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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십자가의 은혜 (요 19: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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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은혜 (요 19:17~30)


오늘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십자가의 고난을 기념하는 고난주일입니다. 형벌의 극치인 십자가가 오늘날은 영광의 상징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십자가 목걸이, 십자가가 반지가 흔할 뿐 아니라, 어떤 나라의 박물관에는 왕관에도, 훈장에도 십자가가 새겨져 있습니다. 본래 십자가는 가장 무서운 형벌의 상징입니다. 

각 나라마다 흉악범을 사형시키는 방법이 다양합니다. 옛날 우리나라는 주로 사약을 내리거나, 교수형, 단두형이 있었습니다. 참고로 말씀을 드리면, 옛날 임금이 사약을 내릴 때 미쳐 사약이 준비되지 못했을 경우 담배 잎을 삶은 물을 먹여 죽게 했다고 합니다. 담배 두 개피를 삶아 그 물을 토끼에게 먹이면 토끼가 3분 안에 죽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담배 두 갑을 삶아 그 물을 마시면 사람이 3분 안에 죽는 다는 것입니다. 흡연을 주의해야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17장 2절에는“연자 맷돌을 그 목에 매이우고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나으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고대 근동지방의 사형방법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이 형벌은 중죄인에게 내리는 것으로 장례식조차 하지 못하도록 시체를 깊은 바다에 던져버리는 무서운 형입니다. 여러 가지 형벌 중에서 가장 모질고 잔인한 처형 방법이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잔인한 로마 군인들의 세계에서도 십자가만은 이야기하지 말자고 했다는 것입니다. 만일 황제가 식사할 때에 누군가가 십자가 이야기를 했다가는 당장 끌어내어 매질을 할 정도로 십자가는 끔찍스러움의 대명사였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달리는 광경을 한번 본 사람은 평생 잊혀지지 않는 악몽으로 기억될 정도로 참혹한 것이 십자가형이었다고 합니다. 이 십자가형은 본래 페르시아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나무에 매달아 놓고 죽이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신학적인 이유로 땅은 본래 신성한 것으로써 나쁜 죄인을 땅에다 놓고 죽이면 땅이 더러워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의 발이 땅에 닿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생각해낸 것이 십자가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보다 더 모진 형벌은 없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공중에 매달은 시체는 치우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두어서 새들이 뜯어먹도록 내버려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얼마나 끔찍한 방법입니까? 이러한 십자가형을 로마 사람들이 도입을 하여 죄인들에게 적용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로마 안에서는 십자가형을 내린 적이 없었습니다. 또한 로마인들에게는 절대로 십자가형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들의 노예나 식민지 사람들에게만 내리는 최고의 형벌이었습니다. 

이러한 십자가의 형을 전혀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억울한 누명을 쓰고 당하셨습니다. 로마 시민이라면 아무리 중죄인이라도 십자가형은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로마 시민권을 소유했던 바울사도는 단두형을 받았습니다. 노예나 식민지 사람들에게만 내리는 십자가형을 예수님께서 당하셨습니다. 이것은 약소국가의 서러움까지 함께 당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는 죄인 자신이 메고 가는 것입니다. 죽을 곳을 향하여 걸어가는 것도 힘든 일이데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가는 고역이 더해졌습니다. 

골고다 언덕까지 십자가를 지고 가신 예수님은 두 죄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강도 같은 죄인으로 합리화하기 위해 강도와 함께 못을 박았습니다. 죄인 아닌 예수님을 죄인으로 가장시켜 죽이기 위해 좌우에 함께 강도를 못 박았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되 옷을 다 벗겼습니다. 그 수치스러움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이렇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왜 이렇게 돌아가셨을까요? 한 마디로 말하면 자유함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8장 32절에 말씀하시기를“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하셨습니다. 이 진리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하셨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시는 자유는 어떤 자유입니까?

一. 죄악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하나님의 눈에 비춰진 인간의 모습에 대하여 로마서 3장 10절~15절에 말씀하시기를“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 발은 피 흘리는데 빠른지라.”고 하셨습니다. 마치 쓰레기와 같습니다. 요즘 건강해보이던 사람이 첨단 기기로 건강 검진을 받고 보니 치료가 불가능한 말기 암환자라는 이야기를 자주 듣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모습이 이와 같습니다. 교양이 있고, 예의가 바르고, 진실해 보이는 신사 숙녀라 할지라도 햇빛보다 더 밝은 하나님의 눈길 앞에 내 양심과, 생각과, 언행을 비춰볼 때 의인은 없습니다. 단 한명도 없습니다. 모두가 추한 죄인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처지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과 원수 되었고, 영원한 멸망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로마서 6장 23절에“죄의 삯은 사망이요.”라고 하셨으며, 야고보서 4장 4절에는“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라고 했습니다.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원수된 인간, 영원한 멸망에 처해진 것이 인간의 처지입니다. 

