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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리마대 요셉 (막 15:4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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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마대 요셉 (막 15:42~47) 
 
 
❚이 무슨 낭비란 말인가?

1956년 미국 사회 전체를 발칵 뒤집어 놓은 사건이 일어납니다. 명문 휘튼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짐 엘리엇을 비롯한 다섯 명의 젊은이들이 남미 에콰도르의 아우카(Auca) 부족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들어갔다가 실종된 것입니다. 에콰도르 깊은 정글 속에 사는 아우카족은 그 당시까지 접촉해서 살아남은 백인이 한 사람도 없을 정도로 사나운 부족이었습니다. 특히 이 부족은 외부인에게 호의를 표하며 환영의 웃음을 보내다가 갑자기 덤벼들어 살해하고 사지를 토막 내곤 했습니다. 

그런데도 짐 엘리엇과 네 친구인 네이트 세인트(Nate Saint), 로저 유드리안(Roger Youderian), 피트 플레밍(Pete Fleming), 에드 멕컬리(Ed McCully)는 오직 ‘영혼구원’이라는 한 가지 목적으로 이 사나운 아우카족 선교에 헌신한 것입니다. 그들은 에콰도르의 전진기지에서 경비행기를 타고 아우카족이 살고 있는 정글 속으로 들어가 바구니에 성경책과 선물을 담아 내려주었습니다. 3개월 뒤 어느 정도 아우카족 사람들과 가까워졌다고 생각한 엘리엇 일행은 아우카족 마을에 근접한 강가 모래톱에 비행기를 착륙시키고 아우카족에게 들어갑니다. 

그런데 그 이후 소식이 끊기고 맙니다. 가족들은 이들의 무사 귀환을 위해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다섯 명의 청년 선교사들의 실종 소식은 미국 전역으로 퍼졌고 대대적인 수색작업이 벌어졌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엘리엇과 친구들은 모두 아우카족의 창에 찔려 살해된 것입니다. 그들이 피살된 후 일주일 만에 수색대가 부패된 시체를 발견했는데 이들의 몸에는 화살이 그대로 꽂혀 있었습니다. 끔찍한 비극이었습니다. 미국 전역이 들끓었습니다. 미국의 모든 언론이 신문 헤드라인에 “이 무슨 낭비란 말인가!”(What a waist!)라는 제목으로 이 끔찍한 사건을 대서특필했습니다. 전도유망한 청년들이 너무나 허망한 죽음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말 이 신문 기사처럼 이 앞날이 창창한 다섯 젊은이의 죽음은 쓸데없는 낭비였을까요?

❚아리마대 요셉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후 시신을 가져다가 장사지낸 사람은 제자들이 아니라 아리마대 요셉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이 사람에 대해 몇 가지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첫째, 그의 이름입니다. ‘아리마대 요셉’이란 아리마대 지방 출신인 요셉이라는 뜻입니다. 아리마대는 아마도 사무엘상 1:1에 나오는 사무엘의 고향 ‘라마다임소빔’일 것이라고 봅니다.

둘째, 그의 직업입니다. 오늘 본문 43절에 보면 그는 ‘존경 받는 공회원’이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공회’(公會)란 유대인의 의회인 산헤드린을 뜻합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이 공회의 의원, 즉 오늘날의 국회위원에 해당되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는 존경 받는 국회위원으로 권력도 명예도 이미 충분히 누리던 사람입니다. 또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님을 장사 지낸 곳은 그가 소유한 ‘새 무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무덤은 바위를 판 동굴 형태의 무덤으로 한 사람을 위한 묘지가 아니라 아브라함이 헷 족속들에게 사서 가족 대대로 묻힌 막벨라 굴처럼 가족묘 형태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헷 족속에게서 은돈 사백 세겔을 주고 살 정도로(창 23:16) 이런 무덤은 제법 재산이 있어야 소유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은 그를 ‘부자’라고 말합니다(마 27:57). 따라서 아리마대 요셉은 사회적으로도 높은 신분이고 권력도 있는 데다, 이미 정치가로서 백성들의 존경도 받고 재산도 많은 사람입니다.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사람이 도대체 뭐가 아쉬울 것이 있겠습니까?

