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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울지 마라 (눅 7: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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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지 마라 (눅 7:11~17)
  

의학 용어 가운데 마라스무스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이것은 갓 태어난 유아가 충분한 사람의 접촉을 받지 못하였을 때 쇠약해져 병에 걸리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마라스무스라는 접촉 결핍증을 발견한 사람은 르네 스피츠 박사입니다. 그는 감옥에서 태어나 길거리에 버려진 아기들을 돌보는 국립병원 의사였습니다. 그는 국립 병원에서 아이들을 위생적인 환경에서 영양분이 골고루 갖춰진 음식을 먹이며 돌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아 사망률이 높은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멕시코로 겨울 휴가를 갔을 때 휴양지 근교의 고아원에서 예기치 않은 발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고아원 아이들은 영양 상태도 형편없었습니다. 환경도 비위생적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아이들이 매우 건강하게 자라는 것입니다. 그는 그곳에서 몇 달 동안을 머물며 그 이유를 밝혀내기 위해 노력하였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유는 그 고아원에는 이웃 마을에 사는 여자들이 매일 고아원을 찾아와 아기들을 안아 주고 아이들에게 노래를 불러 주었습니다. 

아기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며 많은 사랑의 접촉을 가졌습니다. 스피츠 박사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면서 ‘사랑의 피부 접촉을 많이 가진 아이는 건강하게 자랐다. 하지만 사랑의 피부 접촉이 없이 자란 아이들은 점점 약해졌고, 접촉 결핍증 때문에 세포들이 죽어 갔다.’ 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사람은 단순한 사회적 동물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사랑을 먹으면서 자라고 사는 사랑의 사회적 동물입니다. 

우리들이 어렸을 때 배가 아프면 할머니나, 어머니가 ‘내 손이 약 손이다. 내 손이 약 손이다’ 라고 말씀하시며 배를 쓰다듬어 주시면 아픔을 잊고 잠이 드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어머니의 따뜻한 손을 통해 사랑을 느끼게 되고 그 사랑이 바로 아픈 배를 낫게 하는 치료의 힘이 있었던 것입니다. 따뜻한 손으로의 접촉은 그 사람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통로입니다. 그러기에 사람들과 인사를 나눌 때 서로 손을 잡고, 포옹을 하고, 어깨를 두드리며 ‘사랑하다’ ‘감사하다’ ‘힘을 내라’ 고 인사하십시오. 힘겨워하는 남편과 아내를 향해, 그리고 자녀를 향해, 이웃을 행해 사랑의 따뜻한 손으로 터치하시며 인사하시고 격려하십시오. 그 사랑의 접촉을 통해 그 사람의 아픔과 상처 입은 영혼을 치료하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예수님의 목회를 접촉의 목회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사역을 하실 때 당신에게 찾아온 많은 사람들을 만져 주시고, 안수해 주셨습니다. 손을 내밀어 나병 환자를 만져 주셨습니다. 어린 아이를 품에 앉고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소경의 눈을 만져 주셨습니다. 귀 먹은 사람의 귀를 만져 주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손수 씻겨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접촉을 통해 사람들의 육체의 병과 영혼의 병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예수님께서 사랑의 접촉을 통해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시는 모습이 나옵니다. 본문에는 나인 성에서 나오는 행렬과 나인 성으로 들어가는 행렬이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나인 성에서 나오는 행렬에 대해서는 12절에 나옵니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한 과부의 외아들이 죽었습니다. 외아들의 죽음으로 하늘이 무너지는 가슴앓이를 하며 통곡하는 어머니와 죽은 청년을 메고 나오는 동네 사람들의 죽음의 행렬입니다. 

