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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순절] 위대한 삶의 순례(14) : 가이사랴 빌립보 (마 16: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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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삶의 순례(14) : 가이사랴 빌립보 (마 16:13~20)


수년전 유행되던 유머 퀴즈 가운데 이런 것이 있었습니다. 어느 학교 시험 문제 중에 “개미를 삼등분 하면 ( ), ( ), ( )이다.”라는 문제가 있었다고 합니다. 정답은 (머리), (몸통), 그리고 (배)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엽기 학생이 답하기를 (죽) (는) (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학교 교육제도는 시험이라는 과정을 거치며 학생들을 훈련하도록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중간시험이 있고 기말시험이 있습니다. 아마도 가장 중요한 것은 졸업시험일 것입니다. 

예수님도 자신의 제자들과 3년여에 걸쳐 제자 훈련의 삶을 함께 하며 이제 작별의 순간이 가까운 것을 아시고 제자들에게 마지막 졸업 시험 문제를 내셨습니다. 딱 두 문제였습니다. 첫째는,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 둘째는,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였습니다. 이것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적인 물음은 바로 기독론의 문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임을 반영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이 시험문제를 내신 곳이 바로 가이사랴 빌립보/빌립보 가아사랴였다고 기록합니다. 

본문의 시작 구절인 13절을 읽어 보십시오. “예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이스라엘 최북단 헬몬 산의 발치에 자리 잡은 아름다운 도시 가이사랴 빌립보는 헤롯 대왕이 BC20년 로마의 아우구스도 황제로부터 선물로 받은 도시였습니다. 희랍시대에는 판(Pan)신전이 자리잡고 있었던 산수 좋은 곳입니다. 판의 이름을 따서 이곳 일대를 파니아스(바니아스-아랍어, 아립인은 P자 발음이 안 됨)라고 부르며 국립공원의 일부로 되어 있습니다. 

헤롯 대왕이 죽은 후 그의 아들 헤롯 빌립은 로마 황제의 칭호 가이사랴에 자신의 이름 빌립을 합하여 가아사랴 빌립보로 이 도시를 명명하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갈릴리에서 제자들과 함께 있다가 북으로 20마일 정도 떨어진 조용한 이 도시로 와서 자신의 생애에 가장 중요한 이 질문을 제자들에게 던지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 선지자 엘리야, 예레미야, 침례 요한의 재현등 여러 대답이 있은 후 그러면 그동안 나와 함께 있었던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자 그러면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제자들에 의해 고백된 예수는 누구이십니까?

1. 예수는 인생의 구주이십니다.

본문의 백미는 제자 베드로의 고백입니다. 16절입니다.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여기서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그리스도의 뜻은 문자 그대로 ‘기름부음을 받은 자’(anointed one)로서 구약에 보면 그 자리에 취임할 때 기름부음을 받는 세 가지 직종이 있었습니다. 왕과 선지자,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들은 취임 시 양의 뿔(양각)에 기름을 채워 머리에 붓는 것으로 사역을 인준한 것입니다. 

왕은 ‘다스리는 자’인데, 인생의 가장 중요한 질문은 누가 나를 다스리는가? 라는 물음입니다. 선지자는 ‘가르치는 자’로서 인생의 또 하나의 질문은 누가 나에게 바른 진리를 가르쳐 진리로 인도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입니다. 제사장은 하나님에게 속죄의 제사를 드려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다리 역할을 하는 자였습니다. 인생의 또 하나의 질문은 누가 내 죄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가?라는 물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수많은 흔들리는 왕, 거짓 선지자, 성실하지 못한 제사장들을 경험하면서 어느 날 역사의 장에 하나님이 직접 기름을 부어 주셔서 왕과 선지자, 제사장의 역할을 함께 감당할 분의 오심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를 희랍어로 그리스도, 아람어로 메시아로 부른 것입니다. 그러니까 메시아는 나를 다스리는 왕으로 나를 진리로 인도하는 선지자로 그리고 나의 죄 문제를 해결할 자이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이런 메시아를 우리는 다른 말로 ‘구주’(Saviour)(구원의 주님)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이사랴에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예수님 “당신이 바로 그리스도 곧 우리의 구주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이 대답을 예수께서는 얼마나 기뻐하셨는지요? 17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내 아버지의 도움으로 네가 이 진리를 깨달았다고 칭찬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보면 “에수 그리스도”라는 말에 기독교 진리의 핵심이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는 그리스도, 곧 예수가 구주이십니다-이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인 것입니다. 때로 이 ‘예수 그리스도’란 말이 우리에게 너무 친숙한 이름이어서 진리의 핵심을 놓치고 있을 수가 있습니다. 

어떤 학교에서 시험을 치르는데 학교 운동선수가 모처럼 열심히 공부하고 정신차려 시험을 치르고자 클라스 맨 앞줄에 앉아 시험을 치르는데 마지막 문제가 학교 이름을 한문으로 쓰라는 문제였습니다. 시험시간이 끝나갈 무렵 갑자기 학생들의 ㅋ ㅋ ㅋ 웃음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 운동선수 유니폼 셔츠 등판에 학교 이름이 한문으로 적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선수도 뒤늦게 깨닫고 몸을 비틀어 보았지만 자기 등판의 글씨를 결국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 오히려 정답을 알지 못한 오류는 지금 바로 우리의 오류일수도 있습니다. 예수는 누구이십니까? 예, 예수가 그리스도, 예수가 곧 구주이십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2.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란 고백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아주 쉽게 설명을 해 보겠습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은 예수가 하나님이시란 의미입니다. 이렇게 질문을 바꾸어 보겠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이다>-말이 됩니까? 예, 말이 되지요. 사람은 사람을 낳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낳은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이시지요. 그러니까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은 본성 혹은 속성이 같으십니다. 이것이 삼위일체입니다. 