이러한 죄인에게 하나님께서 크나큰 사랑과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것이 사람의 몸으로 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말씀하시기를“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해 이사야 53장 4절~6절에 말씀하시기를“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들의 죄 값을 대신한 고난이 곧 십자가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1장 18절 말씀에“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 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의 공로로 얻을 자유를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 앞에 나와서 십자가의 공로를 믿는 사람은 어떤 죄든지 다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에 대해 로마서 5장 8절에 말씀하시기를“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들을 종합하면 그 의미는 이렇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다 죄인입니다. 죄를 범한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서 영원한 멸망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인간들을 사랑하신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의 몸으로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들의 죄 값을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이 은혜를 깨닫고 하나나을 섬기는 사람은 누구나 다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세계 모든 교회들이 예배시간마다 고백하고 있는 사도신경은 주후 4세기경 교회가 만든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신경보다 더 앞서 있었던 니케아 신조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유럽 교회가운데 성탄절이나 부활절, 고난주간에 사도신경대신 니케아 신조를 고백하는 교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니케아 신조에 이러한 대목이 있습니다.“우리를 위하여, 그리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그리스도는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다.”그렇습니다. 

이 얼마나 귀하고 복된 소식입니까? 그래서 예수님에 관한 말씀을 가리켜 복음(福音) 즉 복된 소식이라 합니다. 이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사람은 좌악으로부터 자유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6장 23절에“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고 하셨습니다. 

二. 억압으로부터의 자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하시기 전 은30에 팔리셨습니다(마26:15~16). 당시 노예의 몸값이 은30 이었습니다. 우주 만물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노예의 몸값으로 팔리셨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가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진리의 복음이 전파되는 곳은 어디나 자유함이 있게 됩니다. 기독교가 전파되는 곳에는 노예제도가 사라졌습니다. 유럽에 기독교가 전파되었을 때 봉건제도가 무너졌습니다. 기독교에 의해 미국의 노예제도가 사라졌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 복음이 전파되었을 때 양반과 상민제도, 남존여비(男尊女卑) 사상이 사라졌습니다. 

三. 가난으로부터 자유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누리는 또 다른 자유에 대하여 고린도후서 8장 9절 말씀에“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하셨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내세의 영생만이 아니라 이 땅에 살아있는 동안에도 우리들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자녀된 성도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지구상에 의식주(衣食住)걱정을 하지 않고 살아가는 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모두 기독교가 활성화되어 있는 나라들입니다. 공산주의 국가들의 몰락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공산주의 국가들은 모두가 그 이전에 기독교 국가들이었습니다. 러시아가 그렇고 동유럽 나라들이 그렇습니다.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 같이 망했습니다. 단 한 나라도 예외가 없습니다. 우리가 그토록 원하는 풍요로움의 근원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명기 28장 1절~6절에 말씀하시기를“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네 몸의 소생과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우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네 광주리와 떡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하셨습니다. 

이처럼 십자가의 공로로 하나님의 자녀된 사람에게는 풍요로움이 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8장 9절에 말씀하시기를“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하셨습니다. 어느 부모가 자식이 가난하게 살기를 바라겠습니까? 외아들까지 우리를 위해 세상에 보내신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이 가난하게 살기를 바라겠습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을 섬기는 그의 자녀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넉넉하여 선한 일에 힘쓰며 보람 있고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이처럼 그리스도 안에는 가난으로부터 자유함이 있습니다. 

四. 질병으로부터 자유가 있습니다. 

이사야 53장 3절 말씀에“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 예수님이 운명하신 것을 보고 그의 죽음을 더욱 확실하게 하기 위해 창으로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르니 물과 피가 나오더라는 기사가 있습니다(요19:34). 이때에 있어진 일에 대하여 로마 전설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옆구리를 찔렀던 로마군인은 외눈 병사였습니다. 예수님의 옆구리에서 흘러내린 물과 피가 그 병사의 얼굴에 떨어져 그 병사의 한쪽 눈에 들어갔습니다. 

