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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침노하는 천국신앙 (마 11: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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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노하는 천국신앙 (마 11:12~19)
 
  
12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13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니 
14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15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16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17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18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들이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19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을 얼마나 높이 평가하고 계신지 잘 보여줍니다. 어쩌면 우리 생각에는 모세나 엘리야가 세례 요한보다 더 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은 단지 광야의 외치는 소리였던 반면, 모세나 엘리야는 하나님과 대면하기도 했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여러 가지 놀라운 기적을 행하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말하는 ‘큰 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조금 다릅니다. 이는 하나님의 계시가 발전되어 가는 선상에서 이해를 해야만 하는데, 세례 요한이 세상에서 가장 큰 자라고 하는 것은, 그가 천국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선지자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천국에 대한 예언은 구약 시대부터 있었지만, 구약의 성도들은 천국과는 먼 거리에 있던 사람들입니다. 왜냐하면 천국의 주체인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야만 천국을 우리가 소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구약의 선지자나 성도들이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말은 아닙니다. 다만 그들은 이 땅에서 천국의 실체인 그리스도의 은혜를 소유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천국과는 먼 거리의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구약의 성도와 선지자들은 천국을 멀리서 바라보고 예언하는 정도에 그친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그 나라에 가장 가까이 접근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바로 천국을 도래케 하시는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요한은 구약 선자들 중에서도 가장 큰 자의 위치에 서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천국을 소유한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세례 요한보다 더 큰 자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이것은 질적으로 다른 두 공동체에 속한 사람을 생각하면 그 이해가 더욱 쉽습니다. 여러분, 초등학생의 신체와 지식이 아무리 성숙하다고 해도 질적으로 다른 대학생의 신체와 지식을 따라갈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은혜를 맛보지 못한 자가 아무리 높은 위치에 있고 또 제아무리 잘나고, 제아무리 똑똑하다 할지라도, 천국의 비밀과 은혜를 소유하고 그리스께서 친히 높이신 우리 성도들은, 천국의 풍성함과 하나님의 자녀로 높임 받은 존귀한 자들이기에, 질적으로 다른 이 세상에 속한 그 누구와도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자긍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비록 여러분이 세상적으로는 초라하고 보잘것없어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가장 크고 귀한 자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주님께서 여러분을 영접하시는 그날에는, 하나님 나라에서 여러분이 가장 존귀한 자로 대접받게 될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고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12절에 보면 주님께서는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고 했습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나라를 말합니다. 과연 이 천국을 얻을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1. 문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당당히 들어가는 사람입니다.

1)눅 16:16절에 의하면,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사실 세례요한은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 있습니다. 또한 신약시대를 여는 가교역할을 한 선지자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메시야를 직접 눈으로 보며 증거한 유일한 선지자였습니다. 요한 이후의 시대는 하늘나라의 문이 모든 사람 앞에 공개되어 누구든지 믿음만 있으면 차별 없이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여기 ‘침노’란 말은, 실상 약탈이나 침략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아무 통제나 차별 없이 누구든지 그 열린 문으로 들어갈 수 있음을 표현한 말입니다.

2)계 21:27절에는 “무엇이든지 속된 것이나 가중한 일 또는 거짓말 하는 자는 결코 그리로 들어오지 못하되, 오직 어린 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뿐이라.”고 했습니다. 과연 어떤 자들의 이름이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됩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 값을 지불하신 것을 믿고, 그 용서를 받아들이며 예수님을 자신의 생명의 주인으로 마음속에 모시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아무 대가나 값을 친히 지불하지 않고도, 그 천국의 축복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고 했습니다. 이는 마치 열린 성문을 무사통과하여 그 성안에 있는 모든 것을 탈취하며 침략하는 자처럼, 아무 값없이 오직 은혜로 그 천국의 복락을 누리게 됨을 의미하는 것 입니다.

3)요 10:9절에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그 문은 지금 우리들에게 넓게 열려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들어갈 수 있도록 열려있습니다. 그러나 멀지 않아 문이 굳게 닫힐 날이 올 것입니다. 늦기 전에 이 문으로 들어가서 영원한 천국을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천국의 복락을 바라보며 용감히 돌진하는 사람입니다.

1)‘침노하는 자가 빼앗느니라.’고 했는데, 이는 힘과 정열을 쏟아 진지하고 성실하게 추구하며 노력함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데니라는 주석가는 이 구절을 주석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마음씨 좋은 호인들의 것이 아니라, 필사적으로 투쟁하는 자들의 것이다.” 물론 우리가 구원을 얻는 일은 결코 행위에 대한 보상이 아닙니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값없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이 지상에 살면서도 천국의 복락을 맛보며 그 은혜를 체험하며 살려면, 필사적인 각오로 은혜를 사모하며 추구해야 합니다.

