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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요 12: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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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요 12:20~26)

  

요즘 불교계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법정 스님의 죽음은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자고 깨면 우리가 담아내기 힘든 충격적인 사건들이 홍수처럼 쏟아지는 때에 그의 죽음은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남긴 무소유 정신때문입니다. 종교를 떠나서 이런 큰 정신적 스승을 우리 시대에 갖게 된 것에 대해 저 역시 목사지만, 솔직히 부럽기조차 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 신앙인들 가운데서도 이런 스승을 최근에 만나보지 못하고 있는지 안타깝고 아쉽기만 합니다. 

사실 그가 외쳤던 무소유란 실제적으로 불가능한 실천입니다. 그래서 법정 스님조차도 무소유는 소유를 거절함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소유하지 않는 것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성경은 무소유 이상으로 ‘청지기’(stewardship)라는 더 실용적이고 더 감동적인 정신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청지기가 무엇입니까? 청지기는 주인이 자기가 아닌 관리자라는 말이 아닙니까? 그는 주인의 뜻을 따라 주인이 맡긴 것을 일시적으로 관리하는 사람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주인은 우주 만물을 창조주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청지기는 자기 것이 없는 사람이지만 무소유의 사람이 아니라, 맡은 자로 주인의 뜻을 실현해야 할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문제는 자신이 청지기임을 잊고 자신을 주인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의욕이 아닌 야욕을 위해 맡겨진 것을 사용하는 타락이 우리를 추하고 슬프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주인의 임재 안에서 매 순간 순간을 살아야 합니다. 종교 개혁자 칼빈은 이런 삶을 “하나님 앞에서”(코람 데오)라고 표현하였습니다. 

