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사순절] 빌라도의 사순절 (눅 23:1~7)

  • 잡초 잡초
  • 493
  • 0

첨부 1


빌라도의 사순절 (눅 23:1~7)

 
내 용 

생각해보면 인간은 우매하게도 왜 그렇게 전쟁을 많이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뭐하려고 그렇게 많이 했는지 인류의 역사는 곧 전쟁의 역사입니다. 지금까지도 온 세계가 저마다 성능이 더 강력한 폭탄과 무기를 계속 개발하면서 전쟁 준비에 광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아무 쓸데없고 하나님도 가장 싫어하시는 역사를 인간은 살아왔고 지금도 계산이 안 되는 그 길을 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역사에서 배운 대로 바벨로니아 시대, 페르시아 시대, 칭기즈칸 시대, 알렉산더 시대, 히틀러 시대, 스페인, 영국, 일본은 끊임없는 침략과 지배 문화에서 살았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영향력이 컸던 시대가 로마 시대로 조명되고 있습니다. 세계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영향력을 크게 행사했습니다. 로마의 제국주의 철학에 유대 나라도 예수님도 희생양이 되신 것입니다. 빌라도는 로마 행정관으로 유대 나라에 파견이 되어 일을 했는데 예수님 시대에 있었기 때문에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잘했으면 영원한 의인이 될 뻔한 기회였지만 잘못했기 때문에 오늘 아침에도 우리가 예배 시작할 때 신앙 고백으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영원한 죄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만나는 모든 역사와 시간은 항상 우리들에게 선택의 기회를 제공합니다. 선택을 잘하는 사람이 훌륭하게 되고 잘못하면 불행하게 됩니다. 우선 예수님 시대의 정치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헤롯 정부가 있었는데, 이 정부는 로마가 인정하는 정부입니다. 이 헤롯 가문은 로마의 인정을 받은 인물로 100년 동안 대대로 왕가로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총독부라고 하는 빌라도 정부가 있습니다. 총독으로 이 나라에 와 있어 조그만 나라에 두 가지 정부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마치 일제 강점기에 우리나라에도 조선 총독부가 있고 일본 사람이 총독으로 와 있던 것과 똑같은 정치 상황입니다. 그러니까 빌라도가 유대 총독으로 있으면서 헤롯 정부와 함께 정치를 하는 상황입니다. 빌라도는 유대나라에 와서 총독으로 제일 큰 사명이 무엇이냐 하면 유대인들의 로마에 대한 반란을 억제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3장에 나옵니다.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처형해서 죽였습니다. 또, 사마리아에서 똑같은 일이 터졌을 때 빌라도가 군대를 동원해서 사마리아 대학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 사람들이 데모를 하니까 그런 것을 억제하는 것이 자기 책임이므로 죽여 버리면서 진압한 것입니다. 로마 정부와 헤롯 정부가 손을 잡고 물리적인 힘으로 그런 일을 하니까 민중은 꼼짝도 못하고 숨도 크게 못 쉬고 살았습니다. 빌라도가 유대 나라의 총독으로 있던 기간이 AD 26년에서 36년으로 되어 있으니까 10년 동안 총독으로 있었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과 좋은 관계에 있었던 로마 군인들도 많았습니다. 예수님이 지나가시는데 어떤 사람이 길에 와서 예수님께 자기 하인의 병을 고쳐달라고 애원했잖아요? 

그 사람은 백부장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 예수님이 최고 칭찬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이스라엘 모든 백성 가운데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했다.” 그리고 그의 소원을 현장에서 들어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고넬료라는 사람 역시 로마 현역 군인 장교 백부장이라고 했습니다. 베드로를 만나서 설교를 듣고 온 집안이 세례를 받아 로마인으로 최초의 세례자가 된 관계입니다. 