셋째, 그의 신앙입니다. 오늘 본문 43절에 보면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였다고 합니다. 그는 본디 유대교를 믿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떤 계기가 있어서 예수님을 믿고 제자가 된 모양입니다. 언제 어떤 계기로 그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는지 성경은 말씀하지 않습니다. 다만 성경은 그를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였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입니까? 쉽게 말하면 천국(天國)입니다. 하나님이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세상 말입니다. 천국을 간절하게 소망하고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 기도하며 기다린 신앙인이었다는 말입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도 이런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비록 오늘 이 땅에서 살아가지만 우리는 이 땅의 시민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 3:20에서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고 고백한 것처럼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나라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 살더라도 하늘을 바라보며 하늘을 소망하는 하늘의 시민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바로 이런 하늘의 시민 되시기 바랍니다. 바로 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간절한 소망 때문에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그 제자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문제가 있었습니다. 비록 그가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긴 했지만 그 사실을 드러내 놓고 밝힐 처지는 못 되었던 것입니다. 왜요? 그렇게 하기에는 잃을 것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그가 무엇이 부족합니까? 뭐가 아쉬운 사람입니까? 힘과 권력도 가졌어요, 존경받는 정치인이에요. 돈도 많아요. 그런데 이 모든 것보다 예수 믿는 것이 더 귀해서 예수님을 따르고 제자가 되긴 했지만 만약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잃을 것이 너무 많은 것입니다. 

안 그래도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싫어하고 특히 유대 정치인이나 종교지도자들은 눈에 쌍심지를 켜고 예수를 죽일 기회를 찾는 판에 만약 자기가 예수님의 제자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하루아침에 이 모든 것을 잃게 될 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여러분 같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용기를 내서 자기가 예수의 제자라고 밝힐까요? 모든 것을 다 잃는 한이 있더라도 말입니다. 아니면 반대로 제자 되기를 포기하고 유대교로 다시 돌아올까요? 여기서 우리는 엄청난 딜레마를 겪게 됩니다. 

전자가 옳기는 하지만 그러기엔 손해가 너무 크고, 그렇다고 예수님을 배반하고 부정하기엔 신앙적인 양심이 허락을 안 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아주 좋은 수가 있어요. 소위 양다리 걸치기 작전이지요. 신앙도 포기 안 하고 동시에 손해도 안 볼 기가 막힌 묘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는 따르지만 그 사실을 몰래 숨기고 몰래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복음서인 요한복음에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요 19:38)

기막힌 방법 아닙니까? 몰래 숨기고 예수 믿는 것이지요. 그러면 아무도 모르니까 자신이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오늘날 예수 믿는다고 손해 보거나 핍박 받을 일이 별로 없긴 하지만 그렇다고 “나 예수 믿는다”고 밝혀서 좋을 것도 없지요. 오히려 직장이나 가정에서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면 “너 예수 믿는다면서 왜 그러냐” 소리 들으니 참 불편합니다. 남들하고 똑같이 살고 같이 행동하고 싶어도 괜히 교회 다닌다는 사실 때문에 불편해지고 행동의 자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숨기는 것이지요. 아니, 숨긴다기보다 굳이 밝힐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말만 안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편하고 예수 믿는다고 괜히 손해 보거나 따돌림 당할 일도 없지요. 아리마대 요셉도 아마 그랬을 것입니다. “이건 숨기는 게 아니라 말 안 하는 거야” 하며 몰래 예수 믿고 몰래 제자 노릇 했을 것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숨기는 것이나 말 안 하는 것이나 도대체 뭐가 다릅니까? 괜한 말장난에 불과합니다. 둘 다 똑같은 말인데 괜히 그렇게 머리 쓰며 말을 바꾸는 것뿐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엔 그 놈이 그 놈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머리 쓰며 손해 안 보며 예수 믿고 살던 아리마대 요셉에게 오늘 어떤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아리마대 요셉의 용기

예수님이 붙잡혀 십자가에 처형을 당한 것입니다. 이 얼마나 충격적인 사건입니까?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따르고 제자까지 되었는데 그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비참하게 사형 당한 것입니다. 이 처형의 과정에서 아리마대 요셉과 동료인 공회원들은 어떤 역할을 했을까요?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장면을 보면 유대인의 공회인 산헤드린은 정말 악독한 무리들로 나옵니다. 마가복음 14장을 보면 온 공회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려고 거짓 증거를 찾습니다(55절). 

거짓 증거를 꾸며서라도 예수를 죽이려고 든 것인데 결국 거짓 증거조차 찾지 못하자 이번에는 거짓 증인들을 세워서 증언하게 시킵니다(56~58절). 공회원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주장하자 모두 일어나 예수를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정죄합니다(64절). 예수님에게 침을 뱉고, 때리고 모욕하다가 결박하고 끌고 가 빌라도에게 넘겨줍니다(15:1). 보세요. 이렇게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에서 공회원들은 한 결 같이 예수님에 대해 적대적이고 무자비하며, 예수님을 죽이기로 작당하는 악한 무리들로 묘사됩니다.

