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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감찰하시는 하나님 (창 16: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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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찰하시는 하나님 (창 16:1~16)


가나안 땅에 거한 지 10년째

어떤 사람이 천국에 가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 이 세상의 천 년이 하늘나라에서는 얼마나 됩니까?” 하나님께서 “1분이다.” 라고 대답하시자 그는 다시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의 백만 불은 천국에서는 얼마만한 가치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1센트.”라고 대답하시자 그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하나님, 저에게 1센트만 주세요.” 하고 요청했답니다. 천국에서 1센트만 가지고 세상에 오면 백만 불이 될 거라는 계산을 했던 것입니다. 그 때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그래, 알았다. 1분만 기다려라.”

하나님의 1분은 천년이니 이 사람은 백만 불을 받기 위해 천년을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우스개소리이지만 신앙생활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이처럼 하나님의 시간과 인간이 생각하는 시간이 다르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베드로후서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벧후3:8). 종말이 더디 온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시간 개념과 사람의 시간 개념이 다르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천 년이 지나고 2천 년이 지나도 종말이 오지 않는다고 하지만 하나님의 시간 기준으로는 매우 짧은 순간이라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에서도 하나님의 시간과 사람의 시간이 서로 다르기에 우리는 시행착오를 격기도 하고 지쳐서 포기하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의 경우가 그런 것 같습니다. 아브라함은 큰 민족을 이루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났습니다. 큰 민족을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한 자녀가 태어나야 하는데 가나안 땅에 정착한지 오래 되었지만 그런 기미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3절과 16절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가나안 땅에 정착한지 10년이 넘어가고 이 때 아브라함의 나이는 85세로 추정됩니다. 약속의 말씀이 있은 지 10년이 넘었습니다. 이미 그 결과를 알고 있는 우리는 아브라함이 10년이 아니라 25년을 더 참아야 한다는 사실에 아브라함에게 동정을 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기다리는 아브라함에게는 너무 긴 시간입니다. 하나님이 가끔 나타나셔서 ‘네 자손이 땅의 티끌처럼 되리라.’ ‘하늘의 별처럼 셀 수 없이 많을 것이라.’는 약속을 주지만 그 때뿐입니다. 약속이나 소원이 더디 이루어지면 사람들은 기다리기를 포기하고 다른 방법을 찾기 시작합니다. 

오늘 말씀이 그렇습니다. 자녀와 관련하여 아브라함의 두 번째 술수입니다. 첫 번째는 자기가 기르던 종들 중 하나인 엘리에셀을 후계자로 삼으려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 때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창15:4)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이 계획을 포기하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립니다. 그러나 그 약발도 오래 가지 않습니다. 아내는 늙어가고 조바심은 커지면서 또 한 번의 인간적 방편을 취하려 합니다. 그것은 사라의 여종 하갈을 통하여 아이를 낳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아브라함은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네 몸에서 날 자’라고 하였으니 사라의 몸은 아니더라도 자기 씨만 되면 되지 않겠는가 하고 말입니다. 또 이것은 당시의 문화에도 맞았습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아내가 자녀를 낳지 못할 때에는 그 몸종을 통하여 대신 낳기도 하였습니다. 야곱이 열두 아들을 낳을 때도 그렇지 않았습니까? 라헬의 몸종 빌하로부터 단과 납달리가 태어났습니다. 레아의 몸종 실바로부터  갓과 아셀이 태어났습니다. 이처럼 몸종을 통해서 아이를 낳을 때에는 그 종이 주인 여자의 무릎 위에서 낳게 합니다. 마치 자기가 아이를 낳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말씀을 해석할 수 있고 또 당시 문화에도 합당하기 때문에 아브라함은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확신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는 일이 진행되어 가는 과정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 일이 순순히 잘 이루어지거나 일이 진행될수록 더 큰 확신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사라의 이런 계획으로 인하여 오히려 집안에 갈등이 일어났습니다. 

4절입니다. “하갈이 잉태하매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그 여주인을 멸시한지라” 하갈은 몸종에 불과한데 아이를 잉태하고는 마치 자기가 안방을 차지하게 된 것처럼 그 여주인 사라를 멸시합니다. 사람이 그렇습니다. 조그만 권세가 주어지면 기고만장합니다. 권력을 함부로 휘두르고 자신을 과시합니다. 이런 모습 보면 눈꼴사납지요. 

