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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죄의 기원과 본질 (창 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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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 기원과 본질 (창 4:1~8)


제가 초등학교 3학년이었을 때 저희 학교에서 불량식품 사먹지 않기 캠페인을 했습니다. 그 당시 학교 주위에 어린 학생들을 대상으로 불량식품을 파는 어른들이 많았고 그것이 어린이들의 건강을 위협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학생들 스스로가 이런 음식을 사먹지 말자는 취지에서 불량식품 사먹지 말자는 캠페인을 벌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불량식품이냐 라는 기준은 제시하지 않았어요. 포장마차에서 팔면 당연히 불량식품이고 정식 가게에서 팔면 괜찮은 식품이 되는지 아무도 그 기준을 제시해주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방과 후에 제가 교문 앞에 있는 구멍가게에 들어가서 무언가를 샀습니다. 무엇을 샀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데 제가 생각해도 후진 것 것이었어요. 무슨 사탕 같은 것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 사탕 봉지를 뜯으면서 가게를 나오다가 마침 교문을 나서던 저희 반 친구에게 들키고 말았습니다. 그 친구가 저를 쳐다보더니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그거 불량식품이지?’ 이렇게 물어보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어요. 

아니나 다를까 그 다음 어린이 회의 때 일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저는 당시 생활부장을 맡고 있었는데 생활부장이 무엇을 하는 직분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제가 당시에 장난이 심했기 때문에 감투라도 씌워주면 좀 점잖아질까봐 생활부장으로 임명시켜준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사탕봉지를 뜯으면서 나오는 것을 목격한 그 친구가 회의 중에 일어나더니 ‘김영준이가 불량식품을 사먹는 것을 제가 목격했습니다. 남에게 본을 보여야하는 생활부장이 불량식품이나 사먹으니 생활부장의 자리에서 내쫓으십시다.’ 탄핵안을 내놓은 것입니다. 그랬더니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학생들이 ‘옳소!’라고 고함을 치는 것이었습니다. 돌연 저는 반 친구들 앞에서 죄인이 돼버렸습니다. 

상당히 당혹스러운 경험이었는데 그때 제가 느낀 몇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불량식품을 사먹어서 해를 받는 사람은 나인데 왜 당신들이 야단이냐. 내가 불량식품을 먹어서 당신이 배탈이 난다면 모르겠지만 해를 입어도 내가 입는데 왜 저렇게 야단일까. 둘째는 여론재판이라는 것이 이렇게 무서운 것이구나. 사람의 정서가 순간적으로 이렇게 변할 수 있구나. 

사람은 참 무서운 존재다. 이것을 깨달았고 셋째는 평소에 인기관리가 중요하구나. 평소에 인기관리를 제대로 했더라면 이렇게까지는 되지 않았을 텐데 인심을 잃으니까 이렇게 되는구나. 사람에 대한 평가는 어떤 한 행위에 의해서 좌우되는 게 아니고 평소에 사람들이 갖고 있던 생각에 좌우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불량식품에 대한 기준이 없는 상황에서 사람을 매도하기 시작하면 무고한 일도 나쁜 일로 매도할 수 있겠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어떤 사람을 나쁜 사람으로 규정하는 것이 그 사람이 행했다고 하는 나쁜 일보다도 더 나쁜 일이 될 수 있겠다, 제가 불량식품을 사먹는 행위보다는 저를 나쁜 사람으로 규정하는 그것이 더 나쁜 일이 될 수가 있는, 더 많은 상처를 입힐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제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탄핵 당하지 않았어요. 담임선생님과 몇몇 친구들이 저를 두둔해 주어서 살아남을 수가 있었고 그리고 그 다음 학년에는 회장으로 당선됐습니다. 그러나 그 일은 저의 기억 속에 남아있습니다. 

초등학생이라고 어른 세계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어린이들의 세계도 어른의 세계와 똑같습니다. 그들도 사람입니다. 나이에 관계없이. 다만 불량식품이 다른 것으로 대체되는 것뿐입니다. 인간은 여전히 어떤 인간의 행위를 나쁜 것으로 규정하려고 하고 그 사람을 나쁜 사람으로 규정합니다. 그리고 사람이 사람에게 해 줄 수 있는 최고의 선과 친절은 그를 두둔해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두둔해주는 것처럼 더 큰 친절과 사랑의 경험이라는 것은 없다고 생각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성경에서 죄라는 단어가 최초로 등장하는 구절입니다. 창세기는 모든 것의 처음이지요. 믿음이라는 말이 창세기 15장에 등장하고 의인이라는 말이 최초로 창세기 6장에 등장합니다. 

