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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앙적 의심에 대한 해답 (마 1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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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적 의심에 대한 해답 (마 11:1~11) 
 
  
1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명하기를 마치시고 이에 그들의 여러 동네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거기를 떠나 가시니라 
2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3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5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6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7 그들이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8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9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 
10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네 앞에 준비하리라 하신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니라 
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때때로 의심과 회의에 빠지게 될 때가 있고, 그래서 신앙이 상승하고 전진하기는커녕, 침체 상태에 빠지거나 퇴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종교 개혁의 횃불을 높이 들었던 마틴 루터는 수년 동안 절망 가운데 있었고, 불신앙과의 숱한 갈등을 경험한 후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사람이 육체의 유혹을 이길 수는 있다. 그러나 신에 대한 불경건과 낙심이라는 유혹에 대항해서 싸우기란 매우 어려운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를 거의 잃어버리고 낙심이라는 파도와 폭풍우에 시달려 거의 죽게 되었다.” 

그런가 하면 놀라운 상상력으로 보이지 아니하는 영적인 것들을, 마치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처럼 묘사했던 죤 번연은, 불신앙과의 갈등을 경험한 후 “내 일생 중에 겪었던 시험 중에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복음의 진실성을 의문시했던 것만큼 견디기 어려웠던 시험은 없었다.”고 했습니다. 

지난 세기 최대의 정통적이고 보수적인 목회자로 손꼽히는 영국의 로이드 죤스 목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어느 사람이 그의 신앙생활 가운데서 의심으로 마음이 어지러웠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면, 그런 사람이야말로 다시 한 번 그의 신앙의 기반을 검토해 보아야 할 것이며, 거짓된 평안을 누리거나 주제넘은 신앙주의에 안주해 있지나 않은지를 확인하여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인물이나 교회 역사 중에서 위대한 성도들 역시 거의 몇 차례 의심과 침체의 늪에 빠진 적이 있었는데, 오늘은 그러한 인물 가운데 대표적인 한 사람이라 할 수 있는 세례 요한, 그 세례 요한이 의심과 침체에 빠지게 된 원인과 또 그것을 다루시는 예수님의 방법을 살펴보는 중에, 우리의 의심과 영적인 침체 상태도 치유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1절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명하시기를 마치시고....”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마 10장의 열두 제자 파송에 대한 교훈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병 고치는 권세를 주어 파송 하시면서 여러 가지 그들이 지켜야 할 제자도에 대해 당부하셨습니다. 그 가운데 마 10:37-39을 보면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제자 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열두 제자들에게 주어진 제자도는 바로 우리들이 그렇게 살고 걸어가야 할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을 주목하십시오.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명하시기를 마치고, 이에 저희 여러 동네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거기를 떠나가시니라.” 이것이 우리가 예수님에게서 반드시 본받아야할 자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명령하고 지시하고, 가르치시지만 아니하고, 명하신 그대로 실천하시고, 솔선수범 본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가르치신 대로 자신이 실천하는 것, 이것이 사실 목회자들에게 또는 구역장 교사들에게 제일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그 다음 2-3절을 보면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라고 했습니다. 당시 세례 요한의 형편을 살펴보도록 합시다. 갈릴리의 실권자 헤롯 안티파스는 로마에 있는 자기 동생을 방문합니다. 그 방문 기간 중 헤롯은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를 범한 것으로 전해져 옵니다. 헤롯은 집에 돌아와 아내와 이혼하고, 동생에게서 빼앗은 제수와 결혼을 하게 됩니다. 이 같은 천인공노할 악행을 전해들은 세례 요한은, 헤롯을 단호하게 책망을 합니다. 헤롯 같은 패륜아 잔인한 독재자를 책망한다는 것은 결코 안전할 수가 없는 일이었고, 그래서 세례 요한은 붙잡혀 사해 동편에 있는 ‘마카이루스’의 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누구에게나 옥중 생활은 견디기 어려운 것이겠지만, 특별히 세례 요한에게는 더욱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세례 요한은 광야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생애 대부분을 넓고 탁 트인 광야에서, 맑은 바람을 호흡하고 또 광활한 하늘을 지붕 삼아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는 어둡고 공기마저 탁한 좁은 감옥 안에 있게 되었고, 사슬에 묶여 있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형편은 세례 요한과 같이 광활한 자연 속에 살았던 사람에게는 죽음과 같은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때문에 세례 요한은 감옥에서 아마 이렇게 생각하였을는지 모릅니다. 만일 예수가 메시아라면 어찌하여 그의 선구자인 내가 이러한 고통 가운데 지내도록 내버려 두실까? 어찌하여 예수님은 나를 도와주시지도 않고, 가엽게 여기시지도 않고 그냥 죽어가게 내버려 두실까? 이렇게 세례 요한이 의심하게 된 원인 가운데 하나는, 고통스러운 환경에서 비롯된 육체적 감정적인 요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의심과 침체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나의 질병을 고쳐 주시지 않을까?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이토록 나를 가난하게 내버려 두실까? 또한 세상을 살다 보면 사면초가가 될 적이 있습니다. 하는 사업이 잘 되지 않습니다. 자녀들도 내 마음처럼 자라 주지 않습니다. 부부관계도 원만치 못합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가 나쁩니다. 몸에는 병이 있습니다. 친구도 이웃도 나의 진심을 알아주지 않습니다. 세상만사 생각하면 골치만 아픕니다. 죽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여러분! 이럴 때 하나님의 존재나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해 본 적이 없으십니까? 

