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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장 중요한 계명 (막 12:2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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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중요한 계명 (막 12:28~34)


사랑에는 5단계가 있습니다.
첫째, 사랑을 받는 단계입니다.
마치 젖먹이 아이들처럼 사랑을 받음으로만 기쁨을 가지려는 이기적이고 유치하며 미숙한 단계입니다. 마치 젖먹이 아기들처럼 사랑을 받음으로만 쾌감을 느끼는 단계로서 이런 사람은 자기만 생각하기 때문에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합니다. 
둘째,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단계입니다.
상대가 사랑해 주는 정도만 사랑하고 상대가 변하면 미움으로 바뀌는 쉽게 변할 위험이 있는 단계입니다. 이 사람의 사랑은 품앗이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셋째,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도 사랑하는 단계입니다.
이런 사람은 이웃이 많은 사람이요, 봉사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넷째, 자기에게 해롭게 하는 사람까지 사랑하는 단계입니다.
이런 사람은 희생정신으로 사랑하는 사람이요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게 됩니다.
다섯째,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대속의 죽음을 죽은 단계입니다.
남을 위해 죽은 사람은 그 이름도 빛나 숭앙받게 됩니다. 이런 사람의 사랑을 ‘아가페 사랑’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신 뒤 날마다 예루살렘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런 예수님께 바리새파 사람들과 헤롯당원들이 보낸 몇 사람이 와서 예수를 시험합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쳐야 합니까? 아니면 바치지 말아야 합니까?” 예수님의 대답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번에는 사두개파 사람들 몇이 와서 일곱 형제와 살았던 여인에 대해 말하면서 “그렇다면 천국에서는 누구의 아내가 되어야 합니까?”라고 묻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천국에서는 모두 천사와 같이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를 듣고 있던 서기관 즉 율법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모든 계명 중 어떤 것이 가장 중요합니까?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예수님의 대답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무엇이 하나님 사랑입니까?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해야 합니까? 호 6:6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그러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라고 호세아는 계속해서 권면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니라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주님이십니다. 내가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인입니다. 하나님이 주인이라면 나는 그 말씀에 따르는 종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종은 주인의 말대로 따릅니다. 순종해야 합니다. 그런데 과연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 맞습니까? 오히려 내 뜻대로 하나님이 해 주시기를 바라고 있지는 않습니까? 먼저 내 마음을 즐겁게 하고 내 마음이 흡족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또 하나, 종은 그저 주인의 명령대로 따르기만 하면 종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주인이 제공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시라면 나의 삶은 주인 되시는 하나님이 책임지시는 것입니다. 나의 삶의 모든 것은 주님이신 하나님의 손길 아래 있다는 것은 먼저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 그리고 잠자리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주인이 제공합니다. 그리고 아파하면 치료해줍니다. 동시에 그분은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나의 하나님만이 아닌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라는 말 자체가 전능하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곧 전능하신 분입니다. 모든 능력을 지니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면 못하실 일이 없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이 우리의 모든 것을 책임지신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 하나님이시라면 당연히 나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나도 중요하고 내 가정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는 우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문에서도 전부 우리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는 곧 사람이 살아가는 원리가 결코 혼자서는 살 수 없는 돕는 배필로서의 삶임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세상에 독불장군은 없습니다.
 
함께 세워져가는 예수님을 머리로 하는 지체들입니다. 함께 지어져가는 성전입니다. 나 아닌 우리가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 땅에서 무엇이든지 합심해서 기도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실 것이라고 했고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과 함께 있겠다고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모임은 나의 유익을 위한 모임이 아닌 주의 이름으로 모이는 주님의 이름을 드러내는 모임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가정의 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행복을 위해서가 아닌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이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도록 입니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이 교회가 우선이냐 가정이 우선이냐고 합니다. 그건 전제가 잘못 된 것입니다. 내 가정이 먼저 중요하다는 말은 사실을 내가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내 마음에 흡족해야 한다, 내 마음에 들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어디까지나 중심은 나입니다. 내 생각에 내 마음에 아니다 싶으면 그건 잘못됐다고 합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주 우리 하나님은 유일하신 분이시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누가 하나님입니까? 내가 하나님처럼 내가 주인처럼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요구하고 그렇게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마음을 다하라는 것은 내 마음을 나누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건 우선순위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주 우리 하나님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럼 나는 뭐냐, 우리 가정은 뭐냐고 반문하실 수 있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했습니다. 가정을 돌보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그 우선순위의 첫 번째에 하나님을 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그들이 어떻게 합니까?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를 좇았습니다.” 그럼 우리 집은 어떻게 하냐고 나는 어떻게 하냐고 합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네 집은 모른 척 해도 좋다고 하시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면 내 집은 살 길이 없는데요 아니면 내 집을 돌아볼 시간이 없는데요 하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래서 절제가 필요합니다. 내 집 일도 중요한 것부터 하나씩 해결해 나가는 것이요 같은 시간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지혜와 상호 협조가 필요합니다. 반드시 해야 할 일과 뒤로 미루어도 될 일을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르밧 과부 엘리야에게 빵을 주면 자기와 자식은 굶어야 합니다. 넉넉해서 대접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럴 능력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빵을 만들어 가져오라고 합니다. 이건 도둑놈 심보가 돼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서 주님이 그 과부의 집을 책임지시겠다는 신호입니다. 그 신호 그 사인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신호를 거꾸로 보게 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얼마 전 좌회전 신호를 따라 좌회전을 하는데 앞에 가던 차들이 갑자기 서는 것입니다. 저는 얼마나 놀랐던지 아니 신호를 따라 그냥 돌아가면 되는데 생각지 않게 그냥 차들이 서 버리니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습니다. 