죄라는 말은 오늘 본문 창세기 4장에 처음 등장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처음 공생애를 시작하는 시점에서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뭐라고 불렀느냐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라고 했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이해하려면 죄라는 것을 이해해야 됩니다. 

죄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기 위하여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막상 죄가 무엇이냐라고 물어본다면 선뜻 대답하기가 어렵습니다. 죄의 기준이 무엇이냐. 죄를 죄로 만드는 것이 무엇이냐. 분명한 기준을 제시하지 않으면 그냥 ‘불량식품 사먹지 말자’ 이런 구호가 돼버려서 엉뚱한 사람을 죄인으로 모는 실수를 저지를 수도 있습니다. 

성경을 아는 분들은 ‘죄는 율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죄는 십계명을 어기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맞는 대답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그러면 왜 하나님은 이러한 행위를 죄로 규정하셨느냐 죄를 죄로 만드는 기준이 무엇이냐 라고 묻는다면 선뜻 대답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인간의 죄가 어떻게 발생하고 무엇이 죄를 죄로 만드는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첫째는 죄의 근원에는 상처가 있습니다. 가인이 죄를 지은 이유는 상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벨의 제물은 받으시고 가인의 제물은 거부하셨습니다. 그래서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했다고 했습니다. 당연히 그럴 것입니다. 하나님이 형의 제물은 거부하고 동생의 제물을 받으셨으니 얼마나 속이 상하겠습니까. 자존심이 상하고 감정이 상하고 하나님에게 섭섭하고 아벨에게 섭섭했을 것입니다. 사회적으로 일탈행위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 어렸을 때 가정환경이 좋지 않았다든가 사회적으로 적응하지 못했다든가 이런 이론이 어느 정도는 맞습니다. 일탈의 근원에는 상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죄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상처받은 모든 사람이 죄를 짓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정환경이 나빴다고 모든 사람이 일탈행위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인이 상처를 입었지만 죄를 안 지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경고하신 것입니다.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만약에 사람이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책임이 없다면 하나님은 이런 말씀을 하실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그 말은 ‘죄는 너를 갖고 싶어 한다. 그러나 너는 그것을 거부할 것이다.’ 이런 말씀입니다. 여름철 모기는 우리에게 소원이 있지요. 우리의 피를 소원해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안 그랬으면 좋겠는데. 마찬가지로 죄도 우리에게 소원이 있어서 죄가 우리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가인의 제물을 안 받으셨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성경이, 적어도 오늘 본문에서는 그 이유를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받고 안 받고는 하나님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제물 드린다고 다 받아야 될 의무가 있는 게 아닙니다. 이 세상에는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일들이 있습니다. 이 세상은 공평하지 않습니다. 섭섭한 일이 생깁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 조차도 섭섭한 일이 생길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상처가 있을지라도 그것이 죄를 낳지 않고 결국은 좋은 결과를 얻을 수가 있습니다. 만일 가인이 하나님이 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지만 내가 뭔가를 잘못한 모양이지, 이다음에는 더 잘해야지, 이렇게만 마음을 먹었다면 그는 이 위기의 순간을 극복할 수 있었을 것이고 하나님이 그를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가인은 승리했을 것입니다. 

