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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부활 소망 (살전 4:1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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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소망 (살전 4:13~18)

     
함께 읽은 말씀은 성도들의 장례식장에서 가장 많이 읽혀지고 선포되는 부활의 확신에 대한 성경구절 중의 한 부분입니다.   세상을 떠나는 사람의 나이와 상황은 사람마다 서로 다릅니다.  어떤 이는 무병장수하다가 평안한 죽음을 맞이하는가 하면 어떤 이는 지병으로 오래 아프다 힘겨운 임종을 맞이합니다.  전쟁에서 처참한 모습으로 전사하는가 하면 돌발적인 사고를 만나 순식간에 목숨을 잃기도 합니다.  행복해 보이는 죽음이 있는가 하면 너무나 허망하고 안타까운 죽음이 있습니다.  

죽음은 나를 세상으로부터 격리시키는 일이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별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죽음에 대하여 말하면 보통은 아쉬움과 슬픔, 두려움으로 가득합니다.  그래서 옛 속담에 ‘똥밭에 굴러도 저승보다 이승이 낫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는 것이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죽는 것보다는 낫다는 뜻에서 하는 말입니다.  성경 전도서에도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전도서9:4)고 하였습니다.  그만큼 살아있는 것이 죽음보다는 안심이 되고 살아있어야 무엇인가를 할 수 있지 죽은 후에는 무슨 소망이 있겠느냐는 생각입니다.  이처럼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찾아오는 것이므로 그 죽음 이후에 나는 어떻게 될까라는 의문 또한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2천년 전 유대 땅에서 시작된 그리스도의 복음이 소아시아를 거쳐 로마제국 전역으로 퍼져가고 있을 때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하여 우리 시대와 동일한 의문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예수 믿다가 먼저 죽은 자들에 대한 궁금증이 데살로니가 교회 안에 있었습니다.  지금 살아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은 주님을 뵙는 기쁨에 참여할 것이지만 주의 재림을 기다리다 먼저 죽은 성도들은 그 기쁨에 참여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난처한 질문입니다.   이 의문을 다시 정리하면 주님 오시기 전에 세상을 떠난 성도의 영혼은 어떤 상황에 있고 또 어디에  있을까?   사람이 죽으면 그 다음 순간 어떤 상태에 이르는가?  이런 질문들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신앙을 변증한 바울의 편지와 함께 데살로니가전서 4장의 마지막 부분은 주의 재림과 성도의 부활에 관한 소망의 메시지이며 오늘 우리에게도 주시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다시 사신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을 가능하게 하는 소망의 원천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없이 우리가 죄로부터 해방될 수 없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헛된 것이며 사망의 세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 구원은 아직 미완성일 뿐입니다.   우리는 거짓말에 속았고 여전히 구원자를 기다려야 할 불쌍한 존재들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 모든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단번에 어린양 희생이 되어 죽으심으로 죄의 삯은 사망이라 선포하신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켜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사망을 이기고 삼일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죄를 이기고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셨습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 성도들의 죽음은 죄값을 치르는 형벌이 아니라 죄된 육신의 삶을 마치고 안식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형벌로서의 죽음은 예수께서 내 대신 십자가에서 겪으셨고 예수 안에 죽는 자들은 죄에 대하여는 죽고 영생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죽은 자는 더 이상 죄를 지을 수 없으니 죽음은 죄 짓는 날을 마치게 하는 복이라는 역설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입니다.  이 땅에서의 수고를 마치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의 안식을 얻는 새로운 시작이 성도의 죽음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죽음을 가리켜 잠 자는 것이라 표현합니다.   잔다고 하여 의식이 없이 수면상태로 어떤 장소에 갇혀있거나 활동이 멈춘 냉동상태처럼 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잔다는 말은 본래 흙으로부터 온 그 몸이 모든 수고를 그치고 흙으로 돌아가 쉼을 얻으며 마지막 부활의 순간에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어 영혼과 연합하는 그날까지 기다린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육신으로부터 떠나간 영혼은 어떻게 되는가요?   사람이 숨을 거두는 순간 영혼과 육신은 분리되어 그 영혼은 영원한 안식으로 들어가던가 영원한 멸망으로 들어갑니다.  어떤 이들이 말하는 것처럼 영혼이 잠자고 있는 것이 아니며, 혹은 그 영혼이 구천을 떠도는 귀신이 된다고 하는데 성경 말씀과는 전혀 다른 억지일 뿐입니다.   육신은 흙으로 돌아가 잠을 자듯 쉬고 있을 때 그 영혼은 의식이 있는 상태로 깨어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근거로 영혼의 활동을 살펴봅시다.   누가복음 16장에 죽은 거지 나사로와 악한 부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그 말씀을 보면 죽은 후 음부에서 고통 중에 있는 부자와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나사로는 분명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영혼이 머무는 장소도 다르고 느낌도 다릅니다.   죽음 이후의 나는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는 수면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즐거움에 있든지 고통을 느끼는 의식상태에 있을 것이라는 암시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린 한편 강도에게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신 것은 그 영혼이 주님과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의 육신은 십자가에서 내려져 사형수들을 버리는 구덩이에 던져질 것이지만 그의 영혼은 오늘 주님과 함께 낙원으로 들어갑니다.   