보았더니 제일 앞에 가던 차가 신호를 따라 좌회전을 하다가 보니 처음 회전할 때는 앞에 있는 신호를 보고 좌회전을 했는데 왼쪽으로 돌아서면서 보니까 앞에 있는 신호가 빨간 불입니다. 그러니까 이분이 순간적으로 착각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서버린 겁니다. 좌회전 신호를 받고 돌아서는 나를 위한 신호가 아닌 오른 쪽 길에 서 있는 차들을 위한 신호를 좌회전 나가던 내 신호로 순간적으로 착각을 해서 이분이 그냥 좌회전을 하다가 갑자기 서버리니 뒤에 따르던 차들이 얼마나 당황했겠습니까? 그래서 바른 판단이 필요하고 바로 알 필요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얼마나 잘 알고 계십니까? 정말 하나님이 유일하신 우리 주님이심을 알고 믿으십니까? 그것도 그냥 주님이 아니라 아빠 아버지지가 되시는 주님이십니다. 이는 우리의 모든 것을 책임지신다는 뜻입니다. 나는 내 건강을 유지하려고 노력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책임을 지지는 못합니다. 어디 누가 아프고 싶어서 아픈 사람이 있습니까? 하지만 우리 아버지 되신 하나님은 라파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건강을 책임지시는 분이시오 또한 치료하시는 분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믿는바 신유입니다. 첫째는 건강하게 살도록 둘째는 아픈 자를 회복시켜 건강하게 살 수 있도록 만드시며 또는 아픔을 이겨낼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는 분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신유의 하나님이심을 마음을 다해 믿으면 하나님이 우리의 건강을 책임지십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나눠지지 않게 하라는 것은 믿음에 흔들리지 말라는 뜻도 됩니다. 왜 내 힘들고 아픈 것만 믿지 내게 능력 주시는 하나님, 힘주시고 평안 주시고 건강을 책임지시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십니까? 한번 솔직하게 이야기해 보자고요. 휴식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쉬지도 못하게 우리를 혹사시키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밤을 지새워야 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잠시 눈만 붙여도 피곤을 풀어주실 수 있는 능력이 주님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기는 그래서는 사람이 어떻게 살 수 있겠느냐고 합니다. 그러니까 전능하신 하나님보다는 우리 상식을 더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서건 존다는 것은 그 시간을 통해 우리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가도록 만드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단지 그 졸아야 할 때와 장소를 구분할 수 있는 지혜는 필요하겠지만요. 그건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해 나가는데 있어서 언제든지 문제가 될 수 있는 또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사람들이 주위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을 그토록 시험하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 열심 당원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 이들과 같은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는 왜 없겠습니까? 가장 가까운 사람 가운데 가룟 유다와 같은 사람이 왜 없겠습니까? 그렇다고 염려해서 아무 일도 안 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 가운데서 다스리시고 지키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건 예수님이니까 가능한 일이지 우리는 예수님이 아니지 않느냐고 하는 분도 계십니다. 하지만 한분 하나님은 지금도 여전히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는 목숨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정말 죽을힘을 다해서 섬기라는 것입니다. 아니 어떤 때는 네 목숨을 내 놓으라고 하십니다. 보다 지혜롭게 할 수도 있지 않느냐고 하십니다. 여유 있는 사람이 하도록 하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주의 일을 여유가 있어서만 하는 것이 아니고 섬기는 것도 있어서만 섬기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주님 되심을 우리가 믿어야 하고 정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우리의 목숨을 내 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우리가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래 사자굴 속에도 던져지고 용광로 속에도 던져지고 바다 한 가운데 집어 던져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정말 주를 위해서 죽고자 하면 하나님이 살리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죽으면 죽으리라고 했던 에스더의 결심이 오늘 우리의 결심이 되어야 합니다. 오히려 바보스럽게 예루살렘을 향해 열린 창으로 예루살렘을 향해 기도했던 다니엘의 어리석음을 우리는 본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누구도 다니엘을 어리석다고는 하지 않습니다. 왜요 그 결과를 우리가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께서 우리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사자굴에 던져지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자굴에 던져집니다. 그런데 죽지 않아요. 분명 죽었는데 다시 살아요. 이게 우리의 부활 신앙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친 것도 바로 그 부활신앙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래서 뜻을 다하라고 합니다. 그렇게 결단을 내리는 것입니다. 