그때 그는 눈을 감고 생각하기를“내가 그를 찔러 나는 그와 원수가 되었는데 그의 몸에서 나온 물과 피가 분명히 나를 저주하여 내게 남아있는 한쪽 눈마저 멀어져 나는 이제 완전한 소경이 되겠구나.”하고 절망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조심스럽게 눈을 떠보았습니다. 그런데 소경이 아니고 눈이 뜨여졌습니다. 더욱 놀란 것은 이미 시력을 잃고 멀었던 눈까지 완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는 창을 집어던지면서“나는 그를 찔러 저주하였는데 그의 몸에서 나온 물과 피는 나를 축복하여 내 감겼던 눈을 뜨게 하였다.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구세주라. 나는 그를 믿겠노라.”하고 그 순간부터 그리스도의 신실한 제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계실 때에도 병든 무리들을 긍휼히 보시고 고쳐 주셨습니다. 문둥병자, 중풍병자, 귀머거리, 눈먼 소경, 앉은뱅이, 귀신 들린 자 등 각색병자들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치료하는 하나님이십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직접 치료하시지만 때로는 사람의 의술을 통해 치료하기도 하십니다. 우리는 모두 이렇게 치료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서양의술을 처음으로 전한 사람은 알렌 의료 선교사입니다. 그가 세운 병원이 우리나라 최초의 병원인 광혜원 지금의 세브란스병원입니다. 로제타 선교사에 의해 설립된 병원이 이화여대부속병원,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의 전신인 경성여자 의학 전문학교, 인천 간호대학, 인천 기독병원입니다. 이 로제타 선교사는 43년간 한국에 머물며 인술을 베풀었습니다. 

미국은 그의 헌신적인 인술을 크게 인정하여 미국이 뽑은 200대 여인의 한 사람으로 선정하기도 했습니다. 로제타의 아들 셔우드 홀도 어머니의 뒤를 이어 우리나라에서 의료선교에 힘을 쏟았습니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결핵협회를 창설했고, 크리스마스실을 만들어 그 수입으로 결핵환자들을 치료하며 결핵퇴치에 앞장섰습니다. 이렇게 주님의 종들을 통해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지 않은 사람은 우리나라에 아무도 없습니다. 

五. 염려와 근심으로부터 자유가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미국의 군인들이 전쟁터에 나가서 총에 맞아 죽은 사람은 30만 명 정도가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남편과 아들을 전쟁터에 보내고 난 다음 집에서 염려하고 근심하고 불안하고 초조하고 떨다가 심장마비로 죽은 사람은 100만 명가량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염려와 두려움은 전쟁터의 어떤 무기보다도 더 무서운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근심걱정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모두가 다 무거운 짐을 지고 험한 나그네의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이를 해결할 길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해답입니다. 염려와 근심에 시달리는 무리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1장 28절에 말씀하시기를“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하셨습니다. 또한 빌립보 4장 6절~7절에 말씀하시기를“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에도 말씀하시기를“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하셨습니다. 염려와 근심되는 무거운 모든 짐을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그 짐을 받아 해결해 주시므로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사방이 가로막혀 어디에도 피할 길이 없는 숨 막히는 상황에 처했어도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면 안개가 사라지듯이 그 모든 불안과 공포가 사라지고 마음의 평안과 함께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게 됩니다. 그러므로 시편 50편 15절에“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는 해결 못하실 문제가 어디 있겠습니까? 예레미야 33장 2절~3절에 말씀하시기를“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 환 일을 네게 보이리라”라고 하셨습니다. 간절한 기도에는 하늘이 움직이는 역사가 있습니다. 

야고보서 5장 13절~18절 말씀에“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찌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찌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년 육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디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하셨습니다. 

어느 분이 말하기를“사탄은 우리가 기도만 못하게 한다면 성경공부는 얼마든지 하게 내버려 둔다.”라고 했습니다. 기도는 생명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으므로 얻지 못하고 성취하지 못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야고보서 4장 2절~3절 말씀에“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라고 했습니다.“무기아래 있는 나라는 망해도 무릎 위에 있는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 무시로 기도하라, 하셨습니다.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해준 은인 언더우드 선교사가 우리나라에 와서 하나님께 드린 기도문이 있습니다. 

오주여!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있는 조선 사람뿐입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해야 할 일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 눈이 볼 수 있는 일이 있을 줄 믿나이다. 
지금은 우리가 황무지 위에 맨손으로 서 있는 것 같사오나
지금은 우리가 서양귀신 양귀자라고 손가락질 받고 있사오나
저희들이 우리 영혼과 하나인 것을 깨닫고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나이다.
지금은 예배드릴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저 경계와 의심과 멸시와 천대만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주소서.

지금은 어떻습니까? 5만여 교회 1200만 성도로 부흥했고, 그가 세운 연희 전문학교는 명문대학교가 되었고, 이 나라의 국력은 세계 속에 우뚝 섰습니다. 이것이 기도요 하나님의 능력으로 나타난 축복인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어떤 자유입니까? 

영원한 멸망으로 끌고 가는 죄악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억압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가난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질병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염려와 근심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이토록 귀하신 주님을 섬기시되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섬기시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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