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동고동락同苦同樂 (요 13:1~10)

  • 잡초 잡초
  • 208
  • 0

첨부 1


동고동락同苦同樂 (요 13:1~10)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는, 자기가 이 세상을 떠나서 아버지께로 가야 할 때가 된 것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 저녁을 먹을 때에, 악마가 이미 시몬 가룟의 아들 유다의 마음속에 예수를 팔아넘길 생각을 불어넣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것을 아시고,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서,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셨다. 그리고 대야에 물을 담아다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른 수건으로 닦아주셨다. 시몬 베드로의 차례가 되었다. 

이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 내 발을 씻기시렵니까?”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하는 일을 지금은 네가 알지 못하나, 나중에는 알게 될 것이다.”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아닙니다. 내 발은 절대로 씻기지 못하십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다.” 그러자 시몬 베드로는 예수께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 내 발뿐만이 아니라, 손가 머리까지도 씻겨 주십시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이미 목욕한 사람은 온 몸이 깨끗하니, 발 밖에는 더 씻을 필요가 없다. 너희는 깨끗하다. 그러나, 다 그런 것은 아니다.”]

• 때를 분간하는 지혜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형기 님의 <낙화>라는 시의 1연입니다. 전도서 기자인 코헬렛은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마다 알맞은 때가 있다”(전3:1)고 했습니다. 나아갈 때와 물러설 때를 알면 누추함을 면할 수 있고, 허물 때와 세울 때를 분별하면 비애에 빠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때를 분별할 줄 아는 인생을 가리켜 ‘철들었다’고 말합니다. 코헬렛은 더 나아가 “하나님은 모든 것이 제때에 알맞게 일어나도록 만드셨다”(3:11)고 말합니다. 주님처럼 때를 잘 분별하신 분이 또 있을까요? 요한은 오늘 매우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는, 자기가 이 세상을 떠나서 아버지께로 가야 할 때가 된 것을 아시고…”(1a)

아버지께로 가야 할 때는 죽는 때입니다. 그런데 그 죽음은 비극적 끝이 아닙니다. 그것은 돌아감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스스로를 보냄을 받은 자라고 선언하셨습니다. 보냄을 받은 자가 할 일은 보내신 분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보내신 분의 일을 완수하고 돌아간 사람은 보내신 분의 칭찬을 받게 됩니다. 그것이 영광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여느 교회에서 그러는 것처럼 하나님께 영광의 박수를 쳐드리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분이 맡기신 일을 하는 것입니다. 

맡겨진 일을 자기 일로 여기고 사는 것을 일러 소명이라 합니다. 소명에 충실한 사람은 참 씩씩합니다. 프랑스 철학자 파스칼 브루크너Pascal Bruckner는 우리 시대의 특징을 ‘유아적 엄살’이라 했습니다. 많은 현대인들이 징징거리며 삽니다. 자기의 상처와 고통에만 눈길을 주면서, 자기 자신이 희생물이라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잘못은 항상 남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칭얼거리고 불평하며 살면 삶이 역겨워집니다(안셀름 그륀). 

그런데 하나님이 예수님께 맡기신 일은 무엇입니까? 세상 떠나는 날까지 결코 놓을 수 없었던 소명 말입니다. 그것은 사람들 가슴에 사랑의 불씨가 타오르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요한이 간결하게 요약한 말씀은 감격스럽습니다.

“세상에 있는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1b)

하지만 유다는 주님의 그런 사랑에 마음을 열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생각하는 메시야상과 일치하지 않자 그는 예수를 팔기로 작정합니다. 그의 비극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수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 예수의 소명

주님은 살려고 발버둥치지도 않지만 죽음을 향해 돌진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맡겨주신 일을 하며 때가 무르익기를 기다리실 뿐입니다. 맡겨주신 일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화해를 이루는 일이었습니다. 나는 보상에 대한 기대나 형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것처럼 슬픈 일이 없다고 말했습니다만, 율법에 얽매어 사는 이들에게 하나님은 늘 두려운 분이었습니다. 잘못을 하나하나 기억하고, 그에 합당한 벌을 내리시는 분으로 여겼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나님은 사람들과 함께 아파하고, 함께 기뻐하는 아버지이셨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은 병들어 신음하는 이들을 보면 그것이 누구의 죄 때문인가를 먼저 따졌습니다. 병으로 고통을 겪는 이들의 아픔이나 소외감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들 곁에 다가서시고, 손을 내밀어 그들을 어루만지시고, 용서를 선포하심으로 그들을 치유하셨습니다. 굶주린 사람들을 보면 그들의 게으름을 탓하기 전에 그들을 먹이실 방도를 마련하느라 애쓰셨습니다. 길 잃은 양들을 보면 그들의 부주의를 꾸짖기 전에 그들이 느낄 두려움을 먼저 헤아리셨습니다. 