그렇다면 낙원은 어떤 장소일까라는 궁금증이 생깁니다.  천국에 이르기 전 영혼이 머무는 대기장소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고 천국을 다른 말로 표현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는데 성경에서 이 용어가 사용된 예들을 종합하면 결국 하나님이 계시는 곳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환상 중에 예수께서 보여주신 하늘나라를 묘사한 계시록 7장을 보면,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다’고 큰 소리로 외치는 광경이 나옵니다.  그때 모든 천사들이 보좌 앞에 엎드려 하나님께 경배하며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로다 아멘’합니다.  

이때 흰옷을 입은 자들이 누구일까요?   이들은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한 자들이며 그들이 하나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신다고 말씀합니다.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고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지니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주실 것임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주 안에서 죽은 흰옷 입은 성도들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깁니다.  땅도 아니고 천국도 아닌 그 어떤 중간 지점에 있다는 암시가 전혀 없습니다.  

그렇다면 죽은 사람들의 영혼에게 그후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예수께서 세상에 다시 오실 때 잠자던 모든 육신들이 일어나 영혼과 연합하게 될 것이며 무론대소하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8, 29)   그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성도들은 그들이 행한 선을 따라 상급의 심판이 있지만, 악을 행한 자들은 그 악을 따라 영원한 멸망의 형벌에 들어갑니다.   

그 심판의 때에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니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는다고 하셨습니다(계20:13).   바다와 사망과 음부가 모든 죽음의 영역을 의미한다고 보면 주님 재림하실 때 모든 죽음의 자리에 있던 자들은 그곳으로부터 놓임을 받아 영과 육이 연합을 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전한 부활의 메시지는 주 안에서 잠자는 자들과 주님 오실 때 살아있는 자들이 어떤 부활을 맞이할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설명한 내용입니다.   죽음이 사랑하는 사람을 갈라놓을 때 누구에게나 이별의 슬픔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죽음 앞에서 담대하며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하여 죽음으로 이별하게 되는 순간조차 아무 슬픈 감정이 없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별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순간이고 고통입니다.  더구나 이 땅에서 다시는 서로 만날 수 없다는 것은 자극히 아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소망 없는 이들과 다른 점은 그 슬픔의 내용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죽음이 가져다 주는 아쉬움과 두려움과 허탈감에 젖어 마냥 슬퍼하기만 할 뿐입니다.  정신적 중압감을 이기지 못하여 우울증에 빠지고 심하면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는다면 예수 안에 죽은 자들도 주님이 다시 오실 때 데리고 오실 것이니 그때 죽었던 몸이 부활하여 영육이 함께 영원히 주님과 함께 할 것을 또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의문에 대한 바울의 답변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잠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할 것이라 하십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때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리니 곧 부활의 순간입니다.   그 영혼은 하나님 나라에서 안식하다가 주님이 재림하실 때 주님과 함께 세상으로 올 것이며 무덤에서 잠자던 육신이 일어나 연합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주의 재림 때에 일어날 성도의 부활과 변화와 주님 영접에 대한 예고입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의 부활이 어떤 것인가 추측할 수 있습니다.   무덤에서 잠자던 그 육신이 영원히 썩지 아니할 새 몸을 입고 영혼과 연합하여 영원히 주님과 함께 있게 됩니다(고전15:52).   그 다음에, 주님 오실 때까지 살아 남았던 자들은 그 육신이 홀연히 변화되어 (고전15:52) 부활한 성도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 즉 하늘에서 주님을 영접하게 하십니다.   

이때 구름은 땅에 비를 뿌리는 그런 구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하심으로 둘러싸인 영광스런 상황을 상징하는 표현으로 해석합니다.   구약에서도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임하시는 광경을 묘사할 때 빽빽한 구름 속에서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뵐때 그리하였고(출19:9, 16),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할 때 성전에 구름이 가득하였습니다(왕상8:10).   

