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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두려워 말라 (사 4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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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워 말라 (사 41:10)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갈수록 혼돈스러워져 갑니다.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과 같은 나라는 아직도 전쟁이 끝나지 않은 상태여서 언제 어디서 폭탄이 터질는지 테러가 일어나서 피해를 당할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고, 아프리카와 남미의 여러 나라들 역시 전쟁과 테러로 인해 치안이 극도로 불안한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 폭탄이 터질는지 알 수 없으니 얼마나 두렵겠습니까?

멕시코는 마피아의 세력이 너무 커져서 치안이 불안해지자 정부가 마피아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소탕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러자 마피아가 무차별로 경찰과 시민을 살상하는 바람에 하루 평균 20여명에 목숨을 잃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국민들이 얼마나 불안하고 두렵겠습니까?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드물게 치안이 잘 유지되는 나라지만, 그렇다고 안심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닙니다. 부녀자 연쇄살인사건이나 아동 성추행 살해 사건과 같은 흉악범죄가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어서 모든 국민이 불안 해 하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정년이 보장되지 않는 것은 고사하고 회사의 사정에 의해 언제라도 실직할 수 있다는 사실이 대부분의 직장인들을 불안하게 합니다. 

더구나 치열한 경쟁과 청년 실업의 증가는 젊은 세대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은 성적 경쟁과 진학으로 늘 불안한 상태로 살아갑니다. 중년이 지난 사람들은 노후 대책이 불안 요인이 되고 있고, 혹시라도 암을 비롯한 질병에 걸리지나 않을까 두려워합니다. 

아이티나 페루, 일본과 같이, 지진이 빈발하는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언제 재앙을 당하지는 않을까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살아갑니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핵무기를 개발한 북한과 대치하고 있어서 언제 전쟁이 발발할지 항상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 없는 실정입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불안과 두려움에서 스스로를 보호할 방법을 강구하려고 합니다. 집집마다 잠금장치를 이중 삼중으로 만들고, 안에서 밖을 볼 수 있도록 비디오 폰은 필수입니다. 건물의 엘리베이터를 비롯해서 층층마다 감시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어느 자료에 의하면, 전국에 설치되어 있는 감시카메라의 수가 200만대가 넘는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감시카메라를 많이 설치할수록 범죄를 줄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앞으로도 꾸준히 늘어날 것입니다. 

미국과 같이 신고만 하면 개인이 총기를 자유롭게 소지할 수 있는 나라에서는 거의 집집마다 권총이나 소총이 비치되어 있는 실정입니다. 이는 타인으로부터 자기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한 자구책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걱정스러운 점은 사람들의 방비가 철저해 질수록 범죄의 양상도 점점 더 지능화되고 흉포화 되어 간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인류 역사상 오늘날과 같이 평화와 안전과 거리가 먼 시대는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행복하게 살려면 이 모든 종류의 두려움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공권력이나 감시카메라나 잠금장치나 총기나 돈과 같은 것에 의존해서는 완전한 성공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방비가 고도화될수록 범죄도 고도화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들은 하나님으로 인해 두려움을 극복해야 합니다. 본문에 보니, 하나님께서 이 같이 말씀하십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이 말씀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들에게 주신 전능하신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보다 더 강한 자는 있을 수 없습니다. 인간은 아무리 강할지라도 실은 코로 숨쉬는 존재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들의 호흡을 주장하시는 분이십니다. 제 아무리 막강한 권력자라도 하나님께서 그의 호흡을 거두시면 하루아침에 죽은 송장이 되고 맙니다. 

무엇보다 감사할 일은, 하나님께서는 진실 무망하시므로 그 하신 약속을 반드시 이행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민 23:19)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악한 자들의 손에서 지켜주시는 이유는, 성도들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을 대적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과 같습니다. 독생자를 아낌없이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어찌 악인들이 성도들을 제 마음대로 해치도록 방치하실 리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악인들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언뜻 보기에는 악인들이 이 세상을 제 마음대로 좌지우지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인류의 역사와 나라와 민족들의 흥망성쇠와 개인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십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어린 자녀들은 자기 아빠와 함께 하면 겁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철이 들면 아빠가 전능한 존재가 아님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하신 하나님께서는 인생이 아니라 전능하신 신이십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는 이교의 신들처럼 신화 속에나 나오는 죽은 신이 아니라,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경외하는 하나님께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항상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요즘 멕시코의 빈민가를 중심으로 죽음의 여신을 숭배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합니다. 멕시코는 천주교 국가로서 대부분의 국민이 천주교 신자인데, 천주교의 교리와 상관없는 해골 모양의 상을 만들어놓고 숭배하는 사람들이 200만이 넘는다고 합니다. 모 방송국에서 취재한 것을 보았더니, 죽음의 여신을 섬기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언제 무슨 불상사를 당할지 알 수 없는 불안한 사회에서 두려움을 무마하기 위해 그 신흥 종교에 몰두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어쩌다가 그들이 조상 대대로 섬겨왔던 기독교의 하나님을 버리고 해골 모양에 커다란 낫을 든 괴물 같은 우상에게 자기들의 운명을 의탁하게 된 것일까요?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지 못한 데 그 원인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에게 하나님은 살아계신 신이 아니라 죽은 신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영험하다는 죽음의 여신상을 섬기는 편을 택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지 않으면서도 교회에 다닐 수 있고, 기독교인 노릇을 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을 보고 성도라,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단지 하나님을 대상으로 종교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격적인 관계는 죽은 자가 아닌 산 자와만 가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막 12:27)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께 자기의 삶을 맡길 수 없습니다. 왜 기독교인이라고 하면서 세인들과 같은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께 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지로는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이 같이 허망한 신자가 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기드온 당시에,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숭배의 죄에 빠졌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미디안 족속의 손에 붙이셔서 무려 7년 동안 압제를 당하게 하셨습니다. 우리민족도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압제를 당해 본 경험이 있지만, 이스라엘 자손이 농사를 지어놓으면 미디안 족속이 쳐들어와서 곡식을 다 빼앗아갔습니다. 마침 밀을 추수할 때가 되었는데,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포도주 틀에서 밀을 타작하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얼마나 초라하고 비겁하게 보입니까? 

