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갈릴리에서 만납시다 (마 28:1~10)

  • 잡초 잡초
  • 259
  • 0

첨부 1


갈릴리에서 만납시다 (마 28:1~10)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아마도 확신을 갖고 사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내가 구원을 받았는지, 내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어떤 사명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확신을 갖지 못하고 산다면 그 삶에 무슨 변화가 일어 날 수 있겠습니까? 윌리엄 바클레이라고 하는 유명한 성경학자는 신앙생활에 확신이 없으면 다음과 같은 문제가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첫째로 신앙의 확신이 없으면 결코 다른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없습니다. 자신이 확신이 없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줄 수 있겠습니까? 둘째로 신앙의 확신이 없으면 힘이 솟아나지 않습니다. 마치 광부가 땅을 팔 때 반드시 금이 나올 것이라는 확신이 있어야 힘이 솟습니다. 

그런데 금이 나올 것이라는 확신이 없는데 어떻게 그 일을 힘있게 추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셋째로 신앙의 확신이 없으면 마음에 평안이 없습니다. 기쁨도 사라지고 매사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감격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때 부활하신 주님은 자신을 가장 먼저 계시하시고, 보여주신 사람들. 그들과 더불어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십자가 앞에서 더 이상 희망을 잃고 있던 당신의 제자들을 일으켜서 복음의 위대한 새로운 역사의 시작을 만드는 사람들로 세워 가십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대하는 본문 10절에 보면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여기 보면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보기를 원하시는 말씀을 보게 됩니다. 당시에는 예루살렘에 성전이 있었고, 또 예루살렘에는 사람들도 많이 살았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볼 때 예루살렘에서 부활하신 것을 증거하면 훨씬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부활소식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보자고 하시지 않고, 갈릴리에서 보자고 하셨습니다. 왜 갈릴리로 가라고 하셨을까요? 여기에는 굉장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 말씀은 이미 주님께서 원수들에게 잡히시기 전 수차례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말씀입니다. 마태복음 26:32에 보면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 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누가 제일 먼저 만났습니까? 16장 9절에 보시면, "예수께서 안식 후 첫 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먼저 보이셨다" 자! 부활하신 주님이 자신을 먼저 누구에게 보이셨습니까? '막달라 마리아'라는 한 여성에게 먼저 보이셨습니다. 바로 이런 막달라 마리아와 같은 여성을 통해서 새로운 복음의 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평범한 여성이죠. 

자, 그렇다면, 제가 주님이라면, 부활하신 주님의 입장에서, 내가 만약 주님의 시각에서 판단을 했다면, 누구에게 먼저 나타나셨을까요? 저 같으면 아마도 베드로에게 먼저 나타나셨을 것 같습니다. 아니면, 도마에게. 의심 많았던 도마에게 봐, 내가 나타났쟎아. 하고서 먼저 도마에게 나타나서 의심 많았던 도마 하나를 확 바꾸어 놓으면, 아마도 더 쉽게 역사가 바뀌어지리라고 판단했을 지도 모릅니다. 어떤 분이 그런 joke를 하더라구요. 

베드로에게 먼저 나타나시지 않은 이유가 베드로라는 이름이 반석, 돌이라는 뜻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나타나셔 봤자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하구요. 부활하신 주님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여러분, 이 막달라 마리아가 누구입니까? 눅8:2절에 보게 되면.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라는 구절이 나오고 있습니다. '일곱 귀신이 들린 여인' 자기 자신을 스스로 통제 할 수 없는 한 불행한 여인이 바로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귀신에 지배당하며 살아야하는 그 비참함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라이트 푸드라는 신학자는 이 '일곱 귀신'을 음란 귀신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여인은 저자 거리에서 자신의 몸뚱이로 남정네를 꼬셔서 살아가는 요즘 말하는 집 창촌의 창녀가 아닙니까? 원래 그녀의 심령이 사막처럼 황폐한 여인이었던 것입니다. 사막의 모래 속에서 꽃이 필수 없는 것은 모래는 생명인 물을 머금지 못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아무리 물을 뿌려 주어도 이내 흘러 내려 버리거나 금방 말라 버리고 맙니다. 그래서 생명을 머금지 못하고 품지 못하는 모래밭은 언제 어디서나 황폐함과 죽음의 대명사일 뿐입니다. 그러나 그 창녀가 영원한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생명을 머금기 시작했을 때, 그녀의 심령이 생명으로 충만했을 때, 더 이상 창녀 일 수가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 마리아가 갈릴리에서 만나자는 주님의 음성을 저들에게 전했지만, 당시 제자들의 반응을 보세요. 막16:11절에 그들은 예수의 살으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뭐라고 그랬습니까? "믿지 아니하니라"고 했어요. 처음에는 그럴 수 없다. '사람이 다시 살다니. 믿지 아니하니라. 13절에 보시면 소위 엠마오 길에 두 제자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그것을 나머지 제자들에게 그 사실을 전했을 때, 13절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고하였으되." 

