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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예수는 어떻게 하라는 거요? (마 27: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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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는 어떻게 하라는 거요? (마 27:21~26)


[총독이 그들에게 물었다. “이 두 사람 가운데서, 누구를 놓아주기를 바라오?” 그들이 말하였다. “바라바요.” 그 때에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그러면 그리스도라고 하는 예수는,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거요?” 그들이 모두 말하였다.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빌라도가 말하였다. “정말 이 사람이 무슨 나쁜 일을 하였소?” 사람들이 더욱 큰 소리로 외쳤다. “십자가에 못박으시오.” 빌라도는 자기로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것과 또 민란이 일어나려는 것을 보고, 물을 가져다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고 말하였다.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책임이 없으니, 여러분이 알아서 하시오.” 그러자 온 백성이 대답하였다. “그 사람의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시오.” 그래서 빌라도는 그들에게,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한 뒤에 십자가에 처형하라고 넘겨주었다.]

• 금기를 넘나들다

갈릴리라는 변방에서 시작된 예수의 하나님나라 운동은 들불처럼 번져 마침내 예루살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서두르는 법 없이 하염없이 걷는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서셨습니다. 오래 전부터 예수의 소문을 들었던 이들은 뭔가 진기한 구경거리라도 만난 듯 예수의 일행을 뒤쫓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 길에 폈고, 다른 이들은 올리브 나뭇가지를 꺾어다가 길에 깔았습니다. 이상한 흥분감이 사람들 사이에 번져갔습니다. 그때 누군가가 선창을 하듯 외칩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께!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더없이 높은 곳에서 호산나!”(마21:9) 온 도시가 들떠서 물었습니다. “이 사람이 누구냐?” 사람들은 그가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신 예언자 예수라고 말하였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그런 흥분된 모습과는 달리 예수님은 더욱 깊은 침묵 속에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어쩌면 지난 3년 동안 일어난 일들을 반추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주님은 광야에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신 후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갈릴리의 어촌 마을을 두루 찾아다니시며 사람들의 가슴에 하나님 나라의 불을 질렀습니다. 잘난 사람들에게 짓눌리고, 무시당하는 것을 숙명이려니 여기고 있던 그들에게 모두가 사람답게 사는 새로운 꿈을 심어주셨던 것입니다. 주님은 종교가 만들어 놓은 금기를 위반하곤 했습니다. 

안식일에도 병을 고쳐 주셨고, 율법이 부정한 이들로 규정한 이들과 접촉하는 데도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세리와 죄인의 친구가 되셨고, 그들의 식탁에 즐거이 앉으셨습니다.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율법 조문으로 옭아매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성전 체제를 부정하기까지 하셨습니다. 신학자들이 금과옥조로 여기는 율법조문을 자유롭게 해석하기도 하셨습니다. 예수의 그런 행태는 기존 체제의 입장에서는 매우 위험한 것이었습니다.

정결예법이나 성전체제를 비판하는 일은 금기의 영역에 속했습니다. 꺼리어 피한다는 의미의 금기禁忌는 사실 적절한 사회 질서를 유지해야 할 필요가 있는 곳에서 사회 통제의 한 방식으로 발생한 것입니다. 금기를 위반하는 것은 곧 사회 질서를 위험에 빠뜨리는 일로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금기의 영역을 수시로 넘나들었습니다. 그것은 위반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사람들을 치유하고, 일으켜 세우고, 자기 삶의 주인이 될 용기를 불어넣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 예수가 어찌 보면 모든 금기가 집약되어 있는 곳인 예루살렘에 들어오셨습니다. 지도자들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평생을 엎드려 살아온 이들이 일어서기 시작하면 자기들이 서 있는 토대가 흔들릴 터이니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들은 마치 예수님의 삶의 목표가 십자가인 줄로 생각합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오셨다는 해묵은 믿음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십자가는 예수님이 선택한 삶의 결과이지 목표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도 살기를 원하는 생명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우리와 다른 것은 우리는 살기 위해 죽음을 피하지만, 주님은 참으로 살기 위해 죽음을 피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 침묵의 힘

