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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우리를 찾아오시는 부활의 예수님 (눅 24: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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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찾아오시는 부활의 예수님 (눅 24:13~35)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최희준씨의 하숙생이라는 노래입니다.  이 노래의 가사처럼 우리의 인생은 하숙생이요, 나그네입니다.  이 땅에 태어나 한 번 밖에 주어지지 않은 낯설은 세상을 지나가는 나그네입니다.  그 종착점은 묘지요, 죽음입니다.  인류의 삶은 결국 묘지를 향해 가는 길고 긴 행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인생이 살아가고 있다는 말은 곧 죽어 가고 있다는 말과 동의어입니다.  인생의 문제가 많을 것 같지만 그 종착점에 가보면 결국 하나인데, 그것은 죽음의 문제입니다.  죽음은 너무나 큰 문제이기 때문에 죽어 가는 사람에게는 그 어떤 중요한 이야기도 소용이 없습니다.

어거스틴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세계 모든 것이 불확실하지만 죽음만은 확실하다."  역사 이래로 인간은 피할 수 없는 이 죽음을 피해 보고자 갖가지 헛된 시도들을 해 왔습니다.  죽음을 피할 수 있고 생명을 연장 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지 해보겠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일찍이 한무제는 장생불사하겠다고 숭로반에 이슬을 받아먹고 살았습니다.  요즘도 자기가 무슨 한무제라고 매일 '아침 이슬'을 마시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인생은 나그네길입니다.  때문에 나그네는 지나가는 길에 미련을 두지 않습니다.  나그네가 지나가는 길에 너무 큰 미련을 둔다면 그는 여행을 계속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다만 영원한 본향으로 가는 징검다리에 불과할 뿐입니다.  지혜로운 자는 다리를 건너갈 따름이지 그 위에 집을 짓지 않습니다.  나그네는 지나가는 길에서 얻은 것들을 가지고 자랑하지도 않습니다.  그것들 또한 지나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늘에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권세도 지나갑니다.  명예도 지나갑니다.  지식도 지나갑니다.  돈도 지나갑니다.  이 세상의 것은 결코 영원하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그네는 지나가는 길에 서서 너무 많은 욕심을 가져서도 안됩니다.  나그네가 짐이 많으면 그 여행이 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 대신 나그네는 영원한 본향을 향해서 투자 할 줄을 압니다.  하늘의 것만 영원합니다.  무엇보다도 나그네는 자신이 걸어가고 있는 길이 바른 길인지를 자주 확인하고 물어야 합니다.  잘못된 길로 빠지기 시작하면 우리가 돌아가야 할 영원한 본향에는 근처에도 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영원한 본향에 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수시로 확인하고 점검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인생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여기에 대해서 불교에서는 모른다고 말합니다.  그럴 수 밖에요.  창조주 하나님을 거역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됨을 올바로 인식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 인생이 이 땅에서의 마지막 종착점에 섰을 때에 돌아갈 고향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은 바다로부터 왔기 때문에 바다로 흐릅니다.  불은 태양으로부터 왔기 때문에 하늘로 올라갑니다.  반면에 우리 인생은 하나님으로부터 왔기 때문에 하나님 앞으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죽으면 그를 가리켜서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갈 곳이 있으니 떠났을 것입니다.  혹은 그를 가리켜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인간은 그가 이 땅에 오기 전에 온 곳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곳이 어디입니까?  바로 우리 인생의 영원한 안식처요, 본향인 하늘나라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는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승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그는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도 부활의 새 생명을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모든 사람들을 죽음과 사망의 그늘에서 벗어나 빛과 영생으로 나아가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생의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환난이나 곤고함이나 죽음이나 사망 앞에서도 감사하며 찬송하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들이 그토록 갈망하는 영생이 이미 주어졌다는 기쁜 소식을 모르기 때문에 힘든 인생을 더 힘들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 부활하신 이 아침에 우리 모두가 확실하고도 흔들리지 않는 부활의 신앙으로 거듭나시기를 바랍니다.  기억하십시오.  그의 삶에 부활의 신앙으로 가득한 사람은 결코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습니다.  캄캄한 밤에 작은 불빛은 더 밝게 빛나듯이 부활의 신앙으로 충만한 사람은 삶이 곤고하고 힘들 때에 더 큰 소망으로 감사하면서 찬송하는 삶을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은 1절의 말씀대로 '그 날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여기에서 '그 날'은 바로 예수님의 빈무덤이 발견된 날입니다.  여기에서 '그 날'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그 날입니다.  원문에서는 "보라 그 날에"라고 해서 감탄사가 사용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자 제자들은 몹시도 허무하고 또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런가 하면 그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에 모두가 도망을 갔습니다.