불교는 본질적으로 궁극적으로 무신론입니다. 무신론자의 삶이 한생을 무소유의 삶의 정신으로 우리 사회에 이런 엄청난 영향을 남기고 있다면 유신론자인 하나님 앞에서 사는 우리들은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까? 자신의 양심 앞에서 살아온 사람이 양심의 수행을 통해 우리 사회에 이런 정도의 큰 깨움과 깨우침을 주고 있다면 하나님 앞에서 성령의 인도로 사는 사람들이 남기는 간증은 너무 초라하고 부끄럽지 않습니까? 이제 우리는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인생의 주인이 아니고 청지기라는 고백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 앞에서 삶을 사는 그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본 본문을 보십시오. 본문은 예수님이 자기의 생명을 씨앗에 비유한 이야기입니다. 이 본문 앞 1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많은 이적들 중에서 최고의 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공생애 3년 동안 예수님은 각종 병든 자 고치시고, 시각장애인을 눈 뜨게 해 주시고, 귀신을 쫓아 주시고, 풍랑 이는 바다를 잔잔케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하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나사로는 살린 사건은 죽은 지 무려 나흘이 지난 후에 일어난 기적입니다. 당시 예수님을 반대하는 자들은 죽은 자를 살려도 가사 상태에서 깨어났다는 둥 허튼 소리를 하면서 안 믿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죽은 지 4일이 지나서 시체에서 냄새가 진동하는 상황에서, 그것도 많은 조문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일어난 사건인데 어찌 부인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번 경우는 전혀 꼬투리를 잡을 수 없었습니다. 이 사건이 일어나자마자 그 소문이 급속도로 퍼져 나갔습니다. 마침 그 때가 유월절 명절이 가까운 시기라 예루살렘으로 가는 순례객의 인파가 그 소문을 듣고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도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을 하십니다. 당시 예루살렘에는 300만이 넘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호산나 이스라엘의 왕이여!!’ 하며 성이 떠날 정도의 환영 인파가 몰려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모습을 바라보던 바리새인들도 19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온 세상이 저를 좇는도다” 30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모습을 보고 “온 세상이 저를 좇는도다” 고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이때 헬라인 몇 명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빌립과 안드레를 통해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간청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예수님은 23절에 비로서 당신의 마음속에 품었던 이야기를 꺼내 놓으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아마도 그 백성들은 이렇게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동안 예수님이 3년 넘게 죽은 듯이 지내시지 않았는가? 조롱도 받고, 수모와 괄시를 얼마나 받으셨는가? 이제 드디어 영광을 받으시고 세상 앞에 능력을 보이시고 세상의 권세를 무릎 꿇게 하시는구나. 세상 앞에 보란 듯이 천군천사를 동원해서 로마 군인을 몰아내고 로마의 앞잡이 헤룻의 무릎을 꿇게 만드시는구나’하는 기대감에 모두가 가슴이 벅찼을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24,25절을 보면 이 백성들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씨앗 이야기”를 합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 자기의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생에 이르도록 그 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나를 섬기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너라.” 예수님은 갑자기 왜 이런 말씀을 했을까요? “너희들이 요구하는 영광과 하나님의 영광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영광과 하나님나라의 영광은 본질적인 의미에서 다르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영화로운 상태를 ‘영광’이라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인간은 영광을 추구하고 살아갑니다. 인간이 받을 수 있는 상중에서 가장 영예로운 상이 노벨상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노벨상을 수상한 사람은 영광스럽다고 합니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는 것을 영광스럽게 여깁니다. 적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개선장군은 모든 사람이 자기를 칭송하는 것에 대해 영광스럽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다시 말하면 남이 갖지 못한 것을 갖고, 남이 누리지 못한 것을 누리고, 남이 얻지 못한 승리를 얻을 때 사람들은 영광스럽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영광, 성도의 영광, 하늘의 영광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죽음을 통해서 이루는 것임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복음과 하나님의 일들은 세상의 방법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합니다. 항상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각오가 없이는 나를 따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 “너희가 나를 섬기려고 하면 나를 따라오라”는 이 말씀은 우리를 긴장감에 휩싸이게 하기에 충분한 말씀입니다. 죽음을 앞두고 하신 말씀이기도 하시지만, 결코 단순하지 않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운데는 이 말씀을 받을 수 있을만큼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기쁘게 ?지 못하고 부담스러워하는 믿음 약한자들도 상당수가 있으리라 봅니다. 일반적으로 현대 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으라는 말은 부담없이 받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 나라의 왕으로 믿고 고백하는 것은 아주 쉽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섬기기를 원합니까? 주님을 따라갈 각오가 되어있습니까?”라고 물으면 매우 부담스러워하며 괴로워합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예수를 부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목장 모임에도 열심히 참석합니다. 나름대로 크고 작은 일들에 봉사하느라 교회를 제집 드나들듯 학도 합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을 섬기고 따라야한다는 말에는 마음을 활짝 열어놓지 않습니다. 예수님께 나아와 쉼을 얻기를 바라면서도 예수님이 메라고 하시는 멍에는 별로 메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그를 따라가는 일에는 가능하면 뒷전에 서려고 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모순된 행동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어린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오실 때 무리가 무엇이라고 소리쳤습니까? 손을 들고 “호산나 왕이시여!”하며 환호하지 않았습니까? 여기서 이스라엘 왕이라고 하는 것은 팔레스타인에 있는 작은 영토에 있는 왕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우시는 하나님의 나라의 왕이라는 말이요, 전 우주를 다스리시는 영원하신 왕이라는 말입니다. 우리 중에 이 고백을 우리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들 예수님을 왕으로 믿고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왕이신 예수님을 따르고 섬겨야 하지 않습니까? 

입으로는 예수님을 왕으로 믿고, 고백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그 분을 섬기고 따르기를 부담스러워 하거나 달가워하지 않는다면, 과연 그의 백성이 될 자격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어느 성도님이 요즘 크리스천들이 마치 “햇빛에 끌려나온 지렁이 같이 힘을 못쓰고 있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 표현의 적나라함 때문에 웃었지만 그 후에도 계속하여 가슴에 남는 말이 되었습니다. 크리스천들이 친절하고 신사적인 것은 꼭 필요한 면모이지만 그렇다고 햇빛 앞에 노출된 지렁이처럼 어찌할 줄을 몰라하며 숨을 곳을 찾는 존재들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십자가에서 사단을 물리치고 죄의 값을 다 치러주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꿀릴 것이 없고 겁날 것이 없는 승전한 군대의 병사 같아야 하는 것이 정상인 것입니다. 그분이 마귀 권세와 사망의 지배를 다 멸하셨기 때문에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겁없이 살아야 하는 천국 시민들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크리스천들이 제일 잃어버린 것이 있다면 세상을 믿음으로 이겨내는 야성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시간, 여러분 가운데 신앙 경력이 오래 되어 입으로는 예수를 믿는다고 청산유수처럼 말하지만, “예수님을 섬기고 따르십시오”라는 말은 부담스러워 하는 분이 계시다면 저는 감히 이렇게 권하고 싶습니다. “안 믿는 것보다는 나을지 모르지만, 세상 끝 날까지 그런 믿음을 가지고 살 생각은 추호도 하지 마십시오” 
  