때에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기를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라고 했습니다. 기드온은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 줄 알지 못하고 대답하기를 “내 주여,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면 왜 우리에게 이 모든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여호와께서 우리를 이집트에서 구출해 내지 않으셨느냐?’라고 우리 조상들이 우리에게 말했는데 그분의 모든 기적들은 어디에 있습니까? 지금 여호와께서 우리를 버리고 미디안 사람들의 손에 우리를 넘기셨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불해하게도 기드온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과 함께 계시는 것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 당시 기드온의 집은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의 집에는 그의 아버지가 만들어 세운 바알과 아세라 상과 우상을 위한 제단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기드온의 신앙 수준은 명색이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하나님에 대하여 어렴풋이 알고 있는 정도였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그는 미디안 사람들의 눈을 피해 숨어서 밀을 타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디안 족속의 손에서 이스라엘 자손을 구해 내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이 가져온 염소 고기와 무교전병과 국을 반석 위에 두게 하고 손에 잡은 지팡이 끝을 내밀어 고기와 무교전병에 대었더니 불이 반석에서 나와 고기와 무교전병을 살랐고 여호와의 사자는 떠나서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제야 기드온은 조상들이 섬겼던 여호와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애굽에서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자손을 크신 능력으로 인도해 내신 것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기드온은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담대해졌습니다. 

먼저, 기드온은 하나님의 지시에 순종하여 우상을 내버렸습니다. 그 밤에 자기 집에 있는 바알의 단을 헐고 아세라 상을 찍어 버리고, 새로 하나님을 위해 단을 쌓고 그 위에 칠년 된 수소를 취하고 그가 찍은 아세라 상을 땔감으로 삼아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습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군사를 소집하여 미디안 족속을 물리쳤습니다. 당시 미디안 족속은 십삼만 오천 명이나 되었지만, 기드온의 군사는 겨우 삼백 명에 불과했습니다. 수적으로 볼 때, 도저히 상대가 되지 않았지만 기드온은 하나님을 의지하여 미디안 대군을 전멸시키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기드온에게서 우리는 두려움을 이기는 비결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올바로 알고 믿고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을 믿고 담대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머리로만 아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두려움을 제거하시고 한없는 용기와 담대함을 부어주십니다. 

다윗은 소년 시절에 사무엘 선지자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은 이후로 항상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시는 것을 알았습니다. 한번은 전장에 나간 형들에게 아버지의 심부름을 갔다가 적진에서 나온 장수 골리앗이 이스라엘 군대를 모욕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군사들은 모두 숨을 죽이고 숨기에 바빴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골리앗은 키가 3미터나 되고 그가 입은 갑옷의 무게만 해도 57킬로그램이나 되었고, 창틀은 베틀채 같고 창날의 무게가 약 7킬로그램이나 되었습니다. 게다가 골리앗은 어려서부터 용사였습니다. 그가 진 앞에 나와서 외치면 땅이 쩌렁쩌렁 울렸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는 감히 골리앗과 맞설 용기를 가진 자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골리앗이 이스라엘 군대를 모욕하는 것을 듣고서는 의분이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자기가 골리앗과 맞서 싸우겠다고 말했습니다. 사울 왕이 다윗을 불러 보니 아직 홍안의 소년인지라 의기는 가상하나 만류했습니다. “네가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기에 능치 못하리니 너는 소년이요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임이니라” 

그러나 다윗은 말하기를 “주의 종이 아비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떼에서 새끼를 움키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 죽였었나이다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라고 했습니다.

