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부활주일] 울음을 멈추라 (요 20:11~18)

  • 잡초 잡초
  • 262
  • 0

첨부 1


울음을 멈추라 (요 20:11~18) 
 
 
어릴 때에 했던 놀이 중에 무엇이 기억에 남습니까? 
아마도 여성분들은 소꿉장난이나 인형놀이를 하면서 놀았던 기억이 있을 것이고, 남성들은 병정놀이, 전쟁놀이를 했던 기억이 제일 많을 것 같습니다. 전쟁놀이는 요사이도 남자 아이들이 좋아하는 스릴 만점의 놀이입니다. 장난감 총으로 상대방을 향해서 “탕! 탕! 탕!”하고 쏘면 금방 사람이 “픽!”하고 쓰러지며 죽는 흉내를 내다가 다시 또 살아나 벌떡 일어납니다. 그리고 또 뜀박질을 하면서 전쟁놀이를 합니다. 죽어 넘어질 때마다 마치 불사조처럼 일어납니다. 아마도 이렇게 어린아이 때처럼 많이 죽어본 적도, 또 다시 살아난 적도 없을 것입니다. 이런 어릴 때의 추억을 못 이겨서 청?장년이 되어서도 전쟁놀이인 서바이벌 게임을 즐기기도 합니다. 심지어 서바이벌 게임에 참여한 사람들은 이 게임의 예찬론을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작전을 짜기 때문에 협동하는 즐거움과 기쁨도 있다. 단시간동안 집중적으로 돌아다니기 때문에 어떤 운동보다 더 많은 에너지와 운동으로 모든 일들을 즐거움 속에서 하기 때문에 피로도 느끼지 않는다. 쌓였던 스트레스를 이때에 다 풀어버리고 때로는 승부욕으로, 때로는 도전의식을 갖고 하기에 적극적인 삶을 살 수 있게 한다.” 
 
이런 이유로 기업들도 의도적으로 서바이벌 게임을 직원들에게 행하도록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이런 놀이에서 수없이 죽음을 맞이했어도 진정한 의미에서 죽음이 무엇인지를 인식할 수는 없습니다. 죽음이란 결코 놀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죽음이란 그냥 죽었다가 다시 일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이 곁을 떠나게 될 때 우리는 죽음이 얼마나 아프고 두려운 것인지 마음속에 깨닫게 됩니다. 가슴이 아린 상처를 안고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는 것을 마음속에 그리워하게 됩니다. 
 제 자신도 죽음을 실감한 것이 막 중학교를 들어갔을 때입니다. 그때에도 벽제 화장터가 있었습니다. 그곳에 갔을 때 옆에 한 아주머니가 슬픔으로 사랑하는 남편의 장례식을 치루고 있었습니다. 남편의 관이 화장터 불구덩이 속에 넣어졌고 세 시간 정도가 지나서 화구가 열리고 시신이 누워있던 받침판이 앞으로 굴러 나왔습니다. 요사이는 앞에 유리막이 되어 있지만 그때에는 옆에서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화구가 열린 후 굴러 나온 받침판에는 남편이 남긴 뼈 조각 몇 개가 놓여 져 있었습니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은 아주머니가 남은 뼈 조각을 보면서 “여보! 이게 당신이야?”하고 소리치면서 통곡했던 모습입니다. 
 
아마 지금 생각해보니, 여인은 그 순간 과거의 모든 일들이 머릿속에 주마등같이 스쳐지나갔을 것입니다. 남편과 사랑했던 시절, 오순도순 대화하며 나누었던 모습이 순간적으로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한줌의 재로 변한 남편의 모습에 여인은 경악하면서 통곡한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우리 주위에 사랑하는 사람을 한 분 이상 떠나보내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음을 맞이할 때 우리의 마음이 쓰리고 아픈 것을 경험합니다. ‘인생이 왜 이렇게 허무한 것인가? 아니 다시 살아날 수는 없는 것인가? 정말 다시 살아난다면 마음껏 사랑할 텐데...... 모든 정성을 바쳐서 함께 살아가면서 더불어 살 텐데......’ 
 