무정한 사회가 강요한 자기 비하의 너울을 쓴 채 그늘진 곳으로만 숨어드는 사람들을 보고는 그들을 역사의 주체로 세우셨습니다. 부정한 사람으로 규정되어 잘난 사람들과 한 밥상에 앉을 수도 없었던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기도 하셨습니다. 주님은 숙명의 노예처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고개를 들라고, 더 이상 피해자 역할에 만족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공간적으로 이미 사람들을 위계질서로 서열화함으로써 사람들을 차별하고 주눅 들게 하는 성전은 더 이상 하나님의 집일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두 다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처럼 깊은 사랑을 보이신 분이 또 있을까요? 주님은 사람들의 눈물 속에, 아픔 속에, 그 못남 속에 풍덩 뛰어드셨습니다. 그들을 하늘의 길로 이끌기 위해서였습니다.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친구가 똥물에 빠져 있을 때 우리는 바깥에 선 채 욕을 하거나 비난의 말을 하기 쉽습니다. 대개 다 그렇게 하며 살고 있어요. 그럴 때 우리는 같이 똥물에 들어가서 ‘여기는 냄새가 나니 나가서 이야기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말해야 합니다. 그러면 친구도 알아듣습니다. 바깥에 서서 입으로만 나오라 하면 안 나옵니다.”(<나는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였다는 것을> 중에서)

이게 성육신입니다. 우리는 인간의 탐욕과 폭력의 강물에 풍덩 뛰어드신 하나님을 믿는 이들입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랑을 어느 신학자는 ‘同苦的 사랑’(compassion)이라 했습니다. 함께 아파하고, 함께 고통을 겪는 사랑 말입니다. 주님은 이런 사랑을 통해 병든 우리를 치유하시고, 가려졌던 하나님의 형상이 드러나도록 해주십니다. 

• 어루만짐

주님은 당신의 그 사랑을 제자들의 가슴에 심어주고 떠나고 싶으셨습니다. 음식을 잡수시던 주님은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신 후, 대야에 물을 담아다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는, 두른 수건으로 닦아주셨습니다. 소위 ‘세족식’이 벌어진 것입니다. 발 마사지를 직업으로 하는 이들이 아닌 이상 누군가의 발을 닦아줄 일은 별로 없습니다. 어쩌면 에로틱한 장면을 연상하는 이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자기들의 발을 닦아주시는 주님의 몸짓 언어를 명료하게는 아니지만 어렴풋이나마 알아들었을 겁니다.

어루만짐은 그 대상에게 주체의 사랑을 표현하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마음의 상처를 입은 이들을 보면 함께 마음 아파하며 등을 토닥여줍니다. 그런 몸짓처럼 많은 것을 전달해주는 언어는 없습니다. 저널리스트인 고종석 씨는 “어루만짐은 일종의 치유이고 보살핌이고 연대”(<<어루만지다>>, 233)라고 말합니다. 어루만짐은 참 아름다운 행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먼 길을 걸어 먼지투성이가 된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십니다. 어쩌면 그것이 예수님과 제자들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신체적으로 접촉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늘 성찰보다 열정이 앞섰던 베드로는 주님께 엄중하게 그러나 정중하게 항의합니다. “주님, 주님께서 내 발을 씻기시렵니까?” 눈치 없는 그를 책망하고 싶으시더라도 잠시 그를 용납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는 자기 마음을 숨기지 않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이게 베드로입니다. 만약 이의를 제기하는 용기가 없었더라면 깨달음의 기회도 없었을 것입니다. 베드로와 주님의 문답이 계속됩니다. 

