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부활주일] 빈 무덤에서 원없이 울리라 (막 16:1~8)

  • 잡초 잡초
  • 217
  • 0

첨부 1


빈 무덤에서 원없이 울리라 (막 16:1~8)



만일 죽었던 가족이 문을 열고 슬며시 들어 온다면 얼마나 놀랄 가요?
얼마 전 뉴스입니다.

6.25 전쟁에 죽은 줄로만 알았던 남편이 50년만에 돌아 왔습니다. 그 동안 북한에 갇혀서 죽을 고생을 하다가 이북을 탈출하여 돌아 온 것입니다. 가족은 물론 고향 사람들이 얼싸 안고 우는 모습이 TV 에 중계되었습니다. 결혼하고 전쟁이 나자 전선으로 나간 후 헤어진 관계입니다. 아내는 남편이 죽은 줄 알고 매년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가 50년만에 돌아오자 기절할 듯이 놀랐습니다. 둘이는 부등켜 안고 원없이 울었습니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원없이 울었습니다. 국민들도 정부도 놀랐습니다.
그가 돌아오자 국가는 그 동안 밀린 봉급과 수당과 연금을 한꺼번에 지불하였습니다.

우리들이 먼 훗날 천국에 가서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는 가족들과 친지들을 만나면 얼마나 반가울가요? 얼마나 원없이 부등켜 안고 울가요?
반드시 그런 날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 이야기로 들어 갑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금요일 저녁에 장례를 치루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해가 지면서 안식일이 시작되었습니다. 안식일에는 아무도 멀리 움직이지 않습니다. 100m 이상 걷지도 않았습니다. 모두가 꼼짝하지 않고 회당에서 예배드리는 일만 하였습니다. 토요일 저녁 안식일이 끝났습니다. 그러나 이미 밤이었습니다. 주일 새벽이 되었습니다. 몇 여자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습니다. 여자들은 걱정하면서 향을 가지고 떠났습니다. 무덤을 막고 있는 돌을 어떻게 여자들이 치울 수 있을 지 걱정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당시 장례는 굴을 파고 시체를 넣고 돌로 막는 문화였습니다. 여인들이 막상 도착하여 보니 돌이 옆으로 굴러져 있었습니다.

들여다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시체가 없어졌습니다. 빈 무덤이었습니다.

나중에 베드로가 빈 무덤에 들어가서 보았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이스라엘은 세마포로 몸을 쌉니다. 그리고 머리는 세마포로 따로 덮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나서 세마포를 잘 정리하여 두셨습니다. 머리 세마포와 몸 세마포를 따로 따로 잘 정돈하여 두었습니다. 요한복음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요 20;7)

어느 부부 이야기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이불과 요도 정리 안하고 잠옷도 아무렇게 벗어 던지고 사는 버릇을 가지고 있는 부인이 있었습니다. 참다 참다 못 하여 어느 날 아침 어지러운 집안을 보며 남편이 젊잖게 말했습니다.
“여보, 예수님은 무덤속에서 그 정신없는 상황에서도 아픈 몸으로도 입고 계시던 세마포를 단정히 정돈하고 부활하셨어요.”
부인이 상냥하게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여보, 미안요. 제가 아직 부활을 못해서 그래요." 

여하간 여인들이 제일 먼저 빈 무덤을 들여다 보았을 때 두 천사가 보였습니다. 여자들은   너무나 무서워서 얼굴을 땅에 댔습니다. 그 때 두 천사가 말했습니다.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여자들은 평소에 예수님께서 늘 이렇게 하시던 말씀을 기억하였습니다. 그리고 달려가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부활하였다고 증거하였습니다. 여인들은 빈 무덤을 보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죽어서도 자기를 자랑하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죽어서 무덤의 크기가 자기 권위라고 여겼습니다. 

피라미드가 그렇습니다. 이집트의 피라밋 무덤은 세계 8대 불가사의 중에 하나입니다. 중국 진시황릉도 그렇습니다. 여산릉이라 불리는 진시황릉은 작은산만 하다고 합니다. 무덤 봉분 아래서 꼭대기까지 계단을 오르는데만 15분이 걸립니다.

중국에 어떤 지하 무덤을 파헤쳤습니다. 돌아 보는 데에만 두 시간 이상 걸린다는 것입니다. 나중에는 다리가 아파서 포기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무덤은 빈 무덤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이었습니다. 부활은 확실한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1. 욕망에는 대상이 있습니다.

부활이 있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 모든 욕망에는 반드시 대상이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식욕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먹을 것이 세상에는 많습니다. 하나님은 식욕만 주시고 식욕을 만족시킬 수 있는 대상을 안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사람에게는 소유욕이 있습니다.
그래서 소유욕을 만족시킬 대상 물질을 많이 주셨습니다.
사람에게는 성욕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욕을 만족시킬 수 있는 이성을 주셨습니다.