세례 요한이 의심과 침체에 빠진 또 다른 원인으로는, 정신적 영적 이유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이미 메시아에 대하여 이렇게 선포한 적이 있습니다.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우리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손에 도끼를 들고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를 찍어 버리는 메시아,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시는 진노가 가득한 심판자 메시아, 이것이 세례 요한의 메시아 관이었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 자신은 무슨 기적을 행하지 않았지만, 메시아가 오시면 놀라운 권능으로 헤롯 같은 악한은 당장 심판해 버리고, 조국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에서 구원해 주실 것으로 믿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은 예수가 정말 그리스도인가 의심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 것이라든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 것이다 라고 기대했다가, 그 기대가 어긋날 때 하나님을 의심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플 때 기도하면 언제나 고쳐 주실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면 몇 배로 갚아 주실 것이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다 해주실 것이다, 이렇게 기대했다가 그렇게 되지 않으면 의문이 생기고 의심을 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하나님을 섬길 가치가 있는 것일까? 예수 믿어 가지고 무슨 유익이 있는가? 라고 의심을 하게 됩니다. 

세례 요한의 의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어떠했습니까? 4-5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직접적인 대답 대신, 이사야 선지자가 메시아에 대하여 예언한 그대로 실현되는 것을 세례 요한에게 알려 주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이 구약 성경에 대해,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메시아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보기를 권고하셨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물론 예수님께서는 산상 보훈에서 심령의 가난에 대해 말씀하셨지만, 본문은 물질적 가난도 배제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H. Stowel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1)복음은 특별히 가난한 자가 받아들이기 쉽다. 2)복음은 가난한 자가 혼자의 힘으로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복음은 비싼 값을 치러야 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3)복음은 기회 면에서도 가난한 자에게 알맞다. 복음은 시간이나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는 마음의 문제이다. 

가난한 자를 위한 복음에 대해서 Dr. Guthrie는 “국왕 곁에 나아가 왕궁의 영예를 향유하고, 국가의 높은 관직을 차지하는 자들은 주로 지체가 높은 자들이다. 왕의 총애는 비천한 삶을 사는 낮은 곳에 내려오는 법이 거의 없다. 그러나 우리의 왕이신 하나님의 은총은, 비록 산꼭대기는 말라 있을지라도, 골짜기 아래에는 축축이 남아 있는 축복의 이슬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교만하고 당당하게 서 있는 나무들에는 단 하나의 보석도 남겨 놓지 않으면서도, 낮은 덤불에는 빛나는 다이아몬드를 달아 놓고, 넓은 잔디위에 진주들을 깔아 놓으시는 것이다. 이 나라는 약하고 온유하고 가난하고 겸손한 자들을 위한 나라이다.”고 아름답게 묘사를 했습니다. 

6절에는 예수님의 한 마디 경고의 말씀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잘못된 메시아관, 잘못된 예수 그리스도관, 이것 때문에 유대 민족처럼 실족한 인생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마 11:27에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고 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안 다는 것은 참으로 복된 일인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떠나간 다음 예수께서는 요한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그 대부분의 말씀이 요한을 칭찬하시는 말씀입니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너희는 세례 요한을 갈대처럼 흔들리고 불안정한 사람으로 보느냐? 아니다.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너희들은 세례 요한이 사치와 안일을 탐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더냐? 옳다. 선지자보다 나은 자니라.” 세례 요한은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자였습니다. 

예수께서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왜냐하면 구약의 선지자들은 멀리서 메시아를 대망하면서 예언하였으나, 세례 요한은 직접 메시아를 바라보며 증언했기 때문이다.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니,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세례 요한은 한 시대의 끝을 맺었고, 새 시대의 막을 연 사람이다. 세례 요한은 말 4:5절에 예언된 엘리야이다.” 이와 같은 내용들이 세례 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이며 칭찬입니다. 