둘째로 감정의 상함이 남을 탓하게 만듭니다. 가인이 마음이 상하게 되니까 자기 동생 아벨을 원망하기 시작했습니다. 내 예물이 열납 되지 않는 것은 아벨 때문이다. 아벨만 없었다면 내 예물이 용납되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아벨을 미워하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오해도 이런 오해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인의 예물을 받고 안 받고는 아벨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이건 가인과 하나님 간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아벨의 제사를 받고 안 받고는 가인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행복하냐 행복하지 않느냐, 성공적이냐 성공적이지 못하냐, 이건 남에게 좌우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에게 책임이 있고 우리하기 나름입니다. 남에게 원인을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의 실수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가난한 것은 부자들 때문이다. 그래서 가진 자에 대한 미움, 이것이 공산주의의 근원이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도 가인에게 ‘네가 선을 행하면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그 말은 아벨을 탓하지 말고 네가 잘하면 된다는 뜻입니다. 아벨 탓이 아니다. 네 책임이다. 네가 잘하면 된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인간이 죄를 짓기 전에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십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봐도 하나님이 아벨에게는 말씀하지 않았지만 가인에게 말씀하셨어요. 의인에게는 말씀하지 않았지만 죄를 짓고자 하는 사람에게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내게 돌이킬 기회를 주지 않았다고 변명할 수 없습니다. 돌이킬 수 있는 기회는 있습니다. 만약에 그게 없다면 하나님은 사람을 심판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영화 히트를 보면 로버트 드 니로가 은행 강도로 나오는데 경찰의 포위를 뚫고 탈출하는 데 성공합니다. 이제는 사랑하는 사람과 해외로 도피하기만 하면 됩니다. 차를 타고 공항까지만 가면 해외로 도피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로버트 드 니로가 여자 친구와 차를 몰고 공항으로 가는데 도중에 그의 얼굴빛이 변하기 시작합니다. 자기를 배반했던 사람을 기억하고 그에 대한 복수심이 마음속에 우러나고 그대로 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공항으로 가던 주인공이 갑자기 차를 돌려서 배반자를 찾아 나섭니다. 그 결정이 그의 인생에 몰락을 가져다줍니다. 결국 해외로 도망가지 못하고 경찰의 총에 맞아 인생을 마감하고 맙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처럼 결정적인 순간에 자기의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서 멸망을 자처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가인처럼. 성경은 이와 같은 마음의 상태를 강퍅함, 또는 완악함이라고 합니다. 사람의 마음에 완악함 자체가 죄는 아니지만 그것이 죄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사람이 실수하기 전에 마음에 강퍅함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넷째로 죄는 폭력성이 있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고 하지 않고 쳐 죽였다고 했습니다. 그냥 죽인 게 아니고 쳐 죽인 것입니다. 이것은 의도적인 폭력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폭력이 반드시 물리적인 폭력이 아닐 수 있습니다. 심리적인 폭력 ․ 언어적인 폭력 ․ 성적인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폭력의 목적은 상대방에게 아픔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내가 아팠던 것처럼 상대방도 아프기를 바라는 것이 폭력입니다. 그래서 가인의 목적은 그냥 아벨을 죽이는 것이 아니고 아벨을 아프게 해서 죽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쳐 죽였다고 한 것입니다. 

다섯 번째로 죄는 사람에게 짓는 것이고 동시에 하나님에게 짓는 것입니다. 죄에게는 이와 같은 수직적이고 수평적인 면이 있습니다. 가인의 입장에서 보면 아벨에 대한 살인은 하나님에 대한 섭섭함에서 비롯됐습니다. 하나님과 풀어야 될 문제를 풀지 않았더니 사람에게 죄를 짓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곰곰이 생각해야 되는 부분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시험, 원망을 풀어야 되는데 그것을 풀지 않으니까 자신의 분을 사람에게 풀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인간의 가장 무서운 폭력성은 세상이 자기와 함께 망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내가 나의 불행함처럼 세상도 불행해지기를 바라는 이것이 인간의 가장 무서운 폭력성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틀어졌기 때문에 발생한 것입니다. 가인이 하나님 앞에 조금만 더 온유했더라면, 조금만 더 자기의 고개를 숙일 수 있었다면 그의 삶이 바뀌었을 텐데.

우리의 기도가 늘 공손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기도가 늘 공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공손한 말만 할 말이 있는 게 아니에요. 기도할 때마다 오, 거룩하시고 자비로우신 아버지시여 주님께 경배와 찬송을 드리나이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에게 진부한 얘기만 하는 게 아니고 때로는 우리의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털어놓는 과정에서 불평할 수도 있고 따질 수도 있고 부르짖을 수도 있고 하나님께 질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내 인생에 대한 의문, 내 인생에 대한 모든 의구심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풀어야 됩니다. 하나님은 왜 내게 이렇게 하셨습니까. 하나님 나는 어떻게 살라는 얘기입니까. 결국 하나님과 풀어야 되요.

하나님이 그것을 환영하십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하나님께 아뢰라고 했습니다. 감사함으로 아뢰라고 했습니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했어요. 가인이 하나님께 아뢨더라면 하나님의 평강이 그의 마음과 생각을 지켰을 것이지만 아뢰지 않았어요. 그래서 마음에 평강을 얻지 못하니까 자기의 형제와도 화목하지 못한 것입니다. 모든 죄는 그러므로 사람에게 짓는 것이요 동시에 하나님에게 짓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틀어지는 것입니다. 

창세기 4장에 일어나는 일은 먼 과거에 일어난 일을 말하는 것뿐만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 모두의 형편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아벨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아벨의 제물을 하나님이 열납하셨어요.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예물을 열납하셨다고 했습니다. 온 세상 죄를 위하여 당신의 몸을 제물로 드린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냥 어쩌다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게 아니고 오래전부터 예정된 대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만세 전에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예정된 것입니다. 구약성경의 많은 곳에서 그림자와 예표와 예언으로 장차 세상 죄를 지고가실 하나님의 어린 양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깨끗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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