사실이지, 그때까지 다윗은 칼이나 창을 들고 전쟁터에 나가본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사람을 죽여본 적도 없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께서 항상 그와 함께 하시는 것을 몸소 경험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다윗의 신앙은 머리로만 아는 신앙이 아니고 또는 맹목적인 신앙도 아니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실생활 속에서 체험을 통해서 알고 믿는 산 신앙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한 손에는 목자의 막대기를, 다른 손에는 물매를 가지고 주머니에는 차돌 다섯 개를 넣고서는 골리앗을 향하여 달려 나갔습니다. 그 때 다윗이 골리앗을 향해 외친 말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날, 다윗이 골리앗의 이마를 겨냥하여 차돌을 취하여 물매로 던졌더니 그 돌이 곧바로 그 이마에 박혔고 골리앗은 쿵 소리와 함께 땅에 엎드러졌습니다. 이에 다윗이 달려가서 골리앗의 칼을 빼서 그의 목을 베어들었습니다. 이로 인해 블레셋 군대는 혼비백산하였고 이스라엘은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다윗은 시편 27편에서 이 같이 간증했습니다.

“1)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2)나의 대적, 나의 원수 된 행악자가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다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3)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안연하리로다”

기드온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과 다윗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은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기드온, 다윗과 함께 하셔서 위대한 승리를 주셨던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저와 성도님들의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는지 알 수 없는 불안한 세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을 때 언제 어디서나 마음의 평온을 누릴 수 있으며, 두려움 없는 담대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미래에 희망을 갖지 못하고 불안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미래를 걱정할 이유가 없습니다. 신명기 31장 8절에 “여호와 그가 네 앞서 행하시며 너와 함께 하사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시리니 너는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만일 우리가 자기의 능력에 의존해서 살아가려고 한다면 세인들과 마찬가지로 내일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고아와 같이 고독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언제나 함께 하시면서 우리의 걸음을 인도하시며 우리의 앞길을 예비해 주시기 때문에 걱정할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렇다고 성도들은 일평생 살아가면서 아무런 어려움도 만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닙니다. 성도들도 역경을 만나고 질병에도 걸리고 실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일을 만날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므로 걱정하거나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지나고 보면 하나님께서 자비로우신 손길로 인도하셨음을 깨닫고 감사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손길을 자주 경험할 때 우리는 어떠한 일을 만나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확신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시편 46편을 지은 성도와 같이 담대하게 선포할 수 있게 됩니다. “1)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2)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3)바닷물이 흉용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찌라도 우리는 두려워 아니하리로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지 나흘이나 되어 냄새가 나는 나사로의 무덤에 가셔서 돌을 옮겨놓게 하신 후에, 하늘을 우러러 보시고 기도하시기를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서 걸어 나왔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님께서 하신 기도의 내용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죽은 나사로를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라”고 담대하게 명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시니까 그런 것이지, 우리야 어떻게 주님처럼 담대하게 명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 15:7)고 하셨습니다. 기도의 응답을 원하십니까? 믿음으로 구하고 의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믿되 여러분의 생각을 가미하지 말고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이 없는 사람을 위해서는 아무 기적도 보여주시지 않으십니다. 그리하여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는 태양이 밝게 빛나고 있지만 소경에게는 태양이 없는 캄캄한 어둠 속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상상 속에서 만들어낸 하찮은 신들에게 끌립니다. 

미신을 섬기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 나름대로 경험들을 갖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미신을 섬기는 사람들은 이사를 한다거나 결혼을 한다거나 또는 벽에 못을 박을 때에도 손이 없는 날을 잡아서 시행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불행한 일이 생긴다고 믿고 있습니다. 

일전에 어떤 사람과 대화를 하던 중에, 자기가 손 없는 날을 무시하고 벽에 못을 하나 박았다가 눈이 충혈이 되고 오한이 들어서 죽을 고생을 했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사람이 정직한 줄을 알므로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미신을 섬기는 그에게 그 같은 일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이처럼 미신을 섬기는 사람들도 나름대로 분명한 체험이 있기 때문에 두려운 마음에 무슨 일에나 점쟁이를 찾아가서 묻습니다. 그러나 이는 두려움 때문에 귀신들의 종노릇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매일 같이 벽에 못을 박아도 아무 일도 생기지 않습니다.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귀신들을 물리칠 수 있는 권세를 받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귀신들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나사렛 회당에 들어가셔서 사람들 앞에서 다음과 같이 이사야서의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 4:18-19)

가난한 자, 포로 된 자, 눈먼 자, 눌린 자는 그들이 처한 처지로 인해서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난한 자는 가난이 주는 고생을 두려워하고 부자의 횡포를 두려워합니다. 포로 된 자는 그를 사로잡은 자들을 두려워합니다. 눈먼 자는 실족할까봐 두려워합니다. 눌린 자는 그를 억압하는 자들을 두려워합니다. 우리는 오늘날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무슨 이유에서건 두려워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 4장 18절에 보니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 두려움은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은 데 대한 형벌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의 마음속에는 두려움이 자리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성도들의 마음속에 임하여 있으므로 두려움이 남아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이 세상은 점점 더 악해져 갈 것이고, 사람들은 점점 더 두려워하면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아 하나님의 자녀 된 성도들은 그 어떠한 악의 세력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성도들과 함께 하시면서 능력의 손으로 붙들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이 말씀을 오늘 우리 각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인 것을 알고 수시로 암송하고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그 도우심을 힘입어 언제나 두려움 없는 승리의 삶을 영위하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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