2)서양의 속담에 “마부가 말을 물 가까이까지 끌고 갈 수 있다. 그러나 그 말로 하여금 물을 마시게 할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차별 없이 풍성한 은혜의 강가로 인도하시며, 구원의 문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나 그 풍성한 은혜의 생수를 마시는 일은 우리 스스로 해야 할 일입니다. 이것조차 않고 저절로 구원의 축복이 굴러 들어올 줄 생각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3)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열어주시는 이 구원의 문을 향해 온갖 힘을 다하여 전진해야 합니다. 열심히 기도하고, 매일 성경 읽고, 성령 충만하여 복음을 전하는 구체적인 삶속에 천국의 기쁨과 기적과 축복이 꽃피고 열매 맺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내 가정, 내 식구들의 구원을 위해서 필사적인 각오로 전진해야 합니다.

13-15절을 보면 예수께서는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라.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고 하였습니다. 엘리야는 구약 시대의 능력 있는 하나님의 선지자로, 죽음을 보지 않고 불 수레를 타고 하늘로 승천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후에 말라기 선지자는 엘리야가 다시 와서 메시야의 길을 예비할 것이라고 예언을 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메시아가 오기 전에 반드시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는 요한에게 먼저 ‘네가 엘리야냐?’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적 사고를 벗어나지 못한 세례 요한은 자신이 스스로 엘리야임을 부인하였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세례 요한이 엘리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요한은 분명 육신적으로는 엘리야가 아니었지만,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와서 회개를 외치며 주의 길을 예비하는 하나님의 사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성도 여러분, 말라기 선지자는 왜 많고 많은 선지자들 중에 엘리야가 다시 올 것이라고 예언을 한 것일까요?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바알의 선지자들을 죽이고 여호와 종교의 개혁을 이룬 사람인데, 엘리야가 와야 한다는 것은 그 당시 팔레스틴이 문화와 종교적으로 개혁이 필요한 시기였다는 것을 말합니다. 즉 알렉산더 대왕으로부터 출발한 헬레니즘의 영향은 모든 문화를 통합하기 시작했고, 그 가운데 여러 신의 이름과 그들을 섬기는 신전이 세워졌습니다. 

또 로마는 황제 숭배를 강요했습니다. 물론 유일신을 섬겼던 유대 지역에는 그 영향이 상대적으로 적었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헬라식 이름을 사용하고 그 문화에 젖어 가고 있던 때였습니다. 윤리는 무너지고 도덕은 사라지는 때였습니다. 이런 때에 그들에게는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며 회개를 촉구하고 개혁을 외치는 엘리야와 같은 사람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역시 엘리야의 심령으로 외치는 소리가 필요한 때가 되었습니다. 우리의 주위를 보십시오. 이 세대는 많은 이단과 적그리스도의 모습이 우리의 신앙을 위협하고 사이비 종교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의 양심은 무뎌져 있고 우리의 도덕은 상실되어 가고 있습니다. 특별히 지금은 주님께서 다시 오실 날이 매우 가까워진 때입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다 세례 요한과 같이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회개를 외치므로, 사람들이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오도록 다시 오실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16-17절에 보면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당시 이스라엘 풍습에 따르면 결혼식에서 피리를 불면 주로 남자들이 거기에 맞추어 춤을 추었습니다. 한편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도다.” 이것은 장례식에서 여인들의 애곡하는 소리에 맞추어 가슴을 치며 비통해하던 것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아이들이 본문은 아이들이 어른들의 결혼식이나 장례식을 흉내 내는 놀이의 광경을 비유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들의 놀이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아이들이 피리를 불어도 다른 아이들이 춤추지 아니하고, 또한 애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고 전혀 반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는 세례 요한이 와서 아무리 회개를 선포해도 반응을 보이지 않고, 구약에서 거듭 예언된 메시아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천국 복음을 선포해도 완악하여 무감각하고 무관심하였던 당시의 유대인들을 책망한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바로 오늘 이 세대도 예수님 당시 세대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한 때 일본 학생들 사이에서는 무책임, 무관심, 무목적, 무행동, 무감각, 무도덕이라고 하는 육무주의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도 무감각은 우리들의 삶을 생명력 없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입니다. 생명력이 있는 것은 자극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하지만, 생명력이 없는 것은 아무리 자극을 주어도 전혀 느끼지 못하고 반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삶이 무감각하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의 삶이 건조해지고, 웃음과 눈물, 감동과 환희, 기쁨도과 슬픔도 느낄 수 없는, 생명력 없는 삶임을 나타내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대는 이웃의 고통과 아픔을 보면서도 눈물이 없고, 이웃과 함께 기뻐할 줄 모르는 무감각한 세대입니다. 또한 이 세대는 이웃뿐만 아니라 하나님께도 무감각해져서, 죄를 짓고도 그 죄의 고통과 아픔을 느끼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도 기뻐할 줄 모릅니다. 무감각한 이 세대는 하나님을 떠나고 하나님의 사랑을 저버리면서도 회개의 눈물을 흘리지 않고, 죄 사함을 받는 엄청난 은혜에 대해서도 아무런 느낌을 갖지 못하는 불행한 세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여러분, 바로 이런 자들이 살았다 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죽은 자들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웃의 아픔과 고난에 동참할 줄 아는 사람들이 되고, 우리의 신앙 감각이 무디어지지 않도록 죄에 대해 민감해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8-19절에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들이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세례 요한이 금욕적인 생활을 하는 것을 보고 귀신들렸다 비난하고, 예수께서 음식을 먹고 마시매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라고 비난을 했습니다. 