로마의 법률 제도는 당시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영향력도 아주 컸습니다. 로마가 머리를 아주 잘 쓴 게 있습니다. 로마가 차지한 광대한 영토에서 정복한 국가들의 자치권을 허용했습니다. 그래서 유대 나라에서도 로마에 빌라도 총독이 와있었지만 헤롯왕의 자치 정부를 방해하지 않고 너희 나라 좋은 대로 하라고 해서 세금을 징수하는 권한을 줍니다. 그래서 삭개오가 여리고 지방의 세리장이 된 것이 성경에 나오고 마태도 유대인으로 세관에 있었다고 했고 그 밖에 민사의 문제, 형사의 문제를 “너희가 알아서 하라.”고 자치권을 인정했습니다. 

특별히 유대인들이 가장 심각하게 생각하는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었습니다. 그래서 회당 건설을 마음대로 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에 로마의 방해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로마가 이 자치권 부여하면서도 절대로 양보하지 아니하는 법률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사람을 죽이는 문제였습니다. 사형법에 있어서는 로마의 권한으로 유대 나라에 주지 않았습니다. 유대 나라에는 국민 평의회라는 기관이 있었습니다. 국회입니다. 71명 혹은 72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름은 산헤드린 공의회였습니다. 예수님의 문제는 이 산헤드린 공의회에서 취급을 했습니다. 자치 기관에서 얼마든지 결정할 수 있는 종교적 범주에 속하는 문제입니다. 

그러면 왜 자치 기관에서 예수님의 문제를 끝낼 것이지 오늘 성경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끌고 빌라도 총독 앞에 왔느냐? 바로 로마가 가지고 있는 법률적 권한 때문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권한은 당신들이 결정하기를 로마의 권한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예수에 대한 문제는 당신이 판결하시오.” 그래서 예수님의 재판 과정을 보면 산헤드린 법정 혹은 가야바 법정이라고 했지요? 빌라도 법정을 왔다 갔다 했습니다. 헤롯과 빌라도가 서로 자기 권한이 아니라고 핑계를 대고 떠맡기려고 하고 있음이 자세하게 나타났습니다. 

여기 “헤롯이 군병들과 함께 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니” 이런 말이 나옵니다. 빌라도는 “이것은 종교적인 문제이다. 우리 로마가 당신네들 종교를 방해하지 않는데 너희가 알아서 해결할 것이지 왜 나한테 보냈느냐?” 헤롯은 “사람 죽이는 권한은 당신들에게 있다. 로마법이다. 당신이 판결해야 한다.” 빌라도가 군중들에게 말했습니다. “이것은 너희 백성의 자치권에 속하는 문제요 종교법이다. 너희가 해결하라.” 그랬더니 사람들이 소리 지릅니다. “우리에게는 사람 죽일 권한이 없습니다. 당신들이 법을 그렇게 만들어 놓았지 않습니까?” 법에 대한 유권 해석 차이 때문에 예수님은 묶여서 왔다 갔다 하는 수모를 당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리들은 빌라도에게 예수를 사형할 수 있는 이유를 만들어 주는 것이 오늘 성경 말씀의 내용을 이루고 있는데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이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했나이다.” 가이사는 로마를 말합니다. “그만하면 반역죄 아닙니까? 로마에 세금 바치지 말라고 했습니다. 죽여도 되지 않습니까?” 여러 가지 이유를 댔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최종 판결을 내렸습니다. “로마법에 의하면 이 사람은 죄가 없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더 난리를 치는데 무슨 난리를 칩니까? 그 당시 로마법에는 사람들의 민심을 사려고 하는 신성모독죄는 죄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있다고 하든지 없다고 하든지 너희들 마음대로 하라.” 지금 우리 한국 시민도 신성 모독죄는 죄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은 없다.” 하면 경찰이 잡아갑니까? “없든지 말든지 그건 네 마음대로 해라.” 

그런데 로마에서 굉장히 철저히 중범으로 취급하는 문제가 내란죄입니다. 유대인들이 이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빌라도에게 예수를 끌고 가서 내란죄를 적용시킨 것입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이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저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까지 백성을 소동케 하고 있나이다. 내란죄입니다. 당신은 이미 갈릴리에서, 사마리아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을 때 많은 사람을 학살하지 않았습니까? 이 사람을 그만두면 더 큰 문제가 생기는데 왜 가만히 계십니까?” 이러는 겁니다. 

