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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나귀 타고 오신 왕 (마 2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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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귀 타고 오신 왕 (마 21:1~11)
  

오는 주간은 고난주간입니다. 
기독교 절기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의미 있는 주간입니다. 
예수님의 생애 마지막 주간일 뿐만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신 십자가의 죽음이 있는 주간입니다.
고난주간에 된 일을 보면,
일요일 - ‘종려주일’이라고 부릅니다.(마 21:1-11)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당시 수도인 예루살렘 성을 입성하실 때 군중들이 종려나무가지를 꺾어 길에 깔거나 흔들면서 ‘호산나’를 외치며 환호했던 날입니다. 

월요일 - 시장하신 예수님께서 열매를 찾으셨으나 열매가 없던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사건(마 21:18-22)과 예루살렘 성전에서 들어가셔서 기도하는 하나님의 집을 강도의 굴혈로 만든 돈 바꾸는 사람들과 비둘기 장사꾼들을 내쫓으며 성전을 정화한 사건이 있었던 날입니다.(마21:12-17). 

화요일 - 예수님을 죽이기로 모함하는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 율법사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가르치시고(마 22:17-40), 한 여인이 귀한 향유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부음으로 주님의 사랑에 대한 갸륵한 보답이 있었던 날입니다.(마 26:6-13). 

수요일 - 예수님께서 조용히 쉬시면서 수난과 죽음을 맞이할 마음의 준비를 하셨던 날입니다. 

목요일 -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김으로 섬김의 본을 보이셨고(요 13:1-17), 제자들과의 최후의 만찬(마 26:17-29)과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여 할 수만 있으시다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고뇌에 찬 기도를 드린 다음,(마 26:36-46) 유다의 고발로 체포되셨던 날입니다.(마 26:47-56) 

금요일 - 이 날은 ‘고난의 날’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날입니다.(마 27:1-11, 32-56) 

이 날에 해도 빛을 잃고, 달도 그 모습을 감추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전통에 의하면 금요일에는 촛불을 켜지 않고, 십자가를 검은 휘장으로 가려 예수님의 죽으심을 슬퍼합니다. 

토요일 - 매장되셨던 날입니다. 

주일 - 부활하신 날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이번 고난주간에 마 21-28장을 조용히 잃고 묵상함으로 주님의 고난을 여러분의 마음속에 재현해보시길 바랍니다. 
예수라는 한 인간! 아니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의 마지막 한 주간에 하신 말씀 한마디, 행동 한 가지는 엄청난 무게로 여러분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그 첫 번째 날, 종려주일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 밖 벳바게에 이르자 제자들에게 “건너 마을에 가서 매어 놓은 나귀와 나귀 새끼를 풀어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명령을 받들어 나귀를 풀어오려고 했습니다. 
그때 주인이 “왜 남의 나귀를 끌어가려고 하느냐?”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제자들이 “주님이 쓰시려고 합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주인은 아무 소리 하지 않고 나귀와 나귀 새끼를 풀어주었습니다. 
주님이 쓰시겠다고 하니까 즉시로 자신의 것을 내놓는 주인의 태도가 감동적입니다.
만일 주님께서 ‘우리의 것을 쓰시겠다.’고 하시면 우리는 어떻게 대답할까요? 
우리의 돈을 쓰시겠다고 하면, 우리의 시간을 쓰시겠다고 하면, 우리의 재능을 쓰시겠다고 하면, 우리의 경험을 쓰시겠다고 하면,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쓰시겠다고 하면, 우리는 어떻게 할까요?

제자들이 겉옷을 벗어 나귀 위에 깔고, 사람들이 그들의 겉옷을 길에 펴며 나뭇가지를(종려나무로서 대추야자나무) 흔들면서 ‘호산나’라고 찬양했습니다.
‘호산나’라는 말은 ‘지금 구원하소서.’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 주일을 종려주일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행진은 왕의 대관식 행차이십니다.
그런데 오늘 이 예수님의 행진은 이상하기도 하고, 우스꽝스럽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왕의 행차라면 자주색 카펫 위에 말을 타고, 팡파르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등장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이 아니라 나귀를 타시고 등장하셨습니다.
자주색 카펫 위가 아니라 사람들의 겉옷 위를 행차하셨습니다. 
금속성이 울려나는 팡파르가 아니라 사람들의 심장에서 솟구쳐 나오는 ‘호산나’ 소리를 들으시면서 나타나셨습니다.
왜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오셨을까요? 
무엇을 보여주기 위하여 이런 행동을 취하셨을까요? 
종려주일에 깊이 생각해보아야할 문제입니다. 

