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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부활, 또 한 번의 기회 (요 2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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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또 한 번의 기회 (요 21:1~14)


며칠 전 갑작스런 천안함 침몰 사건은 우리의 마음을 상당히 아프게 합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입니다. 어떻게 그토록 쉽게 배가 두 조각이 나서 침몰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그들의 아우성에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수색작업에 나섰던 한 군인의 사망소식이 들려온 것입니다. 그런데 아픔은 그게 끝이 아니었습니다. 실종자를 찾아 나섰던 어선 중 한 척이 캄보디아 화물선에 받혀서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애꿎은 10명의 희생을 뒤로 하고 유족들은 이제는 실종자 수색을 중지하고 배 인양을 하는데 총력을 기울이도록 해 달라고 요청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나의 아픔 때문에 다른 사람을 더 이상 아프게 할 수도 죽음의 길로 내몰 수도 없다고 하는 공감대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죽음을 앞에 두고는 그렇게 흥분하는 것일까요? 또 그들은 왜 그토록 울부짖는 것일까요? 그것은 죽음이 주는 공포 때문입니다. 죽음에 대해 두려움을 느낀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죽음이 결코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몇 년 전 9.11 테러에서도 보았고 그리고 이번 천안함 침몰 사건에서 보는 것처럼 이런 예상치 못한 죽음이 우리 앞에 언제든지 놓여 있습니다. 나는 평안하다 하는 그때 마지막 날이 도적같이 다가올 것이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세상의 종말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우리들의 생명도 어느 날 주님이 부르시면 끝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 날과 그 때를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오직 하늘에 계신 우리 아바 아버지만이 아십니다. 한데 정말로 죽으면 다 끝나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왜 명복을 빈다고 하고 좋은 곳으로 가시기를 바란다고 하며 왜 그토록 때만 되면 제사를 지내는 것일까요? 

먼저 생각할 것은 부활이 주는 의미입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에 관한 이야기는 유대인들에게는 결코 낯선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엘리야 선지자를 통해서 사르밧 과부의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또 수넴 여인의 아들이 엘리사 선지자를 통해서 다시 살아난 이야기가 열왕기 상하에 분명히 기록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예수님에게서 다시 반복되는데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 장례를 치르던 도중 길에서 만난 예수님에 의해서 다시 살아났고 회당장 야이로의 열두 살 난 딸이 야이로의 요청으로 그 집을 찾아간 예수님에 의해 다시 살아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사례들은 죽은 당일에 다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역사였기에 어떤 사람들은 그에 대해 사실은 그들이 죽은 것이 아니었다고 억지 주장을 펴기도 합니다. 한데 그런 사람들 앞에 더 놀라운 사실이 벌어졌는데 바로 예루살렘에서 아주 가까운 베다니 마을에 사는 나사로라고 하는 청년이 병이 들어 죽었고 장사까지 다 지냈는데 죽은 지 나흘이나 되는 그를 예수님이 다시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그 장례식에 참석했던 많은 증인들이 있고 더 분명한 사실은 다시 살아난 그 나사로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돌아다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 자신은 어떻습니까? 지금까지 그들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것은 예수님이 계셔서 그들을 다시 살리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십자가에 달려 처참한 모습으로 돌아가신 그 예수는 과연 누가 다시 살릴 수가 있단 말입니까? 