우리가 장례식장 앞에 서게 되면 이런 마음을 다시금 깨닫게 됩니다. 
죽음이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죽음에 대한 정의와 특성이 많지만 죽음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결코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넌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지녔던 인간관계의 모든 것이 다 단절되어 회복이 불가능하게 됩니다. 철회할 수 없고, 반복되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물은 엎질러져도 다시 따르면 되고 실수를 해도 다시 시도하면 됩니다. 
 
자녀들이 대학에 혹 떨어졌어도 그것이 인생 전체의 실패는 아닙니다. 다시 준비해서 시험을 보면 됩니다. 사업이 실패해도 다시 시작하고 일어서면 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많은 것들 중에 죽음만큼은 다시 되돌릴 수가 없습니다. 철회할 수가 없고, 반복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녹음된 테이프를 돌리듯이 반복되어지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죽음만큼은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사랑하는 어머님의 장례를 치르고 나서 집으로 왔는데 돌아가셨다고 생각한 어머니가 집 앞에 나오셔서 나를 맞이하며 이름을 불러주신다면 얼마나 놀라고 두렵겠습니까? 그러나 또 얼마나 반갑고 기쁘겠습니까? 
  
본문에 나오는 마리아가 그런 모습을 지니고 있습니다. 결코 되돌릴 수 없는 줄 알았고,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살아계신 주님이 마리아에게 다가오시는 것을 오늘 본문은 우리들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녀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예수님은 도대체 어디에 계신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만 생각해도 가슴이 아픈데 예수님의 시신에 기름을 부어주려고 찾아왔는데 예수님의 무덤이 열려있고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져 있었습니다. 그는 그 순간 ‘누가 뺏어갔는가? 누가 훔쳐갔는가?’를 생각하며 빈 무덤 앞에서 통곡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다른 사람이 아닌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일곱 귀신들려서 정신적인 질환으로 고통 받고 있다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일곱 귀신이 쫓겨났고 건강해졌습니다. 정신이 올바르게 되었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서 평생 주님을 따라다녔습니다. 복음서에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기름 부은 여인의 이름은 성경에 나와 있지는 않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 여인이 막달라 마리아였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천하고 죄 많은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후에 소중한 여인으로 바뀌게 됩니다. 상처뿐인 삶을 치유 받은 여인, 엄청난 죄악을 용서받은 여인, 너무 많은 죄악을 용서 받았기에 예수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여인이 예수님의 시신에 기름을 바르려고 안식 후 첫날, 예수님의 무덤 앞에 나왔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힐 때, 남자 제자들은 다 무서워서 도망가 버렸습니다. 스승처럼 붙잡혀서 십자가에 달릴까봐 남자 제자들은 다 도망갔지만 여자 제자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남았습니다. 그 현장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보았습니다. 거기에 막달라 마리아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은 움직일 수가 없어서 집에 머물렀고 안식 후 날이 새는 것을 보자마자 여인들이 먼저 예수님의 무덤 앞에 찾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무덤이 비어 있었습니다. 
 
이 순간 왜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생각을 할 수가 없었을까요? 아마 우리도 생각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누군가가 예수님의 시신을 빼돌렸다.’고 안타까워하며 눈물 흘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울었다’는 말은 조용하게 눈물을 흘린 것이 아니라 큰소리로 감정을 억제하지 못해서 통곡했다는 것입니다. 울음은 너무 기뻐도, 너무 슬퍼도 나옵니다. 인간이 갖는 감정의 최고의 자리가 눈물이고 울음입니다. 
  
예수님 앞에서 그녀는 울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왜 울었을까요? 예수님을 향한 사랑 때문에 울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도 수많은 사람이 죽어가지만 우리가 그들 모두를 위해서 다 울 수는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곁을 떠났을 때에야 우리는 울게 됩니다. 그 사람을 향한 사랑 때문에 울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막달라 마리아도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그 앞에서 통곡하며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두 천사도 여인의 모습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어찌하여 그렇게 우느냐?” 라고 질문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도 마리아를 보면서 “얘야! 어찌하여 그렇게 서럽게 우느냐!”하며 여인의 마음을 달래고 있습니다. 
 