그러자 사라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아브라함에게 쏟아 붓습니다. 5절입니다.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나의 받는 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사라는 그 동안 참아왔던 울분을 터뜨렸을 것입니다. ‘내가 아이를 낳지 못한 것도 부끄러운데 몸종으로부터도 이런 취급을 당해야 하느냐.’ 자녀를 주겠다는 이 약속이 사라에게는 오히려 부담감으로, 한편으로는 자기 부끄러움을 자꾸 생각나게 만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지금도 중동에서는 아들을 낳지 못하는 여인은 부끄러운 존재로 취급을 당하고 큰 모욕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옛날은 더 했을 것입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그 모든 처분을 사라에게 맡깁니다. 사라는 하갈을 학대하였고 학대를 견디지 못한 하갈은 달아나버립니다. 하갈은 광야에서 헤매다 죽을 뻔한 위기를 맞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아서 다시 돌아오게 됩니다. 

이런 과정들에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 인간은 실수하기 마련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입장에 있었더라면 우리도 똑같이 행했을 것입니다. 몸은 늙어가고 이미 약속을 기다린 지 10년이 넘어가는데 그렇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이런 작은 교회를 하고 있는데 10년 후에도 이 정도 수준에 머물고 있다면 그때 무슨 생각이 들겠습니까? 처음 출발할 때 몇 년은 좋습니다. 믿음도 있고 이 길이 옳은 길이라는 확신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수준에서 시간이 지체되면 다 지치게 되어 있습니다. 이 길이 정말 하나님의 뜻인가? 괜히 사서 고생을 하는 것은 아닌지 낙담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때는 인간적인 생각이 앞서기 마련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누가 그 사람을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도 비난하지 않습니다. 성경 말씀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자기 생각대로 술수를 부리고 있는 모습만 담담히 서술할 뿐이지 이것이 죄라거나 심각한 실수라고 판단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다만 눈을 감고 외면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여러분 실수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아브라함도 실수했고 우리를 앞서갔던 수많은 사람들도 실수를 경험했습니다. 문제는 실수한다는 사실에 있지 않습니다. 더 큰 문제는 비전을 잃어버리는 것이고 낙담하는 것입니다. 목표를 향하여 가다보면 돌아갈 수도 있고 엉뚱한 길로 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목표를 잃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우리는 다시 정상으로 회복될 것이고 결국에는 그 목표에 이를 것입니다. 신앙은 자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자기 실수 때문에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나는 실수해도 하나님은 이루실 것이고 나는 연약해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약속을 성취하실 것입니다. 이런 신뢰가 있기에 우리는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고 실수해도 돌이켜서 다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이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이사야서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55:8-9)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이 다르다는 말씀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타당하다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이 아닐 경우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이번 경우가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아니라고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일 경우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이 그러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옳은 것도 자기에게는 그렇지 않을 경우도 있습니다. 몸종을 통해서 아이를 낳는 것은 야곱에게는 허락되었지만 아브라함에게는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생각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쉽지 않습니다. 기다리며 지켜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을 풀어 가시는가 인내하며 지켜보아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성급한 결정은 금물입니다. 한 박자 늦추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며 실수를 덜 할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 생각에 가득 차거나 흥분하여 일을 그르칠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면 시간이 더 지체될 뿐입니다. 여유를 가지세요. 어차피 하나님이 이루실 일이라면 하나님이 이루실 것입니다. 또 인생에서 이루어야 할 일들이 단 순간에 이루어질 그런 일들은 아니잖습니까? 좀 늦게 결정하였다고 하여 늦은 것은 결코 아닙니다.

