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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데살로니가와 베뢰아를 선교하다 (행 17: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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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와 베뢰아를 선교하다 (행 17:1~15)
 

오늘은 교회력을 따라 종려주일로 지킵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 이스라엘 백성은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호산나’하며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오신 주님을 환영하고 기뻐했습니다. 이렇게 입성하심은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을 이루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또한 예루살렘 성전을 새롭게 지으시려는 목표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전에 들어가기에 앞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셔서 열매맺지 못한 예루살렘 성전을 심판하사 그의 육체로 새 성전을 지으심을 암시했습니다. 그 의미를 알고 여러분이 오늘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의 주제는 1:8절에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는 것으로 알아서 무슨 신비한 능력을 행하거나 병든 자를 고치는 능력이 오는 것으로 많이 이해했더랬습니다. 아니면 방언이나 예언 등의 성령의 은사를 나타냄이 성령이 오신 권능의 표시인 것처럼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1:8절이 증거하듯이 성령이 임하신 권능은 그 문장에서 말하는 대로 ‘내 증인이 되는’ 권능입니다. 그럼 ‘내 증인’은 어떤 증인인가에 대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를 그리스도인이라고 함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따라서 자신을 나타내고 증거하는 증인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만을 증거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곧 그의 증인입니다.

이처럼 증인이 된다고 하니까 우리는 ‘재미’를 많이 주어야만 증인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또한 ‘감동’이라는 것을 주어야만 증인이 되는 줄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리스도를 나타내기 위하여 재미와 감동을 주어야만 된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현재 TV 방송의 프로그램을 보면 잘 알게 됩니다. 재미와 감동을 주기 위하여 애를 써서 시청자의 눈과 귀를 사로잡으려고 합니다. 아무리 인기가 많고 지속되었다 하더라도 어느 한 날 재미가 없어지거나 감동이 사라지면 그 프로그램은 얼마 가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현대인은 재미와 감동을 추구하니 잘되는 프로그램은 바로 이것을 충족시켜 주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도 재미와 감동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교회를 가는 목적이 재미와 감동을 얻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설교에도 재미와 감동이 적절하게 가미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여러분도 아시는 바와 같이 현재 아주 재미가 있다고 알려진 기독교 TV에 나오는 목사님도 그런 것 때문에 유명세를 누리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예배에 참석하는 교인들의 욕구 충족을 위하여 재미를 추구하는 목사님들도 계시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들이 설교 시간에 그렇게 길게 의자 가운데 앉아서 ‘이제 한 번 나를 재미있게 하고 감동을 줘 보시라’는 태도로 설교자를 주시합니다. 그리하여 내가 재미가 있고 감동을 받으면 그 예배가 훌륭했다고 말합니다.

TV를 보면서 인기가 있고 충격을 주는 프로그램은 리모컨을 통해서 그 채널이 선택되어집니다. 설교를 잘하는 것은 재미가 있다는 말이고, 설교를 못하는 것은 재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인기 있는 TV 프로그램을 선택하는 것처럼 요즘의 교인들도 재미있는 설교를 찾아 이 교회, 저 교회로 떠돌아다니기도 합니다.

이러한 경우는 비단 설교나 예배 뿐 아니라 성경말씀을 읽을 때도 역시 나타납니다. 성경 어느 본문을 읽을 때 그 말씀이 내 눈에 들어오게 되는 까닭은 내 마음에 맞고 내 기분에 맞기 때문이지 성경 자체의 문맥을 이해해서 자기 눈에 들어오는 것은 아닙니다. 

QT를 행할 때도 그 본문 중에 어떤 말이 친구에게 어울릴 수 있는가를 판단해서 자기 마음을 감동주는 구절만 선택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읽어도 자기 재미와 자기 감동을 위하여 읽는 것이지, 그리스도의 영화로움을 위하여는 생각을 못합니다. 나에게 의미가 되고, 나에게 즐거움이 되고, 나에게 감동을 가져다 주는 말씀이 자기 마음에 새겨지게 됩니다. 