솔직히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의 자리도 지켜주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지고 도망치는 제자들의 모습을 보고 얼마나 섭섭했을까요?  그러나 주님은 도망간 제자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못 박힌 손을 보이시고, 옆구리를 보이시며 그들을 위로하시고 다시 부르셨습니다.  배신자 베드로, 의심 많은 도마까지 찾아가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실망과 낙심에 빠져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를 찾아오신 사건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예루살렘에서 서쪽으로 약 12km쯤 떨어진 곳에 엠마오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의 두 제자가 실망과 슬픔에 젖은 모습으로 황혼녘에 엠마오를 향해 길을 걸어가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본문의 내용을 보면, 아마도 자신들의 희망이라고 생각했던 예수님의 죽으심에 관한 이야기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때 낯선 한 사람이 나타나서 어디에서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두 제자와 함께 동행을 하기 시작합니다.  이 사람은 두 제자에게 성경 말씀을 풀어 주었습니다.  메시야가 인간의 죄를 짊어지고 죽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그리고 창조가 없는 종교는 인간 구원을 말할 수 없고, 부활이 없는 종교는 구원을 논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 하셨다는 것입니다.

어느덧 발길은 엠마오에 다달았고 날은 이미 저물었습니다.  저녁 식사나 함께 하자고 하여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본문에서 식사하는 과정을 누가는 아주 재미있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주빈이 되어 떡을 가지시고 축사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었습니다.  여기에서 사용된 4개의 동사들은 오병이어의 기적과 최후의 만찬 때에 사용된 바로 그 유명한 단어들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기적 같은 성만찬을 지금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에 그들의 눈이 밝아지고 어느 순간부터 함께 동행했던 그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공포와 절망, 불안과 낙심에 쌓여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은 이제 희망과 용기와 기쁨과 감격을 안고 예루살렘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답답하고 차갑던 그들의 가슴이 깊은 밑바닥에서부터 복음에 대한 열정으로 불타오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오던 발걸음을 되돌려 예루살렘으로 달려가기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이 바로 부활의 신비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의 신비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주님의 전에 오신 여러분, 올 때의 발걸음과 갈 때의 발걸음이 달라지기를 축복합니다.  올 때의 답답하고 냉랭하던 가슴이 사명과 복음의 열정으로 새롭게 불타오르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이 기록되고 있는 18절에 보면, 이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의 이름은 '글로바'라고 밝혀져 있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한 사람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알려지지 않은 이 한 사람이 '누가'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누가는 왜 이 한 사람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을까?  여기에는 누가의 깊은 뜻이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것은 알려지지 않는 이 한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일 수 있다는 겁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삶의 현장에서 부활의 능력 있는 삶으로 나타나지 못하는 우리들일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알려지지 않는 이 한 사람의 제자는 바로 나 자신입니다.  어쩌면 여기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의 발걸음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지 못한 모든 인생들의 발걸음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엠마오'라는 말은 원문에서는 "모른다.  알지 못하는 길"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엠마오 길은 불확실한 길입니다.  방황의 길입니다.  방탕의 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내가 가야 할 길을 알지 못하고 방황하는 분이 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지만 믿음의 비전을 붙잡지 못하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분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지금 엠마오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서 엠마오 길은 내려가는 길이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내려간다는 말은 단순히 지리적인 개념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엠마오 길은 낙심의 길이었습니다.  실의와 절망의 길이었습니다.  모든 희망을 잃어버린 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하나님 앞에서 예배를 드리고는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신앙의 열정을 잃은 분이 계십니까?  뚜렷한 인생의 희망이 보이지 않습니까?  뭔가 불평스럽고 못마땅합니까?  사명을 붙잡지 못하고 주변을 서성거리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지금 엠마오 도상에 서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17절에서는 "슬픈 빛"을 띠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엠마오 길은 슬픔의 길이었다고 말합니다.  그 길은 내일을 기약할 수 없이, 모든 것을 잃어버린 듯하여 목놓아 울 수밖에 없는 눈물의 길이요, 슬픔의 길이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 누군가로부터의 위로가 필요하십니까?  누군가를 붙들고 울고 싶으십니까?  가슴이 답답하십니까?  그 길이 바로 엠마오 길입니다.