제가 부목사로 섬기던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 교회와 담임 목사님의 목회 방향이 제가 생각하던 방향과는 너무 달랐습니다. 인간의 권위를 높이고 물질 중심적이며, 경쟁과 성장 지향적인 모습이나 부목사들을 대하는 방식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여러 번 담임목사님과 충돌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분은 한국교회에서 꽤 유명했던 분이었는데 어느 날은 그 분에게 “목사님을 사랑하지만 존경할 수는 없습니다.”는 말까지도 했습니다. 제가 이 정도까지 했는데도 그 분이 저를 쫓아내지 않은 것을 보면 그 어른이 큰 어르신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옳지 않은 것은 옳지 않은 겁니다. 항상 마음에 갈등이 있었고 그래서 연말이면 항상 교회를 그만 두어야지 하는 생각이 강했습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습니다. 제 마음에 들었던 생각은 내가 쫓겨나더라도 내 발로 나가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제 스타일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이곳에서 저를 연단하시고 계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배워야 할 것도 있었기 때문이고 제가 포기하면 다른 곳에서도 똑같은 연단을 받아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몇 년 후 그 분이 병으로 돌아가셨고 그분이 돌아가시자마자 저는 그 교회에 사표를 던지고 나왔습니다. 이제는 떠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교회 개척을 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게 인내하며 하나님께서 옮기실 때까지 기다렸던 것이 옳았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것을 일반화 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에 따라 하나님께서 인도하는 방식은 다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진리는 성급하게 판단은 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기도하면서 지켜보세요.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도하시는지 보시길 바랍니다. 때가 되면 옮기실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생각을 아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라는 것은 우리 감정과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생각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며 기다리다 마음에 확신이 들거든 그때는 과감히 행동하십시오. 물론 그것이 잘못된 판단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 가운데 결정한 일이라면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 이후의 과정은 하나님께서 인도하실 것입니다. 자기 생각이 빨랐던 아브라함이 조금 돌아가기는 했지만 결국 하나님은 자기 생각대로 이루셨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을 알아가는 과정은 어쩌면 서서히 이루어집니다. 안개 속을 헤매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가운데서도 마음속의 별을 놓지 않는 것입니다. 별을 바라보며 가다보면 조금씩 하나님의 생각에 가까이 갈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이 부산이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부산에 이르는 길은 경부고속도로를 따라 가는 것이 제일 빠르겠지만 중간에 다른 샛길로 빠지기도 하고 잠시 돌아오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부산이 있는 남쪽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평양이나 인천 쪽으로 가면 안 됩니다. 비슷한 방향으로 가다보면 비록 삼천포로 빠지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부산에 다다르게 될 것입니다. 마음속에 부산이라는 목표만 잃어버리지 않으면 말입니다.

하나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이 다를 경우가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사람들이 옳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도 돌다리를 두들기며 나가듯 한번은 의심을 해야 합니다. 나의 필요에도 맞고 상식적으로 타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실은 시험이요 유혹일 경우가 있습니다. 상식적으로는 맞는데 하나님 뜻에는 어긋날 경우가 있습니다. 

지난 몇 년 동안 기독교 베스트셀러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던 『내려놓음』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을 썼던  이용규 선교사님은 하버드대에서 역사학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던 분입니다. 이분의 경우는 자기 지성과 학력을 살려 미국이나 한국에서 교수나 연구직에 종사하는 것이 정상적인 길이고 사람들의 상식적인 판단일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 요구에도 맞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분은 자기 생각을 내려놓았습니다. 상식적이고 편한 길을 버리고 몽골의 선교사로 갔습니다. 그렇게 내려놓기까지의 과정과 몽골 선교 과정에서 있었던 일을 기록한 것이 바로 이 『내려놓음』이라는 책입니다. 이 책은 50만부가 넘게 팔렸고 한국 교회에 가져다 준 영향력은 지대합니다. 한 사람이 평생 할 수 있는 일보다 이 책 한 권으로 한 일이 더 많을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길이고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생각이 옳았습니다. 

감찰하시는 하나님

그런데 오늘 말씀은 여기로 끝나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은 아브라함의 실수에 초점이 맞추어지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오히려 하갈의 운명에 더 관심을 보입니다. 하갈은 어떤 여인인가? 하갈은 1절에 여종이요 애굽 사람이라고 설명합니다. 이쯤 되면 하나님의 전혀 관심밖에 있을 것이라고 우리는 예상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약속의 자녀가 아닌 육신의 자녀를 낳은 여자이며, 열국의 어미라 칭하게 될 사라를 멸시했던 여인입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이 하갈이라는 여인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갈은 사라를 피해 광야로 달아납니다. 아마 마실 물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 때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 하갈을 오아시스로 인도합니다. 그리고 하갈에게 달아나지 말고 다시 여주인에게 돌아가 그 수하에 복종하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사라를 위함도 아니요, 하갈이 원래 여주인의 소유였기에 원상회복시키려는 법적인 관심에서도 아니었습니다. 순전히 하갈과 그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입니다.

 임신한 여인이 어디에서 편안히 아이를 낳을 수 있겠습니까? 힘들지만 그래도 주인의 수하에 있는 것이 안전합니다. 하갈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 장면은 이곳 말고도 21장에도 있습니다. 이 때는 이스마엘과 함께 쫓겨난 하갈이 브엘세바 광야에서 헤매고 있을 때였습니다. 가죽부대의 물이 다 떨어져 죽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그 자리에서 대성통곡하고 있는데 그때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 하갈에게 샘이 있는 오아시스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하갈의 고통의 소리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아들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였는데 그 뜻은 하나님이 고통의 소리를 들으셨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하갈을 구원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 아들인 이스마엘을 축복하셨습니다. 12절에서는 그가 들나귀 같이 방황하며 거친 인생을 살 거라고 말씀하셨지만 10절과 21장 18절에서는 번성하여 큰민족을 이루게 하겠다는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스마엘로부터 나온 민족이 오늘날의 아랍 족속들입니다. 회교의 근원은 아랍민족이고 그래서 회교도들은 아브라함을 자신들의 조상으로 섬깁니다. 아브라함의 묘가 있는 헤브론은 회교도들의 4대 성지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하갈의 아들 또한 축복하셨습니다.