그러니까 교회를 다니면서 예배함도, 말씀을 읽는 행위도 전부 자기가 기준이 됩니다. 성경을 읽을 때, 나를 기쁘게 하는 말씀인가에 따라 결정이 되지 저자의 뜻과 목적이나 주제는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경배하거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결국 자신을 우상숭배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부모님의 환갑잔치에서 자녀들이 행하는 춤과 노래 등은 모두 누구의 기쁨을 위한 것입니까? 자녀들 자신의 기쁨과 만족과 재미를 위하여 그런 행사를 벌이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부모님의 기쁨을 위하여 그렇게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의 말도, 하나의 표정도, 하나의 몸짓도 어떻게 하면 부모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하여 나타내는 것입니다. 절대로 자녀들은 부모님의 환갑잔치에서 자신을 기쁘게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렇게 한 자리에 모여 예배함도 사실 환갑잔치에서 부모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과 하등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있습니까? 그저 박수나 소리내서 쳐 드리고 하늘 높이 손을 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까?

주님께서 갈릴리로부터 오셔서 세례 요한에게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로부터 음성이 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기뻐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또한 변화산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올라가셨을 때도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기뻐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기뻐하심, 하나님의 사랑하심은 이 아들에게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부모님이 자식을 기뻐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사랑하는 대상에 대하여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하여 말하기 보다 사랑하는 대상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자신에게 더 기쁨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쁨을 준다라고 했을 때는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에 대하여 말한다는 것이 되고 그 말하는 것은 시간이 가는 줄 모릅니다. 막 결혼한 신부는 자기 친구들을 만나 하루종일 수다를 떠는 내용이 자기가 사랑하는 남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처럼 자기에게 기쁨이 되는 것은 사랑하는 자를 말할 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단순히 천당가는 비법을 전수하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기뻐하는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 아니 계시다라는 존재를 기뻐하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축적을 위하여 모여 성경에 대한 진도를 나가는 것으로 기뻐하는 곳이 아닙니다. 이렇게 우리가 이 자리에 함께 모여 예배함은 하나님을 기뻐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여기 앉아 있어야만 천당갈 수 있기 때문에 여기 있어서는 곤란합니다. 만일 그렇게 예배한다면 항상 예배가 딱딱하고 기쁨이 없이 냉랭하게만 됩니다. 출석부에 도장을 찍었다는 만족이나 안위함으로 예배한다면 그건 정말 어리석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이 이처럼 사랑하시고 기뻐하시는 아들에 대하여 증거하고 나타내는 것을 좋아하고, 그 아들을 증거하기 때문에 감동이 있습니다. 그럼 이 아들에 대하여 어떻게 교회가 증거해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아주 명쾌하고 쉽습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본문에 있는 것처럼 ‘예수는 그리스도라’라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가 증거해야 할 핵심입니다.

여러분에게 강론하였던 마가복음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눈다면 전반부는 그리스도의 이름에 대하여 8:26절까지 기록을 하였고, 후반부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하여 기록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방인에게 전한 마가복음은 그 내용이 전부 오직 그리스도에 대하여 기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마가복음은 재미와 감동을 주고 자기를 찔러주는 은혜의 말씀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것을 증거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성경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기록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 처음에 제가 여러분에게 예배에 대하여, 성경에 대하여, 설교를 듣는 것에 대하여 여러분이 어떤 원함으로 나아왔는지 말씀을 드린 것은 바로 이런 점을 먼저 생각하고 듣는 것이 좋겠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도행전 17:1-15절이지만 이 말씀을 풀고 해석하기 위해서는 항상 사도행전 전체를 보고, 오늘 본문이 속한 단락을 본 다음에 접근해야 합니다. 사도행전은 성령이 오순절에 임하므로 출생한 교회가 복음을 전파했는데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여 당시 세상의 제국 도성인 로마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즉 이전의 구약의 하나님 나라의 도성인 예루살렘에서 시작한 그리스도의 나라가 세상 나라인 로마를 정복함으로 땅끝까지 복음이 증거되었다고 말합니다. 