생각해 보면, 인생은 어차피 너도 나도 나그네요, 엠마오로 내려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걸어가면서 나누게 되는 인생 길은 슬픈 대화의 길입니다.  예수 없는 인생의 종착점은 너도 나도 죽음뿐입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인간들의 조상인 아담이 범죄하여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이후로 인간의 가장 큰 숙제는 죽음의 문제였습니다.  죽음은 인간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갑니다.  명예도, 영화도, 부귀도 다 빼앗아갑니다.  죽음은 한 마디로 모든 인간의 종착점이 되어 왔습니다.

성경도 우리 인생들이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이라는 이 숙제 앞에는 진시왕의 불로초 불사약도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죽음 앞에서 인간은 철저하게 자기의 무능함을 드러낼 수밖에 없습니다.  인류 역사 이래로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숙제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죽음의 문제는 인간이 해결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습니다.  죽음은 생명의 주인이 되시는 오직 하나님만이 해결하실 수 있는 영역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엠마오 길에서 벗어날 수가 있겠습니까?  어떻게 이 절망의 길에서, 이 슬픔의 길에서, 이 죽음의 길에서 벗어날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그 해답을 우리들에게 확실하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오시면 됩니다.  본문을 보시기 바랍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찾아 오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주님은 언제나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기다리던 땅에, 기다리던 백성들을 찾아 오셨습니다.  길 잃은 양을 찾아 가셨습니다.  병든 자를 찾아오셨습니다.  죄인의 집을 찾아 오셨습니다.  낙망한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비전과 사명을 잃어버리고 고기를 잡고 있던 베드로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으려고 혈기가 가득했던 핍박자요 죄인 중의 괴수였던 바울에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시간 예수님이 당신을 찾아오시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될 것입니다.  낙심이 변하여 희망이 될 것입니다.  절망이 기적으로 바뀌어질 것입니다.  미움이 사랑으로 바뀌어질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이 찾아오시면 죽음의 길이 변하여 영생의 길이 될 것입니다.

혹여 지금 실망과 낙심, 불안과 공포, 근심과 걱정, 죽음의 인생 길을 걷고 계신 분은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십시오.  부활의 주님을 만나십시오.  인생의 방황은 하나님을 만나면 끝이 납니다.
일찍이 괴테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생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까지 아무리 화려한 성공일지라도 처량한 나그네에 불과하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부활은 기독교 복음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20세기 신학계의 거장이었던 칼 바르트는 부활에 대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부활의 메시지는 짧을수록 좋다.  왜냐하면 부활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인 사실을 성경은 구차하게 증명하려고 하거나 변증하려하지 않았다.  단순하게 선포했고 믿고 살라고 선언했을 뿐이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성경은 부활에 대해서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논쟁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부활이 사실이냐 아니냐, 합리적이냐 불합리하냐, 가능하냐 불가능하냐를 논하지 않습니다.  부활에 대해서 과학적으로 증명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 형태가 어떠하냐에 대해서 전혀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너무나도 단순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무덤 속에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다.  우리가 보았다.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다!"

한 마디로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토마스 왓슨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는 것보다 부활 때에 무덤에서 일어날 것을 더 분명하게 확신해야 한다."  기억하십시오.  부활은 이성적으로 논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부활이 나에게도 일어날 실제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요 실제이듯 우리의 부활 또한 실제입니다.  역사 한 가운데서 성도들은 예수님처럼 부활하게 됩니다.  부활의 능력 또한 실제입니다.  성도는 오늘도 부활의 능력과 부활의 신앙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앙인의 능력도 행복도 바로 부활 신앙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 우리도 죽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때 우리도 부활한 것입니다.  이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모르면 신앙의 절정을 경험할 수가 없습니다.  이 부활의 능력을 잃어버리면 신앙생활에서도 열정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 죽음을 부활로 바꾸신 것은 우리들의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싸움은 이미 끝이 났습니다.  성도의 싸움은 싸워서 이기는 싸움이 아닙니다.  이미 승리가 확정된 싸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이루어 놓으신 영원한 승리를 누리기만 하면 됩니다.  거기에 우리의 구원이 있습니다.  거기에 우리의 희망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죽음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 안에는 포기와 실망과 낙담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기독교는 절망으로 마치는 종교가 아닙니다.  그 안에 희망이 있습니다.  기독교는 죽음으로 끝나는 종교가 아닙니다.  그 안에 부활이 있습니다.  기독교는 십자가가 소중하지만 십자가로 끝나는 종교가 아닙니다.  십자가 이후에 부활이 있고, 거기에 더 풍성한 축복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독교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주님을 만나 죄와 함께 내가 죽는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 내가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길이십니다.  예수님이 나에게 오시면 안 보이던 길이 보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이 당신에게 오시면 무미건조하던 삶에 풍요로운 삶이 약속됩니다.  예수님은 희망이십니다.  예수님이 우리들에게 오시면 절망의 길이 변하여 빛나는 희망이 됩니다.