비록 예수님 자신이 모든 사람들의 죄를 위해서 죽게 될 것을 말씀하셨고 요나의 표적에서 보듯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의 입장에서 보아도 그건 불가능한 일일 뿐이었습니다. 죽은 예수를 누가 다시 살릴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정말로 예수님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안식 후 첫날 새벽 향유를 가지고 무덤을 찾았던 몇몇 여인들이 허겁지겁 달려와서 무덤을 가로 막은 돌이 굴려져 있고 무덤은 비어 있다고 울부짖을 때만 해도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습니다. 그래 요한과 베드로가 한 달음에 무덤을 향해 달려갔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본 것은 빈 무덤과 그 무덤에 놓여 있는 예수님의 시신을 감쌌던 세마포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무덤에서 돌아서다가 천사를 보게 되었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다시 살아나셨다는 이야기를 전해듣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로서는 이게 정말일까 해서 심란할 뿐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막달라 마리아가 다시 달려오더니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소린가 해서 그들이 진가민가 하고 있을 때 예수님이 그들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다시 살아나신 증거를 친히 보여 주시며 음식을 잡수시기까지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자리에 없었던 도마에게는 여전히 믿을 수 없는 이야기일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직접 보고 만져보아야만 믿을 수 있다고 이야기를 하는 순간 자기를 부르는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돌아보니 정말 주님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정말로 다시 살아나신 것입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도 그 밤에 달려와서 자기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노라고 증언을 합니다. 이제는 그 누구도 예수님의 부활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이렇게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났다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그것은 더 이상 죽음이 우리를 묶어 놓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다 끝이라는 생각이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하기야 죽음 이후에는 다시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고 하는 점에서는 끝이 맞습니다. 아직 이 땅에 살아있는 동안 영생을 준비하지 않으면 죽은 다음에는 기회가 더 이상 주어지지 않습니다. 주님이 영생과 하늘나라의 면류관을 위해서 허락하시는 기회는 오직 우리가 이 땅에 살아있는 동안뿐입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니까 죽음은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죽으면 끝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제사는 왜 지냅니까? 그것은 그들도 알고 있습니다. 말로는 끝이라고 하면서도 사실은 끝일 수가 없다는 것을 그들의 행동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한번 죽으면 다시는 돌이킬 수 있는 기회가 없다는 것을 그들이 또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사상을 차려놓고 절하고 하면서 자기들 스스로 위로를 삼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다면 자기들이라도 바르게 살고 영원히 멸망치 않을 생명의 길로 나서야 할 텐데 사람들이 어리석게도 그렇게 하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이 바로 악한 마귀에게 붙잡혀 있는 불쌍한 인생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이 모든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생명을 내 안에 모신 사람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미 예약한 백성이 된 것입니다. 사단은 아담으로 하여금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게 함으로 말미암아 불순종하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불순종으로 말미암는 죄악은 사람을 죽음의 길로 몰고 갔지만 하나님께서는 죽어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인생을 위해서 대속의 길을 마련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은 곧 우리의 대속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나의 주님으로 믿고 영접하는 순간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죄의 굴레가 다 벗겨진 것입니다. 그러기에 더 이상 죄는 우리는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잠시는 우리에게 영향력을 미치는 것처럼 보여도 이미 우리는 죄의 형벌로부터 자유로워졌기에 사탄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하든 우리를 좌절하게 만들어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가 우리들에게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하게 나아가자고 외치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 앞에서 우리는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갈 자격을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든지 죽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또 하나 기억할 것은 부활의 생명을 지녔다고 해도 여전히 어둠 가운데 헤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분명히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지어다” 거듭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하면, 그 죄는 사함을 받을 것이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하지 않으면, 그 죄는 사함을 받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정작 “내가 너희 죄를 다 용서한다. 비록 너희가 다 나를 부인하고 나를 버리고 도망쳤었지만 나는 이미 다 용서했어.”라고  한 마디 덧붙였다면 좋았을 텐데 그렇게까지는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더군다나 성령을 받으라고 하시지만 어떻게 성령을 받을 수 있는지 말씀하여 주시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훌쩍 또 다시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시니 그들로서는 답답해서 미칠 지경입니다. 물론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지어다”라고 하신 말씀으로 미루어 짐작은 하겠지만 그래도 “내가 너희를 다 용서한다”고 직접 말씀하신 것은 아니니 자기들이 지은 죄의 응어리는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답답한 마음을 견디다 못해 베드로가 고기나 잡으러 가야겠다고 하니 같이 있던 제자들이 나도 나도 하고 따라나섰던 것입니다. 하지만 오히려 더 답답해질 뿐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지만 단 한 마리도 잡지를 못했기 때문입니다. 도마와 다른 제자 둘은 몰라도 베드로와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 즉 야고보와 요한은 이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어부들이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처음 예수님의 부름을 받던 그 날처럼 단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채 날이 밝아오는데 떠오르는 햇살에 가려 누군지 알 수 없는 한 사람이 바닷가에 서서 외칩니다.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당연한 대답은 “없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 

