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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순절] 푯대를 향하여 (빌 3: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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푯대를 향하여 (빌 3:4~14)


四旬節 다섯째주일입니다. 사순절을 보내면서 다시 한 번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도리를 굳게 잡아야 하겠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昇天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道理를 굳게 잡을지어다” 했습니다(히 4, 12).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도리를 굳게 잡으려고 할 때, 미혹을 당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따름은, 靜的인 따름이 아닙니다. 우리를 부르신 부르심(召命)도 역시, 靜的인 부르심이 아닙니다.

요즘 상영되고 있는 독립영화 ‘위대한 침묵’을 보신 분이 계십니까? 이 영화의 배경은, 해발 1,300m에 있는 프랑스 알프스 深谷, 일반인들에게는 개방되지 않는 로마천주교회 봉쇄 수도원 그랑드 샤르뜨뢰즈(Le Grande Chartrese)입니다. 3시간가량 영화가 상영되는 영화에서 보아 알 수 있듯이, 그 수도원에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이 바뀌어도, 해가 바뀌어도, 오직 침묵만 흐르는 수도원입니다. 침묵의 연속입니다. 수도사들이 매일 매일, 침묵 속에서 하나님 만나는 수도생활을 합니다. 3시간 가까운 상영시간 동안, 대화소리, 말하는 장면은 불과 5분 남짓 될까요? 

이와 같은 수도사들의 예수님 따름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결코 일상적이지 않는 특별한 따름입니다. 굳이 그 이유를 말씀드리자면, 수도원은 ‘基督敎 靈性의 上水源 役割’을 한다고 해야 할까요? 기독교의 영성의 가늠자 역할을 하는 곳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수도사들의 수도생활을 동경하는 것만이 신앙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 역사 속에, 수도원이 생겨나게 된 동기가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敎會의 世俗化 때문입니다. 교회가 세속화 되어 교회 본연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니까, 세속화된 교회를 정화하기 위해 일어난 운동이 수도원 운동입니다. 그렇게 생긴 수도원은, 지금도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이젠, 전에 없던 개신교 수도원까지 자꾸 생겨나고 있습니다). 

佛敎에서는, 佛法을 닦는 승려가 되기 위해서 속세를 떠나는 것을 出家한다고 합니다. 출가한 승려는 속세와의 정도 끊고, 모든 인연도 끊고, 깊은 산 중이나 오두막 암자에서 들어가서 佛道를 닦습니다. 정적인 수도생활에 精進합니다. 1993년도에 작고한 성철 스님은, 25세에 출가해서 29세에 부처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그 후에도 8년 동안 한순간도 잠을 자지 않고 앉아서, 正坐不臥 修行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한가 싶습니다. 인간 정신의 극점을 보여준 禪僧이었습니다. 

최근 法貞 스님이 돌아가시면서, 당신이 쓰신 책을 더 이상 출판하지 말라는 유언이 알려지면서, 그분의 책들이 一躍 베스트셀러는 물론 품절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분의 삶과 정신이 무소유였기에, 저도 그 분이 말씀하신 무소유가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 책을 구했지만 살 수 없어서, 가진 분의 책을 빌려 읽었습니다.

글이 참 깊고 아름다웠습니다(불교적인 세계관이 있지만, 공감이 되는 부분이 참 많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분이 말씀하신 無所有의 삶을 동경하지는 않습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無所有의 경지를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책 제목이 된, 법정 스님의 ‘무소유’라는 짧은 글은, 1971년에 K. 크리팔라니가 엮은, 印度의 國父 마하트마 간디의 어록을 읽으면서 자신을 부끄러워하면서 쓴 글입니다. 출가한 법정 스님을 부끄럽게 했던 간디의 어록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간디가 영국 런던에서 열리는 회의 참석차 가던 중, 마르세유 세관원에게 소지품을 펼쳐 보여주면서 한 말입니다. 
“나는 가난한 탁발승이오, 내가 가진 거라고는 물레와 교도소에서 쓰던 밥그릇과 염소젖 한 깡통, 허름한 담요 여섯 장, 수건 그리고 대단치도 않은 평판, 이것뿐이오.”

간디 어록을 읽고, 너무 많이 가진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던 법정 스님이, 그 後 어떤 스님으로부터 난초 두 盆을 선물 받아서 키우면서, 거기서 깨달은 진리가 無所有라는 이야깁니다. 난초를 정말 정성스럽게 키우셨습니다. 관련서적을 구해다 읽어가면서, 비료를 구해 주면서, 여름이면 서늘한 그늘을 찾아 자리를 옮겨 주면서, 겨울이면 난초가 살기에 알맞은 방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 실내온도를 낮춰 춥게 지내면서까지….

