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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오늘 내 생일이에요 (요 11: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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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내 생일이에요 (요 11:17~27)
  

우리 인생에서 잊지 않고 기억하게 되는 중요한 날들은 어떤 날들일까요? 많은 분들이 결혼기념일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또 힘들게 공부하고 졸업하는 날도 소중하겠지요. 

그러나 세상에는 이런 날들이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결혼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결혼기념일이 없습니다. 학교에 다니지 않은 사람에게는 졸업일도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똑같이, 공평하게 가진 날이 있습니다. 그것은 <태어난 날>과 <죽는 날>입니다. 공동묘지에 가 보십시오. 묘비에는 두 가지 날이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두 날 중에서 태어난 날은 이미 가지고 있습니다. 죽는 날은 앞으로 언젠가 다가올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날은 성격이 완전히 다릅니다. 태어난 날은 축하할 날입니다. 지난주일 점심때쯤 소예배실 앞에서 한 어린이를 만났습니다. 아이는 손에 줄넘기를 들고 있었습니다. <너 줄넘기 좋아하니?> 아이가 말했습니다. <네. 그런데 오늘 내 생일이에요. 오늘이 내 생일이라구요.> 아마 줄넘기는 선물로 받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아이의 얼굴이 얼마나 빛이 나는지요. 행복해 보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생일은 축하할 날입니다. 요즘 들어 고희나 팔순 보다 더 뻑적지근한 잔치는 아기들의 첫 돌 잔치입니다. 갈수록 돌잔치가 거창해지는 것 같습니다. 저희 집 아이들은 위로 두 아이는 돌잔치를 했고, 아래로 둘은 하지 않았습니다. 위로 두 아이도 집에서 음식을 차려 먹는 게 고작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엔 이벤트 업체들이 참여해서 점차 거창해지고 있습니다. 아기의 탄생, 그리고 무사히 돌을 맞은 것에 대한 기쁨, 생명에 대한 축하, 얼마든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생일이 이처럼 축하할 날인 반면에 죽는 날은 어떻습니까? 요즘 우리 국민 모두가 죽음의 그림자 아래서 고통받고 있습니다. <천안호> 침몰 사고로 많은 이들이 죽었습니다. 처음에는 극적인 구출을 소망했지만, 이제는 그 희망이 사라졌습니다. 오히려 구조 과정에서 <한주호 준위>가 희생되었습니다. <금양 98호>도 실종되었습니다. 그 가족들의 슬픔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죽음의 날처럼 슬픈 날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이들이 우리 곁을 떠나는 날, 모두가 탄식하고 우는 날입니다. 또 우리 자신이 죽을 날도 그렇습니다. 병원에서 힘든 병을 진단 받고 사형선고나 다를 바 없는 말을 듣고 나오는 환자의 표정이 어떻습니까? 그런 진단을 받은 후 화색이 도는 얼굴로 병원 문을 나서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죽음이란 그런 것입니다.  

본문에도 죽음 앞에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나사로의 가족들입니다. 베다니 마을의 나사로가 병이 들었을 때 나사로의 누이 동생들인 마르다와 마리아가 예수님께 사람을 보냈습니다. 11장 3절을 보면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속이 탔을까요? 그러나 예수님은 빨리 오시지 않았고, 시간이 지체하는 동안에 나사로는 죽어 무덤에 들어갔습니다.

나사로의 죽음과 장례, 그리고 슬퍼하는 마르다와 마리아, 이게 우리의 모습입니다. 생명은 천하 보다 귀한 것이지만, 그 생명은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태어났다>는 것을 다른 말로 바꾸면 고생문이 훤히 열렸다는 의미입니다. 한 생명이 태어나서 평생동안 흘릴 눈물의 양은 얼마나 되는 것일까요? 잠들지 못해 뒤척이는 밤은 몇 날이나 될까요? 분노가 가슴을 채워 어쩔 줄 모르게 되는 날들은 또 얼마나 많을까요? 사람들에게 배신당하고 따돌림당하고 오해를 받아 힘들어하는 날들은 또 얼마나 많을까요? 소중하게 모았던 것들을 잃고, 꿈이 하루아침에 무너져 괴로워하는 경우는 또 얼마나 많을까요? 이게 사람들의 한평생에 들어있는 일들입니다. 

그 뿐입니까? 그렇게 살다가 우리 모두는 언젠가 죽게 됩니다. <태어났다>는 말은 <언젠가 죽을 것>이라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마라톤을 시작합니다.

그러기에 어떤 이들은 자신이 태어난 생일을 저주하기도 했습니다. 욥이 그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욥기 3장 1절을 보면 <그 후에 욥이 입을 열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니라>고 했습니다. 또 욥기 3장 11절에 가서 보면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었던가 어찌하여 내 어미가 낳을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라고 했습니다. 

욥이 이처럼 생일을 저주하면서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에게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루에 재산을 다 잃었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하루에 자녀들을 모두 잃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병이 들었습니다. 아내도 그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너무도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생일을 저주한 것입니다.