그러나 같은 산헤드린 공회원이면서도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에 대해 아주 다른 태도를 보입니다. 누가복음 23:51에 보면 그는 다른 산헤드린 공회원들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않았다고 기록합니다. 그 까닭은 그가 예수님을 믿고 따른 제자였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분명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를 믿고 따른 제자로서 다른 공회원들의 결의에 찬성하지 않은 것은 틀림없는데 그렇다면 과연 내놓고 반대를 했을까요? 

성경은 내놓고 반대했는지 안 했는지 분명히 언급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분명 드러내놓고 반대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마가복음 15:1은 분명 “새벽에 대제사장들이 즉시 장로들과 서기관들 곧 온 공회와 더불어 의논하고 예수를 결박하여 끌고 가서 빌라도에게 넘겨주었다”고 증언합니다. 즉 공회가 만장일치로 예수를 사형죄로 판결했다는 뜻입니다. 만약 이 과정에서 단 한 사람이라도 반대하거나 다른 의견을 표명했다면 성경은 이렇게 ‘온 공회’라고 기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게다가 그 자리에서 엄청난 물의와 혼란이 일어났겠지요. 

"어떻게 다들 만장일치로 찬성하는데 저 아리마대 요셉이라는 자만 반대하냐”며 난리가 나고 아리마대 요셉은 집중 공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혹시 의원직조차 위협 받았을지도 모르지요. 그런데도 성경에는 아무런 언급이 없고 온 공회가 만장일치로 결의했다고 하는 것을 보면 틀림없이 아리마대 요셉은 반대는 했지만 마음속으로만 반대하고 드러내놓고 반대의견을 내놓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에는 너무나 큰 용기가 필요하고 잃을 것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충분히 이해가 가는 대목입니다. 우리라면 그런 용기를 낼 수 있겠습니까? 그런 손해 감수할 수 있겠습니까? 못 하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지금 어떤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43절 앞부분을 보세요.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 아리마대 요셉이 빌라도 총독에게 찾아와 당돌히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한 것입니다. 여기서 ‘당돌히’라는 말은 “감히 ...하다, 용기 있게 무언가를 한다”는 뜻입니다. 무례할 정도로 당당하게 요구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머리 쓰며 손해 안 보려고 하던 아리마대 요셉인데, 신앙 양심은 허락 안 하지만 그래도 손해 볼까봐 따돌림 당할까봐 자기 소신도 숨기고 표현 안 하던 아리마대 요셉인데 갑자기 예수님이 돌아가시자마자 그것도 로마의 최고위층 실권자인 빌라도 총독에게 찾아가 당돌하게, 건방질 정도로 당당하게 예수님 시체 내놓으라고, 내가 장사 지내겠다고 요구한 것입니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갑자기 달라진다는 말입니까? 성경은 그 까닭을 말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사이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인지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십자가 사건 때문인 것입니다. 틀림없이 아리마대 요셉도 십자가 현장에 있었을 것입니다. 십자가 현장에 많은 관리들이 있었다고 한 것을 보면(눅 23:35) 아리마대 요셉도 십자가 처형을 지켜보았을 것입니다. 적어도 다른 공회원들처럼 겉으로는 태연하게 십자가 처형을 지켜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십자가 처형을 지켜보는 과정에 십자가상의 강도나 십자가 아래의 백부장처럼 그는 너무나 절실하게 깨달은 것입니다. 이분이 정말 하나님의 아들임을 말입니다. 혹시 모르지요. 그가 믿고 따르던 예수님이 그토록 힘없이 십자가에 달리신 바람에 다른 제자들처럼 실망하고 잠시나마 예수님에 대한 의심이 들었을지도. 하지만 십자가의 현장에서 주님의 고난과 죽으심을 보며 그는 깊이 깨닫고 자신의 비겁함과 의심을 깊이 회개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고 한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해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임을 만천하에 공포한 셈입니다. 

이제 아리마대 요셉은 많은 것을 잃게 될 것입니다. 공회 의원직도, 그동안 쌓아온 명성과 사람들의 존경도 말입니다. 어쩌면 모든 것을 다 잃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이 모든 희생과 손해를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내놓고라도 주님의 시신을 모셔 장사 지냄으로서, 또 자신과 가족이 쓰려고 준비해 두었던 새 무덤도 내놓음으로서 그는 예수님의 부활을 준비한 가장 중요한 제자가 된 것입니다.