그러다가 한 번은 한 여름에, 난초를 햇볕이 드는 뜰에 내다놓은 것을 그만 잊은 채 외출하게 되었는데, 난초 생각에, 모처럼 보인 찬란한 여름 햇볕을 원망했다고 합니다. 뜨거운 햇볕에 축 늘어져 있을 난초 잎 때문입니다. 축 늘어져 있을 난초 잎이 눈에 밟혀 더 이상 지체하지 못하고, 허둥지둥 암자로 되돌아왔다는 겁니다…. 

바로 그때, 법정 스님이 온몸으로, 그리고 마음속으로, 절절히 느낀 것이 執着이 곧 괴로움이라는 불교적인 진리였다는 겁니다. 난초에 집착하는 자신을 본 거지요. 난초에 대한 그 지독한 집착에서 벗어나야겠다고 결심하고는, 찾아온 친구에게 난초를 선뜻 안겨주고 말았답니다. 그러면서 ‘無所有의 자유’, ‘홀가분함’을 터득하였다는 겁니다. 그때부터 스님은 인간 역사를 所有史로 이해하는 역사관을 가지게 되었고, 보다 많은 자기 몫을 위해 끊임없이 싸우는 소유욕을 버리는 도에 더욱 정진하게 되었다는 이야깁니다.

목사가, 무슨 스님 이야기를 이렇게 장황하게 하는가 싶지만, 이유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지금, 법정 스님의 무소유라는 불교적인 가르침에 혼이 다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십자가의 道도 무소유를 말하는 것인가?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도리도 무소유와 크게 다르지 않는 것인가? 그냥 惑할 것이 아니라, 여기서 다시 한 번, 우리가 믿는 믿음의 도리가 무엇인지 되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빌립보서 3, 4하반절이하 16절 말씀(14절까지만 읽었습니다만)에서, 사도 바울이 이 문제에 대하여 우리에게 분명하게 잘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우리 기독교의 복음은, 靜的이지 않습니다. 정적인 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수도원적인 영성도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대단히 動的입니다. 우리가 따라야 할 예수님 따름은, 대단히 動的입니다. 靜的인 따름이 아닙니다. 우리가 특히 유의해야 할 점입니다.

1. 우리가 믿는 믿음의 도리는, 내 삶의 한 복판에 깊숙하게 파고 들어오시는, ‘예수님을 만나는 사건’입니다. 

바울에게는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건이 있습니다. 거기서의 예수님과의 만남의 사건은, 바울의 모든 것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다메섹 사건에서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울의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 만남사건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바울의 熱情의 方向이 수정되었다는 겁니다.

그저 단순한 무엇을 버린, 無所有와 같은 次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바울과의 다메섹에서의 만남의 의미는, 熱情에서 또 다른 熱情에로의, 熱情의 方向 전환에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믿는 믿음의 본질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던 어떤 열정(욕심)이 그냥 죽어 없어져버린다거나, 靜的인 신앙으로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열정의 방향이, 자기 자신에게서, 자기 자신에게로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열정의 방향이 바뀐 것입니다. 그것은 동시에, 지금까지 바울 자신에게 소중하였던, 유익하였던 모든 것들을, 損失로(손해로) 여기게 했습니다. 損費처리하게 했습니다. 그것들이 내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했다. 조금도 내 人生에 유익함이 되지 못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 인생의 會計帳簿에서 그 이전의 유익이라고 여겼던 것들을 완전한 損失로, 不渡處理하게 해버렸다는 겁니다.

바울은 선언합니다. “그러나(헬, ‘알라’ avlla,; 명백한 전환을 가리키는 반의접속사)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害로 여겼다”합니다(부도처리해버렸다). 바울이,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에 자신에게 유익하게 여겼던 것들이 무엇입니까? 자신이 따르던 유대종교(Judaism) 생명과도 같은 종교, 엘리트 종족사상(베냐민 지파, 히브리人 中의 히브리人), 종교적인 자부심(바리새인 중 바리새인), 하나님의 이름으로 교회를 핍박하던 열정, 율법의 義로 볼 때 欠없음, 같은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다 害로 여겼다 합니다.

사실, 이와 같은 바울의 변화는, 바울 스스로에게서 기인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 스스로 자신의 옛 열정이 다 죽고, 새로운 열정으로 방향을 바꾼 것이 아닙니다. 다메섹에서 그의 인생에 깊숙하게 파고 들어오신 예수님이 그의 열정을 바꾸셨습니다. 

K. Barth는 이러한 바울의 변화를, 바울에게 이전에 유익하였던 plus(+)가 Zero(0)가 된 것이 아니라 그에게 plus(+)였던 것들을 도리어 minus(-)로 여긴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금융위기로 주식가치가 하루아침에 반 토막 나는 것을 경험했지만, 그래도 그것은 양호합니다. 0이 된 정도가 아니라 완전한 마이너스가 되어버렸다는 고백입니다. 그것들이 내 인생의 마이너스였다고 한 번 말하는 것으로 끝낸 것도 아닙니다.

