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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몸의 부활 (고전 15:3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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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부활 (고전 15:35~50) 
 
 
2세기 중엽에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사이에 부활절의 정확한 날짜를 두고 논쟁이 발생했습니다. 동방 교회는 유대인들의 유월절 계산법에 따라 닛산월(유대력으로 1월) 14일에 지켰습니다. 반면 서방 교회는 춘분 후 만월이 지난 첫 주일에 부활절을 지켰습니다. 날짜가 고정되어 있지 않아서 대개 3월 22일에서 4월 25일 사이가 되었지요. 동방교회의 관습은 유대인들의 유월절을 부활절로 기념한다는 이유로 2세기말에 많은 비난을 받았습니다. 반면 서방 교회의 관습은 북유럽 인들이 봄의 신으로 섬기던 이스터 축제일과 접목된 것이라며 지금도 유월절 지키기를 주장하는 이단들로부터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이에 대한 성경적인 가르침은 무엇일까요?

성경은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고 했습니다(골 2:16). 그런데 지금도 부활절 날짜나 부활절 ‘계란’ 먹는 문제를 빌미삼아 이단들은 기성교회를 이교도의 축제로부터 빌려온 비성경적인 행사를 하는 거짓교회라고 폄론하고 있습니다. 그들로 더 이상 교회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그러한 “그림자”들의 “실체”이신 “그리스도”에 관심을 두라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골 2:17). 그리스도께서는 성도로 하여금 바로 그런 각종 율법의 얽매임으로부터 자유롭게 하시기 위해서 죽으셨고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절’이 아니라 우리 주님의 ‘부활’을 기념해야겠지요.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주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주일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매 주일마다 부활 말씀만 살필 수는 없지만, 부활에 대해 보다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구별하는 일은 유익하리라 생각합니다. 오늘은 ‘몸의 부활’에 대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칼빈은 철학자들 중에서 ‘영혼의 불멸’을 공언하는 사람은 많지만 ‘육체의 부활’을 인정하는 자는 거의 없다고 했습니다. 죽어서 썩어버린 육체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하나님의 권능을 인정치 않는 인간의 합리적 지성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것을 보여주지요. 헬라 철학은 육체를 영혼의 감옥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육체를 벗어날 때 비로소 영혼은 자유롭게 되고 우주적 신성을 소유하게 된다고 보았지요. 헬라 철학에 영향을 받은 영지주의자들도 영혼은 선하지만 육체는 악하다고 보았습니다. 육체에 대한 그들의 관점 때문에 육체를 학대하는 금욕주의로 나아가거나 영혼만 구원받으면 된다며 육체를 방탕에 맡기는 양극단으로 나아갔지요.

성경은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고 명합니다. 성경은 우리의 몸을 ‘어차피 썩어 없어질 몸뚱이’로 천대하지 않습니다. 몸으로는 도무지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없는 죄악 덩어리로 보지도 않지요. 성령의 전이며 주님의 핏값으로 구속하신 귀한 것이라 합니다. 썩어질 육체에 집착하여 육체 가꾸기에 혈안 된 것이 잘못이지만, 몸을 멸시하는 일도 잘못입니다. 부활과 관련해서 생각하면 이 땅에서 입고 있는 우리의 몸은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부활체를 덧입게 할 씨앗입니다.

죽은 자들이 어떤 방식으로 다시 살게 될까요(35a)? 36-38절은 부활을 부정하는 자들에게 식물의 “종자”와 “그 형체”의 유비를 통해 설명합니다. 씨앗과 그것의 꽃은 생명에 있어서는 연속적이지만 형태에 있어서는 단절적입니다. 부활도 다시 살아난다는 점에서 생명의 연속성이 있습니다. 동시에 부활체는 이 땅의 몸보다 엄청나게 향상되었다는 점에서 단절성이 있지요. 이 연속성과 단절성 때문에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금방 알아보지 못했지만 눈이 열리자 그분이심을 깨닫게 됩니다(눅 24:31). 반면 나사로가 살아난 기사는 그의 죽었던 생명이 이전의 몸으로 되돌아왔을 뿐이기 때문에 부활은 아니지요(요 11:43-44).

사람이 죽으면 대체로 미생물에 의해 분해됩니다. 분해된 몸은 식물의 영양분이 되고, 식물은 초식동물의 먹이가 되고, 초식 동물을 육식동물이 잡아먹습니다. 사람은 그 식물이나 초식동물이나 육식동물을 다시 섭취하기도 하지요. 이처럼 복잡한 먹이 사슬에 의해 죽은 몸이 뒤죽박죽 섞여버리는데 어떻게 산산이 흩어져버린 그 몸이 부활할 수 있느냐는 의문을 가질 수 있겠지요? 사실 자연법칙으로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부활은 자연법칙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뜻대로 저에게 형체”(38a) 주시는 하나님의 권능이 작용합니다. 태초에 무로부터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권능으로 죽은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셔서 부활하는 것이지요(38b).