세례 요한은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에게 그들의 위선을 꼬집으며 회개하라고 외쳤는데, 그들의 악한 심령이 듣기에는 세례 요한의 말이 독설처럼 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세례 요한이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약대 털옷을 입고 생활하는 모습을 보고, 세례 요한을 귀신들린 자로 몰아세우며 미친 사람 취급을 했습니다.

반면 예수께서는 정상적인 생활을 하시면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죄인과 소외된 자들의 친구가 되어 몸소 사랑을 실천하여 본을 보여 주셨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향해서는 그들의 죄를 날카롭게 지적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에 찔린 사람들이 이번에는 예수님을 가리켜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라고 비난하며 자기들의 잘못을 합리화하였습니다. 돌같이 굳어진 그들의 심령은 ‘회개하라’고 외친 세례 요한을 귀신들렸다고 하여 회개하기를 거절하였고, 천국 소식을 전하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복음을 믿고 따르기보다는 책잡고자 오히려 반박함으로 자기들의 입장을 합리화시켰던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기 보다는 오히려 자기의 잘못을 합리화하기 위해 그 잘못을 지적해 주는 상대방을 비난하기가 쉽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비난하는 것으로도 자기들의 잘못이 합리화되지 않으면, 오히려 누명을 씌워 자기의 잘못을 지적한 사람을 궁지로 몰아넣기도 합니다. 여러분, 바리새인들이 왜 예수님을 죽이려고 의논하고,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빌라도가 예수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고 그를 놓아주려 할 때 왜 예수를 죽여야 한다고 백성들을 선동했습니까? 이는 모두 자기들의 잘못을 합리화하려는 악한 본성에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런 태도를 가지고는 결코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더 나은 삶은 우리의 결점을 바로 보고 그것을 고쳐 가는 가운데서 가능한 것이지, 결점을 감추고 변명하는 데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잠 12:15의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나,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라.”는 말씀대로, 누가 우리의 잘못을 지적해 줄 때 겸손히 그것을 받아들이고 고쳐 나가는 하나님 앞에서 지혜로운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인간은 태어나는 그날부터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 생존을 위한 끊임없는 투쟁을 계속해야만 합니다. 개인의 생명 존속을 위하여, 성공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끊임없는 생존경쟁이 전개되는 것입니다. 이 와중에서 약한 자는 강한 자의 밥이 되고 종속이 되며, 강한 자만이 살아갈 수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우리들의 영적 신앙적인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그렇습니다. 문은 두드리는 자에게 열리며, 금광은 찾고 또 찾는 자에게만 발견되는 법입니다. 천국을 침노해야만 하는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온갖 수단으로 막고 훼방하는 세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나라가 다른 나라를 침노하여 빼앗기 위해서는 목숨을 내어놓고 전 국민이 힘을 합해 전력을 기울일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천국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사단이 다스리는 나라를 침노하고 마귀를 내어 쫓고 점령해야 합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예비해 놓으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시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보냈을 때, 그곳에 있는 가나안 일곱 족속을 쫓아내고 그 땅을 점령하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천국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천국을 침노하는 신앙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천국은 힘쓰는 자가 빼앗습니다. 생사가 달려있는 전쟁을 할 때 소풍을 가듯이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십자군대의 정병이요 천국을 빼앗는 용사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거룩한 열정이 필요하고 열심히 필요한 것입니다. 열심히 믿고,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봉사하고, 열심히 헌신하고, 열심히 전도하고, 피 흘리기까지 열심히 죄와 싸우는 침노하는 신앙으로, 저 복되고 영화로운 하늘나라에 들어가서 영원무궁한 복락을 누리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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