또한 복음의 전파는 유대 땅과 이방 땅으로 나눌 수 있는데, 유대 땅에 대한 복음전파는 사도 베드로가 중심이고, 이방 땅에 대한 복음전파는 사도 바울이 중심입니다. 그리고 교회를 따라서 본다면 유대 땅에 대한 복음전파는 예루살렘 교회가 그 전초기지 역할을 하였고, 이방 땅에 대한 복음전파는 안디옥 교회가 전초기지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도 오늘 본문에 대한 내용을 볼 때 이방 땅에 대한 복음전파를 생각하면 아시아와 유럽으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와 베뢰아는 유럽에 대한 복음전파에 속해 있습니다. 로마의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인 빌립보를 복음을 통하여 점령하였고 이제 점차 유럽의 여러 성으로 확대됩니다. 빌립보를 교두보로 하여 데살로니가와 베뢰아로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이렇게 시작하여 로마까지 복음의 진격이 일어났다고 사도행전은 말하는 셈입니다.

빌립보 성에서는 귀신 들린 여종을 치료함을 통하여 복음이 간수의 집에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무슨 신비한 능력이 나타나 귀신을 내어쫓았습니다. 그런 반면에 데살로니가와 베뢰아 선교는 그런 일이 하나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데살로니가와 베뢰아 복음 전파의 특징은 바로 성경을 풀고 해석하며, 성경에 대하여 간절히 사모하여 과연 말씀이 그러한가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다고 말씀합니다. 데살로니가와 베뢰아, 그리고 고린도와 아덴에 이르기까지 나면서 앉은뱅이를 고치거나 귀신을 쫓아내었다는 말은 없고 고린도에서는 일년 육개월 동안 머물며 성경을 가르쳤다는 말씀을 합니다.

이렇게 보면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에 어떻게 교회를 세웠는가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곳과 다른 곳에서도 항상 사도 바울은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먼저 복음을 전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교회가 출생한 이후로부터 교회는 항상 유대인들로부터 핍박을 받아 왔습니다. 사도 바울도 유대인으로서 기독교를 앞장서서 박해한 자였습니다.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나 본 이후로 다메섹에 들어가 말씀을 전하다가 도망가는 장면도 유대인의 핍박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항상 유대인의 핍박을 받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어떤 도성에 들어가기만 하면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는 것을 먼저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도 어떤 사람이나 단체로부터 시비가 일어나거나 소동이 일어나게 되면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이 꺼려지게 됩니다. 그러니 사도 바울에게도 얼마나 진절머리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현대인의 복음전파 전략에도 이는 맞지 않습니다. 갈 때마다 부딪치고 가는 곳마다 소동이 벌어지는데 그 일을 계속한다는 것은 사실 어리석게 보입니다. 그런데도 왜 사도 바울은 부득불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먼저 하시는 것입니까?

그렇다고 해서 현대의 선교사들이 항상 먼저 유대인에게 들어가지는 않습니다. 우리 나라에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 없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슬람 성전은 있다고 알고 있는데 유대인의 회당에 대해서는 들어본 바가 없습니다. 사도행전의 복음전파를 현대에도 그대로 답습해야 한다면 그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그 시대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사도 바울이 유대인의 회당에 먼저 들어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아마도 구원역사 때문인 것 같습니다. 유대인이 먼저요 이방인이 나중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역사의 장자 역할을 먼저 유대인이 맡았고 그 다음에 이방인입니다. 이것이 확실한 답은 아닙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를 보면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했다고 합니다. 이에 대하여 우리가 더 잘 알 수 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1-10절입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 가운데 들어감이 헛되지 않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아나니 너희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의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말하였노라 우리의 권면은 간사에서나 부정에서 난 것도 아니요 궤계에 있는 것도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 전할 부탁을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의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거하시느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도로 능히 존중할 터이나 그러나 너희에게든지 다른 이에게든지 사람에게는 영광을 구치 아니하고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으로만 아니라 우리 목숨까지 너희에게 주기를 즐겨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니라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과 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였노라 우리가 너희 믿는 자들을 향하여 어떻게 거룩하고 옳고 흠없이 행한 것에 대하여 너희가 증인이요 하나님도 그러하시도다.”

