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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순절] 누구를 위한 고난인가? (롬 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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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위한 고난인가? (롬 4:25)


지금은 세계교회가 지키는 사순절(四旬節)기간이며, 다음 주일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날을 기념하는 고난 주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 장식품을 사용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습니다. 목걸이나 반지 또는 빼지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본래 십자가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못 박혀 돌아가신 십자가는 로마 식민지 백성들에게 내려진 가장 고통스러운 사형집행 도구였습니다. 십자가 처형은 로마 시민권이 없는 노예나 외국인들을 강압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잔악한 수단이었습니다. 

십자가를 땅에 뉘어 놓고 두 손과 두발에 못을 박은 후 그것을 세워 놓고 죽기까지 버려두는 것이었습니다. 이 형틀에 매어 달린 죄수는 견딜 수 없는 고통과 굶주림과, 갈증과 경련을 일으키는 극한 고통을 받으며 4~6일이 지나야 숨이 끊어지는 것입니다. 죽음의 고통을 극대화시킨 처형 방법이 십자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형틀위에서 여섯 시간 만에 운명하셨습니다. 로마의 병사들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확인하고자 창으로 옆구리를 찔러 피를 다 쏟게 했습니다. 

사람의 몸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이렇게 흉악범의 모습으로 십자가에서 처형당해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죄인은 아니었습니다. 흠과 티가 없으신 예수님에 대하여 히브리서 7장 26절에 말씀하시기를“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라.”하셨습니다. 

예수님께 죄가 없으셨음은 사형을 언도한 재판장 로마 총독 빌라도가 여러 차례 밝히고 있습니다. 처음 대제사장의 무리가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끌고 왔을 때에 빌라도가 말하기를“내가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누가복음 23:4)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의 무리들은 이에 불복하고 공소했습니다. 빌라도는 절차를 따라 재심을 했습니다. 재심을 하면서 예수님께서 주로 활약하셨던 갈릴리 지방의 일을 잘 알고 있고, 그 지방의 사법관이며 행정권자인 헤롯에게 예수님을 보내어 심리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헤롯도 예수님의 죄를 찾지 못하고 다시 빌라도에게 돌려보냈습니다. 

이때에 빌라도가 한 말이 누가복음 23장 13절~15절에 기록하기를“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관원들과 백성을 불러 모으고 이르되 너희가 이 사람을 백성을 미혹하는 자라 하여 내게 끌어 왔도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서 사실하였으되 너희의 고소하는 일에 대하여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고 헤롯이 또한 그렇게 하여 저를 우리에게 도로 보내었도다 보라 저의 행한 것은 죽일 일이 없느니라.”라고 선언했습니다. 초심의 무죄 판결을 재심에서 다시 확인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또다시 고소하여 예수님은 최종심인 삼심을 받게 되었습니다. 빌라도는 다시 무죄를 선언했습니다. 이에 대해 누가복음 23장 22절에 기록하기를“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한대”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저희가 큰 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박기를 구하니 저희의 소리가 이긴지라 이에 빌라도가 저희의 구하는 대로 하기를 언도하고 저희의 구하는 자 곧 민란과 살인을 인하여 옥에 갇힌 자를 놓고 예수를 넘겨주어 저희 뜻대로 하게 하니라”(누가복음 23:23-15)였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에 대해 무죄를 세 번씩이나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죄인처럼 십자가에서 극형을 받으셨습니다. 

一.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 돌아 가셨을까요? 

대제사장들을 포함한 수많은 민중들의 위협적인 힘을 이길 수 없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로마 군병들의 총칼의 힘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고 계셨을 때에 예수님을 체포하고자 로마 군병들이 몰려왔습니다. 그때 제자 베드로가 칼을 뽑아 말고라는 사람을 쳤을 때에 그의 귀가 땅에 떨어졌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마태복음 26:52-54)라고 하시면서 말고의 귀를 다시 붙여 주셨습니다. 