그러면 죽은 자는 어떤 종류의 몸으로 부활할까요? 39-41절은 먼저 이 세상에 다양한 육체와 다양한 형체가 있음을 언급합니다. 하나님께서 각 육체를 그가 속한 환경에 가장 적합하도록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을 나는 새에게 그 환경에 가장 적합한 육체를, 물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는 그 환경에 가장 적합한 육체를 주셨습니다. 물에 속했느냐 하늘에 속했느냐에 따라서 형체를 다르게 하셨지요.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이 땅에 속해 있을 동안에는 이 땅에 살기 적합한 육체를 주셨지만,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속하게 되면 그 환경에 알맞은 부활체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부활 후의 몸은 이전의 몸과는 다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양한 육체에 저마다 독특한 영광이 있게 하셨습니다. 영광에 우열이 아니라 각각의 영광이 “따로 … 따로” 구별되게 하셨고, 각각의 영광이 “다르며 … 다르며 … 다”르게 하셨지요(40-41). 이처럼 부활체도 따로 따로 구별될 것이고 저마다 영광이 다를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을 때 그분은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자국을 가진 채 부활하셨습니다(요 20:20, 25, 27). 이는 그 자국들이 그분의 영광을 반영하기 때문이지 부활체가 이전 몸에 있던 흉터나 장애를 그대로 반영한다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부활의 몸은 상호 비교 속에서가 더 영광스러운 모습이 아니라 각자에게 가장 영광스러운 모습일 것입니다.

42-44절은 부활한 몸이 이 땅에 속한 몸과 얼마나 다른지 알려줍니다. 먼저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라고 했습니다(42). 액면 그대로의 진실을 말하면 욕이 되거나 실례가 되는 경우가 많은데요, ‘썩을 놈’이라는 욕도 인간의 궁극적인 실상을 여과 없이 노출합니다. 인간은 결국 썩을 존재니까요. 그런데 좀 더 생각해보면 죽는 순간 부패 속도가 빨라지는 것일 뿐 사실상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썩고 있는 존재입니다. 인간의 몸은 항상 세포가 죽고 새로운 세포가 생기는 과정 중에 있기 때문이지요. 세포가 죽으면서 피부와 근육과 뼈도 점점 썩어갑니다. 하지만 부활체는 이처럼 썩어가는 현상이 전혀 없을 것입니다.

다음으로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라고 했습니다(43). 아담의 타락 이후 자연인의 몸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없는 치욕스런 몸이 되었지요. 하지만 부활체는 만일 아담이 순종했더라면 주어졌을 영광스러운 몸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영광스러운 부활체로 나타나셨을 때 바울은 눈이 멀어버렸었지요(행 9:3-8). 이어서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라고 했습니다(44). 강한 척 하는 사람이 있지만 실상 모든 인간은 약합니다. 대단하다고 말하는 인물들도 사실은 한계를 가진 별수 없는 존재입니다. 특히 죽음 앞에서 인간은 전적으로 무능하고 무력합니다. 하지만 부활체는 죽지 않는 강한 몸입니다(눅 20:36).

종합하면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44)는 말씀으로 요약됩니다. 육의 몸으로 심었는데 육의 몸으로 다시 산다면 별로 소망스럽지 않을 것입니다. 위 무력증과 두통, 잦은 몸살, 삐걱거리는 관절, 뭉쳐서 풀리지 않는 어깨, 쿡쿡 쑤시는 허리, 이 모든 것이 그대로 부활체에 반영된다면 끔찍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몸은 망가질 텐데 골골한 몸 상태로 되돌아와서 영원히 사는 것이라면 백번 사양하고 싶습니다.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는 것이기 때문에, 지금은 육의 몸이지만 신령한 몸을 기다리기 때문에 부활을 소망하는 것이지요.

몸이 썩어가고 있음을 느낄 때, 치욕스런 몸의 소욕들을 인정해야 할 때, 강인하지 못한 모습으로 드러날 때, 우리는 슬퍼집니다. 남 보기에는 강한 척 참고 지내도 깊은 우울함이 그 속에 숨겨져 있을 수 있고, 존경 받을 만한 모습 이면에 환경에 지배를 받는 별 수 없는 인간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지요.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것 같다가도 당면한 상황 앞에서 너무나 무력한 모습에 낙담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신령한 몸을 입을 날이 다가 오고 있습니다. 요즘은 ‘구구팔팔이삼사’라고 해서 99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이삼일 앓고 사망하는 것에 소망을 두는 분들이 많지만, 성도의 참 소망은 신령한 몸을 입는 데 있을 것입니다.

45-50을 보십시오. “첫 사람 아담”은 “산 영” 곧 살아 있는 생명체로서 “흙에 속한 자”였습니다. 그는 후손들에게 결국은 흙으로 돌아갈 약하고 욕되며 썩어질 몸을 물려주었지요. 하지만 “마지막 아담”인 예수님은 “살려주는 영” 곧 생명을 주는 영이 되셨습니다. 첫째 아담으로부터 육체의 죽음이 시작된 것처럼 마지막 아담으로부터 부활의 생명이 시작된 것이지요. 성도가 흙에 속하여 있는 동안에는 첫째 아담처럼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겠으나 하늘에 속하게 되는 날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게 될 것입니다. 썩어질 혈과 육으로는 썩지 아니할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영지주의가 활개 치던 때에 교회는 사도신경을 통해서도 몸의 중요성을 인식하도록 대항했습니다. 신경의 내용을 보면 하나님은 몸을 창조하셨고, 예수님은 몸을 통해 오셨고, 성령님은 몸이 다시 살게 하십니다. 몸에 대한 견해가 잘못되면 영지주의자들처럼 과도한 금욕주의나 방탕에 빠질 수 있습니다. 지나치게 육체에 집착하거나 혹은 육체를 벗어버리려고만 하기 쉽지요. 몸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잘 정립하시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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