후진국이나 독재 국가에서는 말 안 듣는 사람을 해치는 것이 간단합니다. 없는 죄를 만들어 뒤집어 씌어 버리면 됩니다. 아무도 말 못합니다. 왜 빌라도 정부와 헤롯 정부가 서로 예수님을 떠넘기며 취급하지 않으려 했는가 말입니다. 이것은 간단합니다. 죄 없는 사람을 판결하기가 양심에 괴로워서입니다. 괴로움이 성경에 나오잖아요? 더군다나 이 판결은 사람을 죽여야 됩니다. 자기 말 한마디에 따라서 아무 죄도 없는 어떤 사람의 목숨이 끊어져야 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빌라도는 상식적으로 봐서 양심이 살아있음이 성경에 나왔습니다. 양심선언을 했습니다. 그 양심선언이 뭐냐? “죄가 없다.” 여러분! 이태리에서 만든 예수님에 대한 영화는 빌라도에 대한 고민을 필요 이상으로 부각시킵니다. “본래 빌라도는 정상적 판단을 해서 예수의 무죄를 선언했는데 야비한 유대인들이 폭동을 일으키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떠밀려 예수의 사형집행을 선언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빌라도의 죄가 아니라 유대인의 죄이다.” 이태리 사람들은 철저하게 그것을 주장합니다. 빌라도가 예수님께 오늘 이런 질문을 합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이때 왕이라고 대답하면 죄가 됩니다. “너는 이 민중을 선동해서 왕 되려고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거 아니냐?”라고 묻는 것입니다. 없는 죄를 만들어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왕 개념은 로마 정부의 왕, 유대 나라의 왕 개념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왕이라고 부르는 것은 대한민국의 대통령 개념이 아니라 만왕의 왕, 인류의 구세주 의미의 왕 개념인데 빌라도는 이렇게 치사하게 만듭니다. 아마도 이 빌라도는 총독 행정관 10년 생활 가운데 이 문제가 제일 어려운 것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빌라도는 양심선언 또 하나 합니다. 마태복음 27장 24절에 “빌라도가 아무 성과도 없이 도리어 민란이 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르되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종교적 행위 같은 것을 했습니다. 사람 앞에서 물 떠나놓고 손 씻으면서 “난 죄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피 묻은 손도 아니요 피 흘리는 손도 아니다. 깨끗하다.” 빌라도의 이 행위를 심리적으로 분석해보면 이 사건 이후에 닥칠 어떤 재앙에 대해서 두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깨끗함을 종교 의식과 같이 손 닦으면서 발표하는 것을 볼 수 있잖아요? 그렇게 되니까 그것을 보는 유대인들이 또 대답을 했습니다. 

“백성이 다 대답하여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 하거늘” 유대인들은 자신만만한 겁니다. “괜찮습니다. 그 예수를 죽이는 것은 죄도 아니요 피 흘림도 아닙니다.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것이 죄가 된다면 그 죗값을 우리에게 주십시오. 우리 자손들에게 주어도 괜찮습니다.”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것은 조심스러운 해석인데 과격한 부흥사들은 이 대목을 너무나 좋아합니다. “그래서 그 피가 그들 말대로 그 자손에게 돌아간 것이 히틀러에게 600만 학살당한 것이다.” 이 문제는 해석자들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나는데 긍정도 부정도 힘든 해석입니다. 

