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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왜 나귀새끼인가 (2) (막 1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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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귀새끼인가 (2) (막 11:1~10)    


옛날이야기입니다. 어느 어머니가 눈 하나가 없는 애꾸눈이었습니다. 아이가 자라면서 그 어머니가 부끄러워 어머니가 학교에 오면 숨고 가정부라고 말했습니다. 결국 아이는 크면서 탈선하고 문제아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가 애꾸가 된 사정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려서 아들이 사고로 눈 하나를 잃었을 때 어머니는 아이의 장래를 위해서 한눈을 주어 아이의 눈은 온전하게 하였고 어머니의 한눈은 없어지게 된 것입니다. 아이는 그것도 모르고 그동안 어머니를 너무 많이 오해하고 어머니의 깊은 속마음을 헤아리지 못하였습니다. 모르니까 어머니를 경멸하였고 무시하였고 부끄러운 행동을 하게 된 것입니다. 자식들은 그런 깊은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모르니까 오해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바른 이해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게 됩니다. 이해를 영어로 “understand”라고 합니다. under 와 stand 가 합쳐진 합성어입니다. 그 말은 아래에서 올려다보아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모두 일방적으로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판단하기 때문에 이해가 안 되고 오해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때로 오해는 큰 사건을 일으킬 수도 있습니다. 정치지도자들이 시대를 잘못 읽어서 큰 착오를 일으킨 적도 있습니다. 

큰 인물들이 판단을 잘못 해서 역사에 큰 오점을 남긴 경우도 있습니다. 재판에서 판결을 잘못하면 큰 오판도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오해의 시대입니다. 그래서 관계를 악화시키고 엄청난 판단의 착오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그런데 때로 오해는 이해보다 진실보다 사실보다 더 확신이 있고 강렬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오해하는 사람들은 더 확신 있게 반대하기도 합니다. 선악과가 유혹을 받고 보니까 갑자기 더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탐스럽게 보였습니다. 

그것이 오해의 매력이고 비진리의 힘이고 가짜의 유혹의 힘입니다. 요즘 가짜를 만들어 파는 사람들을 보면 열심히 사명을 가지고 발각되면 감옥에 가는데도 만듭니다. 물론 돈 때문에 그런 짓을 하지만 그 노력가지고 다른 일을 하면 좋을 것인데 굳이 가짜를 만드는 일을 택합니다. 그것이 가짜와 거짓이 지니는 매력입니다. 지난 주일에 “예수를 바로 알자“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수님을 더 깊이 알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3년간의 공생애 삶을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갈릴리 사역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사역지를 갈릴리 해변으로 잡았습니다. 당시 갈릴리는 해변으로 이방인들과 대부분 소외된 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살았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곳에는 병자들과 귀신들린 자와 무당들이 많이 모여 살아갑니다. 그래서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매일같이 귀신들린 자들을 고치고 각종 악성병자들을 고친 것으로 나옵니다. 가난한 동네에 병자들이 더 많습니다. 귀신들린 사람도 무당들과 점쟁이들이 다 그 가난한 동네에 모여 삽니다. 갈릴리는 예수님의 3년 공생애 기간의 활동무대였습니다. 여러분, 마가복음은 모두 몇 장인지 아십니까. 

어떤 목사님이 다음 주일에는 마가복음17장을 공부 할 테니 미리 읽고 오라고 했습니다. 다음 주일에 마가복음17장을 읽은 분은 손을 들라고 하니까 많은 분들이 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거짓말이 들통 났습니다. 마가복음은 16장 까지만 있습니다. 마가복음 1장~9장은 예수님의 갈릴리사역 중 병자 고침, 가르침, 복음전파 사역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10장은 갈릴리에서 사역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고 11장~16장은 예루살렘에서 주로 고난주간에 벌어진 사건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예수님 사역은 갈릴리를 중심하여 이루어졌습니다. 

예루살렘 사역 회피 

예수님의 3년 동안 사역은 가급적 예루살렘은 피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은 마지막 죽는 장소였습니다. 예수님은 주로 갈릴리를 중심으로 일반적인 사역을 합니다. 그곳에서 기적을 행하며 은연중에 메시야임을 나타내셨고 기적을 행할 때마다 백성들은 예수를 왕으로 삼으려 했으므로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고는 즉시 그 자리를 떠나셨습니다. 왜냐하면 아직 예수님의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직도 할 일이 많이 남았습니다. 아직 때가 무르익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때가 되기를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에는 때가 중요합니다. 앞으로 나아갈 때가 있고 뒤로 물러설 때가 있습니다. 안을 때가 있고 멀리할 때가 있습니다. 문을 열 때가 있고 열린 문을 닫을 때가 있습니다. 사람을 살릴 때가 있고 죽일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에도 매사 때가 있습니다. 그 때가 하나님의 섭리가 이루어질 환경이 조성된 때입니다. 아직 입춘도 되지 않았는데 개구리가 밖으로 나오면 얼어 죽습니다. 물은 99도에서도 끊지 않고 정확하게 100도가 되어야 끓습니다. 물을 수증기로 바꾸어 놓는 것은 1도 차이에서 발생합니다. 