1) 예수님은 누구신가?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오셨다는 것은, 예수님은 누구신지를 알려주는 행동입니다. 
예수님은 이제까지 자신이 누구시라는 사실을 숨겨왔습니다. 
몇 군데를 예로 들어봅니다.
막1:40-45절에 보면, 예수님이 한 문둥병자를 고치시고, 43-44절에 이렇게 당부하십니다.
“곧 보내시며 엄히 경고하사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또 막 5:21-43절에서 예수님이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고치시고, 43절에 이렇게 당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그들을 많이 경계하시고…” 
이 외에 여러 곳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라고 밝힐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숨기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때가 왔습니다. 
며칠만 있으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이 세상에서의 삶을 정리하셔야 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분명히 밝혀야 하실 때입니다. 
예수님이 구원자, 메시아이심을 공개적으로 선언해야 할 때입니다. 
그래서 나귀를 타시고 오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래전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이 있은 후 그들을 구원할 메시아(히브리어), 그리스도(희랍어)는 나귀를 타고 올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슥 9:9절에서 스가랴는 예언하기를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나귀의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셨다는 것은 ‘예수님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메시아, 그리스도이시다’라는 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선언하신 행위였습니다.
당시에는 예수님의 제자들까지도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하여 반신반의 했습니다. 
도대체 이분은 누구실까? 
그러나 제자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의 나귀의 새끼를 타시는 행동을 보고, 그들은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을 생각했습니다. 
얼마나 감격스러웠겠습니까?
“아, 저 분이메시야시구나!”
그들은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알고, 소리 높여 호산나,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오늘 종려주일을 맞이하면서 여러분도 예수님을 향하여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하시는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누군가가 나를 향하여 ‘예수님은 누구신가’라고 질문하였을 때 “잘 모르겠는데 교회 가보니 주님, 주님 하더라.”고 흐리멍덩하게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나의 주님’이라고 분명하고 똑똑하게 고백하는 절기가 되길 바랍니다.
인간의 근본 문제는 뭐니 뭐니 해도 죄의 문제와 죽음의 문제입니다.
모든 걱정과 갈등의 근원을 따져보면 죄와 죽음의 문제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의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구세주이십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구세주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삶의 갖가지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구세주이십니다.
주님은 아플 때나, 실의에 빠졌을 때나, 절망 한 가운데에서 허우적거릴 때나, 내일을 볼 수 없는 어두운 구름에 갇혔을 때나, 언제나 어디서든지 우리 주님이십니다.

여호수아서 1장 9절의 말씀에 늘 은혜를 받습니다.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함께하신다는 것은 동반자입니다. 
주님은 여러분이 어디로 가든지 함께 하시는 partner입니다. 
주님은 여러분과 언제든지 함께 하시는 partner입니다.
주님은 여러분이 무슨 일을 하든지 함께 하시는 partner입니다. 
직장의 partner! 사업의 partner! 선교의 partner! 인생의 partner! 자녀교육의 partner! 
어떤 분은 사업을 하면서 예수님을 동역자 partner로 모셨답니다. 
예수님을 회사의 회장님으로 모신거지요.

그래놓고 하는 소리가 “주님, 이 사업을 망하게 하시든지 불같이 일으키시든지 마음대로 하십시오. 망하면 나만 손해입니까? partner도 손해지….”
그러니 주님이 꼼짝할 수 있겠습니까?

2)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오셨다는 것은,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의 이집트 생활에서 감사한 일중에 하나는 예수님이 타고 예루살렘성에 들어가셨던 ‘나귀’라는 짐승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서울에서는 '나귀가 노새일까?’ 정도로 상상했는데…. 
그곳에서는 눈만 뜨면 나귀를 볼 수 있습니다. 
나귀를 자세히 관찰해보면 신체적으로 뭔가 균형이 잘 잡혀있지 않습니다. 
몸에 비해 머리가 너무 크고, 귀가 너무 큽니다. 