예수님은 마침내 지도자들의 음모에 따라 빌라도에게 넘겨지셨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기면서 제시한 죄목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민족을 오도하고, 황제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반대하고, 자칭 그리스도 곧 왕이라고 하였습니다.”(눅23:2)
“그 사람은 갈릴리에서 시작해서 여기에 이르기까지, 온 유대를 누비면서 가르치며 백성을 선동하고 있습니다.”(눅23:5)

예수 운동을 위험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그들이 동원한 수사는 치밀합니다. 민족을 오도한다, 백성을 선동한다, 황제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반대한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자칭했다면서 그 말의 속뜻은 ‘왕’이라는 해석까지 친절하게 덧붙이고 있습니다. 어느 것 하나 사실과 부합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멋대로 왜곡하여 자기들이 파놓은 함정에 끼워 넣고 있습니다. 빌라도는 그런 공소장에 대해 예수에게 변론을 기회를 주었지만, 주님은 침묵하십니다. 이미 말의 부질없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빌라도는 이 낯선 사나이의 깊은 침묵에 당황했습니다. 자포자기의 심정인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그저 고요한 침묵 속에 머물 뿐입니다. 칼릴 지브란은 <사람의 아들>에서 예수님을 만난 빌라도의 당혹감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심문을 했지만 그는 대답을 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만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눈 속에는 불쌍히 여기는 빛이 들어 있었습니다. 바로 자기가 내 통치자요 재판장이기나 한 것처럼.”

성경은 빌라도가 예수의 침묵을 매우 이상히 여겼다고 전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상히 여겼다’는 말은 예수의 이적을 본 사람들의 반응을 전할 때 사용되던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빌라도는 예수에게서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어떤 위엄, 즉 신적인 권위를 보았던 것입니다. 주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지만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말씀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 진퇴양난

빌라도는 난처한 지경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다면 결정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정치적인 고려와 양심의 법 사이에서 갈등했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의 요청을 뿌리치는 일도 쉽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이 비협조적으로 나온다면 자신의 정치적 평판에 손상을 입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예수를 처벌할 생각도 들지 않았습니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어떤 다른 힘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는 궁여지책으로 사람들에게 묻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라고 하는 예수는,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거요?”

정치적으로 지혜로운 처신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당당하지는 못합니다. 그는 그렇게 해서 자기 책임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는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요구합니다. 악한 생각이 들어가면 사람은 언제든 악마적으로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생명의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들이 자기들의 기득권을 위협하는 이를 제거하기 위해 서슴없이 죽음의 편에 가담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십자가 처형은 로마 체제에 지속적으로 저항해온 사람들이나 반역자들에게 부과되는 형벌이 아닙니까? 그들도 어쩌면 많은 무고한 이들과 애국자들이 십자가에 처형되는 현실을 보면서 이를 악물었던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기들의 이해가 걸린 사안 앞에서는 이렇게도 쉽게 악의 편에 가담합니다. 

우리도 지금 이 질문 앞에 서 있습니다. “예수는, 나더러 어떻게 하라는 거요?” 두 가지 태도가 나타납니다. 첫째는 방관입니다. 빌라도의 아내는 남편에게 전갈을 보내 지난 밤 꿈에 그 사람 때문에 몹시 괴로웠다면서 그 사람의 일에 관여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빌라도는 물을 가져다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손을 씻고는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책임이 없으니, 여러분이 알아서 하시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손을 씻는다고 해서 책임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불의와 공모 혹은 방조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파멸시켰습니다.