삼위일체를 너무 어렵게 생각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위격에 구별이 있지만 본질적 속성이 동일하시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 아들은 다같이 하나님이란 의미입니다. 나와 내 아들은 분명히 구별된 존재이지만 <같은 인간>인 것은 틀림없는 것과 같습니다. 

시편 2편 7절은 일반적으로 메시아를 예언한 대표적인 구약 말씀으로 이해가 됩니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하나님이 낳으신 아들이 구세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낳으신 아들이라면 그 아들도 하나님이 아니시겠습니까?

기독교 교리에서 예수는 참 하나님이시오 참 사람이시다는 고백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고백으로 간주되어 왔습니다. 소위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고백입니다. 둘 중의 어느 것 하나를 부인하는 것이 역사적으로 이단을 분별하는 가장 중요한 지침이 되어왔습니다. 이단은 예수의 신성을 부인하든가 아니면 예수의 인성을 부인해 온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의 신성을 믿는 것 곧 예수의 하나님 되심을 믿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예수가 단순히 훌륭하신 사람이었다면 그는 우리의 모범은 되실지 몰라도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구주는 되시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설교가 척 스윈돌 목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정보였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교육자를 보내셨을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기술이었다면 그는 우리에게 과학자를 보내셨을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돈이었다면 그는 우리에게 경제학자를 보내셨을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쾌락이었다면 그는 우리에게 연예인을 보내셨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용서이었기에 그는 우리에게 구세주를 보내신 것이다.”고. 

그런데 성경은 용서는 궁극적으로 하나님만이 하실수 있는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우리에게 구세주로 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중요한 고백을 확인해야 합니다-“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3. 예수는 교회의 반석이십니다.

18절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주신 말씀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 신학자들은 역사를 통해 여기서 반석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토의해 왔습니다. 카톨릭에서는 문자 그대로 이 반석을 인간 베드로로 해석했고 그래서 베드로를 초대 교황으로 간주해온 것입니다. 그러나 개신교에서는 우리가 본문을 계속 읽어 내려가 보면 예수께서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예언하시자 베드로가 만류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인간적이긴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라”(23절)고 말씀하십니다. 

만일 사탄도 될 수 있었던 인간 베드로위에 교회가 세워진다면 그 교회의 기초는 얼마나 취약한 것일까요? 그래서 개신교 신학자들은 여기 반석이 베드로가 아닌 베드로의 신앙 고백의 핵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뜻한다고 본 것입니다. 실제로 성경은 우리의 신앙의 기초인 반석을 그리스도라고 가르칩니다. 바울사도는 고전10:4에도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 했고 베드로 자신도 벧전2:4에서 예수님을 “보배로운 산돌(반석)이신 예수”라고 증언합니다. 

그렇습니다. 교회의 기초는 예수이시고 그분이 또한 교회의 주인이십니다. 본문 18절에서 그가 친히 “내 교회(My church)를 세우리라”고 말한 것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교회의 주인은 결코 목사가 아닙니다. 그래서 목사가 바뀐다고 해서 흔들리는 교회는 성경적 교회의 모습이 아닙니다. 주인은 변함이 없고 다만 그가 쓰시는 종들이 시대를 따라 바뀌는 것 뿐입니다. 

교회의 타락은 언제나 종이 주인 노릇을 할 때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이런 유머도 생겨났을 것입니다. 천국에서 성도들이 도착할 때마다 예수님은 일어나서 성도들을 포옹해 주시고 환영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목사가 도착하자 예수님이 보좌에서 일어나지 않으시고 그냥 “너 왔냐?” 그러시더래요. 그래서 한 성도가 묻기를 “예수님, 목사님은 복음을 위해 남다른 수고를 많이 하셨는데 어째서 일어나서 환영해 주시지도 않으셔요?”하고 묻자, “내가 일어서면 저 사람이 내 자리에 앉을까 봐 그런다”하셨답니다. 

그러므로 다시 한번 우리는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의 교회의 주인은 누구이십니까? 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가 우리 교회의 주인이시고 우리 교회가 세워져 가는 반석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가 계속 그분만을 바라보고 그분만을 붙들고 나아갈 때 우리 교회 또한 반석위에 세워진 교회로 또 다른 다가올 세월에도 존귀하게 쓰임 받는 교회가 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베드로와 예수의 제자들이 이 중요한 고백을 한 곳이 가이사랴 빌립보였다는 것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고 믿습니다. 예수님 당시 갈릴리 지방도 사실상 유대인들에게는 이방의 땅으로 간주되었지만, 가이사랴 빌립보는 갈릴리 최북단의 이방 국가들과 이방의 촌락들을 연결하는 도시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제자들의 신앙 고백을 받으시고 이제 이 복음이 유대와 사마리아의 변경을 넘어서서 땅 끝까지 예수님의 교회들이 세워져 복음의 등대 역할을 하실 것을 기대하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제자들이 만난 동일한 예수님을 만난 오늘의 우리도 동일한 신앙 고백을 통해 복음의 위대한 메시지를 선언하는 것입니다. 예수만이 구세주라고, 예수가 곧 하나님이시라고, 예수가 바로 우리의 희망과 생명의 공동체인 교회의 반석이시라고. 이 고백이 변하지 않는 한, 그리고 이 고백의 핵심인 복음이 이 강단에서 선포되고 있는 한 우리 교회는 변함없는 주님의 몸으로 쓰임 받을 것을 기대하십시다.  (이동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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