사람에게는 명예욕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는 혼자 살지 않고 같이 살아가면서 명예를 가지게 하는 대상을 주셨습니다.
사람들에게는 잠욕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밤을 주시고 잠욕을 만족시킬 수 있는 잠을 자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가장 강한 욕망은 영원히 살고 싶아하는 욕망입니다. 그래서 진시황은 불노초를 구해오라고 신하들에게 명령하였습니다. 신하들이 한국 쪽으로 떠났습니다.   
그러나 구하지 못 하여 돌아가지 못 하였습니다. 진시황은 불노초를 구하러 떠나서 돌아오지 아니하는 신하를 기다리느라고 동쪽으로 보면서 늘 기다렸습니다.

그 동상이 위해에 있습니다.
이집트의 왕들은 영원히 살고 싶어서 왕이 되자 말자부터 피라밋을 만들기 시작하였습니다. 무덤을 크게 만들고 몸을 미이라는 만들어 놓으면 언젠가는 부활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인간의 가장 큰 욕망입니다.

우리나라 왕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왕이 죽으면 저 세상에서 부활하여 살기를 원하면서 같이 지내던 하인과 하녀들을 같이 묻었습니다. 그리고 사용하던 물건들을 같이 묻어 주었습니다.
모든 욕망에는 대상이 있습니다. 가장 큰 욕망은 부활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은 반드시 있습니다.
1679년에 홉스(Hobbes)라는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전 세계를 소유하고 있다면 나의 생명을 단 하루만이라도 연장시켜 주는 자에게 전 재산을 주겠다. 나는 지금 어둠속에서 사라져 가고 있다.”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하루 이틀 생명을 연장시켜 주시는 분이 아니라 영원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이 부활입니다.

2. 씨앗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모든 씨앗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나무나 식물들이 다 죽는 것같지만 씨앗으로 다시 재생됩니다. 식물의 부활입니다.
3000년된 피라밋 속에서 씨앗이 발견되었습니다. 과학자들의 초미의 관심사가 있었습니다.
<3000년 된 씨앗을 심으면 싹이 날 것인가 안 날 것인가?>

누구도 대답하지 못 하였습니다. 대답은 간단합니다. 심어보면 압니다. 그 씨앗을 심었습니다. 궁금하시지요?
날 것이라고 믿으시는 분은 아멘해 보세요.
이미 3000년 동안 말라 비틀어졌기에 이미 생명력을 잃었기에 싹이 나지 않을 것이라고 믿으시는 분은 아멘하십시오.

결론은 싹이 났습니다.
동물도 식물도 다 씨앗이 있습니다. 씨앗이 없는 생명은 이 세상에 아무 것도 없습니다. 
유난히 질문이 많은 아이가 있었습니다. 가족과 함께 시골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질문이 시작되었습니다.

"아빠! 저건 뭐야?"
"콩 심는 것이란다."
"저건 뭐야?"
"고추."
"어! 고추를 심었구나. 저건 뭐야?"
"벼를 심고 있단다."
이 곳 저 곳을 보다가 공동 묘지를 보고 물었습니다.
"아빠! 저건 뭐야?"
"저긴 죽은 사람을 묻는 곳이지."
아들이 말했습니다.
"어 저건 사람을 심은 거구나."

공동묘지는 사람을 심는 곳입니다. 심는다는 말은 다시 싹이 날 것이라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시는 그 날 공동 묘지에서 사람이 다시 날 것입니다. 성령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살전 4;16-17)

바울은 부활장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느니라>(고전 15;42-45)

씨앗에는 생명이 있는 것을 보면 분명히 부활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1-3)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목사님은 슬피 우는 할머니를 위로하시려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할머니!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 할아버지는 그리스도 안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우리도 그리스도를 믿기에 얼마 있으면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 때 만나면 손을 잡고 함께 찬송하십시다.”

이 말을 듣자 할머니가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 천국 가지 않으렵니다.”
목사님이 놀라서 물었습니다.
“왜 그러십니까?” 
할머니가 말했습니다.
“저 영감이 천국가면 나는 저 영감이 있는 천국에 가지 않으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변화된 모습으로 천국 백성이 될 것이라고 성경은 증언하여 주고 있습니다. 죄도 아픔도없는 아름다운 삶이 될 것입니다. 부활의 몸은 변화된 몸입니다.

3. 증거에는 진리가 있습니다.

증거가 분명하면 진리가 정확한 것입니다.
빈 무덤은 예수님의 부활을 확실하게 증거하여 주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자 자기들도 잡혀 죽을 가 두려워 하였습니다. 그래서 모두 고향으로 도망을 갔습니다. 예수님의 12명 제자중에 가룟 유다 하나만 가룟 사람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11명은 모두 갈릴리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제일 먼저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내가 예수라면 제일 먼저 겟세마네 동산으로 갔을 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엎드려 기도하던 자리에 엎드려서 이렇게 기도드릴 지도 모릅니다.

"하나님!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처럼 기도하였던 자리입니다. 이 곳에서 십자가 지을 능력을 받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어쩌면 잠 들어 있는 빌라도 침실에 제일 먼저 갔을 지도 모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군중들에게 내어줄 때 세수대야를 가지고 오라고 하여 손을 씻으면서 말했습니다.