둘째는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자기들의 적을 없애는 것입니다.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를 제거하는 일에 마음을 모았습니다. 그들은 공의회를 소집하여 예수에 대한 대책을 숙의합니다. “이 사람이 표징을 많이 행하고 있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 사람을 그대로 두면 모두 그를 믿게 될 것이요, 그렇게 되면 로마 사람들이 와서 우리의 땅과 민족을 약탈할 것입니다.”(요11:47-48) 그러자 노회한 가야바가 말하였습니다. “당신들은 아무것도 모르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민족 전체가 망하지 않는 것이, 당신들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소.” 그들은 민족 전체를 위한다는 명분하에 예수 죽이기를 공모합니다. 하지만 유대교의 오랜 가르침은 다른 사람들을 살리기 위하여 무고한 사람을 희생시켜서는 안 된다고 말해왔습니다. 

“만일 적들이 모여 있는 여자들에게 말하기를, ‘너희 모두 욕보지 않으려면 너희 가운데 하나를 우리에게 보내라’고 한다면 그들이 와서 모두를 욕보이게 할지언정 어느 한 여자를 뽑아서 욕보게 해서는 안 된다.”(아브라함 요수아 헤셀, <<누가 사람이냐>>, 종로서적, 137쪽)

그들은 민족을 살린다는 그릇된 명분으로 예수를 죽임의 벼랑으로 내몰았습니다. 그것이 자기 자신에 대한 부정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 거친 예수 vs. 세련된 예수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믿는다고 고백하는 예수는 복음서에서 증언되고 있는 그 예수님이 맞습니까? 우리는 다른 예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 통렬하게 말합니다.

“여러분을 그리스도의 은혜 안으로 불러 주신 분에게서, 여러분이 그렇게도 빨리 떠나 다른 복음으로 넘어가는 데는,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갈1:6)

사실 다른 복음은 없습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왜곡시키고 있을 뿐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다른 복음은 ‘할례와 율법주의’를 강조하는 이들의 가르침을 가리키고 있지만, 지금 우리들은 또 다른 의미의 ‘다른 복음’을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콘스탄틴 황제 이후 기독교는 특권을 누리는 위치에 서게 되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성경에서 증언되고 있는 예수는 참 불편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예수를 제거해 버릴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교회가 발견한 길은 예수를 정신화하고 종교화하는 길이었습니다. 예수는 삶의 변화를 가르쳤지만 교회는 예배의식 속에 예수를 박제화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가지고 현실을 변혁하려 했지만 교회는 죽음 이후에 가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르침으로 예수를 침묵시켰습니다. 신학자들은 거칠거칠한 예수를 숨기고, 세련되고 고상하고 철학적인 예수를 만들어냈습니다. 사람들 속에 어울리기 위해 금기를 깨뜨리는 예수, 부정하다고 규정된 이들과 함께 먹고 마시던 예수는 교회당 저 꼭대기로 높여져 사람들의 삶과 무관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예수는 새로운 종교를 가르치신 적이 없습니다. 새로운 삶을 가르치셨을 뿐입니다.

고난 주간을 앞둔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복음서가 증언하고 있는 그 예수의 생생하고도 치열한 삶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사람살이의 현장에서 빚어지는 아픔과 슬픔을 쉽게 초월하지도 않고, 불의한 세상 현실로부터 달아나지도 않고, 그렇다고 폭력적으로 맞서지도 않았던 예수님을 배우는 것입니다. 예수의 피, 그 뜨거운 심장이 없어 우리는 세속의 물결에 속절없이 떠밀리며 삽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변혁을 위해 폭력을 사용하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세상의 악한 세력과 맞서야 하지만 그것은 정신의 힘, 사랑의 힘을 근거로 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지는 사랑이야말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입니다. 성도들은 힘에 힘으로 맞설 것이 아니라, 어떤 힘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는 영혼이 있다는 것을 세상 앞에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던 빌라도 앞에서도 참으로 고요하셨습니다. 

성도들은 어느 곳에 있든지 생명의 표지를 일으켜 세워야 합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따뜻함을 불어넣고, 이웃의 마음 깊은 곳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형상이 싹을 틔우도록 물을 주고 거름을 주어야 합니다. 주님의 고난을 깊이 묵상하는 이 주간 우리 마음과 삶의 한복판에 주님께서 함께 머무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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