오늘 우리들의 현실은 어떠합니까? 무언가를 얻어 보려고 하고, 무언가를 잡아 보려고 몸부림치지만 아무 소득이 없습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하심이 없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애써 자부해 보지만 그러나 힘들고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무언가 손에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를 않습니다. 몸부림치고 수고하며 온갖 궁리를 다 해 보지만 그저 막막할 뿐입니다. 손에 잡히는 것이 없습니다. 힘이 다 빠집니다. 맥이 다 풀립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지만 그래도 뭔가 보이는 것이 있어야 될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고 해서 은혜를 모르는 것도 아닙니다. 은혜도 받았고 은사도 여전합니다.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마음도 간절합니다. 그런데도 마찬가지입니다. 삶이 왜 그리도 피곤한지 모릅니다. 그토록 몸부림을 치며 살아보려고 하는데 여전히 수렁에서 헤매고 있습니다. 몸도 마음도 다 지쳤습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바로 그 현장에 주님이 찾아오십니다. 사실은 제자들 옆에서 지켜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아니 오늘도 우리를 지켜보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가 깨닫지를 못할 뿐이지 주님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 주님이 물으십니다. “친구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너희들에게 무슨 소득이 있느냐?” “너희들에게 무슨 소망이 있느냐?” 이 말은 “너희가 지금 포기하려느냐?” “이제는 주저앉아 버리려느냐?” 그런 질문이 되겠습니다. 주님의 물으심에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하는 제자들의 대답은 결코 포기가 아닙니다. “우리는 잡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결코 포기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결코 좌절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결코 낙망하지 않습니다” 하는 표현입니다. 이 믿음이 오늘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를 찾아 주시고, 우리에게 아직도 포기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는 믿음이 있는지 확인하시는 그 주님 앞에 변함없는 믿음을 보일 수 있어야 하고 그 믿음으로 나아가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하지만 무얼 좀 잡았느냐 물으실 때 “못 잡았습니다” 대답할 수밖에 없었던 제자들의 심정이 어땠겠습니까? 아주 비참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주어지는 새 희망이 있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힐 것이다” 왜 하필이면 오른 편입니까? 옛날에는 깊은 곳에 저어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배 오른 편이라 하십니다.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멀리 갈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시작할 필요가 없다 지금 네가 하고 있는 그 일을 통해서도 역사하시겠다, 지금 네가 하고 있는 그 일을 통해서 복된 삶을 이루게 하시겠다”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나는 실패한 자야, 나는 이제 더 이상 무얼 어쩔 수가 없어. 나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인가 봐.” 이런 자조 섞인 말들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 여기 오른 편이란 능력의 편, 권능의 편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내 힘으로가 아니라 주님의 능력을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의지하라 다시 말해서 주를 의지해서 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오른 편이란 말은 우선 순위를 두라는 뜻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먼저 주님께 예배하고 먼저 주님을 섬기고 먼저 주를 위해 살라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던졌더니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서 그물을 끌어올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 고기가 든 그물을 끌면서 배를 저어 육지로 나아 와서 그물을 땅에 끌어 올려놓고 보니 커다란 고기가 153마리나 되었지만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왜 지금까지 우리가 수고하고 애썼는데도 만족한 결과를 얻지 못했는가? 

