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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순절]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롬 5: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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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롬 5:9~11)


(롬 5: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롬 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롬 5:11)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오래 전 멕시코의 어느 마을에 병에 걸린 어머니를 간호하는 착한 소녀가 있었습니다. 소녀는 어머니의 회복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산에 올라가 약초를 캤습니다. 어느 날 소녀는 절벽 사이에 돋아난 약초를 캐다가 그만 굴러 떨어졌습니다. 소녀가 흘린 피로 주변의 하얀 꽃이 빨갛게 물들었다. 소녀는 정신이 희미해질 때 예수님이 나타나 "저 피 묻은 꽃을 꺾어 어머니에게 갖다드려라."고 말씀 하였습니다. 그 순간 소녀는 힘을 얻고 일어나 그 꽃을 어머니에게 갖다드렸습니다. 어머니는 이 꽃의 향기를 맛보고 병석에서 일어나 건강을 되찾았다고 합니다. 이 꽃의 이름은 포인세티아 입니다. 그래서 이 포인세티아 꽃의 꽃말은 '희생' 또는 '축복'이라고 합니다. 희생이 축복의 열매를 맺는다는 말입니다.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희생으로 우리는 모든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화평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인 영생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늘의 기쁨과 안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모든 부유함과 행복을 경함하며 하늘의 영광 가운데 살 수 있는 축복이 임했습니다. 

오늘 읽은 로마서 5장에는 유난히 '말미암아'라는 단어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본문에서만도 '그의 피로 말미암아' '그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섯 번이나 강조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임한 축복이 얼마나 크고 놀라운 것인지를 반복하여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에게 가져다 준 축복이 무엇인가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1. 그 피로 말미암아 우리는 의롭다 하심을 얻게 되었습니다. (8-9절)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9절) 
  
죄로 말미암아 인류는 하나님의 진노하심과 심판 아래 있게 되었습니다. 생로병사 즉 인간의 모든 고통과 불행과 죽음이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인류는 이 죄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고자 양심껏 착하게 살려고 몸부림치기도 하였습니다. 엄격한 법을 정하고 법대로 하며 법을 어길시에 중벌을 주기도 하였습니다. 선행을 쌓아 죄를 희석시키려고도 해 보았습니다. 그렇지만 그 어느 것도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습니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며 죄가운데 멸망하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프랑스에 비롱이란 사람은 1500년대의 유명한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비롱장군이 중병에 걸려 위독해지자 유언을 남기고자 절친한 친구를 불렀습니다. 친구들이 모이자 비롱은 "내가 하나님께, 그리고 국왕 폐하와 국가, 사회에 진 빚을 다 못 갚았는데..."라고 울먹이면서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한 친구가 부드럽고 진지한 목소리로 "그만두게나. 아무리 애써도 결국 다 못 갚을 테니까."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노력을 해도, 몸부림을 쳐보아도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죄의 빚을 도저히 갚을 수가 없습니다.  인류 역사가운데 수많은 사람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죄값을 지불하고 의로와질려고 몸부림쳤으나 모두 실패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하나님께서 오직 한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대속의 십자가를 지고 피흘려 죽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을 믿고 회개하는 자를 하나님은 의롭다 하시고, 당신의 진노하심과 심판을 거두십니다.  이것이 죄를 해결하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말은 법정용어입니다. 재판정에서 검사가 피고의 죄를 열거하며 몰아세웁니다. 변호사가 피고의 무죄를 힘을 다해 변호합니다. 재판장이 양쪽의 공방을 다 듣고 무죄 선언하면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입니다. 재판장이신 하나님앞에서 율법과 양심 그리고 사단이 검사가 되어 우리의 죄를 찾아내어 공박합니다. 예수님이 변호사가 되어 우리를 위해 변론하십니다. '저가 저지른 죄와 허물이 크고 많으며 그로인해 심판받고 멸망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저의 죄값을 내가  이미 십자가에서 다 담당하고 지불했습니다. 그러므로 저를 다시 심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다 들으시고 최종판결을 내립니다. "무죄, 의롭게 되었음." 그래서 우리는 모두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 

마가복음 10장 45절에서 예수님은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대속물'이란 말은 상업적 용어입니다. 장사군들이 시장에서 물건값으로 어떤 것을 요구할 때 쓰는 말입니다. 대속물은 구약에서는 범죄의 보상으로 내는 가축을 의미합니다. 또 주후 1세기 그레코-로만 시대에서 대속물은 노예를 해방시키기 위해 치루어야 할 몸값을 뜻합니다. 
  
예수님이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주신 것은 죄인인 우리가 받아야 할 벌에 대한 대가를 그 분이 대신 갚아주신 구속의 은혜입니다. 또한 죄의 노예가 되어 있는 우리들을 값을 치루고 사셔서 자유케 하시는 해방의 은총입니다.  
  