심리학자들이 실험을 해 보았습니다.  쥐를 잡아서 독 안에 넣고 빛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완전 밀폐를 시켜 놓았더니 3분 안에 죽었습니다.  희망을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조그마한 빛을 열어놓았더니 36시간이나 살아있었습니다.  720배를 더 살았다는 겁니다.

문제는 희망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함께 희망을 사야 할 때입니다.  그런데 그 희망을 어디에서 사야 합니까?  어디에 가야 희망이 있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희망을 찾아 먼 길을 갈 필요가 없습니다.  희망을 사고자 엄청난 돈을 지불할 필요도 없습니다.  지금 바로 여기 이곳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면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오시면 당신의 가정은 희망으로 넘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들에게 오시면 이 땅에는 희망으로 충만할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면 충분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여러분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지금 저와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활짝 열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십시오.  그래서 그분이 여러분의 삶 속에서 부활되어지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의 신앙에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본문 33절 상반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가 보니"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 발길을 돌이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고 즉시로 올라갔습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머뭇거릴 시간이 없습니다.  기회가 지나기 전에 새로워져야 합니다.  가룟 유다와 베드로와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가룟 유다는 머뭇거리다가 회개할 기회를 놓쳐버렸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째 부인하고 나서 닭이 울자 그때에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바깥으로 나가서 울면서 바로 회개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돌이키는 것은 잠시 잠깐 뒤면 늦습니다.  바로 지금 여기 이곳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로마서 4장 25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우리의 범죄함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다시 살아나신 것은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은 이제 더 이상 죄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아니,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은 이제부터는 더 이상 죄와는 상관이 없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6장 6절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살아나신 것은 우리가 다시는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라고 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은 이제 더 이상 죄의 종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우리가 이미 죄로부터 죽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은 죄에 대해서 자유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싸움은 이미 끝이 났습니다.  성도들의 싸움은 싸워서 이기는 싸움이 아닙니다.  이미 승리가 확정된 싸움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둠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승리하셨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한 성도는 예수님께서 이미 이루어 놓으신 영원한 승리를 누리기만 하면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그 영원한 승리를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노만 빈센트 필 목사님의 독수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산골마을의 한 소년이 산에 갔다가 독수리 새끼 한 마리를 잡아왔습니다.  철사줄로 다리를 꽁꽁 묶어서 모이를 주고 마당에서 키웁니다.  처음에는 몇 번 날아가겠다고 날개를 퍼덕여 봅니다.  그때마다 철사가 묶인 다리에서 피가 납니다.  이 독수리는 이제 어미새가 되었는데도 날아갈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어느 날 이 소년이 독수리를 보니 언제 풀어졌는지 모르지만 이미 독수리 다리를 묶고 있던 줄이 풀어져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독수리는 날아갈 생각을 하지 못하고 얌전히 날개를 접고 마당 이곳저곳을 헤집고 다니면서 모이를 주워 먹고 있었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는 묶여 있어서 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닙니다.  여러분을 묶고 있던 그 죄의 사슬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이미 풀어졌습니다.  죄와 사망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저 은혜의 창공을 향해 마음껏 날아오를 수가 있습니다.  아니, 날아올라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죽음의 사슬이 풀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독수리 날개쳐 올라가듯이 주님과 함께 일어나 사명을 향해 걸어가십시오.  시험에 들고 낙심하여 넘어져 있는 모습은 결코 우리 주님께서 기대하고 원하셨던 그 삶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죽음의 권세에 갇혀서 살아갈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죄와 죽음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영적 싸움만큼이나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내 삶이 완전히 승리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깨달았다면 지금까지 걸어왔던 그 엠마오의 길에서 이제 돌이켜야 합니다.