8절 말씀에 보면 “…해로 여길뿐더러(7),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반복적인 마이너스를 강조합니다. 동시에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모든 면에서 다시 출발하지 않을 수 없는 자신의 새로운 열정을 이야기합니다) 내 主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高尙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排泄物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라”합니다(8-9). 바울은 다시 한 번, 자신에게 유익하던 것을 排泄物로 여겼다고 까지 합니다(개에게 던지는 똥, 음식물 찌꺼기, 쓰레기를 말함). 굉장히 혐오스러운 말입니다. 모욕적인 말입니다. 이런 표현을 쓰지 않고서는, 안 되기에 그렇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 인생(사도 바울)에 찾아오신 예수님이, 법정 스님에게 무소유의 의미를 가르쳐 준 난초보다 덜 소중한 존재이신가? 하는 겁니다. 기독교 신앙은, 난초에 집착하는 집념이 괴로움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수준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내 인생의 새로운 열정의 이유가 되시는 하나님이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과 비교해서, 내게 더 소중한 것이 있고, 더 의미 있는 그 무엇이 있다면, 우리는 아직도 예수님을 제대로 못 만난 자입니다. 난초를 통해서도 무소유를 배웠는데, 예수님 안에서 나에게 유익하던 모든 것이 害가 됨을 배우지 못해서야 되겠습니까? 

2.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따름은, 뒤에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해서 달려가는 삶, 새로운 열정입니다.

예수님 따름의 삶은, 그저 소유하지 않는 삶이 아닙니다. 過去의 그릇된 熱情에서 전혀 새로운 熱情에로, 熱情의 方向이 바뀌는 것을 말합니다. 기독교의 신앙은, 무엇을 버리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집착하지 않음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 비움 그 자체에 그치지 않습니다. 과거의 집착, 열정에서 전혀 다른 열정에로, 열정의 변화를 말합니다. 그 열정의 변화, 삶의 이유의 변화의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兄弟나 姉妹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子息이나 田土를 버린 者는, 現世에 있어 집과 兄弟와 姉妹와 어머니와 子息과 田土를 百 倍나 받되, 逼迫을 兼하여 받고 來世에 永生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막 10, 29-30). 

여기 예수님은, 그냥 버리라 말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위하여 버리라 하십니다. 그 버림은, 熱情의 方向의 變化를 말합니다. 그냥 내다버리라, 廢棄處分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하나님 나라 복음을 위하여, 再使用하라는 겁니다. 再解釋하라는 겁니다. 열정의 방향을 바꾸라는 겁니다. 정적인 포기를 요구하신 것이 아닙니다. 대단히 동적인 열정의 변화를 요구하신 겁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아담과 여자)을 창조하신 후, 말씀하신 첫 말씀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아담과 여자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아담과 여자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경영).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하셨습니다(문화명령, Cultural Mandate). 

시편 16편에서 다윗이 노래한 것을 보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줄로 재어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은 실로 아름답도다.” 하나님 경외하는 신앙은, 굉장히 동적입니다. 그것이,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서, 무슨 의미가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소유의 의미를 되물으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자에게, 현세에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는다 하셨습니다.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다는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가진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내 소유들이, 예수님과 복음을 위한 열정이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푯대를 향하여 경주하는 삶을 사는데 유용한 도구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내 인생의 主人을, 예수님으로 바꾸라는 말씀입니다.

에리히 프롬이 󰡔소유나 존재냐󰡕에서, 소유지향적인 사람과 존재지향적인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소유지향적인 사람은, 자신의 정체성을 ‘자기 존재’가 아닌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그 무엇’에서 찾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나는 무엇(X)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나이다”는 사람이지요. 소유지향적인 사람의 결국은,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그것에 자신이 소유당해버리고 맙니다(법정 스님이 난초에 집착하게 되셨던 것처럼). 결국은, 소유만을 좇다가 알맹이 없는 양파 같은 인생을 끝마치고 맙니다. 죽음 앞에서 그 무엇도 자기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에리히 프롬이 말하는 것처럼 ‘나’라는 존재가 ‘내가’ 되는 것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나’라는 존재가 ‘내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는 사람입니다. 내 인생의 소유권이 예수님인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 합니다. 사순절을 지키면서 우리는, 내가 소유지향적인 사람인지? 아니면 혹 ‘나’라는 존재가 그저 ‘내가’ 되기를 바라는 사람인지? 그렇지 않으면, ‘내’가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人’이라는 분명한 정체성을 가진, 열정의 방향이 바뀐, 푯대를 향하여 경주하는 삶을 사는 자인지 물어보아야 합니다. 고민해야 합니다. 나는 진정한 그리스도의 사람, 그리스도人입니까? 하나님 앞에, 對答해야 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을 우리의 삶의 푯대로 세워 주신 것 감사합니다. 그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는 경주자가 되게 하옵소서. 열정의 방향을 바꾸어 자신을 다 쏟아 부었던 사도 바울처럼, 그리스도인의 사람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들을, 유용하게 쓸 수 있는 믿음과 헌신, 열정을 주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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