그 다음에 빌라도에게 이상한 일이 하나 벌어집니다. 자기 아내가 빌라도에게 영적인 충고를 했습니다. 마태복음 27장 19절 “총독이 재판석에 앉았을 때에 그의 아내가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저 옳은 사람에게 아무 상관도 하지 마옵소서. 오늘 꿈에 내가 그 사람으로 인하여 애를 많이 태웠나이다 하더라.” 이것은 하나의 하나님의 현몽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아내는 자기 남편에게 “당신이 왜 미련스럽게 그 일에 관계를 해서 어렵게 하느냐? 그것은 유대인들의 종교적인 문제요 헤롯 정부가 알아서 할 일이지 아무 상관하지 말고 당신은 지혜롭게 손을 떼라. 왜 그것을 붙잡고 결단을 내지 못하고 그렇게 끙끙 앓고 있느냐?” 라고 충고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빌라도의 귀에는 세 가지 소리가 들려오는 겁니다. 하나는 너무나도 큰 소리가 들려옵니다. 유대 백성들이 모두 나서서 “죽여라. 십자가에 못 박아라.” 그러나 그 소리는 빌라도 마음에 옳지 않다는 결정을 이미 내렸습니다. ‘저 소리는 옳지 않다.’ 그 다음에 자기 아내는 건네준 나직한 충고의 소리입니다. 그것도 옳은 말입니다. “이 사람은 옳은 사람인데 당신이 결정해서 그 옳은 사람을 왜 죽이라고 판결하려느냐? 당신은 상관하지 말라!” 이것도 옳은 소리입니다. 그 다음에 자기 양심의 소리입니다. 이것은 소리가 없는 소리입니다. 그러나 가장 옳은 진리의 소리입니다. 

그런데 빌라도는 이 들려오는 몇 가지 소리 가운데 가장 그릇된 소리를 선택하는 과오를 저지르게 됩니다. 결국 이 빌라도의 사순절은 그릇된 선택의 사순절이라고 결정할 수 있습니다. 왜 그랬는가? 이유가 나옵니다. 민란이 나려는 움직임을 보고 결정한 것입니다. 지금 빌라도의 최고 책임은 유대 나라에서 로마에 대한 민초들의 민란이 못 일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지면 빌라도는 원로원에 소환이 되어 총독의 자리에서 물러나야 되고 평생 쌓아온 자신의 공적이 물거품과 같이 되는 자기 인생 최대의 위기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옳은 소리를 무시하고 그릇된 소리에 굴복 당하고 말아 죄 없으신 예수를 사형하라고 최종 판결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보면 빌라도에게 주어진 아주 좋은 기회가 생깁니다. 문제가 없이 해결할 수 있는 길이 또 하나 주어져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총독에게 주어진 권한입니다. 이 권한은 총독만이 행사할 수 있는데 누구도 원망할 수 없는 절대권입니다. 총독은 국경일에 어떤 죄수라도 총독 권한으로 특사령을 내릴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 권한을 사용하면 그만입니다. 비록 군중이 죽이라고 아우성을 치는 죄인일지라도 “알았다. 그러나 나에게 주어진 특사령의 권한을 내가 행사하겠다. 예수는 무죄다. 나가라.” 할 수 있습니다. 

바라바는 정말 죄가 많은 사형수인데도 그날 나오지 않습니까? 이것이 총독의 권한입니다. 그 권한을 이용하면 얼마든지 예수님을 자유 석방할 수 있었는데 빌라도는 그 기회를 놓치고 맙니다. 이로 인해서 빌라도는 두 가지를 얻었습니다. 민중의 반란을 억제했고 총독의 자리를 몇 년 더 지킬 수가 있었습니다. 과연 잘한 걸까요? 지금 온 세상의 크리스찬들은 예배드릴 때마다 신앙고백을 합니다. 신앙고백이 빌라도를 저주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했잖아요?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제가 로마에 갔을 때 안내자가 해 준 말이 빌라도 후손들은 족보를 없애버렸답니다. 

지금 자기들은 이태리 국민들 가운데 빌라도 후손인 것이 분명한데 예수 잘 믿는 후손이 되었단 말입니다. 그런데 조상으로 올라가 보면 제일 우두머리가 예수님을 그렇게 했다는 것이 얼마나 예수 잘 믿는 신앙인으로서 수치스럽고 안 된 일입니까? 그래서 창피해서 못살겠다고 족보에서 지워버렸습니다. 한 국가의 최고의 통치자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기회라고 성경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기회를 올바르게 선용하고 옳은 일을 위해서 결단을 하면 그의 업적은 길이길이 찬양의 대상이 되고 그 기회를 탐욕과 오만, 그리고 자기 욕망 채우기에 급급하면 추악한 역사의 심판을 받도록 되어 있습니다. 