“내가 하는 일을 지금은 네가 알지 못하나, 나중에는 알게 될 것이다.” 
“아닙니다. 내 발은 절대로 씻기지 못하십니다.”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은 베드로가 나중에 배신하리라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그의 발을 씻으시며 그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유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장 바니에는 유다의 발을 닦아주시는 주님의 마음을 이렇게 헤아려 봅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나는 여전히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는 당신의 마음속에 있는 나약함과 상처와 질투심을 알고 있습니다. 악마가 당신을 사로잡으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는 당신이 모든 두려움, 특히 악한 영에서 벗어나 사랑하면서 충만하게 살아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봉사의 스캔들>>, 79)

베드로는 새벽 닭 울음소리를 들으며 주님의 어루만지시던 손길을 느꼈는지도 모릅니다. 유다는 목을 매다는 그 순간 주님의 마음이 떠올라 울었을지도 모릅니다. 믿음이란 주님께서 나를 위해 하시는 일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더러워진 내 발을 차마 보일 수 없어 우리는 주님의 초대를 거절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 영혼을 짓누르고 있는 삶의 무게를 그분 앞에 내려놓지 못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다.”

• 서로 남의 발을 씻겨 주어라

이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또 오버쟁이의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합니다. 

“주님, 내 발뿐만이 아니라, 손과 머리까지도 씻겨 주십시오.”
“이미 목욕한 사람은 온 몸이 깨끗하니, 발 밖에는 더 씻을 필요가 없다. 너희는 깨끗하다. 그러나,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주님은 우리가 이미 깨끗한 사람이라고 말씀해주십니다. 구름에 가려 있다고 해서 해가 사라진 것이 아니듯이, 죄와 욕심에 가려있다 해도 하나님의 형상은 사라질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죄 가운데 사는 것은 자기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죄란 하나님이 이미 우리에게 주신 소중한 생의 가능성을 허비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후에 옷을 입으신 주님은 식탁에 다시 앉으셔서 그들에게 물으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일을 알겠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님 또는 주님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옳은 말이다. 내가 사실로 그러하다. 주이며 선생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겨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남의 발을 씻겨 주어야 한다.”(12b-14)

은총은 새로운 소명입니다. 은혜 받은 자의 삶은, 주님의 손과 발이 되는 데 있습니다. 은총은 우리를 봉사의 삶으로 부릅니다. 봉사자를 뜻하는 라틴어 세르부스servus는 본래 지휘관에게 전황을 알리러 가는 전령을 뜻한다고 합니다. 봉사자란 그러니까 공동체 구성원들 사이에 의사소통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하는 사람입니다. 누가 이런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성격이 뾰족하여 남을 찔러대는 사람, 말이 많은 사람, 냉랭한 사람은 못합니다. 

늘 감사할 줄 아는 사람, 사랑의 시선으로 사람들을 바라보는 사람, 자기 뜻보다 주님의 뜻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라야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심을 통해 사랑은 본래 비언어 수단, 즉 우리의 태도와 시선, 몸짓과 웃음으로 전달된다는 사실을 깨우쳐주셨습니다. 헬라어로는 봉사자를 디아코노스diakonos라 하는 데 그 뜻은 식탁 옆에서 기다리고 선 사람을 일컫는다고 합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헌신하고 생명과 사랑을 일깨우는 것을 자기 본분으로 삼은 사람입니다. 성도는 이런 일에 부름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 또 이런 사람이 있는 공동체는 친밀한 우정에 바탕을 둔 기쁨이 넘칩니다. 이런 기쁨을 가리켜 ‘同樂的 기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교회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님의 ‘동고적 사랑’을 바탕으로 하여 ‘동락적 기쁨’을 누리는 이들입니다. 하지만 동락적 기쁨은 우리가 이웃들과 함께 서기 위해 동고적 사랑을 선택하지 않는 한 불가능한 꿈입니다. 인권을 유린당하는 이들 곁에 머물고, 그들의 목소리가 되어주고, 희망조차 없이 살아가는 이들에게 웃음을 되찾아주기 위해 고난을 마다하지 않을 때 우리는 진정한 기쁨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교회는 한 마디로 하여 주님의 뜻을 가슴에 품고 동고동락하는 새로운 가족 혹은 인류입니다. 평화와 생명의 꽃은 누군가의 발을 닦아주기 위해 겉옷을 벗고 무릎을 꿇는 사람이 있는 곳에서 피어납니다. 높아지려는 마음들이 부딪치는 곳은 풀 한 포기 피어날 수 없는 사막으로 변하고 맙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교회들마다 말이 아니라 몸으로 사랑을 살아내는 신실한 사람들이 조용히 일어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