“나는 예수에게서 죄를 찾을 수가 없다. 그러나 너희들이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하여서 내어 준다. 내게는 책임이 없다. 핏값은 너희들이 받아라.” 그래서 예수님이 죽었습니다. 예루살렘에 빌라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도록 언도한 곳이 있습니다. 비가 내리는 날이면 이 산에서 빌라도의 손 씻는 소리가 들린다고 합니다.

"나는 아무 잘못이 없다. 내 잘못이 아니다."
  빌라도의 변명소리도 들린다고 합니다. 물론 전설입니다. 억울하게 죽은 것을 기억하며 빌라도에게 제일 먼저 자랑스럽게 갈 수도 있습니다.
태어난 베들레헴에 제일 먼저 가시지 않으셨습니다. 자라난 곳 나사렛으로 가시지 않으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일 먼저 갈릴리로 가셨습니다. 11명 제자들이 모두 도망간 곳입니다.

그 곳에서 예수님은 11 제자 다시 찾으히고 재사명을 맡겨 주셨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죽었는 데 분명히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확실이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확인하였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전하다가 100% 모두 순교하였습니다.
이 세상에 거짓을 위하여 순교할 사람은 없습니다. 한 두 명도 아니고 모두 순교하였습니다.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파스칼이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만일 예수의 제자들이 서로 의논해서 예수의 부활을 거짓으로 만들어 냈다고 가정해 보자. 그 중 한사람이라도 본심에 돌아갔더라면 예수의 부활이란 전부 붕괴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저들은 순교를 하면서까지 입증한 제자들의 진실성을 믿지 않는다면 우리는 벌써 그런 사람과는 말할 필요조차 없다."

만일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이 거짓이고, 제자들이 거짓으로 <예수 부활하였다>고 전하였다고 가정하여 봅니다. 그 중에 한 명이라도 양심선언을 하였다면 기독교는 존재할 수 없을 것입니다. 11명 제자가 모두 순교하였다는 것만 보아도 부활의 증거는 분명합니다. 

증거가 분명하면 진리가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이것만 보아도 부활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나라 구전 민요 가운데 상여를 매고 갈 때 부르는 타령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관하고 흙을 다지며 부르는 만가이기도 합니다.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영영 다시 못 오리라 
솥안에 익은 팥이 싹이 틀 때 다시 오랴
소반위에 삶은 닭이 나래칠 때 다시 오랴
한번 가고 못 오는 길 어이 섭지 아니하랴
북망산 마지막 길 내가 서러워 하노라

예수님의 복음을 받기 전에 우리 조상은 죽으면 영영 다시 오지 못 할 것이라고 노래하였습니다. 솥안에 팥이 싹이 트면 온다는 말은 불가능이라는 말입니다. 소반위에 삶은 닭이 날개를 칠 때 온다고 하는 말은 영영 죽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복음은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죽은 후에는 부활이 있습니다.

빌리 그래함은 목사님이 죽을 때 말했습니다. 
"오늘 신문에서 빌리 그래함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리거든 믿지 마십시오. 나는 죽은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나라로 옮겨 간 것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1. 욕망에는 대상이 있습니다.
2. 씨앗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3. 증거에는 진리가 있습니다.

평생 대학생 선교를 위해 헌신해 온 로슈멕도르라는 불붙는 전도자가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는 물론 인류역사는 사기극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사실이라면 부활의 신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겐 최대의 비극이 될 것이다.”

부활의 빈 무덤.

먼 훗날 부활의 빈 무덤에서 원없이 울 사람들로 천지가 진동할 것입니다. 죽음의 슬픔이 없는 집은 이 세상에 한 집안도 없습니다. 그 날 죽었던 이들이 다시 살아나 만날 때 온통 천지는 눈물 바다가 될 것입니다. 여기서 저기서 기쁨의 눈물로 진동하게 될 것입니다.
나도 그 날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를 끼어 안고 원없이 울 것입니다.
부활의 빈 무덤에서 원없이 울 날이 올 것입니다.

빈 무덤에서 원없이 울리라.

이런 이야기 하나 드리고 마치려고 합니다.

밀레(Millet, Jean Francois 1817-1875)의 만종이 부활의 그림이라는 해석이 나와 주목을 끌고 있습니다.
농부가 밭에서 고된 일을 하고 있을 대 저녁 종소리가 교회로부터 울려 퍼지게 되었습니다. 농부 부부는 일하다 말고 교회의 종소리를 들으면서 기도하는 전원적인 풍경을 그린 그림입니다.

그러나 이 그림은 그렇게 낭만적인 것만이 아닙니다. 이 그림을 통하여 밀레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있습니다.

농부 부부 옆에는 쇠스랑과 망태기가 놓여 있습니다. 씨감자가 그 망태기 속에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망태기는 농부 부부 아기가 죽었을 때 담아 장례를 치루었던 망태기였습니다. 그 망태기에 감자씨를 담아 밭에 심던 중입니다.

씨는 부활입니다.
죽은 자녀가 부활하기를 바라는 심정이 들어 있는 그림이라는 해석입니다.
먼 훗날 부활의 그 날 부부는 다시 만난 자녀를 부등켜 안고 원없이 울 것입니다.
부활은 기쁨의 눈물입니다.
빈 무덤에서 원없이 울 날이 모두에게 올 것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