14절 "그 후에 열 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나타나사 저희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의 살아난 것을 본 자 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믿지 않았다! 믿지 않았다! 이 구절이 되풀이되지 않습니까? 어떻게 보면 부활을 믿지 아니하는 것이 사실은 타당하고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불신앙과 회의를 어떻게 넘어서느냐는 것이 중요해요. 마침내 이 여성들과 제자들은 그들의 불신앙과 회의를 넘어 서서 믿는 자리에 설 수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해요. 

먼저 부활하신 주님이 먼저 이들에게 자신을 먼저 계시하셨기 때문에 비로서 그들은 믿는 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믿음의 확신을 가진 자가 행복한 자라고 생각해요. 세계적인 심리학자 가운데 소위 '내담자 중심의 접근이론'을 전개한 '칼 로저스'라는 심리학자가 있지요. 본래 그는 20대에 신학교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그러나 신학교에서 공부하면서 그는 그의 머리속에 몰려오는 많은 회의를 그는 극복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는 결국 신학교를 떠납니다. 나중에 그는 자기의 전기를 통해서 자기 신학교 시간을 회고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내게 밀려오는 회의를 넘어설 수 없었다. 결국 나는 신학교를 떠났다. 나는 불행한 사람이다. 나는 불행한 사람이다." 그는 심리학계에서는 존경을 받는 세계적인 석학이 되었고, 많은 기여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신앙적으로는 그는 스스로를 불행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회의를 넘어 설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또 다른 부분에서 자기 나름대로의 또 다른 독백을 첨부합니다. "내가 좀더 추구 했었더라면." 이런 말을 덧붙이고 있어요. "내가 좀더 추구 했었더라면." 좀더 계속해서 주의 은혜를 구할 수 있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저도 이 말이 너무 안타깝게 들리더라구요. 그가 만약 정말 좀더 추구해서 주님의 은혜를 받은 자가 되었었더라면, 그는 부활하신 주님의 붙들림을 받아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 나라의 사역자로 쓰임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그는 심리학자로 큰 기여를 한 것도 사실이지만, 다른 측면에서 위대한 신앙적인 기여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에 회의는 있을 수 있습니다. 불신앙은 있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예요. 

회의를 넘어서서 마침내 신앙의 자리에 도달하는 것. 이것만이 나의 삶에 놀라운 역사를 감당할 수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아직도 부활의 그 주님을 확신하지 못하십니까? 구하시기 바랍니다. 구하는 자가 얻을 것입니다. 찾으시기 바랍니다. 찾는 자가 찾을 것입니다. 문을 두드리는 자에게 비로서 열려질 것입니다. 구한다는 말은 한번 구한다는 말이 아니예요. 계속에서 구한다는 말이예요. 본래 원래 원문의 뜻이 '계속해서 구한다.' 찾으라. 한 번 찾으라는 말이 아니예요. 

지속적으로 찾으라는 것이예요. 두드리라. 한 번 두드려 보라는 것이 아니예요. 한번 조금 생각해 보았다가, 한번 조금 기도해 보았다가 에이~ 이 소용없어. 이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구도자는 계속 문을 두드리는 자여야 합니다. 이 은혜 받았던 여인들처럼 주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주님의 애정을 표현하며 그 자리에 끝까지 남아있었던 여인들이 마침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찾는 자가 찾을 것입니다. 두드리는 자에게 열어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절망할 수밖에 없었던 이 여인들은 이제 자기에게 다가오신 예수님이 바로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돌아가신 분이 아니라 사망 권세를 깨드리신 부활의 주님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패배를 숙명처럼 받아들이는 여인들이 아닙니다. 부활의 증인자로 세상 앞에 선 것입니다. 여기 본문 7-10절을 보십시오.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무덤을 빨리 떠나 제자들에게 알게 하려고 달음질할새 예수께서 저희를 만나 가라사대 평안하뇨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본문의 8절에 이 여인들의 행동이 어떻습니까? “달음질 할새” 뭐라고 했어요? “달음질 할새”라고 했어요. 여러분은 어떨 때 달려갑니까? 슬픔에 잠겼던 이 여인들의 눈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이들은 더 이상 슬픔에 잠겨있지 않았습니다. 이 소식을 전하기 위해 뛴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우리를 주목시키는 한 단어가 또 있습니다. 7절에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먼저"라는 단어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먼저 가서 기다리시는 예수님' '앞서 가시는 주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먼저' 가셨습니다. 