빌립보에서 고난을 당했고 도망가며 데살로니가에 들어가 복음을 전파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바울은 사람에 대하여 아첨의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않았다고 하며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수고하며 복음을 전했다고 말합니다. 그들에게 재미와 감동을 주기 위하여 증거한 것이 아니라 오늘 사도행전 본문에 말씀한 바와 같이 성경을 풀어 그 뜻을 해석하여 복음을 전파했는데 마치 유순한 유모가 자식을 기른 것처럼 복음으로 봉사했다고 말합니다.

친어머니 같은 경우에는 자식을 길러놓으면 그래도 어느 정도 보상이 따르는데 유모의 경우에는 별로 보상이 없는 것 같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사람들로부터 무언가 받아내기 위하여 바울은 밤낮으로 일하며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한 복음 전파가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람의 귀에 듣기 좋은 말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 전파는 성경을 풀어 강론하였고 그 내용은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핵심이었습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 교회의 복음 전파는 고린도처럼 일년 육개월을 머물며 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3주 정도만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시기하여 소동을 일으킴으로 바울은 쫓겨났습니다. 3주 정도로 아주 짧은 기간 동안 복음을 전한 데살로니가 교회가 여전히 믿음의 시련 중에 있었는데 사도 바울은 이들이 믿음을 잃지 않을까 매우 노심초사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덴에 머물며 디모데를 보내어 데살로니가 교회가 믿음에 굳게 서 있는지 알아보려 했습니다. 디모데로부터 들려온 소식은 데살로니가 교회가 믿음에 굳게 서서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 뿐 아니라 다른 지방에도 그 믿음의 소문이 퍼져 나가게 되었다는 아주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에는 다른 서신서와 달리 독특한 말이 나옵니다. ‘너희에게 쓸 것이 없는데’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너희에게 별로 할 말이 없다는 표현입니다. 별다른 권면이 필요치 않은 교회라는 말입니다. 그처럼 데살로니가 교회는 믿음으로 잘 서 있었습니다. 다 잘하고 있으니 덧붙여 쓸 말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데살로니가전서는 너희가 이미 사도가 전한대로 잘 하고 있는데 거기에다 ‘더 많이 힘쓰라’고 권면할 뿐입니다. 이미 잘하고 있으니 더 잘하라고 할 말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데살로니가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사도는 성경 곧 구약성경의 뜻을 풀어 해석하였습니다. 17:3절입니다.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바로 이 복음이 데살로니가 교회로 하여금 많은 환난 가운데서도 굳게 서게 한 능력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는 성도들을 위하여 아첨할 필요가 없습니다. 재미와 감동을 주기 위하여 개그맨처럼 행동할 필요가 없습니다. 교회에 성령을 부으심은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한 것이고, 교회는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사랑하시는 아들을 증거하는 것이 그 본분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세상의 인기 있는 TV 프로그램과 달리 오직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말할 뿐입니다. 바로 이 분을 증거함으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고 새 백성을 그 도성에서 일으키셨습니다.