나인 성으로 들어가는 행렬이 있습니다. 11절입니다. 한 목소리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여기에서 ‘그 후에’는 1절에서 10절의 사건 이 후를 말합니다. 거기에는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서 병들어 죽어가는 백부장의 종을 고친 사건이 나옵니다. 죽어가는 백부장의 종을 살린 이 후에 예수님을 따른 행렬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놀라운 기적을 보고 제자들과 따르는 사람들은 얼마나 사기가 충천해 있었겠습니까? 얼마나 활기가 넘치고 힘이 있었겠습니까? 바로 생명의 행렬입니다. 

나인 성을 중심으로 죽음의 행렬과 생명의 행렬이 만났습니다. 생명의 주인이 되시는 예수님은 죽음의 행렬 맨 앞에서 외아들을 잃은 슬픔을 가누지 못하고 통곡하는 여인을 보시고는 그녀를 향해 ‘울지 마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그 죽은 청년이 누워있는 관에 손을 대시며 ‘청년아 일어나라’고 외치십니다. 그러자 죽었던 청년이 일어나 앉아 말도 하며 다시 살아났습니다. 

저는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관에 손을 대셨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중동지역은 대부분이 무더운 날씨로 인해 시체를 보관하기 어려워 죽은 당일에 장례를 치뤘습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시체를 관에 넣지 않았습니다. 나무 상여 위에 시신을 올려놓고 세마포로 감싸고 얼굴은 손수건으로 덮어서 메고 나갔습니다. 예수님께서 관에 손을 대셨다는 것은 시체에 손을 대셨다는 말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죽은 자의 시체에 손이 닿으면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죽음은 곧 죄의 결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이 담고 있는 사랑의 정신으로 시체에 손을 얹으시고는 ‘청년아 일어나라’고 외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이터치의 사랑입니다. 절망과 고통을 함께 하며 그 상처를 함께 아파하는 하이터치의 사랑입니다. 죽음의 행렬이 생명의 행렬로 변화되는 데는 바로 이와 같은 예수님의 하이터치의 사랑이 있었습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신 부활 주일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뿔뿔이 흩어진 제자들을 찾아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이터치의 사랑을 주셨습니다. 의심 많은 도마의 손을 당신의 손으로 잡아 당신의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 자국을 만지게 해 주셨습니다. 베드로에게 구운 생선을 나눠주시며 그에게 사랑의 손길을 주셨습니다. 부활의 주님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열등감과 좌절감, 그리고 패배 의식에 사로잡혔던 사람들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죽음의 행렬에 누워 있는 청년과 같은 제자들을 하이터치의 사랑으로 어루만지시며 그들을 다시 회복시키셨습니다. 

부활 주일 아침에 예수님은 당신의 손을 펴서 우리들의 상처와 아픔, 절망의 감정과 열등감과 패배감을 가지고 있는 우리들을 어루만지시며 ‘일어나라’고 외치십니다. 부활의 아침에 우리의 아픔과 상처, 가지고 있는 모든 슬픔을 떨쳐 버리고 부활의 기쁨을 가지고 삶의 자리로 일어서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더 적극적으로는 우리의 손이 예수님의 부활의 손의 역할을 하기 원합니다. 삶의 주변의 아픔과 고통을 어루만지는 가운데 치료하는 축복의 손이 되기 원합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의 행렬이 나인 성에서 통곡하며 나오는 죽음의 행렬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를 살리러 나인 성을 향해 들어가는 생명의 행렬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저는 본문을 묵상하는 가운데 죽었던 외아들의 부활보다도 아들의 죽음을 애통해 하던 어머니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외아들의 상여를 쫓아가던 여인은 생명은 붙어 있지만 죽음이었습니다. 아들의 죽음은 곧 어머니의 죽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들의 상여는 어머니의 상여였습니다. 아들을 잃은 어머니의 아픔을 보신 예수님께서 13절에서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불쌍히 여기셨다’는 헬라어는 ‘스프랑크니조마이’라는 단어입니다. 이는 ‘창자가 뒤틀린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일찍 남편을 잃고 홀로 외아들을 키우다 아들을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내고 울부짖은 여인의 고통을 창자가 뒤틀리는 아픔으로 함께 느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절규하는 어머니를 향해 ‘울지마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느 영어 성경에서는 ‘weep no more’ 라고 번역했습니다. ‘더 이상 울지마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죽은 아들을 살려 주셨습니다. 죽었던 외아들의 부활은 그 어머니의 부활이었습니다. 아들의 부활은 어머니에게 생명줄이었습니다. 아들의 부활은 어머니의 환희이고, 감격이고, 희망이었습니다. 그런 의미로 아들의 부활은 어머니의 부활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의 죽음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스승을 배신한 죄책감에 쌓여 삶의 의욕을 잃고 무기력하게 살았습니다. 그들의 삶은 외아들의 죽음 앞에서 통곡하는 어머니의 심정이었고 좌절과 절망감에 쌓여 있었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하심은 제자들의 부활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확신한 그들은 절망과 좌절의 어두운 빗장을 열어 젖히고 세상을 향해 뛰쳐 나갔습니다. 

