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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얻은 승리 (롬 8: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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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얻은 승리 (롬 8:1~11)
 

성도들은 영적인 싸움에 나선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상관없이 이 싸움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악의 세력이 도처에서 성도들을 넘어뜨리기 위해 온갖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공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하기를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했습니다(딤후 2:3). 

복음 사역자들만 그리스도 예수의 군사인 것이 아닙니다. 사도는 빌립보 교회의 신자들에게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다’고 했습니다(빌 1:30). 사도들을 비롯한 사역자들 뿐 아니라 신자들에게도 영적 싸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강하고 담대한 마음으로 핍박을 이겨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1장에 이르기를 “7)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8)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성도들에게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승리가 약속되어 있기 때문에 대적들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담대하게 영적 싸움에 임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들이 승리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인지 말씀해 드림으로 피차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첫 번 째로, 성도들이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는 이유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사죄의 은총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에 이르기를 “1)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 주신 사죄의 은총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보여줍니다. 세상 사람들은 ‘죄와 사망의 법칙’에 지배를 당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죄를 짓고 살다가 결국은 사망에게 삼키 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에 의해서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죄와 사망의 법이 성도들을 지배하지 못하며, 그 대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에 의해 다스림을 받습니다. 

이제, 예수 믿는 성도들은 율법의 정죄를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법정에서 의로운 자라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이는 성도들이 죄를 짓지 않고 본질이 의롭기 때문이 아니라 성도들의 영적인 소속에 의한 것입니다. 성도들은 지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주님을 믿기 이전의 우리의 실상을 이 같이 말씀합니다. 

‘그 때에 너희는 죄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 곧 마귀를 따랐으며,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으며, 육체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닌 이방인이요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었고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으로서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였다‘(엡 2:).

그런데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그리하여 성도들은 새로운 영적 신분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베드로전서 2장 9-10절에 이같이 말씀합니다.

“9)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10)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사랑하는 성도님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이 이처럼 말로 다할 수 없이 영광스럽고 은혜로운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도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지난날과는 영적 신분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러므로 과거와 같이 죄와 사망의 법에 의해 간섭을 받지 아니하고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법에 따라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한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법에 의해 보호를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한 죄와 사망의 법이 우리를 주관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성도들은 절대로 죄를 짓지 않는 것일까요? 요한일서 1장 8절 이하에 이르기를 “8)만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9)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10)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구원 받은 성도들도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죄 사함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지만 아직 인간적인 약점을 지니고 있으므로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에게는 죄 사함의 길이 항상 열려 있습니다. 우리가 범죄했을 때 뉘우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죄를 자백하면 다시금 사죄의 은총을 내려주십니다. 

그러나 죄에도 종류가 있습니다. 요한일서 5장에 이 같이 말씀합니다. 

“16)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17)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18)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이 말씀에 의하면, 죄는 죄인데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는가 하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가 있습니다. 사망에 이르는 죄란,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죄입니다. 아무리 흉악한 죄인이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구원의 주님을 부인하면 달리 구원 받을 방도가 없는 것입니다. 