그 100도를 임계점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의 모든 물질에는 임계점이 있고 하나의 상태가 다른 상태로 변화하기 위해서는 이 임계점을 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쓰실 때도 이 임계점을 넘어야 쓰임 받습니다. 위대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고난의 어두운 시절을 보냅니다. 그 시절이 임계점입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니까 그 임계점의 선을 넘어 성공하게 되고 하나님으로부터 사용 받는 것입니다. 가장 힘든 때가 가장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할 때입니다. 그런데 그 고비를 넘으면 새 세계가 열립니다. 물도 그 선을 넘어야 끓습니다. 하나님의 때도 기적도 뜻도 섭리도 때가 되어야 즉 임계점을 넘어야 이루어집니다. 지금 예수님은 그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공공연히 입성하심 

마침내 때가 되었습니다. 지금까지는 갈릴리를 중심으로 활동을 하였지만 유월절 명절이 가까워질 때 드디어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입성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은 보란 듯이 당당하게 예루살렘에 입성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기적을 행하고도 말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지만 오늘은 많은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그 환호를 거절하지 않으시고 입성하십니다. 지금까지는 자신이 메시야 됨을 소극적으로 나타내었지만 오늘은 만인에게 공개적으로 자신이 메시야임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십자가를 져야 할 시간 즉 하나님의 때, 임계점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때가 되면 모든 것이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게 됩니다. 나무에 달린 열매들이 익으면 건드리기만 해도 떨어집니다. 모든 열매들은 익으면 단맛을 내고 스스로 떨어집니다. 예수님은 공개적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함으로서 구약에서 말씀한 예언을 스스로 성취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제사장들, 바리새인들을 자극하지 않았지만 오늘은 마음  먹은 듯 그들을 자극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들도 예수를 함부로 하지 못했던 것은 당시 사람들이 예수를 진정한 선지자로 여겼기 때문에 극도로 조심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성전에 들어가 장사꾼들을 몰아냈습니다. 

그리고 내 아버지 집을 강도의 굴혈로 만들지 말라고 을러댔습니다. 그 말은 바리새인들, 제사장들을 무섭게 책망한 말입니다. 그리고 나오다가 무화과나무를 저주해서 말라 죽게 했습니다. 그것은 제사장들 바리새인들에 대한 심판 즉 바리새인들을 향한 아주 무서운 책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종교인들 바리새인들 제사장들의 분노가 폭발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에서 1주일간은 일촉즉발의 위기의 시간이었습니다. 

어린 나귀새끼 타고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갈 때 어린 나귀새끼를 타고 갔습니다. 왜 잘 훈련된 군마를 타지 않고 어린 나귀새끼를 탔는가 하면 그것도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스가랴 9장9절을 보면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 나귀를 타시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타이밍을 인파가 절정에 달했을 때인 유월절 명절 때를 선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얼마 전까지 기적을 베풀어 나병환자와  눈먼 장님과 앉은뱅이와 38년 된 병자를 고치고 물위를 걷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고 귀신을 내쫒고 죽은 자를 살리셨습니다. 

그런 기적을 보고 백성들의 이목이 예수님에게 집중되었고 백성들은 뭔가 기대를 했습니다. 그래서 유월절 명절 때 수많은 인파가 예루살렘으로 집결했습니다. 역사가 유세비오스에 의하면 그해 유월절 명절에 바쳐진 제물만도 12만 마리였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엄청난 인파가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왜 그 많은 인파가 모여들었는가 하면 모두 예수의 소문을 듣고 뭔가 기대를 가지고 이심전심으로 모여들었을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 때를 택하여 지금과는 대조적인 모습으로 왕으로 개선장군처럼 입성하였습니다. 

당시 개선장군은 군마를 타고 칼을 높이 쳐들고 입성하여 많은 시민들로부터 박수와 갈채를 받았습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개선장군처럼 입성하였습니다. 그런데 다른 점은 개선장군은 군마를 타고 칼을 높이 쳐들고 들어갔지만 예수님은 빈 몸으로 아주 초라한 나귀새끼를 타고 들어갔습니다. 왜 가장 초라한 나귀를 그것도 나귀새끼를, 나귀새끼 중에서도 남에게 빌린 것을 안장도 없어서 제자들이 옷을 벗어 깔고 갔습니다. 그것이 무슨 의미냐 하면 예수는 군림하는 개선장군이 아니고 겸손과 평화의 왕이라는 점을 부각시키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은 5병2어로 5천명을 먹이고도 남기는 능력이 있지만 그런데 자신은 때로 스스로 배고파하심을 감당하였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신 예수이지만 그는 스스로 죽음의 쓴 잔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외관상 무력하였지만 내면에는 너무 강한 능력과 살리는 능력과 호령하는 능력을 소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스스로 낮추시고 개선장군이 아닌 초라한 나귀새끼를 그것도 빌려서 타고 입성하였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진정한 왕이고 메시야이고 하나님의 아들임을 무언극으로 세상에 알리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의미를 이해도 납득도 알아차리지도 못한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를 겸손과 평화와는 거리가 먼 이방세력을 물리쳐 줄 정치적인 메시야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눈에는 그 나귀새끼가 눈에 보일리가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왜 나귀새끼를 타고 가는지를 알 까닭이 없었습니다. 백성들의 눈에는 그 나귀새끼가 군마와 같이 보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의 모습도 개선장군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그토록 환호하였고 찬양하였고 호산나하고 춤추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의 메시야 이해가 잘못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나귀새끼를 탄 예수를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그 기대가 빗나갔을 때 그 입으로 예수를 죽이라고 소리를 질렀던 것입니다. 