Ⅰ.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그 분을 따르기 위해서 먼저 해야 할 일은 다른 것이 없습니다. 종이 되어야합니다. 26절입니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여기서 섬긴다는 말은 헬라어로 ‘집사가 되다’는 뜻입니다. ‘디아코네오’ 집사는 시중을 드는 종을 가리킵니다. 종의 삶은 한마디로 자기를 포기하는 삶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은 나를 위해 너무 많은 것을 포기하신 분입니다. 하늘 영광을 포기했죠. 

이 땅에 오셔서도 제대로 된 방에서 태어나지도 못한 채 구유에 나셨고, 어릴 때부터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그것도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이 땅에서 얼마나 많은 고통을 안고 지내셔야 했습니까? 어찌 그뿐입니까? 공생애를 감당하실 때 한번은 제자들에게 이런 탄식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 나는 새도 깃들일 집이 있는데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입니다. 이 모든 것이 나 하나를 당신의 자녀로 삼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신 것이 아닙니까?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즉 죽도록 나를 사랑하신 예수님을 의지하고 그분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사는 것만큼 행복한 것이 또 있습니까? 사랑에 눈이 먼 연인들에게는 둘이 함께 지낼 수만 있다면 살집이 좀 작아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가난해도 ?찮습니다. 고생을 해도, 욕을 먹어도 견딜 수기 있습니다. 그저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같은 원리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아낌없이 내어주시기까지 나를 사랑하신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이 신앙생활이기 때문에 세상에 이것만큼 행복한 것이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그 행복이 마음속에 담겨 있어야합니다. 따라서 주님의 말씀은 다시 이렇게 표현 될 수 있습니다. “종이 되어 나를 섬기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나를 따르라” 이 말씀을 하신 주님은 우리의 생각과 계획보다 더 멋진 것을 갖고 계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러므로 주님을 따르는 이 일에 자신을 포기하는, 종으로의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Ⅱ. 그러면 중단 없이 계속해서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썩는 밀알이 되어야합니다. 24절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을 들어보세요.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고 죽지 아니하면 그대로 있느니라.” 무슨 말입니까? 죽어야 산다는 것입니다. 밀알의 죽음은 끝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밀알의 죽음은 전혀 새로운 시작입니다. 죽는 것은 한 알의 밀알이지만, 거두워 지는 것은 많은 열매입니다. 참된 열매를 거두기 원하는 자는, 먼저 자신이 죽어야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은 조금도 죽으려하지 않으면서도 참된 열매를 거둘려고 애를 씁니다. 자신을 속이고 있음에도 자기가 속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향해 콧방귀를 뀌고,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까? 그러므로 25절에 무엇이라 이야기합니까?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여기 이 무슨 의미인지 좀더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여기서 ‘생명’은 헬라어로 ‘프쉬케’인데, ‘목숨’이라는 일반적인 의미 이외에도 ‘자아’, ‘뜻’, ‘의지’, ‘소원’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미워하라”는 말은 우리의 뜻이나 소원을 부인하라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막8:34절에서는 이것을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철저히 복종하기 위해 자신의 소원이나 뜻은 다 부정하고 죽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려고 한다면 우리 자신의 모든 것을 부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곧 썩는 밀알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일찍부터 깨달은 사람들은 세상이 보기에 미친 것처럼 살아갑니다. 지금으로부터 180년 전에 미국 교회가 처음으로 파송했던 선교사가 아도니람 저드슨 선교사입니다. 지금도 미국뿐만 아니라 선교사들은 누구든 이 분의 삶을 닮기를 원할 정도로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사람의 가슴에 깊은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그는 탁월한 수재였기에 젊은 25세의 나이에 모교인 대학으로부터 교수 초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같은 해에 보스톤에 있는 어떤 큰 교회로부터 담임목사 청빙을 받았습니다. 두 가지가 다 탐나는 초빙이어서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할지 몰라 즐거운 비명을 지를 정도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두 곳을 다 정중하게 사절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선교사가 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혼한 지 보름만에 아내와 함께 인도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인도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선교사라는 이유 때문에 쫓겨났습니다. 그들은 다시 배를 타고 미얀마(버마)로 떠났습니다. 긴 항해 도중에 아내는 유산을 했고 너무 허약해진 나머지 랑군에 도착했을 때 들것에 실려 배에서 내려야 했습니다. 