보십시오. 세종대왕이 언제 사람입니까? 그런데 ‘세종대왕’하면 존경의 인물로 대한민국 땅 가장 중심 거리인 광화문에 앉아 계시다는 말입니다. ‘연산군’하면 그 반대로 생각을 합니다. 빌라도는 영원히 빛나는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기회에 있었습니다. AD 26년에서 36년에 유대 총독이 되었다는 것은 메시야를 만났을 수 있는 축복의 시대에 그 자리에 있었던 것입니다. 

주어진 그 축복의 기회에 가지고 있는 축복 권한을 올바르게 사용하지 못한 죄가 인류의 종말까지 가는 사순절 행사를 해버렸습니다. 만약 그때 빌라도가 자기의 권한으로 최대한 권한 활용을 해서 민란을 일으키는 민중 제압을 위해서 계엄령을 선포하고 로마군의 사령부가 있는 안전지대로 예수를 호송해서 보호하고 자기 임기 동안 절대 예수 보호 운동에 몸을 바쳤다면 지금 세계는 그에 대해서 어떤 평가를 했겠습니까? 예수님 다음으로 정의로운 통치자 역사로 남았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은 빌라도도 아니고 통치자도 아닙니다. 소리 없이 존재하는 소시민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들에게도 선택의 기회는 갈등스럽게 언제나 오고 있습니다. “어떤 것을 선택해야 되겠습니까?”라고 질문하는 민초들을 향해서 예수님은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 먹고 사는 문제보다도 먼저 하라. 그리하면 다른 선택이 너희에게 주어진다.” 이렇게 말씀하셨잖아요? 성경의 모든 내용은 바로 선택의 지혜 때문에 영광과 멸망의 사례들로 기록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조카 롯을 보세요. 아브라함은 아들이 없어서 형님 아들 롯을 데리고 양자 삼아서 데리고 갔잖아요?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 땅으로 삶의 거처를 옮길 때 외로워서 “너라도 나와 같이 살자.” 그래서 그를 다 양육시켜 주었고 이제는 롯이 자립할 나이가 되어서 생업권 때문에 이제는 분가를 해야 될 입장이 되었을 때 두 사람이 마주 서서 하는 이야기를 보세요. 목축업을 생업으로 하니까 물과 풀이 있어야 되는데 이미 좋은 땅을 차지하고 있는 그들이 누군가 하나는 거기서 떠나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양자 아들보고 “선택의 우선권을 네게 주겠다. 

네가 선택하는 땅에서 나는 떠나겠다.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가져라.” 그러면 롯이 어떻게 선택해야 합니까? “작은 아버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작은 아버지가 나를 아들 삼아서 키워주셨습니다. 이제는 이만큼 성장한 것이 작은 아버지 덕분입니다. 이 좋은 땅과 물 차지하시고 여기서 행복하게 사십시오. 내가 양떼를 몰고 가족을 이끌고 사막으로 나가겠습니다. 나는 젊으니까 넉넉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래야 되는 것 아닙니까? 좋은 땅을 자기가 차지하고 늙은 작은 아버지를 사막으로 내쫓습니다. 

그 결과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 열국의 아비가 되는 하나님의 축복이 나타났고 롯이 살던 곳은 소돔과 고모라 땅이라는 영원한 하나님의 심판의 대명사로 지금까지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저주의 땅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렇게 세상에 많은 미련을 두었던 아내는 소금 기둥이 되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으며 롯의 두 딸은 “우리가 성장한 처녀들인데 남자가 없으니 어떻게 하냐? 아버지라도 유혹해서 살아야 하지 않느냐?” 아버지에게 술을 퍼 먹이고 데리고 자서 자식들을 낳은 것이 큰 딸 족속이 모압 족속이요 작은 딸 족속이 암몬 족속이 되었잖아요? 이 친구들도 족보를 없애버렸습니다.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할 때 엄청난 방해꾼이 되어서 결국 또다시 모압 족속과 암몬 족속이 하나님의 심판의 채찍을 맞는 모습을 우리는 성경에서 보게 됩니다. 