왜 아무 것도 잡지를 못하고 여전히 빈배로 남아 있었는가? 힘만 들었지 고달프기만 했었는가? 오히려 점점 더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들기만 했었던가? 아니 잡기는 많이 잡은 것 같았는데 막상 그물이 찢어져서 빈 그물이 되지는 않았던가? 그것은 바로 주님의 능력을 힘입어 살지를 못하고,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살지를 못하고, 주님의 일을 먼저 생각하지 못하고, 주님을 의지하여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찾아오신 주님을 먼저 깨달은 자는 요한이었습니다. 처음 주님의 부름을 받던 그 날이 언뜻 머리를 스칩니다. 그래서 외칩니다. “저분이 주님이시다” 그 말에 시몬 베드로가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래 벗었던 몸에 겉옷을 두르고는 물로 뛰어 3들었습니다. 자 보십시오. 옷을 벗은 채로가 오히려 헤엄치기가 더 쉬웠을 것입니다. 거리는 약 100 미터쯤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왜 겉옷을 입고 바다로 뛰어 내렸을까요? 그것은 주님 앞에 자기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주님 앞에 급히 가고자 하는 마음으로 바다로 뛰어 내린 베드로였습니다. 

이는 베드로가 얼마나 주를 사랑했던지 그리고 주 앞에 자기의 본분을 잃지 않고 살았던 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기의 안위보다는 주님 앞에 나아가기를 더 기뻐했던 베드로였습니다. 나의 힘든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주님만을 바라보고 주님만을 향하여 바다로 뛰어들 수 있었던 베드로였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여전히 조급했던 것입니다. 주께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져 고기를 잡으라 하셨고 그래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았다면 마땅히 그 고기를 가지고 주님께로 나아왔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주님 앞에 나아갔을 때 주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너희가 지금 잡은 생선을 조금 가져 오라” 그런데 베드로는 빈손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은 우리가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얻은 그 결과를 보여 달라고 하십니다. 그저 열심과 사랑으로만 주 앞에 나아가는 것이 아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산 결과 내게 허락하신 그것을 예물 삼아 주님 앞에 나아와야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무엇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 오셨습니까? “너희가 지금 잡은 생선을 조금 가져 오라”는 말씀은 우리가 순종한 그 결과를 주님께서 원하신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보여 주십니다. 주님은 우리들의 순종하는 믿음의 결과를 보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그 마저도 빈손은 아닙니까? 

제자들이 배에서 내려 주님 앞에 나아가 보니 이미 예수님은 숯불 위에 생선을 올려놓으셨고 빵도 준비해 두셨습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에게 명하십니다. “너희가 지금 잡은 생선을 조금 가져 오라.” 왜 가져오라고 하셨을까요? 분명히 그곳에는 생선도 있었고 빵도 있었습니다. 이미 숯불에 생선을 굽고 계셨는데 새삼스레 생선이 왜 필요했을까요? 주님은 없어서 가져오라고 하신 것도 아니고 욕심이 많아서 가져오라고 하신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의 놀라운 역사와 주님의 소명을 다시금 상기시켜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내가 너희를 불러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였거늘 아직도 옛 모습으로 남아 있더냐? 아직도 너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었더냐? 너희의 관심은 도대체 무엇이냐? 너희가 지금 해야 할 일이 무엇이냐”는 간접적인 질책이기도 한 것입니다. 