'먼저' 발을 씻겨 주셨고 '먼저' 섬기셨고 '먼저' 고난을 받으셨는가 하면, '먼저' 죽으셨고 '먼저'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그는 우리들의 행위를 보시고 우리 인생을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회개하면 용서하겠다가 아닙니다. 이제 용서하고 제자들을 찾아 가셨습니다. 돌아오면 사랑하겠다가 아닙니다. 이미 사랑하시기에 먼저 갈릴리로 달려가신 것입니다. 갈릴리 - 거기 예수님이 먼저 찾아와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이곳에 그의 피와 땀과 눈물을 쏟으셨습니다. 부활하신 후에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을 만나고 싶어 했던 장소도 갈릴리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갈릴리는 예수님과 제자들 간의 첫사랑이 서려있는 곳입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소망이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가롯 유다를 제외하고는 모두 갈릴리 촌에서 태어나 그곳을 떠나본 적이 별로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부자도 없고, 많이 배운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사회적으로 천민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인격적으로 제자가 될 만한 어떤 자격도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대부분 신경질적이고, 교만하고, 자존심이 강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비록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저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꿈을 가지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들을 3년 동안 함께 지내며 생사고락을 했던 현장이 갈릴리입니다. 

그러니 이 갈릴리를 어떻게 저들이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저들도 예수를 만나자 가족도 생업도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를 ?았던 곳이 갈릴리입니다. 첫 사랑의 현장입니다. 처음사랑이란 그리스도를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린 사랑 즉, 자아를 부인하는 사랑입니다. 처음 사랑에는 조건이 없습니다. 비교가 없고, 아무것도 끼어들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앞에 그 첫사랑을 다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갈릴리에서 그 첫 사랑을 회복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2.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새롭게 만나주신 두 번째 이유가 있습니다. 사해바다는 들어가는 물만 있지 나오는 물이 없습니다. 그러나 갈릴리 바다는 흘러 들어가는 물이 있고 오염되고 때묻은 물, 빠져나가는 물이 있습니다. 갈릴리 - 그곳은 은혜가 있고 회개가 있고 용서가 있는 곳입니다. 제자들은 이곳 갈릴리에서 예수님을 부인했고 팔았습니다. 이곳에서 시기했고 다투었고 배신하여 도망갔습니다. 

그러나 다시 이곳에서 예수님을 만나 회개했습니다. 용서받았습니다. 제자로서 새롭게 인정을 받았습니다.갈릴리에서 만나자! 회개하고 다시 시작해 보자는 것입니다. 잘못도 있을 수 있고 허물과 부족이 있어도 좋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것으로 족합니다. 이제는 매듭을 지어야 합니다. 이 모습 이대로 주님을 만날 수는 없습니다. 배신했던 그 자리에서 회개하고 새롭게 출발해 보자는 겁니다. 회개는 아름다운 것입니다. 회개는 용기 있는 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비겁한 자는 회개를 못합니다. 비겁한 자는 언제나 변명하고 핑계하고 위장합니다. 이런 사람은 언제나 죄인입니다. 그러나 회개하는 사람은 의인으로 인정받습니다. 

[쿼바디스]라는 영화에서도 절실하게 묘사되어 있지만 베드로는 로마에 핍박이 있을 때에 로마를 피하여 도망을 갑니다. 도망가다가 예수님을 만났다는 장소에 지금도 그 자취가 있는 것을 볼수 있어요. 전설대로예수님의 발자국이 있거든요. 예수님게서 로마쪽으로 가시다가 “쿼바디스 도미네(주여 어디로 가십니까?)”하고 여쭙지 않습니까? 그러자 예수님게서는 “네가 버린 로마를 위하여 내가네 대신 들어가 다시 십자가에 못박혀 죽을란다”하십니다. 이에 베드로는 “제가 가겠습니다”하고 다시 로마로 들어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데 “내가 어떻게 감히 예수님과 똑같은 모양으로 죽는단말인가. 거꾸로 매달아다오”하고 그는 마침내 거구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습니다. 