“내가 지금 당장 열 두 영 더되는 하늘의 천사를 동원시켜 단숨에 그들을 멸할 만한 능력이 없는 줄 아느냐?”라는 말씀입니다. 열 두 영의“영”이란, 로마군대의 일개 군단을 뜻하는 것입니다. 당시 일개 군단의 병력은 보병이 6,100명, 말이 726필 규모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의“영”이란, 12군단의 수만큼 되는 천사의 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천사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러한 천사들을 동원시켜 단숨에 로마 나라를 멸할 만한 능력이 예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능력을 전혀 쓰지 않으시고 아무 힘도 없는 사람처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 까닭이 무엇입니까? 그 이유에 대해 본문에 말씀하시기를“예수는 우리 범죄 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로마서 4:25)하셨습니다. 죄 범한 우리를 의롭게 하셔서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고자 죄인의 모습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 피의 공로를 믿으므로 우리들이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들의 이름이 하늘나라 생명록에 기록되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6장 51절-55절에 말씀하시기를“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 되시고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공경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1974년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인“생존”이란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의 내용은 실화입니다. 1972년 10월13일 우루과이의 몬테비데오를 떠난 전세 비행기 페어차일드 F227기가 칠레의 산티아고로 가던 중 악천후로 안데스 산맥에 불시착을 했습니다. 양쪽 날개와 꼬리가 산봉우리에 부딪혀 달아났으나 눈에 덮인 산허리에 동체 착륙을 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15명의 아마추어 럭비 선수들과 응원단으로 따라가는 친구 25명, 그리고 승무원 5명 등 모두 45명이 탑승하고 있었습니다. 

그중 더러는 불시착 때 즉사했고, 더러는 부상을 입고 산위에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눈에 덮인 안데스 산맥은 전문가들도 꺼려하는 죽음의 계곡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정부는 10일간 수색 비행을 했으나 찾지 못하자 그들을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비행기에는 식량이 전혀 없었고 추위와 굶주림과 싸우면서 67일간을 끝까지 견디어 구출된 사람은 16명뿐이었습니다. 이들의 생명을 두 달 이상을 유지시킬 수 있었던 것은 죽은 이들의 살을 뜯어 먹으며 연명했기 때문입니다. 

부상으로 여러 주간을 앓다가 산위에서 죽은 니코라치 군이 아버지 앞으로 적은 메모지에 이러한 글이 있었습니다.“아버지도 전혀 믿기 어려우실 일이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죽은 친구의 살을 쪼개어 내는 일입니다. 이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으니까요? 저도 이제 오래 살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내가 죽은 뒤 나의 살이 친구들을 구원하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생존한 청년 호세는 로저스 신부에게 이렇게 고백을 했습니다.“저는 학생시절에 교회에 한주도 빠져본 적이 없습니다. 부모님이나 동네 어른들은 모두 저를 칭찬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저 죽음의 산위에서 새로운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동안 교회에는 다녔으나 ”하나님의 집“에 살지 않았고, 신자란 이름은 가졌으나 사실 신앙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눈 덮인 산에서 죽음과 싸우며 지금 비로소“하나님의 집”으로 돌아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교회에서 수없이 성찬예식을 참여했으나 기계적으로 빵과 포도주를 든 것뿐이며 그 뜻이 내 가슴에 전해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산위에서 죽은 친구의 살 조각을 손에 들었을 때 그것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것을 알았으며, 정말 사랑이 무엇이며, 십자가가 무엇임을 깨달았습니다.”

이처럼 천지에 보이는 것은 흰 눈밖에 없는 산위에서 죽은 친구들의 몸은 다른 친구들의 생명을 살리는 양식이 되었듯, 하늘로부터 내려 오셔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의 살과 피는 우리를 영원히 살리는 생명 양식과 생명수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6장 51절에 말씀하시기를“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하셨습니다. 