❚거룩한 낭비

이런 점에서 아리마대 요셉은 열두 제자들과 대조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은 처음에는 당당히 주님을 따르다가 막상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는 두렵고 손해 볼까봐 피하고 부인합니다. 반면 아리마대 요셉은 처음에는 손해 볼까봐, 자신이 누리는 권력과 명예와 인기 잃을까봐 속이고 숨기다가 십자가 때에는 당당히 드러냅니다. 또 아리마대 요셉의 모습은 빌라도와도 대조됩니다. 빌라도 총독은 분명 예수님이 의인이고 무죄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백성들이 폭동을 일으킬까봐 비겁하게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줍니다. 자신의 것을 잃을까봐, 손해볼까봐 두려워 소신대로 행동하지 못하는 빌라도나 제자들과 달리 아리마대 요셉은 참 용기를 가진 제자입니다.

또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을 위해 기꺼이 최고의 장사를 치러 드립니다. 값비싼 세마포로 주님의 시신을 싸서 자기가 쓰려고 준비한 새 가족묘를 내놓아 최고 수준의 정성스러운 장례를 치러 드린 것입니다. 그의 모든 명성과 지위와 재물, 모든 소유와 누리는 것도 다 손해 볼 각오 하고 주님을 장사지낸 것입니다. 그래서 아리마대 요셉은 진정한 주님의 제자인 것입니다. 자신의 손해와 희생을 통해 부활의 초석을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의 희생은 거룩한 희생이요 그의 낭비는 거룩한 낭비인 것입니다. 이 거룩한 희생과 낭비를 통해 주님은 부활하십니다.

설교 첫머리에 소개한 짐 엘리엇과 네 친구의 이야기는 그들의 비참한 죽음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들의 아내들이 남편들의 뒤를 따라 아우카족에게 들어가 정성껏 부족을 섬깁니다. 추장을 비롯한 모든 아우카족들이 이들의 헌신에 감동했습니다. 부인들이 본국으로 떠날 때에 아우카족 추장이 물었습니다. “당신들은 무엇 때문에 우리를 위해 이 고생을 하십니까?” 짐 엘리엇의 부인 엘리자벳이 말했습니다. “남편들은 하나님을 알려주기 위해서 이곳에 왔습니다. 

당신들이 그들을 죽여 뜻을 이루지 못했지요. 우리는 남편들이 그렇게도 당신들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을 들려주기 위해서 왔습니다. 그 말이 무엇이냐고요? ‘예수님은 여러분을 사랑합니다’라는 말입니다.” 엘리자벳은 “이 무슨 낭비란 말인가”라고 신문기사를 쓴 기자에게 남편이 휘튼대학에서 썼던 일기장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일기장에는 그 후 수많은 크리스천들의 가슴을 불타게 만든 문장이 쓰여 있었습니다. “영원한 것을 위해서 영원하지 못한 것을 버리는 사람을 어리석다고 하지 마라.” 또 이런 말도 쓰여 있었습니다. “이 쓸모없는 나뭇개비에 불을 붙여 주옵소서. 제 삶을 주의 영광을 위해 태워 주옵소서. 저는 오래살기를 원치 않습니다. 

오직 주님만을 위해 풍성한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결국 아우카족 전체가 복음을 받아들이고 짐 엘리엇 일행을 창으로 찔렀던 다섯 명의 아우카족 사람들 가운데 네 명은 목사가, 한 명은 전도자가 됩니다. 헌신과 열정, 사랑과 용서가 기적을 낳은 것입니다. 앞날이 창창한 다섯 명의 젊은이가 아우카족에게 희생당한 것은 신문 기사처럼 헛된 낭비가 아니라 거룩한 낭비였음이 증명된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낭비한 예수님처럼 잔인무도한 부족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고귀한 생명을 버린 다섯 선교사의 죽음은 위대하고도 거룩한 낭비였던 것입니다. 아리마대 요셉의 희생과 거룩한 낭비를 통해 주님의 부활이 완성된 것처럼 말입니다.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 흘려 네 죄를 속하여 살 길을 주었다 널 위해 몸을 주건만 너(는 나를 위해) 무엇 주느냐 널 위해 몸을 주건만 너 무엇 주느냐?(찬송가 311장)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는 주님을 위해, 다른 이들의 생명과 구원을 위해 어떤 거룩한 낭비를 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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