여기 본문에서 유대인들이 시기했다고 합니다. 구약 역사에서 유대인은 하나님 나라의 장자였고 이방인은 신약 역사에서 하나님 나라의 장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이 이 장자됨을 시기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본문이 말하는 점을 따라 본다면 그 시기는 바로 4절의 말씀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중에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좇으나” 그 성의 큰 무리와 귀부인이 바울과 실라를 좇았기 때문에 시기가 일어났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여러 번 제가 말씀드렸드시 로마가 그 큰 제국을 통치하면서 골칫거리 중에 하나가 바로 유대인 문제였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은 로마제국의 다른 민족들과 다르게 오직 유일신을 믿기 때문이었습니다. 로마는 이름을 다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로 많은 신들이 있었는데 유대인은 오직 하나만을 섬긴다고 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여러 잡신들이 많은 것보다 하나의 신을 말하는 것이 더 신빙성이 있어 보일 것입니다. 여기 경건한 헬라인의 무리도 그렇게 유대인에게 들어와 있지 않은가 생각됩니다. 이것은 단지 추측일 뿐이지 확실한 사실은 아닙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자들이 바울과 실라를 좇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시기한 것입니다.

이 유대인들이 괴악한 사람들을 동원했습니다. 보통 시위가 나거나, 달동네 같은 곳을 철거하기 시작할 때 요즘에도 힘깨나 쓰는 사람들을 동원하지 않습니까! 바로 그런 자들을 연상하시면 괴악한 사람들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을 동원하여 바울과 실라를 찾았으나 찾지 못하자 야손의 집에 들어가 그를 끌어내어 야손을 고소했습니다. 

이처럼 항상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런 소동이 따랐습니다. 그뿐 아니라 바울과 실라는 결국 야반도주를 감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께 항상 말씀드리듯이 성령의 권능은 가는 곳마다 핍박을 당하고 도망가는 모습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성령의 권능은 자기를 높여 큰 업적을 이루고 신비한 능력을 행하는 사람들로 부흥회의 간증자들이 자신을 이야기합니다. 얼굴도 반짝일 정도로 화사합니다. 그러나 그런 모습에 비하여 여기 바울과 실라는 아주 초라하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예수님도 갈릴리 사람, 나사렛사람이라 일컬음을 받았습니다.

오직 성경이 이 그리스도에 대하여 해를 받으사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셨다는 것을 말하며 이 분이 그리스도로서 승천하여 모든 만민의 왕으로 오르셨다고 증거하였습니다. 그게 복음의 핵심이었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 사람들과 비교하여 달랐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을 본문에서는 신사적이었다고 합니다. 신사적이라고 하니까 영국 신사를 떠올리거나 오픈 마인드를 가진 사람이라고 그 말을 풀어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것 보다는 그냥 그 문장에서 신사적이란 말을 푸는 것이 좋습니다. 그 뒤에 설명을 하니까요.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바로 이것이 신사적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베뢰아 교인들은 마음이 간절하여 이것이 그러한가 하며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다고 합니다. 복음의 전파는 늘 신비를 동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첫 성에 대한 복음전파는 그런 것을 동원하지만 다른 곳에서는 성경 말씀을 듣는 것으로 말합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바울이 복음을 증거할 때 마치 하나님 앞에서 말씀을 듣는 것처럼 하였다고 말합니다. 성경을 단지 3주 동안 강론하였는데 그들이 이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베뢰아교회도 말씀을 듣고 그러한가 날마다 상고함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원이 되었습니다. 

항상 구원을 얻으려면 신비의 체험이나 큰 감동이나 눈물을 경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는 전혀 데살로니가 교회와 베뢰아 교회가 생겨난 것과 맞지 않습니다. 요즘 제가 입교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교육을 받는 형제와 자매들에게 강조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마가복음과 출애굽기를 가지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얼마나 마음이 찔렸는가, 어느 집회에 참가하여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로 주님을 만났고 구원을 얻었다고 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마가복음에서 증거하는 그리스도가 누구이며 어떻게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왕이신지 그냥 정상적인 상태에서 듣고 영접하라고 가르칩니다. 마가복음에 나타난 그리스도만이 자기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왕이심을 확실히 알고 영접하며 그의 백성이 되라고 가르칩니다.