여러분! 사랑은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사랑은 우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들과 딸을 키우면서 얼마나 많은 눈물로 하나님 앞에서 기도한 적이 많으십니까? 사랑하지 않으면 눈물이 나오지 않습니다. 사랑하게 되었을 때 모든 눈물을 쏟는 모습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보셨습니다. 
 “어찌하여 우느냐?” 
 이 말은 위로의 말이기도 하지만 더 강력한 말씀입니다. 
 “이제는 네 눈물을 닦아라! 지금까지는 우는 것이 적절하다. 그러나 나를 보라! 부활한 나를 보라! 새 생명의 나를 보라! 죽음을 넘어선 나를 보라! 이제는 네 눈물을 그치라! 그리고 닦으라. 네 울음을 멈추라!”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십자가의 죽음이 결코 우리 인생의 마지막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부활한 주님을 만나면 그동안 가졌던 모든 서러운 눈물도 다 끝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들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도대체 부활이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은 왜 부활을 찬양하고 부활의 기쁨 속에 있는 것일까요? 부활만큼 강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는 자리가 또 어디에 있을까요? 세상 사람들은 죽음이 끝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런 기존의 사고방식에 “죽음이 인생의 마지막이 아니다!”라고 저항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선언하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고백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죽음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죽음이란 결코 우리 자신을 얽어맬 수 있는 힘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죽음을 넘어서는 부활을 너무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부활을 마치 기독교가 꾸며 낸 동화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현실을 도피하기에 딱 좋은 것이 기독교의 부활이라고 말합니다. 
 “현실이 더 어렵지 않느냐! 부활을 생각하면서 현실을 도피해라! 현실의 어려움을 참으라. 아니면 도망가라!” 
 
이런 기독교를 공산주의를 일으켰던 칼 막스와 레닌이 조롱하고 비난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부활은 결코 기독교의 동화가 아닙니다. 기독교의 부활은 현실도피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현실을 정면으로 부딪치는 강력한 힘입니다. 죽음이라는 엄청난 사건이 우리를 위협하는 현실로 다가오는 것을 뛰어넘는 능력입니다. 죽음의 문제를 도전하라는 하나님의 혁명적인 메시지입니다. 
 
여러분! 죽음이 어떻게 인간을 더 지배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죽음이란,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가는 자리이고, 영원한 하나님과 더불어 인생을 나누는 자리인 것입니다. 이런 죽음을 알고 죽음을 넘어서라는 것입니다. 현실을 부딪치라는 것입니다. 현실에 있는 고통과 외로움과 낭만과 절망 속에 주저앉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부활의 생기가 들어오면 우리는 펄쩍펄쩍 뛸 수 있습니다. 

여러분, 공놀이를 해보셨습니까? 공기가 다 빠진 공으로 드리블을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땅바닥에 척하고 부딪히고 맙니다. 사탄이 ‘탁!’하고 한번 치면 바로 땅바닥에 주저앉는 사람들, 생기가 없는 사람들, 부활의 능력을 갖지 못한 사람들은 세상에 부딪히는 여러 가지 어려움과 혼란 속에서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솟아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공기가 가득 차있는 공을 한번 땅바닥을 치면 곧바로 솟아오르게 됩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가슴속에 무엇을 품고 살아갑니까? 
부활의 생기, 생명의 능력, 하나님이 주신 성령의 역사를 가슴속에 품으면 더 이상 슬픔이 없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가 절망할 때가 없다는 말도 아닙니다. 그러나 생명의 역사를 내 안에 품게 되면 우리는 이 세상에 부딪히는 환란과 고통 속에서도 그것을 넘어가는 힘과 용기를 얻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사실을 안 존 돈(John Donne)이라는 사람이 ‘죽음아! 너 자만하지 말라’는 제목으로 이런 시를 썼습니다. 
  