사람들은 면전에서 칭찬하고 아첨하다가, 돌아서면 비방하고 욕하는데, 예수님은 자신에 대한 의심 때문에 질문하러 보낸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선지자가 되어 가지고 메시아가 누구인지도 모른단 말이냐? 나에 대하여 의심을 하다니 그래 가지고 어떻게 선지자 노릇을 할 수 있겠느냐? 책망을 하시지 않고, 그들이 떠난 다음 보지도 듣지도 않는데서 세례 요한에 대하여 최대의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 가장 나쁜 점을 보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례 요한의 최선의 것을 보신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구원의 확신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주시는 가장 큰 선물 중 하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이 구원받고서 의심할 수 있을까? 물론입니다. 그렇다면 의심하는 것이 좋은 것인가? 아닙니다. 통증이 육체에 고통을 주듯이, 의심은 영혼에 해악을 끼칩니다. 통증은 하나의 경고요, 어딘가가 탈이 났다는 신호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의심이 있다면 설사 그가 하나님의 거듭난 자녀라 할지라도, 그러한 의심들은 어딘가 문제가 있다는 표시입니다. 

영적 침체의 징후들이 무엇입니까? 믿음이 약화되는 것을 말하며,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식어짐을 의미하고, 하나님의 일에 열정이 줄어들게 되고, 헌신의 마음이 점점 없어짐이고, 말씀을 배우고 묵상하는 일에 게을러지는 것이고, 경건 생활에 관심이 점차 적어지는 것이며, 드디어는 죄에 대하여 두려움이 적어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영적인 쇠퇴기에 있는 성도는 기도하지 않게 되고, 양심이 마비되고, 마음에 기쁨과 평강이 사라지고, 불안과 불만족이 자리 잡게 됩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까?” 이것은 세례 요한이 옥중에서 그의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물었던 질문입니다. 세례 요한은 지난 날 예수님에 대하여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라고 증거한 바가 있고, 세례 요한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발 끈을 매어 주기에도 부족한 사람이라고 했으며, 예수님은 흥하여야겠고, 자신은 망하여야 하리라고 까지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이심을 확신으로 가득차서 증거 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왜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까? 하면서 의심을 하게 되었습니까? 그 이유는 1)환경적인 요인으로 육체적 감각적인 감옥의 고통 때문에 2)정신적 영적인 원인으로 예수님을 심판자로만 보고 하나님의 사랑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위대하고 강력한 설교자였습니다. 그러한 그가 이렇듯 의심과 침체에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연약한 우리는 어떠하겠습니까? 세익스피어는 낙망의 순간에는 자신이 시인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며, 라파엘도 한 때는 자신이 화가라 불리울 자격이 있는가를 의심했다고 합니다. 가장 위대한 성도들도 때로는 세례 요한처럼 의심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심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의심하기 전, 우리가 갖고 있는 하나님께 대한 생각, 우리가 갖고 있는 메시아관, 예수관이 잘못되어 있지 않은가를 먼저 의심해 보아야 한다.” 왜 그렇습니까? 세례 요한의 의심은 잘못된 메시아관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의심에 대한 가장 큰 해결 방법 중 하나는, 다시 성경을 읽어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틀린 것이 아니고, 내가 틀린 것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계속해서 믿음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감옥에서 보지도 듣지도 못한 세례 요한에게, 자신의 하시는 일을 전해 주면서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가운데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실족하는 성도가 한 분도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엘라 휠러 윌콕스 라는 시인은 주님께 대한 믿음을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내 가진 모든 배가 돛대는 부러지고 돛이 찢어져 
난파하여 돌아올 지라도 나는 주님을 의심치 않으리! 
모든 죄악에서 나를 건져 주시며 
결코 실패함이 없는 주님의 손을 나는 믿으리! 
내가 찢어진 돛 때문에 울지라도 
내 모든 희망이 산산조각이 나더라도 
“나는 주님을 믿습니다.”라고 외치리! 

어려움이 벌떼처럼 몰려들고 
슬픔이 비처럼 쏟아질 지라도 나는 주님을 의심치 않으리! 
어려움과 고통을 통해서만 
내가 원하는 곳에 이를 수 있다고 나는 믿으리! 
내 십자가 아래서 신음하고 분노할지라도 
모진 손상을 통해서 
보다 큰 얻음을 보게 되리! 

이 시인의 고백이 오늘 우리의 신앙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세례 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는 한 마디로 너무도 너그럽고 인자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낙심 중에 죽기를 구하는 엘리야에게 천사를 보내시사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엄마가 어린아이를 사랑으로 어루만지듯, 하나님은 실의 가운데 빠져 있는 엘리야를 사랑으로 어루만져 위로하시고, 새 힘을 주시며 새로운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 시간 우리 중에 세례 요한처럼, 또는 엘리야처럼 의심과 침체 상태에 빠져 있는 성도가 있으시다면, 하나님께서 그러한 성도들을 사랑으로 어루만지시고 위로해 주시사, 의심과 근심을 치유해 주시며, 새 힘을 주셔서, 엘리야처럼 다시금 사명을 위해 힘껏 달려가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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