감사한 일은 구원 받은 성도들은 사망에 이르는 죄를 범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요한일서 3장 6절에 이르기를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하지 아니하나니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구원받은 성도들은 어떤 경우에도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죄를 범치 않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로서 주님과 함께 죽는 데도 가리라 장담했지만, 주님이 심문 받으시던 대제사장의 관저 뜰에서 불을 쬐면서 지켜보던 중에 사람들 앞에서 세 번이나 주님을 알지 못한다고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새벽닭 울음소리를 듣고는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신 주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 심히 통곡했습니다. 베드로는 비록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모른다 부인했지만 그것은 그가 겁을 먹었기 때문이지 그는 여전히 주님을 사랑하고 있었기에 닭 울음소리를 듣고서 밖에 나가 눈물로 회개하였던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인간적인 연약함으로 인해 죄를 짓지만 회개할 때 다시금 사죄의 은총을 받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은 지금도 살아 역사하고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보혈은 지금도 우리의 죄를 사하시며, 죄와 사망의 법에 묶여 있는 자들을 자유하게 하십니다. 히브리서 10장 19절 이하의 말씀과 같이, 우리는 예수님의 피를 힘입어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고, 우리 마음에 예수님의 피 뿌림을 받아 양심의 악을 깨닫게 되어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성도들이 사죄의 은총을 힘입어 살아갈 때 죄와 마귀의 세력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담대하게 대적하여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두 번 째로, 성도들이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는 이유는 그리스도 예수의 생명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25)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고 하셨고, 요한일서 5장에 이르기를 “11)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12)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생명을 누릴 수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로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생명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예한 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포도나무의 비유에서 주님과 성도들의 관계를 이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1)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2)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3)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4)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가지가 살고 죽는 것은 전적으로 포도나무에 붙어 있느냐, 떨어져 나가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가지는 포도나무에 붙어 있기만 하면 진액을 공급받아 생명을 누리며 열매를 맺게 되지만, 만일 가지가 포도나무에서 떨어져 나가면 그 즉시로 생명에서 단절되어 죽고 맙니다. 그런 점에서, 가지가 포도나무를 살리는 것이 아니고 포도나무가 가지를 살리는 것입니다. 가지는 철저하게 포도나무에게 의존해서 생명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성도들의 관계가 이와 같습니다. 성도들이 가진 영적 생명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이 누리는 생명은 별도로 주어진 생명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함께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생명을 지속적으로 누릴 수 있지, 예수님을 떠나면 그 시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명을 풍성히 누릴 수 있는 길은 분명해졌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뿐 아니라 그 분의 말씀을 순종하면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입술로만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할 뿐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사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기쁨으로 순종할 때, 생명을 얻되 더 풍성히 얻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 속에 영적 생명이 충만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먼저, 우리 마음에 기쁨이 충만하게 됩니다. 생명은 기쁨을 생산합니다. 그래서 어린 생명이 태어난 집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사람 뿐 아니라, 초목도 새싹이 돋아나는 것을 볼 때 기쁨이 있습니다. 봄이 되어 산과 들과 길에서 움트는 초목들을 보면서 우리는 생명의 희열을 맛봅니다. 우리 마음이 생명의 희열을 느낄 때 낙심과 절망과 같은 부정적인 세력이 가까이 오지 못합니다. 마음의 우울증을 치료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기쁨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주는 일시적이고 정욕적인 기쁨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신령한 기쁨, 구원의 기쁨을 받아 누려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울증이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떠나가고 말 것입니다. 

빛이 비추면 어둠이 사라지듯이, 생명이 임할 때 죽음의 세력은 물러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장 4절에 이르기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했습니다. “그 안”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을 의미합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있고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의 빛을 비추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이 생명의 빛이 우리 심령 속에 비추면 어둠의 세력, 의심과 낙심과 절망과 미움과 시기와 슬픔 따위가 순식간에 사라져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사람은 그가 처해 있는 형편이 불리하기 때문에 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당면한 문제를 긍정적인 눈으로 보고 판단하지 못하기 때문에 망하는 것입니다. 긍정적인 생각, 믿음의 생각을 하려면 그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말씀하기를 “11)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고 했던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절망이라고 외칠 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들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으로 인해 육신의 질병을 이길 수 있습니다. 질병은 생명의 결핍에 의한 것이므로 예수 안에서 생명을 받되 풍성히 받아 누릴 때 병은 떠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열 두 해 혈루증 앓던 여자가 예수님의 겉옷에 손만 대면 자기 병이 나을 줄 알고 몰래 다가와서 손을 대었더니 즉시로 예수님에게서 치료의 능력이 그 여자의 몸속으로 들어와서 혈루 근원이 말라버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두려워 떠는 그 여자에게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찌어다”(막 5:34)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성도들이 건강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기에 말씀하시기를 “17)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18)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기도할 때 우리 병이 낫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질고 곧 병고를 담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몸의 연약함과 질병의 치료를 위해 기도하여 강건한 삶을 누리게 되시기 바랍니다. 