제자들이 돌이켜 어디로 갔습니까?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예루살렘은 '평화의 터전'이라는 뜻입니다.  주전 1000년경 다윗이 하나님의 도성으로 세운 도시입니다.  그곳은 희망의 길, 구원의 자리, 하나님이 기다리는 곳을 말합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이 계신 곳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만나 주시는 곳이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는 말은 하나님 곁으로 돌아갔다는 말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은 서쪽으로 가는 길이었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동쪽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해지는 곳에서 해뜨는 곳으로 갔습니다.  절망을 떠나 희망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낙심을 떠나 기쁨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은 내려가는 길이었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은 올라가는 길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주님의 십자가가 있는 곳이요, 성전이 있는 곳이요, 제자 공동체인 교회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엠마오 도상에 있어야 할 사람들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우리가 절망하고 좌절하고 낙심해야 할 자리가 있는 곳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결코 거기에서 웅크리고 앉아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닙니다.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당신의 나그네 길 한 가운데 계십니다.  당신의 고난 가운데 동행하고 계십니다.

이제 당신이 발걸음을 예루살렘으로 돌이키십시오.  여러분이 발걸음을 엠마오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이키는 순간, 그래서 예루살렘인 제자 공동체로 향하는 순간 여러분의 삶은 달라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으로 발걸음을 들여놓는 순간 여러분의 인생은 달라질 것입니다.

처절했던 유대인 학살 수용소였던 아우슈비치 감옥 벽에는 오늘 찢겨 죽을지 내일 끌려가서 비누공장의 재료가 될지 모르는 암담한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벽마다 엎드려 "하나님, 당신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라고 써넣고 울부짖으며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친구들과 동료들이, 그리고 가족들이 찢겨 죽어 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들은 이렇게 절규했습니다.  "하나님, 살아 계십니까?  하나님, 보고 계십니까?  하나님, 당신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그때 한 신앙인이 그 곁에 이렇게 써 놓았습니다.
"God is here!"  "하나님은 여기에 계신다."
God is here!  하나님은 여기에 계신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한 가지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저 높고 높은 보좌에 계시는 그래서 우리와 전혀 관계가 없는 분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고난을 당하는 그 자리에서 우리와 함께 고난 당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와 함께 울고 있습니다.  우리와 함께 아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바로 여기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하나님께로 돌아오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지금 이곳에 계시다는 한 가지 사실만으로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여러분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을 등지고 가시던 분은 이제 돌아오십시오.  내리막 길로 내려가시던 분은 이제 올라가십시다.  내려가는 신앙,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이 부활의 아침에 부활의 주님을 만남으로 여러분의 신앙에 커다란 전환점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주께로 돌아가십시다.  이제 사명을 붙잡고 다시 올라가십시다.  하나님께서 기꺼이 두 팔을 벌려 나를 반겨 주실 것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너무 멀리 떨어지면 돌아오고 싶어도 돌아오지 못합니다.  너무 내려가면 올라오고 싶어도 올라오지 못합니다.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지금 바로 이곳에서 결단하십시오.  제자 공동체인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 제단의 뿔을 붙잡고 사명을 감당하십시오.

♬"저 멀리 뵈는 나의 시온성 / 오 거룩한 곳 아버지 집
내 사모하는 집에 가고자 / 한 밤을 세웠네
저 망망한 바다 위에 이 몸이 상할지라도
오늘은 이곳 내일은 저곳 / 주 복음 전하리"♬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인생은 나그네길입니다.  언젠가 우리 모두는 반드시 영원한 본향에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토록 사모하고 사랑했던 우리 주님을 뵙게 될 것입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그날에 영원한 본향에서 주님께서 베푸시는 잔치에 참여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부활하셔서 지금도 우리를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십시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의 신앙으로 다시 새롭게 거듭나십시오.

여러분이 부활의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순간 여러분의 삶도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능력 있는 신앙으로 힘있게 솟아오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일은 내 생명을 걸고서라도 경험해야 할 만큼 가치가 있습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걸고서라도 만나야 할 만큼 가치가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임마누엘이신 주님께서 부활하셔서 영으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러므로 부활하셔서 영으로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과 함께 다시 일어나 저 영원한 본향을 향하여 중단 없이 걸어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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