는 므나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므나가 무엇이냐?” 하는 것은 우선 사람에 따라 다르게 나눠준 달란트와는 달리 모두에게 똑같이 나눠주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 면에서 므나는 ‘재능’이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이 말하는 므나는 무엇일까요? 

➊ 첫째 의견은 므나를 ‘생명’이라고 봅니다.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받은 값진 것은 바로 생명이라는 것이죠. 따라서 므나로 장사하여 남긴다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생명으로 육신의 생명인 자녀를 낳아 대를 이어가는 것이고, 영적인 생명을 낳는 것입니다. 

➋ 두 번째로 므나는 전도의 사명입니다. 모든 성도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받은 것이 전도의 명령, 복음 전도의 사명이지 않습니까? 따라서 므나로 장사하여 남긴다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복음을 또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➌ 세 번째로 므나는 “기회”입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삶의 기회, 만남의 기회, 사랑할 기회, 섬길 기회, 열심히 일할 기회가 므나라고 보는 견해입니다. 따라서 므나로 장사하여 남긴다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선용하는 것입니다. 그 기회로 사람의 영혼을 사고, 그 기회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➍ 마지막으로 므나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은 ‘므나는 곧 성령이요, 믿음’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즉 모든 성도가 동일하게 받은 것은 믿음이요 성령이기 때문인데, 그것으로 장사하여 남기라는 말은 믿음으로 믿음의 역사를 이루고, 성령으로 성령의 역사와 능력을 나타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켜 가는 것이 므나를 받은 성도의 사명입니다. 즉 성도가 믿음으로 살고, 성령으로 살아서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고 확장시키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장사하여 남기는 삶이요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듣고 상 받을 삶이라는 것입니다.

4) 비유를 말씀하신 이유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러한 <므나 비유>를 말씀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➊ 첫째 이유는 제자들을 포함한 여러 사람들의 생각을 바로잡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생각하듯 정치적인 왕으로 군림하기 위하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는 자, 희생하여 죽는 분으로 오셨다는 것을 분명히 심어주려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 나라가 즉시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 당장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라고 대답을 하신 셈입니다.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신 후에 다시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우편에 계시다가 다시 오실 것인데, 그때야 비로소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하게 임할 것을 암시하셨습니다. 

➋ 따라서 예수님은 곧 자신이 오셨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며, 그 후 그의 나라와 그 나라를 위한 사역은 남은 자들에게 맡겨진 므나라는 점을 깨우쳐주십니다. 즉 귀인에게 므나를 받은 종들처럼 주님의 사람들은 사명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이죠. 귀인이 왕위를 받아 다시 온 것처럼, 우리 주님도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인데, 그때 종 된 성도들이 자신이 받은 사명에 어떻게 충성했느냐를 물으실 것입니다. 

➌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왕됨을 원치 않던 백성들(14), 즉 왕이 “원수”라고 불렀던 사람들에 대한 것입니다. 그들은 분명 귀인의 백성인데도 귀인이 왕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땅에 오셨으나 자기 백성들이 영접하지 않았습니다(요1:11). 따라서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하여 자신을 거절한 사람들이 얼마나 큰 실수, 아니 큰 죄를 저지르고 있는지를 확실하게 가르치시려 하셨습니다. 

➎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자신이 다시 오실 때, 받은 사명에 대해 충성을 다한 자에게는 보상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열 고을”, “다섯 고을”이 바로 그 보상을 의미합니다. 마가복음 10장 28절에서 30절을 보면,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어려움도 있지만 반드시 보상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주님을 위하여, 주님의 나라를 위하여,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에 충성을 다하는 성도에게는 반드시 상이 있습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주신 많은 것으로 남기기는커녕 자기 배만 채우다가 화장실만 부흥시키고 가는 인생이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면서 사는 것, 그리고 주어진 사명에 최선을 다하여 사는 것은 주님이 오실 그때만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도 풍성한 삶을 사는 지름길입니다. 이 땅의 삶은 어떤 삶이든지 지루할 수밖에 없지만, 주님을 기다리는 삶은 결코 지루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오실 때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여러분이 주님께 갈 날이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성도의 삶은 더 넓어지고 더 높아지고 더 풍성해집니다. 그것이 충성한 자에게 주시는 주님의 상급이지요.