二. 구원받은 우리들은 어떠한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1.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어느 가정의 가훈이“다웁게 살자”였습니다. 참 감명이 깊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버지답게 살고, 어머니는 어머니답게 살고, 자녀는 자녀답게 산다면 그 가정은 분명 행복이 가득한 가정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의 공로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사람은 삶의 목적이 분명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든 삶의 푯대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즉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입니다. 이러한 성도위에 하나님의 은총이 넘쳐나게 됩니다. 

성경에 에녹이라는 사람은 죽지 않고 하늘나라로 들려 올라갔습니다. 히브리서 11장 5절에 에녹에 대하여 기록하기를“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에 초점을 맞춰 살아간 에녹에게, 하나님은 더없는 기쁨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자 애쓰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영광의 날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자 힘쓰는 사람이 실패한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성공의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자 애쓰는 사람이 실패해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축복된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갈라디아서 6장 7절에 말씀하시기를“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하셨습니다. 심고 거두는 것이 식물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삶에도 똑같이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는 영광이며 우리에게 축복이 되는 삶의 방법을 제시하셨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9절 말씀에“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 31절에도“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하셨습니다. 
빌립보서 1장 20절에도“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라고 하셨습니다. 
로마서 14장 8절에는“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하셨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란 하나님의 영광에 초점을 맞춘 삶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은, 나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이므로 덤으로 내가 그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삶의 지혜입니다. 

태평양 어느 바닷가는 암초들이 여기저기 자리 잡고 있어서 배들이 좌초되는 일이 흔히 발생했습니다. 등대가 하나 있었지만 그 등대는 부두의 위치를 신호해줄 뿐, 암초를 피할 수 있는 각도를 가리켜 주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곳 관계자들은 고민 끝에 기발한 아이디어를 생각해냈습니다. 바로 그 등대 뒤에 일직선으로 두 개의 등대를 더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배들이 멀리서 볼 때 세 개의 등대가 완전히 일치가 되어 하나로 보일 때의 각도로 들어오면 들쑥날쑥한 암초들을 아슬아슬하게 피해 무사히 정박시킬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우리들에게도 많은 목표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목표들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목표 아래 하나로 합치될 때만이 우리는 인생의 목적지에 안전 하게 도달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목표가 흐트러지고 나누어지게 되면, 어디에 놓여 있을지 모르는 암초에 부딪힐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의 영광을 위해 지음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인생의 모든 목표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88년 서울올림픽에서 육상의 삼관왕으로 세계인의 이목을 끈 여자 육상선수가 있었습니다. 그녀는“세계에서 가장 빠른 여자”라고 불리는 그리피스 조이너입니다. 그녀가 금메달을 따내자 많은 기자들이 몰려 취재경쟁을 벌였습니다. 그 가운데 미 NBC방송의 한 기자가“달리면서 어떤 생각을 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습니다.“하나님께 영광 돌릴 것을 생각하며 달립니다. 최선을 다함으로 내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긴 후 하나님께 영광 돌릴 때만큼 인생의 보람을 느껴 본 적은 없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본받을 지혜로운 사람의 삶이 아닐 수 없습니다. 

2. 옛사람을 죽여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가리켜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는“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가리켜 새 사람이라고 한다면 엣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을 믿지 않고 거역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옛사람의 모습에 대하여 갈라디아서 5장 19절-21절에 밝히시기를“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하셨습니다. 

이러한 옛사람 까닭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 가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옛사람을 죽여야 합니다. 이러한 옛사람의 요소는 마치 농작물이 자라는 밭의 잡초처럼 내 마음 속에서 돋아나게 됩니다. 잡초가 우거진 논밭에는 곡식이 잘 자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지런한 농부는 열심히 김을 맵니다. 그리하여 풍년의 결실을 거둡니다. 이처럼 진실한 하나님의 자녀는 옛사람을 죽입니다. 이에 대해 에베소서 4장 22절-24절에 말씀하시기를“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하셨습니다. 