우리가 신명기 성경에서 줄기차게 나오는 하나님의 교훈 “내가 너희 앞에 복과 저주를 주었노니 선택은 네가 하라.” 이것입니다. 잘못된 선택은 지금 당장은 좋은 것 같으나 절대 실패입니다. 옳은 선택은 지금 고난스럽게 보이지만 절대 승리입니다. 이것을 빌라도의 사순절에서 우리가 배우는 것입니다. 오늘 세상으로 말하면 공휴일입니다. 여러분은 예배를 선택하셨습니다. 주변에 많은 나를 유혹하는 일들을 다 배제하고 오늘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선택하셨고 많은 사용처가 있는데도 하나님께 물질을 드리는 예물을 선택하신 것이 봉헌인 것입니다. 

제가 온 세상을 다니면서 공통점을 하나 발견하는데 어느 나라나 사용하는 돈에다 그 나라 국민이 최대 공약수로 존경하는 인물 그림을 넣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쓰는 돈도 보세요. 지갑에 있는 것을 지금 빼보셔도 괜찮습니다. 이퇴계, 이율곡, 세종대왕, 신사임당이 있습니다. 달러 지폐에는 8명의 얼굴이 그려져 있습니다. 1불이 조지 워싱턴이고 2불에서부터 1,000불짜리까지 있습니다. 그런데 제일 고액환인 1,000불에는 클리블랜드 대통령 얼굴입니다. 일화가 있습니다. 클리블랜드는 20대 시절에 패거리 깡패여서 날마다 토요일, 일요일만 되면 패거리들이 나쁜 짓하러 돌아다녔습니다. 

술과 마약, 퇴폐를 찾아서 날마다 도박하러 다니며 나쁜 일만 했습니다. 주일날 아침인 그날도 계획된 자기들의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친구와 둘이서 약속한 장소로 가는 겁니다. 그런데 자기 동네 교회 앞을 지나가는데 교회 큰 간판에 쓰여 있는 글자가 눈에 띄었습니다. 그날 그 교회 예배 설교 제목이었습니다.『죄의 값은 사망이다.』 “어? 가만 있어봐! 이게 무슨 소리냐? 죄의 값은 사망이라니?” 다른 친구가 “아니, 뭐하는 거냐? 빨리 가자!” ‘죄의 값은 사망?’ 이 문구 하나가 클리블랜드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라니? 이게 뭐지?” “야! 너 무슨 소리 하는 거냐? 얘들이 기다리는데 교회 앞에서 우물대는 거야? 빨리 가자!” “가만 있어봐! 이게 무슨 소리인지 우리 들어가 보자. 죄의 값이 사망이라는 게 무슨 소리냐?” “아니, 얘가?” 둘이 교회 앞에서 싸우다 헤어졌습니다. 

클리블랜드는 그날 거기 들어가서 그 설교를 들었습니다. 성령 충만해졌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자기 인생의 방향을 반대로 바꾸었습니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났습니다. 미국의 일간 신문에『미국은 클리블랜드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클리블랜드가 당선된 빅뉴스가 신문을 통해서 미국을 떠들썩하게 했습니다. 클리블랜드가 대통령이 된 겁니다. 그런데 한 감옥에서 늙은 죄수가 그 신문을 보면서 하염없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바로 그때 교회 앞에서 싸운 친구입니다. 이 이야기는 실화입니다. 한 순간의 선택이 사람을 이렇게 갈라놓습니다. 빌라도의 사순절을 기억하면서 ‘아! 빌라도가 그때 선택 하나를 잘못함으로 영원한 죄인이 되었구나!’ 여러분 모두가 지혜로운 선택자가 되어서 주님의 관심과 축복의 자녀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오늘 사순절에 빌라도의 선택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가를 우리는 조명하였습니다. 성령님께서 저희들의 마음 가운데 항상 은혜를 주셔서 이것과 저것을 선택하여 가는 과정에서 언제나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선택하는 지혜와 영적 능력을 저희들에게 내려 주시옵소서. 그래서 평생 동안 하나님의 나라 확장에 쓰임을 받게 하여 주시고 복된 삶이 약속되어지는 은혜의 백성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