모든 사람은 죄를 범하였고, 죄의 지배하에 있다는 것, 또 사망은 죄 안에서 우리에게 대해 왕노룻하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의 목숨을 주고, 대신 우리들을 죄와 사탄의 권세에서 자유케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골 1:13-14). 우리를 자유케 하시는 예수님의 구원 사역은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심으로써 확증되었습니다. 

2. 그 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10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10절)
  
죄는 관계를 깨뜨립니다. 아담에게 들어온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렸을 뿐 아니라, 이어 아내 하와와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 심지어 자기 자신과의 관계마저 깨뜨렸습니다. 오늘 성경은 그 죄가 우리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였다고 말씀합니다. 그뿐인가요? 죄는 모든 사람을 원수 되게 합니다. 죄는 이렇듯 관계를 깨뜨리고 화목을 빼앗아가는 능력이 있습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깨어진 관계 속에서 고통하고 있습니까? 

죄인인 우리가 다 하나님과 원수였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롬 5:10).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와 이토록 껄끄러운 관계를 참으실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먼저' 화해를 청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받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칭함을 받음으로써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 곧 화해의 관계가 맺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 5:1).
  
예수님은 "화평" 그 자체입니다. 십자가로 원수된 것을 소멸하심으로 인간 및 모든 만물과 하나님 사이에, 또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화해와 평화를 이룩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가 이룬 평화와 화해는 이미 구약시대에 약속된 "화평의 언약'의 성취입니다. 또 이미 스가랴 선지자가 예언한 바 있는(슥 9:9-10) "메시야의 평화"의 실현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가져온 화해와 평화는 단순히 심리적 평안만이 아닙니다. 또한 정치와 무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Pax Romana가 아니라 사랑과 화해로 원수와도 한 몸을 이루는 Pax Christi 입니다.
  
영화「불의 전차」를 통해 자신의 인생이 소개되었던 스코틀랜드의 육상선수 에릭 리들은 중국에서 20 년 동안을 선교사로 사역하였는데, 마지막 2년은 세계 2차 대전으로 인해 일본군 수용소에 갇혀 지냈습 니다. 참기 힘든 수용소의 환경 속에서 사람들 사이에서나 그룹들 간에 참을 수 없을 정도의 분노가 끓 어오를 때마다 그들 사이에서 화평케 하는 자로 그는 알려져 있었습니다. 리들의 삶은 모든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어느 날 리들이 점호에 나타나지 않자 일본군 경비가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한 사람이 대답하기를 에 릭이 몇시간 전에 갑자기 죽었다고 하였습니다. 경비는 잠깐 주춤하더니 이렇게 물었습니다. "리들은 예수 믿는 사람 아니었나? 그렇지?"
  
리들은 일본어를 전혀 몰랐고 경비병도 영어를 전혀 몰랐습니다. 그들이 유일하게 직접 만날 수 있었던 순간은 하루에 두차례 의무적인 점호시간 뿐이었습니다. 리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경비병이 어떻 게 알았을까요? 그는 수용소 안에서 싸움을 해결하던 에릭에게서 그리스도를 보았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화목제물"이 되어주셨습니다. 죄로 인해 생긴 막힌 담을 허물어 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화목을 이루는 다리가 되어준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로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깨어진 인간관계를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과 화목한 관계로 변하면 무엇이 좋습니까? 우리 안에 불안이 사라지고 두려움이 사라지고 평안이 넘칩니다. 담대함이 찾아옵니다.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형성되므로 기도가 상달되고 응답이 넘칩니다. 

1세기 전 영국에서 활동했던 고아의 아버지 죠지 뮬러는 80평생 2만 5천번이나 되는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는 이 기도를 통해서 1만명의 고아를 돌보았고 선교지에 2백만권의 성경과 3백 만권 이상의 신앙도서를 보냈으며 10만명 이상의 주일 학생을 교육했다고 합니다.  그가 81세가 되던 해에 어느 신학교의 특강강사로 초청되어 그 비결이 무엇인지 질문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는 의자에 무릎을 꿇고 기도의 자세를 취하면서 "이것이 비결이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죠지 뮬러의 생애는 기도가 얼마나 엄청난 능력이며 또 특권임을 잘 보여 준 아름다운 삶입니다.  동시에 그가 얼마나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누리며 살았는가를 보여주는 산 증거입니다.

3. 그 피로 즐거워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11절)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11절) 
  
죄는 기쁨을 앗아갑니다. 선악과를 먹는 달콤함은 아담을 숲에 숨게 하였으며 마침내 기쁨의 동산 에덴에서 떠나게 하였습니다. 죄는 그 죄를 짓기까지는 달콤한 즐거움을 주지만 그 후에는 부끄럼과 불안을 안겨줍니다. 또 깨어진 관계로 인한 갈등과 고통을 더하게 합니다. 
  
