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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부활의 첫 증인 (요 20: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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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첫 증인 (요 20:11~18) 
 
 
한 일간지 기사 가운데 웃지 못 할 내용을 본 적이 있습니다. “로또 1등 당첨 후 행동요령”입니다. 가장 강조하고 있는 것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이순신 장군의 어록을 인용하여 “나의 당첨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일단 잠적하라”는 것입니다.

가장 심한 것은 “무조건 주변을 정리하라”는 것입니다. 사귀던 애인이 있으면 일단 헤어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인과도 이혼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이혼수속이 끝나고 난 후 당첨금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참 씁쓸한 이야기입니다. 정말 기쁜 소식을 함께 나눌 수 없는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은 기쁜 소식을 함께 나눌 사람들이 있으십니까? 정말 깜짝 놀랄만한 소식이 있을 때 누구에게 제일 먼저 알리시겠습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을 때 제일 먼저 그 소식을 알리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놀랍게도 그 대상이 막달라 마리아였다는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예수님께서는 부활의 기쁜 소식을 맨 처음 어머니 마리아에게 알려야 했지 않았을까요? 아들의 죽음 때문에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을 어머니에게 먼저 알려야 하지 않았을까요? 아니면 장차 주님의 뒤를 이어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이끌어 가게 될 베드로에게 먼저 알려야 하지 않았을까요? 그렇지 않으면 3년 동안 함께하던 제자들에게라도 먼저 알려야 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께서 부활의 소식을 제일 먼저 알린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이 사실에 기초해서 다빈치 코드라는 책에서는 예수님께서 막달라 마리아를 연인으로 사랑했다고 그야말로 ‘소설’을 썼습니다. 그 뿐 아니라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해서 자식도 낳고 가문을 이루었다고까지 했습니다. 이렇게 ‘소설’을 쓰게 될 정도로 부활 소식을 막달라 마리아에게 제일 먼저 전하셨다는 사실은 의외였습니다.

그러면 왜 막달라 마리아에게 제일 먼저 부활 소식을 전하셨을까요? 물론 이것은 주님만이 아십니다. 하나의 미스테리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서 조심스럽게 해답을 유추해 볼 수 있는 단서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 단서들이 주님의 부활을 대하는 우리에게 소중한 교훈을 줍니다.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기록은 성경에 13번 나타납니다. 그 내용을 종합해서 그녀의 삶을 재구성해 보면 이렇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갈릴리 호수 서쪽 연안에 자리하고 있는 ‘막달라’라는 마을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녀에게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귀신이 들려있었던 것입니다. 그것도 가장 지독하다는 일곱 귀신이 들려있었습니다. 

당시에 일단 귀신이 들린 사람은 사회로부터 격리가 됩니다. 가족으로부터 버림받고 마을에서 쫓겨나 거리를 떠돌며 방황하게 됩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여인으로서 가족을 떠나 미쳐 방황하며 참혹한 삶을 살고 있었을 것입니다. 얼마나 그 삶이 고달팠을까요? 얼마나 많은 아픔을 그 마음에 묻어두고 있었을까요? 아마도 차라리 죽고 싶은 생각을 여러 차례 했을 것입니다. 

그러던 중에 우연히 주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우선 아무도 가까이 해주지 않았던 자신, 공격적이고 더럽고 추악한 자신을 불쌍히 바라봐 주셨습니다. 그리고 따뜻하게 맞아주셨고, 놀라운 능력으로 그 무섭다는 일곱 귀신을 쫓아내 주셨습니다. 자신을 깨끗하게 낫게 해 주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이 사건 이후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주님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주님 때문에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기에 남은 생애를 다 바쳐 주님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우선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께서 공생애 기간 사역하실 때 주님을 따르며 섬겼습니다. 눅 8:1-3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새 열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 막달라 마리아가 주님을 따르며 주님을 섬겼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주님의 식사와 주님의 일상생활을 뒷바라지 했을 것입니다.