항상 비정상적인 것이 정상적인 것을 대치하게 되면 혼란을 초래하게 됩니다. 초자연적인 역사가 자연적인 역사를 대신하게 되면 역시 혼란에 빠집니다. 그로 말미암아 정상적인 질서가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집에서 삼시 세끼를 먹는 것이 정상이지 외식을 하는 것만이 정상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복음의 전파도 기록된 말씀을 통하여 아주 정상적인 상태에서 전 인격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습니다.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이 있는데 데살로니가 교회는 아주 짧은 3주 동안의 복음전파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쓸 말이 없을 정도로 믿음과 사랑이 다른 지방으로 확대되고 전하여졌습니다. 복음이 전하여질 때 환난을 겪었습니다. 복음을 받아 들인 후에도 환난이 끊이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믿음에 굳게 서 있었습니다.

우리가 전하는 이 복음도 3주만이 아니라 한 시간에도 복음을 받아들일 수가 있습니다. 정말 안타까운 점은 이전의 알던 복음이 아니라고 그렇게 대비를 시키며 강조를 하였는데 여전히 이전의 복음의 토대에서 자기를 설명할 때는 정말 어쩔 줄 모르겠습니다. 아닌 것을 계속 말하니 답답하기만 합니다. 이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기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저 천당가는 비법만 알 뿐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그 귀가 열려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는 아내가 남편을 사랑하면 남편을 잘 알지만 남편을 사랑하지 아니하면 남편을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자식도 사랑하지 않는다면 부모가 자식을 알 수가 없습니다. 지식의 축적과는 아주 다른 것입니다. 이 복음을 접하고 오랜 시간을 보내었는데도 여전히 무지함 속에 있다면 자기 자신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생명이요 구원입니다. 

그렇다고 다 내칠 수는 없는 문제입니다. 우리가 오래 인내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모든 말씀에 대하여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사람은 복음에 관심이 없는 사람입니다. 한 마디로 오늘 사도행전의 본문 말씀을 따라 말한다면 그는 신사적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그건 맞지 않는 것 같은데요 라고 주장하며 따지는 자들이 낫습니다. 그들은 어느 순간에 복음으로 확 자기 자신을 바꿀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도 없고 아무런 기쁨도 없이 그저 좋다고만 앉아 있는 자들은 심각한 문제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모든 것을 다 안 것처럼,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는 자들이 큰 문제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듣는다는 것은 무슨 특별한 조치가 임하거나 기상천외한 놀라운 능력이 임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직 복음을 듣고 그 말씀을 받아 그리스도임을 아는 자들이 주님의 백성으로 서는 자들입니다. 이미 다 안다고, 진도 다 마쳤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복음을 모르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늘 감당해야 할 최고의 사역은 성경을 풀어 가르치는 일입니다. 성령의 감동함을 입은 사람들이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을 교훈하는 것에 착념하여 이 말씀이 사람을 온전케 함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자라고 믿음에 굳게 서 있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성경을 가르치며 풀어 해석하여 강론함으로 가능합니다. 아무리 효과가 없는 것처럼 보여도 교회는 이 사역을 성실하게 감당해야 합니다. 

성경말씀은 자기에게 감동을 주는 구절만이 말씀이 아닙니다. 예배시간에 나와 어떻게 재미와 감동을 얻어 돌아갈꼬 라고 있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복음이 그러한가 날마다 상고하는 신사적인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리여야 합니다. 설교자는 사람을 위하여 아첨의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않아야 합니다.

이 시간에도 성경을 풀어 강론할 때 이 말씀에 아멘으로 화답하고 날마다 성경을 간절한 마음으로 상고하여 그리스도의 통치에 순종함이 우리의 구원이요 생명입니다. 아무쪼록 우리가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짧은 기간의 복음 전파에도 불구하고 믿음과 사랑이 다른 지방에 소문으로 전해지며, 베뢰아 교회처럼 신사적인 신자들로 가득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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