그곳에서 저드슨 부부는 복음을 위해 열심히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어 두 번째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도 몇 달되지 않아 열병으로 죽였습니다. 그러나 저드슨은 낙심하지 않고 복음 사역에 최선을 다했는데 그만 감옥에 끌려 들어갔습니다. 그는 창문이 하나도 없는 캄캄하고 더러운 감방에서 일년 반 동안이나 고생을 했습니다. 그가 감옥에 있는 동안 그의 아내는 밖에서 얼마나 어려움을 많이 당했는지 모릅니다. 그 길로 아내는 건강을 해쳐 남편을 출감한 직후에 37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저드슨은 낙심하지 않고 복음을 위해서 일했는데 결국에는 자신도 병이 들어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는 요양을 하려고 고국으로 가는 배를 탔는데 그의 건강이 너무 악화되어 고국 땅을 밟아보기 전에 선상에서 숨지고 말았습니다. 당시는 냉동기술이 전무한 시대라 그의 시체를 바다에 장사 지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땅에서 저드슨의 삶은 이렇게 끝이 났습니다. 

여러분, 저드슨의 생을 한번 보세요. 그가 세상적으로 받은 복이 무엇입니까? 이국만리에서 아내와 자녀를 잃고 자신도 차디찬 바다에 수장되는 운명을 보면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차라리 대학교수로 갔더라면, 차라리 큰 교회 목회자가 되었다면 얼마나 행복한 생을 살았을까요? 그러나 그 부부는 진짜 축복을 놓치고 싶지 않아 세상 복을 포기해 버렸던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저드슨의 가정은 예수 때문에 망한 가정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진짜 복을 받은 가정이었습니다. 저드슨은 불교가 국교인 그 나라에서 최초로 성경을 만들어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는 데에 쓰임 받았습니다. 1850년 그는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죽어갔으나 100년 후 그 땅에는 20만 명이 넘는 많은 알곡의 결실을 보았습니다. 또 그의 부인은 오늘날 선교사 부인 중에서 가장 귀감이 되는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저드슨 부부가 하나님 나라에 가서 누릴 영광을 생각해 보세요. 그것은 세상의 어떤 고난과도 비교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롬8:18에 보면,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우리는 저드슨처럼 위대한 믿음의 영웅이 아닙니다. 평범한 다수에 속하는 신앙인 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 사랑 받고 선택받고 쓰임 받는 이 참된 축복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또한 우리는 세상 적인 축복도 있어야 이 험한 세파를 헤쳐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상에서 누리는 축복에 연연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분수대로 만족하며 살아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 사랑 받으면 됐지 그 이상 더 바랄 것이 무엇이나?" 하는 심정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얼마나 가졌느냐? 얼마냐 건강하냐? 얼마나 오래 사느냐? 하고 복을 따지는 것은 세상 사람들의 관점이라는 것을 우리가 명심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예수를 위해 죽도록 충성해야 하는 종입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썩는 밀알로 의생하신 것처럼 우리도 희생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많은 열매를 맺으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주부이든, 학생이든, 사회인이든, 직장인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우리는 이 세상을 구원하는 귀한 일에 쓰임 받는 종이 될 수 있습니다. 

한 번밖에 없는 우리 인생입니다. 이 세상의 망할 나라를 위해 헌신하겠습니까? 지금이라도 늦지 않습니다.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지금부터라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그 일을 시작합시다. 우리의 젊음과 지식, 재물, 시간, 이 모든 것을 세상을 구원하는 일을 위해 사용합시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이 축복하시는 복된 삶이 될 것입니다. 수많은 영혼들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 빛나는 삶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누구입니까? 가장 영광스러운 일에 부름받은 예수의 제자들입니다. 자신의 신분을 한시도 잊지 마십시오. 함부로 살다가 그만 둘 인생이 아닙니다. 예수를 따르는 제자로거 그 신분에 걸맞는 인생을 살다가 주 앞에 서야합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라고 하시는 칭찬을 꼭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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