이집트 농촌마을에 가면 이 나귀가 자기 몸보다 더 크고 뚱둥한 농부를 태우고, 발길질 한번 하지 않고 묵묵히 걸어갑니다. 
보고 있노라면 애처로울 정도입니다.

① 예수님이 말을 타시지 않고 이 나귀를 타셨다는 것은 예수님은 섬김의 종이심을 보여주십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은 ‘말’을 타는 인생관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더 많이 차지하고, 더 많이 뽐내고, 더 많이 자랑을 하고, 더 많이 지배하고, 더 많이 다스리고….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나귀’를 타는 인생관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더 많이 섬기고, 더 많이 희생하고, 더 많이 수고하고, 더 많이 사랑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것이 제대로 된 삶이라는 것을 압니다.

유대인들은 식사를 할 때 비스듬히 기대어서 식사를 합니다. 
주인이 비스듬히 기대어서 식사를 하면 종들은 음식을 부지런히 날라다 줍니다. 
이 때 주님은 놀라운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편하게 누워서 날라다 주는 음식을 먹는 자가 높은 자가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섬기는 종들이 더 높은 자다.”
눅 22:27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즉 섬김이 인간의 높고 낮음을 가릴 수 있는 평가의 기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말이 높은 것이 아니라 나귀가 높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섬김의 삶을 마 25:31-46절에서 다음과 같이 구체화시킵니다. 
주님이 모든 민족을 양과 염소로 갈라놓고 심판하십니다.
양에게 하신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 25:34-36) 

이것이 바로 섬김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보여주신 섬김의 삶은 단순합니다. 
“배고프다고 하면 네가 먹을 것을 좀 줘라. 
목마르다고 하면 네가 마실 것을 좀 줘라.
옷이 없어 헐벗었다고 하면 네가 입을 것을 좀 줘라.
병이 들었다고 하면 네가 약이라도 좀 발라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높은 자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인 송병락 교수가 ‘마음의 경제’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내용 중에 “참으로 풍족하게 사는 백성과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오직 십계명과 산상 수훈의 사랑의 윤리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참된 의미에서 경제의 풍요로움을 깨닫지 못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신학자가 한 이야기가 아니라 경제학자가 한 이야기입니다.
송 교수가 지적한 십계명과 산상수훈의 핵심이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 섬김이고 다른 하나는, 이웃 섬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은 가치의 혼돈 속에 엉망진창이 되어간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인은 확신합니다.
가장 고귀한 삶, 가치 있는 삶이란 남을 섬기는 삶이란 사실을.
우리가 열심히 공부하는 이유는 남을 제대로 섬기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땀 흘려 돈을 버는 이유는 남을 더 많이 섬기기 위함입니다.
섬김이 여러분의 삶에 체질화되시길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사는 길입니다.

② 예수님이 말을 타시지 않으시고 나귀를 타셨다는 것은, 예수님은 평화의 왕이심을 보여줍니다. 
조금 전에 읽은 스가랴의 예언을 계속 읽습니다. 
슥 9:10절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나귀를 타신 메시아가 오셔서 말을 내몰고, 전쟁하는 활을 꺾고, 병거를 불사르고, 화평을 선포한다는 것입니다. 

말은 강하고 힘이 셉니다. 
그래서 힘을 나타내는 단위를 ‘마력’이라고 표시합니다. 
말은 전쟁의 도구로서 정복과 지배가 뒤따릅니다. 
말발굽이 지나간 곳에는 피가 고이고, 말발굽 소리는 듣는 이로 하여금 간담을 서늘케 합니다.
그러나 나귀는 평화의 상징입니다.
나귀의 새끼를 타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따르시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평화의 도구가 되길 바랍니다. 
가정에서 평화를 만들고, 직장에서 평화를 만들고, 동네에서 화목을 도모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단체와 단체 사이에서 평화를 만들기 바랍니다. 아멘
저는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성 프랜시스의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라는 시를 다시 한 번 읽음으로 이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며/ 이해받기 보다는 이해하고/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며/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아멘” 

주님을 따르는 여러분의 소원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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