저들이 무어라 답할 수 있었습니까? 그저 주님 앞에 고개만 푹 숙이고 서 있을 뿐입니다. 그때 다시금 주시는 주님의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자 와서 아침을 먹어라” 여기 “아침을 먹어라.” 이 말씀은 새로운 희망을 주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식탁으로 초대하신 그것은 이들을 이미 다 용서하셨다는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유대인들은 아무나 식탁에 초대하지 않습니다. 아무 하고 함께 식사를 나누지도 않습니다. 저들이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은 “이제 우리는 온전히 하나가 되었소” 하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우리는 함께 식사를 나누면서 가까워지기도 하고 또 가까워졌기 때문에 한 자리에 앉아서 식사를 합니다. 따라서 주님이 “와서 아침을 먹으라”고 하시면서 빵을 집어 제자들에게 나눠주시고 구운 생선도 그렇게 나눠주셨던 것은 “이제 나는 너희들에게 아무런 서운함도 가지고 있지를 않다. 나는 너희를 다 용서했다. 자 그러니 함께 아침을 들자꾸나.” 하는 뜻이었습니다. 
주님은 우리들에게도 똑같은 것을 원하십니다. 우리들과 함께 아침을 들고자 하십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빵과 고기를 나눠주시면서 식탁으로 초대하듯이, 우리들에게도 필요한 모든 것을 허락하여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밤새도록 수고하였던 제자들이기에 얼마나 배가 고팠겠습니까? 그들에게 먹을 것과 평안한 마음을 주셨던 주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히들어 하는지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 또 한 번의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면서 처음 부름받던 그 때를 생각하라 첫 사랑을 회복하라고 하십니다. 처음 은혜 받던 그 날의 감격을 다시 회복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도록 다시 우리에게 또 한 번의 기회를 주시는 주님 앞에 감사하며 살아가게 될 때 그 주님이 우리들의 필요도 채워 주실 줄로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미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사신 예수님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그토록 혹독하게 채찍에 맞으시고 가시관에 찔리시고 온갖 모욕을 당하시며 십자가를 지셨고 그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러면서도 마지막까지 “저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이 하는지 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하셨던 주님이십니다. 그 주님이 다시 사셨습니다. 다시 사신 주님이 누구보다도 먼저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힘들어하고 좌절하고 낙심하여 헛수고만 하고 있는 그들에게 처음 부르실 때처럼 다시 한 번 부르십니다. 또 한 번의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주님은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이시오, 우리들에게 새로운 삶의 비전을 보여주시는 주님이시오, 용서하시고 포용해 주시는 주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워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그 주님 앞에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이 부활의 신앙에 굳게 서서 또 한 번의 기회를 놓치지 않는, 무엇보다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해야 할 일은 특별한 곳에 가서 특별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닌, 내가 있는 바로 그곳에서 주님의 뜻을 드러내는 것 즉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요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 다시 말해서 그물을 바로 배 오른편에 던지는 일입니다. 지금까지는 내 힘으로 했다면 이제는 말씀을 의지해서 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 계신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가르치심을 따라서 하는 것입니다. 

나 혼자서는 아무리 수고해도 거두는 것이 없습니다. 아니 거둔다고 한들 남는 것이 없어서 오히려 더 허탈할 뿐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말씀을 따라 그물을 던지면 그물을 들 수조차 없을 정도로 그렇게 고기가 많았으나 그물은 찢어지지 않는 놀라운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전대가 찢어지지 아니하도록 지켜 주실 것입니다. 기한 전에 열매가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풍성한 열매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다 마련하여 놓으신 아침을 주님과 함께 나누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릅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복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말씀에 의지하여 오늘을 살아가는 성도들이요 성령의 감동하심을 따라 주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모든 일을 감당하십시오. 주님이 하신 것처럼 우리 역시 또 한 번의 기회를 이웃에게 주십시오. 결코 안 된다고 하지 마십시오. 못한다고 하지 마십시오. 헛수고에 불과하다고 하지 마십시오. 그 사람은 안 된다고 하지 마십시오. 

또 다시 실패할 뿐이라고 하지 마십시오. 나는 이렇게 망가진 사람이라고 하지도 마십시오. 더 이상 죽음에 매여 있지 마십시오. 지금까지는 거둔 것이 없을 지라도 피곤하고 지치고 힘들고 아프고 내가 봐도 실망할 수밖에 없는 그런 모습이라고 해도 이제 다시 주님의 말씀을 따라 배 오른 편에 그물을 내릴 때 내 삶의 현장에서 보혜사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를 때, 주의 종을 통해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될 때, 죽음을 딛고 일어나 부활 신앙으로 살아가게 될 때 큰 물고기가 153마리나 잡혔어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던 그 놀라운 역사가 다시금 우리 앞에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그 주님이 명령하십니다.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와서 아침을 먹으라.” 이 또 한 번의 기회, 또 한 번의 사랑의 사람들 부활 신앙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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