이렇듯  세상적 즐거움은 곧 시드는 들의 꽃과 같이 잠간이요 일시적입니다. 그리고 그 후에는 불안과 두려움과 고통을 안겨줍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기쁨은  "하나님 안에 있음으로" 누리는 영원한 기쁨입니다. 아무것이 없어도, 모든 것을 잃는다 해도 기뻐할 수 있는 즐거움입니다(합3:17).  그리스도가 내주(內住)하심으로 영원토록 솟아나는 기쁨의 샘이 되어주시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처음 이 땅에 들어온지 오래지 않았을 때 어떤 사람이 한국의 여러 종교를 평한 글이 있습니다.  거기보면 재밌는 부분이 있는데 어떤 종교를 상갓집에 비유했습니다.  그저  인생무상만을 강조하다보니 다 죽고 다 없어진다는 것밖에 남지 않습니다. 그러니 상갓집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종교는 마치 제사집과 같다는 것입니다. 효도를 한답시고 밤낮 제사만 지냅니다.  일년내내 정성 다해 제사지내다가 세월 다 갑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잔칫집같다고 했습니다.  언제나 찬양소리가 그치지 않습니다.  예배가 감사의 축제입니다.  신자가 되면 사람들의 얼굴이 밝아집니다.  행복해집니다. 

하나님과 화평하는 것이 기쁨의 뿌리입니다. 하나님과 등지고 원수가 되면 행복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 죄짓고 하나님을 거스리면서 살며 기쁨이 충만해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순간적인 기쁨은 만날 수 있지만 또다시 공허해지고 근심이 그를 누룹니다.   '웃을 때에도 마음에 슬픔이 있고 즐거움의 끝에도 근심이 있느니라 (잠 14:13)'고 성경은 증거합니다. 
  
기쁨의 근본은 하나님과 화목하는데 있습니다.  눅15장에 보면 탕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아버지의 재산을 다 잃었습니다.  처음에 그는 자기가 불행한 원인이 재산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친구를 다 잃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행해진 진짜 이유가 아닙니다.  후에 그는 깨닫습니다.  자신이 아버지를 떠났기 때문에 불행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아버지품을 떠나서는 절대로 행복할 수 없습니다. 잘되건 못되건, 가난하건, 부유하건 그것은 기쁨과 상관없습니다.  그것을 깨달은 둘째 아들은 곧 집으로 돌아갑니다.  아버지 품으로 돌아갑니다.
  
아버지는 그가 재산을 다 탕진한채 거지가 되어 돌아왓으나 상관하지 않습니다.  냄새나는 모습으로 가진 것 하나도 없이 돌아왔으나 기뻐하며 그를 끌어안고 즐거워합니다.  실패한 자식의 모습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잔치를 크게 열고 새옷과 새신 가락지를 내어주며 사람들에게 돌아온 자식을 자랑하며 즐거워합니다.  그리하여 돌아온 아들은 참 기쁨을 회복하게 됩니다. 
  
여기에 중요한 성경의 원리가 담겨 있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적으로 성공한 모습을 하나님께 보여주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난채 성공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을 떠난채 세상적으로도 성공해보아야 오래지 않아 허무해집니다. 공허해집니다. 아무리 많은 재물을 모아도, 대단한 권력을 잡아도, 인기를 얻어도 별것이 아님을 깨닫는 데에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실패한 모습도 괜찮습니다.  초라한 모습도 괜찮습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직 돌아오기만 하면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돌아오기만 하면 하나님과 함께 참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과 화평한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만 진정한 기쁨이 있습니다.   이 은혜에 들어감을 입었을때에만 새로운 세계에서 살게 됩니다. 새로운 세계를  바라보며 오늘을 살때 참된 즐거움이 넘쳐납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기쁨이 있습니까?  이 기쁨이 여러분안에서 인생을 풍성하게 하는 생명력으로 역사하게 있습니까?  이 기쁨이 여러분안에서 위대한 창조력으로 역사하여 인생을 아름답게 만들어 가고 있습니까?  아직 그 기븜이 없으시다면 여러분이 지금 하나님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 점검해 보시고 즉시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테레사 수녀가 생전에 늘 강조한 말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남을 돕는 가장 쉬운 방법은 돈을 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려운 이들을 위해 돈을 조금 보내고 충분히 도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보다 직접 오십시오. 여러분의 사랑을 주십시오. 따뜻한 가슴과 영혼을 주십시오. 와서 땀흘히며 섬겨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고통받는 자들을 위해 함께 지내며 눈물을 흘려주는 것이 더 좋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고 천국보좌를 포기하셨습니다. 우리로 화목하게 하시려고 낮은 이땅에 찾아 오셨습니다. 우리로 즐겁게 살게 하시려고 십자가를 지시고 피흘리셨습니다. 그 피로 말미암아 우리는 생명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유업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의 귀한 피가 헛되지 않게 의롭게 삽시다. 화목하게 삽시다. 즐겁게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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