또한 갈라디아서 5장 24절에는“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옛 사람을 죽인 사람이 거룩한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을 귀하게 들어 쓰십니다. 디모데후서 2장 20절-21절에“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하셨습니다. 

우리나라 초대 선교사인 마포삼열 목사는 밤만 되면 불량배들과 유생들의 돌 세례로 곤혹을 치르곤 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평양 깡패로 알려진 이 기풍이라는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잔칫집마다 찾아다니며 술과 떡을 내놓으라고 행패를 부리던 깡패였는데 마포삼열 목사의 집에도 끈질기게 찾아와 돌을 던지고 불을 지르는 등, 그의 행패는 말로 할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어느 때는 마포삼열 목사가 이기풍이 던진 돌에 맞아 입원하기도 했습니다. 하루는 선교사의 집에 불을 지르고 도망치던 이기풍 청년이 다치게 되었는데 선교사가 찾아가서 치료를 해 주었고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이에 감동한 이기풍 청년은 회개하고 예수를 믿기로 결심했습니다. 훗날 그는 평양신학교를 나와 초대 목사가 되었고, 초대 제주도 선교사를 파송을 받았습니다. 그는 일생 호남지방에서 목회를 했는데, 여수 돌산 앞 우학교회에서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순교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옛 사람을 죽이고 회개한 사람을 귀하게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3. 복음에 빚진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가 깊이 깨달아야할 것은 나 자신만이 구원 받은 것으로 만족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나를 구원하실 때에는 나 자신만의 구원이 아니라 나로 인해 또 다른 사람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5장 18절-19절에“저가(하나님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하나님)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하셨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하나님과 화목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것은 나의 구원만이 아니라, 나로 인해 또 다른 사람들과 화목도록 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화목의 직책 즉 복음증거의 직책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전도 잘하는 몇몇 사람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예수 믿는 모든 사람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전도는 절대로 은사가 아닙니다. 예수 믿는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사명인 것입니다. 

이 같은 구원받은 자의 책임을 깊이 깨달은 바울사도는 말하기를“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로마서 1:14-16)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전도에 대해 빚진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예수님께 크나 큰 빚을 졌습니다.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 주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받았으니 이 얼마나 큰 빚입니까? 그러므로 우리 몸은 내 것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6장 19절-20절 말씀에“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피로 값 주시고 사셨으니 주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이니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을 해야 합니다. 

내 몸의 주인 되신 하나님께서 가장 간절하게 바라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죽어가는 영혼을 건져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혼구원에 대해 명령하시기를“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디모데후서 4:1-2)하셨습니다. 쉼없이 핑계하지 말고 죽어가는 영혼을 건지기 위해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모두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준 분들에게 빚을 졌습니다. 성도 여러분! 한강변에 자리 잡은 양화진이나 절두산을 한 번 찾아가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어, 성령님의 감동을 저버릴 수 없어, 순종하고자 낯 설은 이국땅인 이 나라의 영혼을 구원하고자 복음을 전하다가 죽어간 수많은 선교사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의 눈물과 땀과 피 흘림을 통해 오늘 우리들이 복음을 듣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로 인해 이 사회가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로 세계가운데 우뚝 서게 되었습니다. 이 빚을 갚는 길이 무엇이겠습니까? 이제 내가 또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승천하시기전 마지막으로 당부하신 말씀이 마태복음 28장 19절-20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하신 것입니다. 가서 전하라는 것입니다. 모든 족속에게 전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거룩한 명령에 순종하여 2만 명이 넘는 이 땅의 젊은이들이 세계 곳곳에 나아가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에게 하신 약속은 무엇입니까?“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 끝나는 날까지 여러분과 함께하시며 복 주기를 바라십니까? 영혼구원을 위해 복음을 전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 끝나는 날까지 여러분의 자녀들과 함께하시며 복 주시기를 바라십니까? 영혼구원을 위해 복음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어느 화가가 전도의 의미를 화판 위에 옮겨 보려고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의 광경을 그렸습니다. 먹구름이 뒤덮인 하늘, 번쩍이는 번개, 그 사이로 작은 배 한척이 사나운 파도에 휩쓸려 깨어져 가고 있습니다. 배 위로는 집채 같은 파도가 삼킬 듯 덮치고 있으며 소용돌이치는 물결에 휘말려 사투를 벌이고 있는 사람들의 고통스러운 얼굴에는 구원을 요청하는 외침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한 가닥의 희망이 나타나 있는데 그것은 바닷물 위로 불쑥 솟아나 있는 커다란 바위였습니다. 그런데 한 선원이 그 바위를 두 손으로 필사적으로 붙들고 있습니다.