3. 여기 보세요. 갈릴리에서 모든 희망을 잃고 방황하는 제자들에게 다가오신 주님은 첫 사랑이 담겨 있고, 희망의 열정이 있는 이곳에서 다시금 사명자로 그들을 세우시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곳에서 패배를 숙명처럼 여기는 무력한 삶이 아니라 이제는 부활의 능력으로 하늘 소망을 가지고 재출발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과연 지난 2000년 동안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들은 모두 인생의 새 출발이 가능했습니다. 갈릴리! 그곳은 -첫사랑을 회복하는 곳입니다./믿음의 새출발을 하는 곳입니다./버린 사명을 새롭게 하는 곳입니다./흩어진 공동체를 재건하는 곳입니다./절망을 바꾸어 희망을 선포하는 곳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안에 연약함이 있습니다.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문제로 인해 염려가 있습니다. 불안한 우리의 미래를 앞에 놓고 두려움에 갇혀있는 분이 계십니까? 이 시간 하나님께서는 말씀합니다.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시고 꺼져가는 등불마져도 꺼뜨리시기를 심히 원치 않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데 누가 우리를 굴복시키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주저앉히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약하게 만들겠습니까? 아무도 우리를 대적할 자가 없습니다. 

그 하나님은 내 인생 한 가운데 계셔서 나를 붙잡고 모든 것을 넉넉하게 이기게 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닥쳐오는 불행과 고난에도 불구하고 만약 우리가 내 삶에 대한 예수님의 분명한 계획과 그 섭리를 믿을 수가 있다면, 그리고 내 삶의 언제 어디서나 나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이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분이심을 믿을 수만 있다면, 내 삶의 죄악의 상황 속에서도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나를 지키신다는 이 믿음, 이 승리의 확신을 가질 수만 있다면, 우리 인생 가운데 다가오셔서 모든 것을 넉넉히 이기게 하시는 그 예수님의 말씀에 붙잡혀 세상이 주지 못하는 기쁨을 그리스도 안에서 누릴 줄로 확신합니다. 그 

러므로 부활의 능력을 체험한 바울은 이렇게 외칩니다.  고전 15:56-58절에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부활의 주님을 만난 제자들은 더 이상 방황하지 않았습니다. 세상 것에 집착하지도 않습니다. 이제 사명이 생긴 겁니다. 주님이 맡겨주신 사명! 그래서 그들은 세계 각처로 흩어져 복음을 전합니다. 순교하면서도 기뻐했습니다. 바울의 고백대로입니다. 롬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무엇을 하든지 중요한 것은 주님의 뜻대로 사는 겁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겁니다. 주님의 복음을 위해 사는 겁니다. 그렇다고 모두 목사 되고 선교사 되라는 뜻은 아닙니다. 자신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그러면 영원히 빛나는 인생이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웰치(Welch) 음료회사를 아시죠. 세계적인 기업입니다. 그 창업자는 웰치입니다. 그는 본래 아프리카 선교사로 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신체검사 결과 아내가 아프리카 기후에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체질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탈락한 후 그는 실망한 채 고향에 돌아갑니다. 방황하다 깨닫고 결심합니다. 선교사로 가지 못하면 좋은 일로 돈을 벌어서 선교사들을 후원하면 되지 않나 생각합니다. 웰치의 아버지는 치과의사였는데, 부업으로 알코올이 없는 성찬용 포도즙을 만들었습니다. 

그는 그 사업을 물려받아 주님만 위해 돈을 쓰리라 결심하고 최선을 다합니다. 그 결과 세계적인 기업을 일구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약속한 대로 수입의 절반을 선교를 위해 드렸습니다. 한번 왔다 가는 인생 세상의 소유에만 집착하다 다 사라지게 되면 얼마나 허무합니까? 어리석은 인생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우리는, 영원한 천국을 아는 우리는 일시적인 세상 것이 아니라 영원한 가치를 위해 살아가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 함께 갈릴리로 가십시다. 당신이 웅크리고 있는 그곳이 절망의 땅이라 할지라도 갈릴리에서 만난 주님은 당신의 절망의 땅을 희망의 땅으로 바꾸어 주실 것입니다. 사랑을 잃어버리고 싸늘한 심정으로 살아가시는 분이 계십니까? 갈릴리로 가십시다. 사랑을 회복하고 기쁜 마음으로 감격함으로 살아가십시다. 주께서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온 천하에 사랑할 대상이라곤 당신 하나밖에 없는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시고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갈릴리로 가십시다. 사랑의 땅으로 가십시다. 회개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보십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세계를 약속해 주십니다. 세상이 전부가 아닙니다. 이 세상에 살아가는 삶이 인생의 전부가 아닙니다. 그것은 순간적이고 일시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갈릴리로 가십시다. 사명의 땅으로 가십시다. 비전의 땅으로 가십시다. 거기서 주님 만나고 새로운 삶의 목적을 가지고 세상으로 나아가십시다. 갈릴리에서 만나자 희망의 땅, 사랑의 땅, 비전의 땅에서 만나자 말씀하십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