정말 죽기 살기로 하겠다고 마음에 결단을 내리는 겁니다. 내가 기어나가더라도 내가 죽더라도 주의 전을 찾겠다 이렇게 결단하라는 것입니다. 정말 큰 일이 생기면 볼 것 없이 뛰어나가지 않습니까? 직장이고 뭐고 다 제켜놓고 뛰어가는 것 아닙니까? 그렇게 주님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힘을 다하라고 하십니다. 내 할 수 있는 최선의 섬김을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가? 우리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했는데 알고 보니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었다면 이보다 더 허망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내 생각이 하나님께로 향해 있어야 합니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실까를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내가 채널이 맞아야 합니다. 지금이야 라디오나 텔레비전이 알아서 채널이 맞춰져 있어서 리모컨으로 누르기만 하면 되지만 그렇다고 해도 내가 보기를 원하는 방송의 채널을 맞춰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가정의 행복도 먼저 주님의 일에 함께 마음과 뜻과 온 힘을 다할 때 하나님이 보장해 주시는 것입니다. 아무리 내가 내 가정을 세워나가려고 해도 주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 가정 그것은 죽음이요 재앙입니다. 하나님이 돕는 배필을 지어주신 것이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돕는 배필 무엇을 위해서 돕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돕는다는 것이 오히려 망가뜨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와 그가 어떻게 아담을 도왔습니까? 사라 그녀는 또 어떻게 아브라함을 도왔습니까? 

그러니까 진짜 돕는 것이 어떻게 하는 것인가 가정을 행복을 지키는 것이 어떻게 하는 것인가 그 우선순위와 행복의 원리를 우리가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 한다는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지으신 것은 곧 첫째는 하나님과 교통하도록 하기 위해서요 둘째는 생육하고 번성하도록 하기 위해서요 셋째는 정복하고 다스리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뜻을 바로 깨달아 나를 정복해야 합니다. 내 마음을 주님의 마음으로 채워야 하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려야 하는데 이는 곧 모든 족속에게로 가서 그들을 제자 삼는 일을 해야 합니다. 마르다가 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해서 분주합니다. 예수님을 대접하고 싶어서 집으로 모셔 들였는데 음식을 준비하자니 마음이 분주합니다. 손길이 바쁩니다. 그런데 동생 마리아는 천연덕스럽게 예수님 발치에 앉아서 예수님의 말씀만 듣고 있습니다. 예수님 대접을 위해서도 그렇고 형제간의 우애를 위해서도 마리아는 마땅히 음식 준비하는 것을 도와야 한다고 마르다는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말씀은 마리아가 옳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마르다가 하는 일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더 좋은 쪽 주님이 더 기뻐하는 쪽은 마리아처럼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말씀이 우선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우선입니다. 모든 것들 다 버려두고 주를 좇았던 제자들의 모습으로 그러므로 우리는 돌아가야 합니다. 정말 주를 위해서 죽을 각오를 하여야 합니다. 주를 위해서는 다 버릴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께서 모든 것을 책임지시고 더 큰 은혜와 평강으로 넘쳐나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이 귀한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넘쳐나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단순히 이웃 사랑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원수 사랑까지도 말씀하십니다. 원수도 은혜 아래 변화되면 좋은 친구가 된다는 것을 요나서가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은 원수를 변하여 친구 되게 하셨는데 그런 하나님의 뜻을 마치 요나처럼 내가 싫어하고 있지는 않은지 깊이 반성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 내가 선을 긋습니까? “그 사람은 안 돼” 그런데 그건 누구의 뜻입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다시 물어야 합니까? 누가 내 이웃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어 우리들에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죽어가는 사람, 강도만난 사람, 이건 도무지 폐만 끼치는 사람, 조금도 도움은 안 되고 힘만 들게 만드는 사람 그런데 그를 위해서 나를 희생하는 사람 그가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강도 만나 죽어가는 사람 피 흘리고 쓰러져있는 사람 그래서 지나가던 제사장도 레위사람도 모른 척 지나쳤던 바로 그 사람에게 이 사마리아 장사꾼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어찌 보면 사마리아 사람으로서 자기가 그렇게 버림 받은 사람 취급을 당해온 까닭에 더 그 죽어가는 사람이 안타깝게 여겨졌는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장사꾼으로서 떠돌아다니는 자기도 언제 저렇게 강도를 만날지 모른다고 하는 마음 때문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이 사람은 가던 길을 멈추고 그 죽어가는 사람들 치료합니다. 그리고 여관으로 데려가 그를 돌보아 줄 사람을 구합니다. 그 비용까지 지불합니다. 그 후 그가 어떤 보상을 받았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아니 그 사람이 그런 보답을 바라고 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이게 진짜 사랑입니다. 오히려 내가 뒤집어 쓸 수도 있습니다. 기껏 살려냈더니 보따리 내놔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갚으시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몇 년 전 샘물 교회처럼 좋은 일을 하고도 욕을 먹을 수 있고 좋은 일을 하다가 죽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진짜 사랑이라고 주님 말씀하십니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하신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니까 누가 나를 아프고 힘들게 한다고 해서 내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또는 잘못될까봐 해가 될까봐 못하겠다고 하지 않아야 합니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가 내 마음에 들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가 내 마음에 들기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에게 맞추어줄 수 있어야 하고 오히려 그 손에 나를 찌르려고 하는 칼이 들려 있기에 더욱 그를 품에 안아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 위의 주님의 사랑입니다. “저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조차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그리고 이것이 진정한 자기 사랑입니다. 진짜 나를 아끼고 나를 지키는 비결은 이웃을 위해서 나를 버리는 것입니다. 내 모든 염려를 내려놓으십시오. 극한 가난 가운데서 오히려 풍성한 구제 예물을 드렸던 마게도냐 교회들을 기억하십시오. 