구원의 희망이 있다면 바다 위로 솟아나와 있는 바위뿐이었습니다. 이 바위는 폭풍우를 만나 물속에 빠져 들어가고 있는 인간에게 구원의 희망을 주는 만세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으로 그려진 그림입니다. 그런데 완성된 그림을 자세히 훑어본 화가는 그 그림이 원하는 주제를 정확히 나타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화가는 그림을 찢어버리고 다시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지난번 그림과 비슷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한 가지 변화를 주었습니다. 바위를 붙잡고 있는 사람이 한 손으로만 그 바위를 붙잡고 다른 한 손을 힘껏 내밀어 물에 빠져가는 다른 동료를 붙잡아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구원받은 사람이 멸망해 가는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한 손을 뻗치고 있는 바로 그것이 신약성경에서 보여주고 있는 전도의 모습입니다. 그 손을 뻗치기 전까지는 복음도 없고, 이 세상에서는 아무 희망도 없습니다. 이 진리를 알고 있는 사람은 감히 두 손으로 나만을 위해 바위에 매달려 있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영혼 구원은 전도로부터 시작됩니다. 로마서 10장 13절-15절에 죽어가는 영혼이 구원받는 과정에 대해 말씀하시기를“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고 하셨습니다. 전해야 듣게 되고, 들어야 믿게 되고, 믿어야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고, 주의 이름을 불러야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어 놓으신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농부가 마치 씨앗을 뿌리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땅과 공기와 비와 햇빛과 씨앗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농부가 마치 씨앗을 심고 가꾸지 아니하면 결코 풍성한 양식이 있을 수 없는 이치와 같습니다. 우리는 모두 우리교회가 더욱 부흥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우리나라가 더 발전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우리가정과 우리의 자녀들이 잘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원해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지켜 주셔야만 됩니다.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길이 바로 영혼 구원을 위해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영혼 구원은 하나님의 단 한 가지 소원입니다. 우리들의 소원은 내가 잘되고, 내 자식들이 잘 되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소원은 영혼 구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의 거래를 요청하셨습니다. 죽어가는 영혼이 구원받도록 복음을 전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와 세상 끝 날까지 함께하여 지켜주시고 복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가복음 10장 29절~30절 말씀에“예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하셨습니다. 영혼구원을 위해 헌신하고 투자하면 내가 드린 것의 100배의 축복을 금세에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100배의 이익이라면 투자할 가치가 있지 않습니까? 시간을 드리고, 내 몸을 드리고, 물질을 드려 투자할 가치가 있습니다. 몇 년 전 세계경제 여파로 많은 사람들이 손해 본 펀드와 같지 않습니다. 투자 대상자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 삼으시고자 하늘라라로부터 이 세상에 사람의 몸으로 오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우리들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이 고귀한 은혜로 우리가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 큰 은혜 입은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첫째,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둘째, 옛사람을 죽여야 합니다.
셋째, 복음의 빚을 갚아야 합니다. 

이러한 삶은 구원받은 성도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이러한 삶은 하나님께 사랑받는 길입니다.
이러한 삶은 내 삶을 보람되게, 아름답게, 복되게 하는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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