그들은 외쳤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 로마의 권력이,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그들을 붙잡고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면 죽이겠다’ 고 으름장을 놓고 협박을 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우리가 너희 말을 듣는 것이 옳으냐. 하나님이 말씀을 듣는 것이 옳으냐.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지 않은 수 없다’ 고 외치며 예수님의 부활을 외칩니다. 죽음의 권세를 깨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믿음 안에서 부활의 대열에 서서 생명의 행렬에 동참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이 제자들의 부활이 되었습니다. 

제자들의 부활의 신앙의 모습을 보고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이 부활의 신앙을 가지며 생명의 행렬에 동참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초대교회의 거대한 복음의 물결을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제자들의 부활이 되었습니다. 제자들의 부활이 초대교회의 부활이 되었습니다. 죽음의 행렬에서 부활의 행렬로 변화되는 부활의 축제가 삶의 자리에 이어졌습니다. 

이 부활의 아침에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의 부활이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부활이 삶의 자리에 지쳐 있는 다른 사람들의 삶에 생명력을 불어 넣는 부활이 되기를 원합니다. 

‘다 감사드리세 온 맘을 주께 바쳐, 그 섭리 놀라워 온 세상 기뻐하네.”라는 찬송가 66장은 마틴 링카르트 목사가 작사한 찬송가입니다. 링카르트 목사는 1648년까지 이어진 ‘20년 전쟁’을 겪은 독일 목사입니다. 전쟁과 전염병 콜레라 때문에 그 목사님이 목회하는 지역에서만 8천명이나 죽었습니다. 교우들도 쓰러졌습니다. 그의 외아들도 쓰러졌습니다. 고난은 깊어져만 갑니다. 

링카르트 목사는 주민들을 격려하며 전쟁의 폐허와 전염병과 싸웠습니다. 날마다 땀을 흘리며 함께 일하는 동안에 생각지도 않았던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비극 가운데서도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불화하던 사람들이 눈물로 악수를 하고, 방종하던 청년들이 부지런해지고, 냉랭하던 부부들이 다시 결합되고, 낡고 우중충한 예배당을 헐고 새로 짓자는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 때 지은 시가 바로 찬송가 66장입니다. 

‘다 감사드리세 온 맘을 주께 바쳐 그 섭리 놀라와 온 세상 기뻐하네. 예부터 주신 복 한없는 그 사랑 선물로 주시네. 이제와 영원히!’ 진정한 부활의 영광은 골고다 십자가의 언덕 위에서의 고난을 딛고 피어난 꽃입니다. 고난이 심하면 심할수록 하나님의 은혜는 더 구체적으로, 더 강렬하게 체험됨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죽음의 행렬에서 울려 퍼지던 통곡의 소리가 생명의 행렬로 변화되어지며 감사와 기쁨의 노래로 변한 것처럼 우리의 삶의 자리에 예수님이 부활이 나의 부활로, 나의 부활이 고통 가운데 있는 이웃들의 부활로 선포되는 은혜가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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