다음으로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의 고난의 현장을 지키며 주님을 따랐습니다. 마 27:55-56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 그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배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에 달려 운명하시는 그 자리에 막달라 마리아가 지키고 서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께서 무덤에 장사되실 때 또 거기에 있었습니다. 마 27:58-61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 위에 놓고 가니 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 예수님께서 장사되신 그 무덤에 막달라 마리아가 마지막까지 남아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도망친 그 자리 심지어 예수님의 가족들마저 떠난 그 자리를 막달라 마리아가 지키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오늘 본문을 보면 막달라 마리아는 안식 후 첫날에 새벽같이 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다는 것입니다.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그 날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는 또 그 무덤을 찾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이 비어있는 것을 보고 제자들에게 가서 알렸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이 막달라 마리아를 따라 무덤으로 달려왔습니다. 무덤 안을 살펴보니 막달라 마리아의 말대로 무덤이 비어있었습니다. 빈 무덤은 확인했지만 두 제자는 또 그대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요 20:11을 보면 이 때 막달라 마리아는 혼자서 그 빈 무덤을 지키고 울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성경의 내용을 종합해 볼 때 한 가지 결론을 지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그 누구보다 주님을 사랑했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토록 주님을 사랑하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제일 처음 그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본문 16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부르셨습니다. “마리아야!” 그 때 막달라 마리아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아마도 온 몸에 전율이 일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가슴이 터지도록 기뻤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제일 먼저 막달라 마리아를 찾으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사랑 때문입니다. 그 사랑에 끌려 막달라 마리아를 찾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주님은 막달라 마리아처럼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뜨겁게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은 바로 막달라 마리아처럼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막달라 마리아처럼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단지 감정적으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로 사랑을 고백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삶 속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을 말합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사랑의 실천은 다음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은혜를 갚으며 살았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께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자신을 장악하고 있던 귀신을 내 쫓아주셨습니다. 그리고 몸도 고쳐 주셨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해 주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이 은혜를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은혜를 갚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살았습니다. 바로 이 모습이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 모습을 귀히 여기셔서 제일 먼저 막달라 마리아를 찾으신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받은 상처는 오래 기억합니다. 그것은 사소한 상처라고 해도 두고두고 마음에 간직합니다. 이에 비해 은혜는 쉽게 잊어버립니다. 그것이 큰 은혜라고 해도 얼른 망각해 버립니다. 상처는 꼭 받아야 할 빚이라고 생각하고, 은혜는 꼭 돌려주지 않아도 될 빚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계산법을 바꿔야 합니다. 상처는 돌려주지 않아도 될 빚이라 생각해야 합니다. 그 대신 은혜는 꼭 갚아야 할 빚이라 생각해야 합니다. 특히 하나님께 받은 은혜는 꼭 갚아야 할 빚이라 생각하며 살아야 합니다.

중국 진(晉)나라 때 ‘위무자’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어느 날 아들을 불러놓고 이렇게 당부했습니다. “너의 새어머니는 아직 젊으니 내가 죽거든 개가시키도록 하여라.” 한참 세월 흐른 후내 위무자가 죽게 되자 아들을 불러놓고 이번에는 이렇게 당부했습니다. “내가 죽거든 너의 새어머니는 나를 따라 순장(殉葬)토록 하여라.”

아들 ‘위과’는 아버지의 두 유언 가운데 어떤 것을 따라야 할 지 고민이 되었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병중에 혼미하여 남긴 유언보다는 맑은 정신일 때 남긴 유언을 따르는 게를 옳다고 판단하여 젊은 새어머니를 개가시켜 드렸습니다.

뒷날에 위과가 두회와 전쟁을 벌일 때의 일입니다. 두회가 워낙 용맹한 장수인지라 위과의 군대는 싸움에서 지고 있었는데, 갑자기 두회가 탄 말이 누군가 묶어놓은 풀에 걸려 넘어지는 바람에 위과는 두회를 사로잡고 전쟁을 이겼습니다. 그날 밤, 위과의 꿈에 한 노인이 찾아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당신이 개가시킨 새어머니의 아비가 되는 사람이오. 그대가 지혜로운 판단으로 나의 딸을 개가시킨 것이 고마워 내가 풀을 묶어 적장의 말이 걸려 넘어지게 한 것이오. 작게나마 은혜를 갚게 되어 기쁘오.”

이 고사에서 결초보은(結草報恩)이란 말이 나왔습니다. “죽어서 무덤의 풀을 묶어서라도 은혜를 갚는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저마다 주님께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갚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을 사랑하며 사는 삶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주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갚고자 할 때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를 찾으실 것입니다.