그뿐 아니라, 죽음은 생명의 단절에 의한 것입니다. 인간들이 죄로 인해 생명과 단절되었으므로 죽음에게 삼키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 사함을 받아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었고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법 아래서 살아가기 때문에 주 강림하실 때 마지막 나팔 소리에 부활의 영광에 참예하게 됩니다. 부활은 비유하자면, 우리 속에 심겨져 있는 영생의 씨앗이 자라 열매를 맺은 것과도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대속의 죽음을 통해 죄의 문제를 청산하셨으므로 사망은 무장해제를 당했습니다. 사망의 쏘는 것 곧 사망이 가진 무기인 죄가 청산되었으므로 사망이 더 이상 성도들을 위협할 수 없습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이 피하여 도망갈 수 없는 
육신의 죽음 누이를 두고 주님이신 당신을 찬양합니다. 
덧없는 죄 가운데 죽어가는 이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러나 당신의 거룩하신 뜻에 복종하는 가운데 죽는 이들은, 
그 죽음이 아무 해도 끼치지 못할 터인즉, 진실로 복된 이들입니다.“

그는 죽음을 일컬어 “누이”라고 했습니다. 원수가 아니라 누이처럼 친밀하게 대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는 죽음이 더 이상 심판이 아니라 천국에 들어가는 관문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성도들이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을 가리켜 “죽었다”고 하지 않고 “잔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더 이상 그 무엇을 두려워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처럼 성도들은 그리스도 예수의 생명 안에 있으므로 궁극적인 승리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세 번 째로, 성도들이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는 이유는 그리스도 예수의 승리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계시록 5장에 의하면, 사도 요한이 환상 중에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오른손에 책이 들린 것을 보았습니다. 그 책은 앞뒤로 기록되었고 일곱 인으로 봉한 것이었습니다. 그때 강한 천사가 요한에게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누가 이 책을 펴며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한가?” 그러나 하늘에서나 땅 위에서나 땅 아래 어느 곳에서도 그 책을 펴서 볼 수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 책을 펴서 볼 자격이 있는 사람이 보이지 않자 큰 소리로 울었습니다. 그 때 장로 중 하나가 그에게 말하기를 “울지 마라. 유다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심판하는 권세를 예수 그리스도께 주셨다고 증언합니다(요 5:27, 행 10:42).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최후의 심판주로서 강림하셔서 산 자들과 죽은 자들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판주가 되신 것은 그 분이 죄와 죽음과 마귀를 이기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셔서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신 것입니다(롬 1:4). 이 세상에 죄와 사망과 마귀를 완전히 없이하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으십니다. 예수님 한 분만이 영원하신 승리자이십니다. 

그런가하면,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분의 승리에 동참하는 은혜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가 곧 성도들의 승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는 절망이 있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말씀하기를 “8)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고후 4:)라고 했습니다. 

누구나 사노라면 낙심하고 절망할 일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어떻게 해 볼 방도가 없다, 이제 끝장이다 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포자기한 나머지 스스로 죽음을 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는 절망이란 없습니다. 성도들에게는 죽음조차도 절망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 안에 있는 성도들은 부활의 소망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 그의 누이 마르다와 마리아는 절망했습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때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오라비가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벌써 냄새가 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는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썩는 냄새가 나는 것을 보고 이제는 살아날 희망이 없다고 단정지었지만,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의 무덤에 가셔서 무덤을 막은 돌을 옮겨놓게 하신 후에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신 후 “나사로야, 나오라!” 하시니,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서 걸어 나왔습니다. 이처럼 죽음도 그리스도인을 절망시키지 못한다면, 그 무엇이 성도들을 절망시킬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님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곧 성도들의 생명과 직결되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사실을 믿을 때 우리는 주님의 승리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어떤 극한적인 어려움 가운데서도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절망을 딛고 소망을 붙잡을 수 있으며, 죽음을 이기고 생명을 누리게 되며, 불화를 해결하고 화목을 이루고, 질고를 이기고 강건함을 누리며, 죄의 세력을 이기고 의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위대한 영적 승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날마다 누림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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