“죽음아! 너 자만하지 말라. 죽음이여! 너 뽐내지 말라. 어떤 이들은 너를 힘세고 무섭다고 하지만 넌 그렇지 못하나니. 내 생각에 네가 해치워 버린다고 여기는 사람들 사실은 죽는 게 아니란다. 
불쌍한 죽음아! 너는 나도 죽일 수 없나니. 너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휴식과 잠에서 큰 기쁨 나오나니.” 
  
왜 그럴까요? 우리의 죽음은 영원한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너로부터는 더 큰 기쁨 나온단다. 소중한 사람들이 너와 함께 빨리 가면 갈수록 우리가 죽게 되면 죽어도 육체의 안식과 영혼의 해방을 얻나니. 너 사망아! 너는 운명, 우연, 제왕들, 절망한 자들의 노예일 뿐이며 너는 독약과 전쟁과 질병과 함께 살고 있구나. 그 뿐인가! 아편이나 마법의 주문도 네가 일격을 가하는 것 보다 더 잘 우리를 잠들게 할 수 있나니. 너 사망아! 그런데 왜 뽐내느냐. 짧은 잠을 자고 나면 우리는 영원히 깨어나나니 그러면 죽음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니. 죽음이여! 그때는 네가 죽으리라.” 
 
죽음을 향해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까? 
“죽음아! 네가 죽으리라. 내가 죽는 것이 아니라 네가 죽으리라. 내가 죽는 순간 나는 영원한 하나님과 기대어 덧붙여 다시 새 생명을 얻는데 그때 죽음아! 네가 죽을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믿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는 아들을 우리를 위해서 이 땅에 보내주시고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죽음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죽음아! 아픈 것이 어디 있느냐.”하시며 그의 아들을 통해서 죽음을 이기신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부활이란 인생의 대역전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어떤 역전입니까? 거짓이 아니라 진리가 승리한다는 것, 악이 아니라 선이 이긴다는 것, 절망이 아니라 소망이 승리한다는 것, 죽음이 아니라 생명이 모든 것을 이기는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을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이 땅에 살면서 이것을 누리라! 우리는 이미 승리하고 있다. 우리는 어떤 세상의 고통과 어떤 세상의 아픔도 넘어갈 수가 있다.” 
 
부활이 없는 기독교란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1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새 생명의 약속이 없으면 그 많은 시간과 정성, 삶의 내용을 주님 앞에 드릴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부활을 믿습니다. 비록 때로 낙망할 때도 있고, 때로 상처 받을 수도 있고, 때로 모든 것들이 다 무너져 버리는 것 같은 아픔을 가질 때도 있지만 주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실 때 우리에게 가르쳐주십니다. 
 
“이제 네 울음을 그쳐라! 이제 네 슬픔을 그쳐라! 이제 네가 갖고 있는 이 답답한 가슴으로 움츠려든 이 가슴을 펴라!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를 가슴속에 품고 하나님과 더불어 인생을 살아가라!” 
 
하나님이 주신 이 축복을 통해서 정치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의 정치를 생명의 정치로, 기업하는 사람들은 이 땅을 생명의 자리로 풍요롭게 바꿔나가야 됩니다. 직장에서 일하는 사람, 문화인들, 교육가들은 이 땅을 생명의 자리로 세워 나가야 됩니다. 가정주부들이 하는 ‘살림’은 ‘살려주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살림을 하면서 고달프면 살아가지 못합니다. 살림을 하면서 가정을 살리는 생명의 자리로 바꾸어 나가야 합니다. 세상 속에서 살아갈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생명의 역사를 가르쳐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가슴을 펴고 호흡하듯이 하나님의 생명의 생기를 가슴으로 품고 인생을 살아가십시오. 이제는 울음을 멈추고 답답하고 낙망하는 것을 다 내려놓고 주님 앞에 나아가는 복된 하나님의 사람들 되기를 바랍니다. 
  
   - 기도 -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저희들은 너무 빨리 실망하고 너무 빨리 울다 지쳐 넘어졌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제는 울음을 그치고 생명의 성령의 역사를 우리 가슴속에 품게 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약속의 능력을 갖고 세상에서 살리는 역사를 행해나가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김지철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