이런 하나님을 만나고 난 하갈은 13절에서 하나님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 고백합니다. 감찰하시는 하나님은 ‘보고 계시는’ 하나님, ‘돌보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스포트라이트만 받는 인생에만 주목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엑스트라처럼 무대의 주변에서 아니면 그 뒤편에서 이름도 없이 일하고 있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갈은 자기 같은 인생을 누가 지켜보고 있을 거라 전혀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하갈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부자와 거지 나사로에 나오는 하나님의 모습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었습니다. 부잣집 대문 앞에 살며 그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던 거지, 피부병을 앓고 있었으며 개들만이 그 헌데를 앓고 있었던 거지 나사로는 세상 사람들이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보고 계셨습니다. 

어떤 한 난쟁이가 거리에서 거꾸로 서서 공을 굴리는 재주를 보여주고 구경꾼들이 던져주는 돈으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한 수도사가 그 난쟁이를 불쌍히 여겨 수도원에 들어와서 편히 살도록 해주었습니다. 수도원에 들어간 난쟁이는 며칠은 좋았지만 점점 풀이 죽어 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수도사는 그 난쟁이의 얼굴에 생기가 돌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가만히 그 난쟁이의 행동을 주시해 보았습니다. 

난쟁이는 아침 일찍이 공을 들고 교회당 안으로 들어가더니 십자가 앞에 섰습니다. 난쟁이는 "예수님 저는 아무 것도 주님께 드릴 것이 없습니다. 제가 가진 것이라고는 이 공 굴리는 재주밖에 없습니다. 이 재주라도 주님께 보여 드리겠습니다." 하면서 거꾸로 서서 다리로 공을 굴렸습니다. 그가 교회당 안을 한 바퀴 돌면서 재주를 다 부리고 제단 앞에서 땀을 닦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셔서 그 난쟁이에게 하시는 말씀이 "네가 나에게 가장 훌륭한 선물을 주었다. 너는 나를 기쁘게 하였구나"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지켜보시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갈의 모습에서 우리는 두 가지 교훈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는 하나님은 선택된 자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에서 벗어난 롯에게도 관심을 가지시고 계십니다. 그들을 통하여 모압과 암몬이라는 족속을 이루게 합니다. 하나님은 쫓겨난 자녀 이스마엘에게도 관심을 가지고 계시면 그를 아랍족속의 아버지로 삼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에서 탈락한 야곱의 형 에서에게도 관심을 가지십니다. 그래서 그를 통해 에돔 족속을 이루게 하십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모든 약자와 쫓겨난 자들에게 관심을 가지시는 하나님에 주목해야 합니다. 

교회사에서는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는가라는 문제로 논쟁이 된 적이 있습니다. 구원이라는 차원을 떠나서 우리는 하나님은 교회 안에 있건 밖에 있건 모든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교회 안에 있는 자녀만 사랑하는 작은 분이 아닙니다. 약하고 힘들고 또 의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시야를 넓게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복음이 전파되기 이전은 마치 어둠과 저주의 나라였던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복음의 빛이 비추기 이전에도 여전히 우리나라를 사랑하셨고 특히 이 땅에 힘들고 어렵게 살거나, 선한 일을 하며 살던 사람들을 지켜보시고 보호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자꾸 편협한 교리로 제한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또한 하나님은 우리 인생 또한 지켜보고 계시며 돌보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내 인생을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다고 절망하지 마십시오. 시편 시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시139:2-4) 하나님은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계십니다. 사람들은 이해해하지 못할지언정 하나님은 우리 생각을 헤아리시고 우리 본심을 이해하십니다. 하나님은 내 행동의 근본 이유를 아시며 또한 내가 하는 말의 의도가 무엇인지 잘 아십니다. 절벽처럼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 인간 남편과 같은 존재가 아니라 내 영혼의 일부처럼 나를 더 잘 이해하시는 분입니다.

감찰하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어느 곳에 있던지 우리 곁에 계십니다. 시편 시인은 계속해서 이렇게 노래합니다.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시139:8-10) 

해군 초계함이 서해상에서 침몰하여 수많은 목숨들이 실종되었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우리들이 고백하는 것은 그들이 어떤 깊은 바다 속에 있다한들 하나님께서 거기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바다는 무심한 바다가 아니라 하나님의 손 안에 쥔 한 줌의 물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지키시고 보호해주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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