5) <므나비유>의 핵심 메시지

따라서 오늘 본문이 주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무엇입니까? 장차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자신의 삶에 대한 결산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성도는 충성을 다합니다. 17절을 보실까요?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주님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했는데도 “열 고을”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시겠다는 말씀을 통하여 주님이 오시기까지 충성한 성도에게 큰 상을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미국 스탠더드 석유 회사의 평사원이었던 ‘아치볼드’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아치볼드는 직장을 사랑하는 마음이 남달랐습니다. 출장을 가서 호텔 숙박계를 쓸 때에도 자기의 이름을 쓰지 않고 “한 통에 4달러 스탠더드 석유”라고 자기 회사의 석유 가격과 이름을 적었습니다.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에도 “한 통에 4달러 스탠더드 석유”라는 말을 먼저 한 후 용건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한 통에 4달러 스탠더드 석유”라고 불렀습니다. 

이 소문이 사장인 록펠러의 귀에 들어갔습니다. 그래서 록펠러가 아치볼드를 불러서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그와 식사를 하면서 록펠러는 그가 얼마나 회사를 사랑하고 위하여 충성하는지를 알고는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 평사원의 말 한 마디 한 마디 속에까지 愛社心이 스며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록펠러는 ‘이 아치볼드야말로 우리 회사에 없어서는 안 될 인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후 아치볼드가 어떻게 되었을지 짐작이 가시죠? 그는 록펠러의 뒤를 이어 세계 최대의 석유 회사 사장이 되었습니다. 

충성하여 열 고을을 다스리는 상을 얻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장차와 지금 이 땅에서 충성하는 성도에게 주님이 주실 상은 그 이상인 줄로 믿습니다. 그러니 ‘내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충성하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작은 일에도 최고의 충성을 아끼지 않을 때 주님께서 큰 상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3.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자의 삶

말씀을 맺겠습니다. 

주후 79년 8월, 이탈리아의 폼페이 근처에 있는 베스비우스 산이 용암을 내뿜으면서 폭발하여 번영하던 로마제국의 도시 폼페이는 완전히 폐허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 후 17세기 후반부터 고고학자들이 발굴 작업을 시작하여 지금까지 계속 되고 있습니다. 이 폼페이 시의 유적 가운데 발굴자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것이 하나 발굴되었는데, 그것은 폼페이 성의 성문을 지키는 보초병입니다. 그는 폼페이 성의 성문에서 무기를 손에 들고 부동자세를 취한 채 죽어 있었습니다. 

런던 미술관에는 이 군인을 모델로 해서 그 당시의 어지러운 모습을 그려놓은 유명한 그림이 하나 걸려 있는데요. 그런데 그 그림 아래에는 <충성>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화산이 폭발하여 그 용암덩어리가 자신에게 파도처럼 밀려오는데도 피하지 않고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초병의 자리에서 최후를 맞은 그 사람이야말로 충성의 모범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충성은 주위의 환경과 여건에 흔들리지 않고 자기가 맡은 일에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이렇게 하든지, 저렇게 하든지 그것에 관여하지 않습니다. 또 남들이 알아주든지 몰라주든지 그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대가가 있느냐 없느냐, 크냐 작느냐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충성하다가 고생을 하고 희생을 하느냐 아니냐 하는 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아가 진정한 충성은 죽기까지, 즉 죽는 그 순간까지 충성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2장 10절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다시 오실 주님이 주신 사명에 죽도록 최선을 다하고, 그리고 충성하다가 죽는 것이 므나를 받은 성도의 삶의 자세라는 것이죠. 그렇게 충성할 때 주님은 반드시 “열 고을”, 혹은 “다섯 고을”을 차지하는 복을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장차 주님으로부터 칭찬과 상 받기를 원하시죠? 그리고 이 땅에서도 주님으로부터 상 받기를 기대하시죠?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충성해야 합니다. 죽을 정도로 충성하고, 죽을 때까지 충성하셔서 장차 영원한 주님의 나라에서, 그리고 이 땅에서, 큰 복을 받아 누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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