둘째, 주님의 필요를 채우며 살았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을 따랐습니다. 아마도 12 제자들과 함께 주님과 공동체를 이루며 살았을 것입니다. 이 때 막달라 마리아는 자신이 가진 것으로 주님을 섬겼습니다. 식사 문제를 담당했을 것입니다. 공동체의 안살림을 맡아 수발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사역에 전념하실 수 있도록 뒷바라지 했을 것입니다. 바로 주님의 필요를 채우며 살았던 것입니다. 이 모습이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이런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곤충학자가 개미떼를 관찰해 보았답니다. 재미있는 것은 개미들 중 15%만 일하고 85%는 그냥 놀고 먹더랍니다. 그래서 일하는 15%를 따로 격리시켜 놓았더니, 그 중에서도 또 15%만 일하고 85%는 놀더랍니다. 경제학자인 파레토가 ‘파레토 법칙’을 발표했습니다. 20%의 인구가 80%의 돈을 가지고 있었고, 20%의 노동자가 80%의 일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개미떼에서나 사람들의 공동체에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의 필요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실제로 공동체에 별로 기여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소수는 자기의 필요는 물론이지만 공동체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헌신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공동체에 크게 기여합니다.

교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영적으로도 자기의 필요에만 촉각을 곤두세우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실제로 교회에 별로 기여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소수의 사람들은 공동체의 필요에 관심을 기울이고 또 이것을 채우기 위해 헌신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공동체에 크게 기여합니다.

딤후 2:21을 보면 바울이 이런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릇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왕이면 주님께서 귀히 쓰시는 그릇이 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릇은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사용자를 위해 존재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릇의 가치는 그 그릇 자체의 재질이나 품격에 따라 결정되지 않습니다. 단지 얼마나 귀하게 쓰임을 받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여기서 귀하게 쓰임을 받기 위해서는 사용자의 필요에 잘 맞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제 주님의 필요를 생각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위해 귀하게 쓰임 받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이런 사람들을 찾으시는 것입니다.

셋째, 항상 주님 곁을 지키며 살았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어떤 일이 있어도 주님 곁을 지켰습니다. 주님께서 집을 떠나 두루 다니시며 사역하실 때 그 곁을 지켰습니다. 주님께서 잡히셔서 끌려가실 때도 뒤를 따르며 그 곁을 지켰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실 때도 그 곁을 지켰습니다. 주님께서 무덤에 장사되실 때도 그 곁을 지켰습니다. 때로는 아끼시던 제자들이 다 도망치고 없는 그 자리를 끝까지 지켰습니다. 가족들마저 다 떠나버린 그 자리를 끝까지 지켰습니다. 이 모습이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이런 사람을 찾으십니다.

세계 제 1차 대전 중에 있었던 실화입니다. 어떤 같은 마을에서 자라났던 두 친구가 같이 전쟁터에 나가게 됐습니다. 한번은 전쟁도중 한 사람이 아군에서부터 격리 되었습니다. 어디선가 포탄이 날아들기 시작했고 그리고 한 친구는 날라 온 파편에 부상을 입어 피 흘리고 쓰러집니다. 

그 광경을 멀리 참호 속에서 바라보고 있던 다른 친구가 견딜 수가 없어서 부상당한 친구에게 달려가려 할 때 분대장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분대장의 만류를 뿌리치고 친구에게 달려갔고 천신만고 끝에 친구를 들쳐 업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때 친구는 이미 죽어있었습니다.
분대장이 화를 내며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것 봐라 너까지 죽을 뻔하지 않았느냐 그래서 내가 말렸던 거야” 이 때 그 병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분대장님! 제가 그 친구에게 다가 갔을 때 아직 살아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친구가 숨을 헐떡이며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친구야 네가 올 줄 알았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주님 곁에 있는 것입니다. 비록 내게 손해가 된다고 해도 주님 곁을 지키는 것입니다. 비록 내가 큰 희생을 감수해야만 해도 주님 곁을 지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이렇게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오늘의 부활절입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뜨겁게 만나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싶다고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만나주셔야 합니다. 

그러면 부활하신 주님은 누구를 만나주실까요? 막달라 마리아와 같이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늘 주님의 은혜를 갚으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주님의 필요를 생각하며 그 필요를 채우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항상 주님 곁을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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