예수께서 하늘로 올리워 가실 때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였습니다(행 1:9).  예수께서 세상의 마지막 날에 나타날 징조를 말씀하실 때 ‘그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마24:30) 하십니다.   바로 구름에 둘러싸인 신비로운 방식으로 주님은 다시 오실 것이니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임하시는 모습입니다.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신다’고 했는데 바울은 여기서 ‘하르파조’harpazo라는 헬라어를 사용하였고 영어성경에는‘caught up’이라고 번역합니다.  이 말은 순식간에 위로 끌어올려져 데려감 즉 take away 당한다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본문을 근거로 성경에서 사용하지 않는 소위 ‘휴거’(携擧) 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휴거란,‘이끌다, 끌다’라는 의미의 携와 ‘들다’라는 의미의 擧를 사용하여 공중으로 들어 올림을 받는다는 뜻의 한자 용어입니다.  그럼 공중에서 주님을 맞이한 사람들에게 그 다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라는 궁금증이 생깁니다.  이 물음에 대한 신학적인 여러 의견들이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이런 복잡한 신학이론을 설명하는 자리가 아니므로 상세하게 말씀드리지 않습니다. 

<개혁주의 종말론>을 쓴 안토니 후크마(Anthony Hoekema)는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라는 구절에서 영접하러 나간다는 말은 어느 도시에 찾아온 고위 방문객을 맞이할 때 베푸는 공식적 환영을 묘사하는 신약의 전문 용어라고 설명합니다.  고위 방문객을 영접하기 위하여 도시를 벗어나 마중나갔다가 그와 함께 도시로 돌아오는 관습을 배경으로 합니다.   이처럼 부활한 성도들과 변화된 성도들이 함께 공중으로 이끌려 주님과 기쁨의 만남을 가진 후 주와 함께 땅으로 되돌아 올 것이라는 뜻입니다.   

마치 마태복음의 혼인잔치 비유에서 지혜로운 다섯 처녀들이 신랑을 맞으러 나갔던 것처럼(마25:6) 성도들도 재림하시는 주님을 영접하러 공중으로 이끌려질 것이며, 처녀들이 신랑과 함께 혼인잔치에 들어간 것처럼 부활 성도와 변화된 성도들이 주님을 영접한 후 하늘로부터 내려온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주와 함께 항상 있을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에서 바울은 주 안에서 먼저 죽은 자들에 대한 궁금함을 대답하기 위하여 죽은 성도의 육체 부활과 살아 남은 자들의 변화된 몸에 대해서만 설명하고 있습니다.  주를 믿지 않는 자들에게 일어날 일에 대하여는 생략이 되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복음서를 비롯하여 신약성경 전체를 살피면 예수께서 재림하시는 마지막 날에 신자들과 불신자들을 불문하고 먼저 죽은 모든 이들이 무덤에서 일어나는 대부활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부활 성도와 변화된 성도들이 공중에 이끌려 주님을 맞이한 후 세상에 다시 오신 주님은 비로소 최후의 심판을 시작하십니다.   계시록 20장12절에‘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하신 것처럼 이 심판으로 주를 믿지 않던 자들은 영원한 형벌에 처하게 되고 성도들은 새 하늘과 새 땅의 복을 영원히 누리게 될 것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던 시대에 헬라 철학에 익숙했던 사람들은 육체의 부활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영혼은 선하지만 육체는 악하고 완전한 존재에 대한 방해물로 여겨 사람이 죽을 때 육체는 소멸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부활은 영혼과 육체가 아울러 새롭게 시작하는 부활을 선포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은 영혼만 아니라 그 육체까지 선하고 아름답게 지으셨으니 마지막 부활의 순간에 우리를 선하고 아름다운 몸으로 변화시키십니다.    이것을 위하여 예수께서 사람의 몸으로 세상에 오셨고 죄인의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3일 만에 다시 살아 우리의 구원과 소망이 되셨습니다.    

오늘 부활주일은 바로 이 승리의 주님과 함께 부활의 영광에 동참할 것을 소망하는 성도들이 부활하신 주님, 다시 오실 주님을 믿음으로 바라며 찬양하는 날입니다.    소망 없는 다른 이들처럼 원통해 하거나 무작정 슬퍼하지 말고 나에게 생명을 주시고 건강을 주시며 기회를 주셨을 때 믿음을 굳게 지키며 사시기 바랍니다.   먼저 가신 성도들을 데리고 주님 다시 오실 날을 소망 중에 기다리며 주 안에서 승리하는 백성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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