메시야 바른 이해 

우리는 여기서 우리의 신앙고백을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를 너무 잘못 이해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구원과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오신 구원의 메시야임은 상상도 못하였습니다. 모두 정치적으로 힘으로 기적으로 로마로부터 해방시키고 자유를 주는 메시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순간 환호하였고 또 순간 태도가 돌변하여 죽이라고 소리를 질렀던 것입니다. 이해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원대한 뜻을 사람들이 다 알기에는 역부족입니다. 하나님은 원대한 뜻으로 예수를 세상에 보내 십자가를 지게 하였고 죽고 부활하게 하셨습니다. 

그런 그 깊은 구도의 뜻을 누가 헤아려 알겠습니까. 그래서 오해하고 엉뚱한 기대를 하고 환호했다가 저주로 돌변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오늘은 어떻습니까. 오늘도 어떤 사람은 예수를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성자로만 이해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4대 성인이니 3대 성자니 하고 말하기도 합니다. 또 예수를 한 시대에 나타났던 계몽운동가로 사회를 개혁하고 가난한 자들을 먹이시고 병자들을 고치고 노예제도를 헐고 사회를 개혁하다가 기득권에 의해서 죽임당한 사람으로 아는 분들도 있습니다. 교회 밖에서는 그렇게 이해하는 것은 무리도 아닙니다. 모르면 그럴 수도 있고 오해도 곡해도 가능합니다. 

그러면 교회안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는가 하면 오늘 교회안의 그리스도인들도 역시 예수를 잘 모릅니다. 그래서 잘못 이해하고 잘못된 기대를 하는 신자들도 있습니다. 그 말은 우리의 신앙고백이 잘못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신앙 간증 하는 것을 보면 대부분 내가 기도해서 병을 고쳤고 내가 예수를 믿어 복을 받았고 돈을 벌었고 내가 이렇게 했더니 성공했다고 간증을 합니다. 물론 기도해서 병도 고치고 복도 받고 성공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내용이 지극히 신앙의 일부분이라는 점입니다.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 중에도 그런 감격과 치료와 성공과 복을 받음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신앙 간증이나 고백이 아닙니다. 신앙고백의 원형은 사도신경입니다. 사도신경은 신앙고백의 교과서이고 모델이고 기준입니다. 거기 보면 내가 병을 고치고 성공하고 돈을 벌었다는 내용은 들어 있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천지의 창조주이시고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나는 믿으며 그는 성령으로 잉태하여 동정녀에게 나심을 나는 믿으며 마침내 고난 받으시고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지금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고 이다음에 반드시 심판하러 오실 줄을 나는 믿습니다.” 그것이 아주 건강한 신앙고백입니다. “그 하나님은 지금도 나와 함께 계시며 성령은 지금도 나의 일생과 나의 삶을 주도하고 계시며 우리 주님은 나의 구주로서 내 삶의 중심이 되십니다.” 이것이 신앙고백입니다.  

신앙은 이 고백의 바탕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그래야 그 신앙이 어느 환경에서나 견고하게 하게 됩니다. 집을 지을 때 기초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신앙의 기초가 성공, 물질, 돈, 명예, 형통위에 세워지면 그 조건들이 훼손되고 사라질 때 그 신앙도 함께 허물어지게 됩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께서 기적을 행하고 돌아다닐 때 다 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왕으로 삼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는 기적은커녕 무력하게 붙잡히고 힘없이 잡혀가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실망하였고 정치적인 사람들의 막후 손놀림이 빨라지면서 군중은 이용당하여 예수를 죽이라고 소리를 질렀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적이 일어날 때는 뭔가 이루어질 것 같았는데 그곳에 기적이 없으니까 예수는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신앙고백은 그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들이 아무리 열심히 봉사하고 헌신하고 열정적으로 기도할지라도 그것도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를 현실적인 문제들을 해결해 주는 예수로 알면 그 기도나 열심이나 봉사는 잘못된 것들입니다. 그때는 내 소원을 이루어 주면 주님이고 안 이루어 주면 실망하고 버리게 됩니다. 예수는 우리에게 형통을 주시려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병을 고치려 오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죄에서 해방하고 자유함을 주시려고 주어진 자리입니다. 예수의 부활은 자유함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신 사례입니다. “나는 그 주님을 믿습니다” 그 신앙고백 위에 신앙이 세워져야 합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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