예레미야도 예언자로 살아가는 삶이 너무도 고달파 견디기 힘들 때 생일을 저주한 적이 있었습니다. 예레미야서 20장 14절을 보면 <내 생일이 저주를 받았더면, 나의 어미가 나를 생산하던 날이 복이 없었더면...>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가 가진 생명은 이런 생명입니다. 우리 생명은 병들고, 늙어 가는 생명입니다. 길거리를 천천히 걸어가는 노인들을 볼 때, 허리가 휘어 앞을 보시는 게 아니라 땅 바닥을 보면서 간신히 걷는 분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착찹합니다. 이게 우리의 생명입니다. 앞으로 우리가 이런 생명을 붙잡고 살아야 할 것을 생각하면 암담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런 생명을 생각한다면 되는 대로 대충 살다가 끝내도 될 것 같은 절망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현재의 생명을 가볍게 여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현재의 생명을 통해서 우리는 참 생명을 얻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현재의 생명과는 차원이 다른 또 하나의 생명에 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25-2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은 당신을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죽어도 사는 것에 관해 말씀했습니다.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에 대해 언급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또 하나의 생명은 어떤 생명입니까? 우리는 그 생명을 예수님에게서 발견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로마 군인들이 예수님 아래 갔을 때 이미 예수님은 숨을 거둔 후였습니다. 군인들은 죽음을 확실히 하기 위해 옆구리를 긴 창으로 찔러 물과 피가 흘러나오게 하였습니다. 그 후 예수님은 무덤에 장례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대로 끝나지 않으셨습니다. 당신께서 예고하신 대로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 다시 사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잃으신 예수님의 생명은 우리가 현재 가진 것과 같은 생명입니다. 그것은 찢겨지고 고통받다가 죽는 생명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명은 그 이전의 생명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 생명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합니다. 문이 닫혀 있어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나 이 몸은 환영이 아닙니다. 생선을 잡수시기도 하고, 손으로 만져볼 수도 있었습니다.

부활의 생명은 늙지 않습니다. 쇠약해지지 않습니다. 좀먹는 생명이 아닙니다. 이 생명의 신비에 대하여 고린도전서 15장 42-44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했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현재의 몸은 썩는 몸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몸은 썩지 않습니다. 현재의 생명은 욕된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생명은 영광스럽습니다. 현재의 생명은 약한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생명은 강합니다. 현재의 생명은 몸 안에 갇혀 있지만, 부활의 생명은 신령하여 더 이상 몸이 제약이 되지 않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신비로운 생명을 얻으시길 기원합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이 생명을 우리에게 보이셨고, 장차 우리도 부활할 것을 선포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생일이 현재의 생명을 준 날이라면, 이제 우리는 또 하나의 생명, 영원한 생명을 얻는 제2의 생일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이 영원하고 참된 생명을 주시는 우리의 구주이십니다. 본문 아래 부분을 보면 예수님은 이것을 만천하에 선포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나사로를 살린 사건입니다. 이미 나사로는 무덤에 장사된 지 나흘이나 지났지만,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야 나오너라>고 불러 내셨습니다. 나사로는 새로운 생명으로 살아났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사로가 살아났지만 지금까지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는 그 후 구브로, 즉 키프로스에서 전도하다가 죽었습니다. 화면에서 몇 컷의 사진을 보십시오. 앞의 몇 장은 베다니에 있는 무덤 사진입니다. 나사로는 이 무덤에서 살아 나왔습니다. 나중 사진은 그 나사로가 죽어 묻힌 키프로스의 무덤입니다. 나사로가 다시 살았지만, 그 생명은 영원히 사는 생명은 아니었습니다. 현재의 생명을 다시 한 번 얻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나사로가 영원히 사는 것도 아닌데, 다시 살게 하셨을까요? 거기엔 매우 강한 선언적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생명의 주인이심을 선언하는 의미입니다. <잘 보라. 죽었던 나사로를 내가 살렸다. 나사로가 지금은 현재의 생명으로 다시 살았지만, 장차 썩지 않고, 쇠하지 않는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할 것이다. 난 생명을 주는 너희의 구원자다. 내가 이 세상에 온 것은 너희에게 생명을 주기 위함이다. 이제 너희는 날 믿으라. 그러면 이런 생명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이런 의미를 말씀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 이야기를 마칠 때가 되었습니다. 고통으로 가득한 현재의 생명을 가지고 태어난 날도 우리가 기뻐하고 축하한다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때는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 모두가 누리길 기원합니다.

그렇다면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25-26절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그 끝에 질문이 나옵니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그 때 마르다가 무엇이라고 대답했습니까? 

27절을 다같이 읽어봅시다.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할렐루야! 여러분,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부활이요, 생명임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바로 이 믿음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이 믿음이 우리에게 충만하길 기원합니다. 우리 모두가 두 번째 생일을 가지게 되길 기원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확신하게 된 날이야말로 축하해야 할 우리의 생일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제2의 생명이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현재의 생명을 소홀히 여겨도 좋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어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고 해서 현재의 생명을 마음대로 하고, 학대해도 좋습니까? 

최근에 한 연예인의 자살로 세상이 시끄럽습니다. 자살한다는 것은 태어난 것을 후회한다는 뜻이 아닐까요? 얼마나 자신의 생명에 대해 고통스러워하면 죽음을 선택하겠습니까? 그러나 이래도 좋습니까? 어차피 형편없는 생명이니, 대충 살거나 스스로 포기해도 좋은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현재의 생명은 미래의 영원한 생명을 준비하는 도구입니다. 현재의 생명으로 살아있는 동안 우리는 최선을 다해 예수님을 잘 믿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현재의 생명을 아름답게 가꾸어 가는 사람이 장차 영원한 생명도 풍성하게 누릴 것입니다. 힘들더라도 포기하지 마십시오. 어려워도 일어서십시오. 당당하게 살아가십시오. 우리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기다리고 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마음으로 현재를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이제 고린도전서 15장 57-58절을 읽어드림으로써 오늘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현재의 생명을 활용하여 믿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준비하는 여러분이 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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