‘손톱이 반쯤 떼어져 나가도 울지 않는 저이지만 친구의 바늘 같은 말 한마디는 쉽게 넘길 수 없었습니다.’
초등학생이 쓴 편지 구절입니다. 친구가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를 반쯤 떨어져나간 손톱의 아픔보다 더 크게 느끼고 있는 이 아이처럼 오늘 내가 한 말은 타인에게 어떤 의미가 되었을까요?
위로가 되었을까요?
아픔이 되었을까요?
부담이 되었을까요?
분노를 심었을까요?
화를 가라앉혔을까요?

한마디의 말이라도 남에게 사랑의 힘을 주는 말을 하기 위해, 나의 말이 남에게 위로와 사랑이 되지 못할 때는 차라리 침묵할 줄 아는 입술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이런 사랑의 마음을 품어 오늘을 사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960년대에 휘튼 대학을 수석 졸업하고 교수직을 얻은 짐 에리엇은, 에콰도르의 아우카 족이 너무 흉포하여 아무도 그들에게 접근하지 않아 복음을 받지 못했다는 글을 읽고 아우카 족에게로 갔습니다. 그리고 몇 달간 소식이 끊어졌습니다. 

마침내 짐 엘리엇을 찾기 위해서 나섰던 수색대들은 참혹하게 찢겨서 죽어 있는 그의 시체와 유품들을 발견했습니다. 지금은 폐간된 “루크”라는 잡지에 화보가 그대로 실려 온 세계가 경악했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이 짐 엘리엇의 부인이 1년 후, 간호원 훈련을 받은 뒤에 아우카 족에게로 들어간 것입니다. 남편이 사랑했던 그래서 그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쳤던 그 민족을 향해서 간 것입니다. 여자를 다치게 한 자는 비겁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는 사실을 이 부인은 모르고 갔습니다. 그리고 5년 동안 그들을 위하여 헌신하였습니다. 

안식년이 되어 돌아간다고 하자 추장이 온 부족들을 모아 놓고, 파티를 열어주면서 물었습니다. “늘 앞서서 고통을 함께하는 당신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사실은 5년 전에 당신들이 죽인 그 사람이 내 남편입니다. 그리고 나와 내 남편이 섬기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여기까지 와서 살게 된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아우카 족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했습니다. 

사랑은 결국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내 목숨을 버리는 것입니다.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그 주님이 우리를 더 이상 종이 아닌 친구라 부르십니다. 아니 그런 우리를 신부로 맞으십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신부된 우리 역시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려야 합니다. 목숨을 버린다는 것은 내 생각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내 뜻 내가 원하는 것을 내려놓을 때 그곳을 하나님께서 더 크고 귀한 것으로 채워가시는 것이요 바로 그 빈자리가 사랑으로 넘치고 행복으로 넘치고 은혜로 넘치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오늘 종려 주일에 이 주님의 사랑으로 주님의 교훈으로 우리가 다시 한 번 우리 심령을 채우며 우리 자신을 돌아볼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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