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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께서는 다 아십니다 (마 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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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는 다 아십니다 (마 6:1~8) 

 
종교 개혁자[마르틴 루터]가 어느 날 아침에 혼자서 아침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빵과 몇 조각의 고기를 놓고 식사를 하는데 바로 앞에 개 한 마리가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루터의 손이 상에 가면 상을 보고, 루터의 손이 입으로 올라가면 입을 보고, 올려보고 내려 보고를 열심히 하는 겁니다. 하도 신기해서 루터가 고기 조각 하나를 찢어서 개에게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아주 좋아하며 고기조각을 받아먹습니다. 그리고 금방 또 루터를 쳐다봅니다. 그것을 보면서 루터가 무릎을 치면서 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이 개가 내가 먹는 이 고기조각 하나를 쳐다보는 것처럼 내가 하나님을 이렇게 쳐다 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 까!” 이 개는 이걸 쳐다보는 동안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겁니다. 

그런데 자기는 하나님 앞에 기도한다고 “하나님 아버지!” 불러놓고는 이 생각 저 생각, 자기생각에 빠져 있는 이것이 도대체 무슨 믿음이냐는 겁니다.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하면서 세상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어느 새 자기를 사랑하고, 하나님 앞에 진실하다고 하면서 이렇게 거짓이 많고, 위선이 많고, 허세가 많은지 모르겠다는 자기반성입니다. 

히11:6절에 신앙의 기본이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그렇습니다. 이 믿음이 중요합니다. 이 세상에는 이것도 중요하고, 저것도 중요하고 명예도 지식도 권력도 다 중요할는지 몰라도 우리가 오늘 세상을 떠나 하나님 앞에 갈 때는 오직 한 장의 티켓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믿음입니다. 오직 믿음 하나 가지고 하나님 앞에 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 믿음에 문제가 있습니다. 믿는다고 하면서 믿지 않을 때가 더 많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나를 믿을 때가 훨씬 많습니다. 어느 사이에 자기도 모르게 스스로 자기도 자기에게 속은 겁니다. 정말 나는 믿음이 있는 줄 알았는데 어느 순간 믿음이 아니었더란 말입니다. 

여러분, 인간 생활의 근본은 동기의 문제입니다. 중심이 문제라는 말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잘못된 생각이 뭐냐 하면 결과에 의해서 동기와 목적을 평가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시작이 잘못된 일인 줄 압니다. 그러면서도 계속합니다. 왜요? 이것이 잘 돼서 마지막 결과만 좋으면 모든 잘못도 정당화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히틀러]하면 독일의 독재자로 유명한 사람입니다만 이 사람이 독재자로 군림하기 전에 많은 군중들 앞에서 특별히 주장한 것, 네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가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심을 가지라는 것이요, 둘째는 역경을 이기는 인내심을 가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셋째로 중요한 것은 지도자에 대한 충성심이라고 했고, 마지막으로 법을 따르는 준법정신을 가지라고 주장할 때 모든 국민이 그를 지지했고 그 성원을 받아서 영웅이 됐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영웅이 된 후로 조국 독일은 물론이거니와 온 세계에 큰 피해를 입혔습니다. 아직도 그의 이름 앞에는 독재자라는 별명이 붙어서 다닙니다. 그런데 여러분, 왜 한 때의 영웅이 희대의 독재자가 되었습니까?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그의 생각 속에 믿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어떤 방법으로라도 게르만 민족을 온 세계에 높이 올려놓으면 된다고만 생각 했습니다. 그러면 모든 잘못된 일들은 다 정당화 될 것이라고 착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이 착각이 결국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손해를 입히고, 얼마나 많은 상처를 입혔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무엇을 하기 전에 동기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하고자 하는 일의 중심이 중요합니다. 특히 신앙생활에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이란 어떤 것이어야 합니까? 그 동기는 무엇이어야 합니까? 그 중심에 무엇이 있어야 도대체 귀한 믿음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말입니다. 이걸 생각해 봐야 됩니다.

그래서 말씀입니다만 오늘 본문에 가장 귀하고 가장 깨끗한 믿음을 요구하는 예수님의 말씀이 나옵니다. 그 믿음의 핵심이 뭐라고 합니까? 은밀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만이 아는 신앙의 은밀함을 말합니다. 하나님만 아시면 된다는 믿음입니다. 나의 이 기쁨을 하나님이 아시면 됩니다. 나의 이 행복도 하나님이 아시니 더욱 커지는 것입니다. 나의 이 보람도 하나님이 아시니 배가 되는 것입니다. 그거면 됐다는 마음입니다. 본문 1절과 5절을 보면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마라.”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2절의 “구제 할 때 나팔을 불지 마라.”는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마디로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은 불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가장 확실한 정체성입니다. 좋은 일이든, 혹은 나쁜 일이든지 하나님이 다 아십니다. 내 기쁨을 아시는 분이 내 슬픔인들 모르시겠습니까? 내 행복을 아시는 분이 내 억울함인들 모르시겠냐고요? 그러면 된 것 아닙니까? 무엇이 더 필요합니까? 

사람에게는 행동을 요구하는 몇 가지 의식이 있습니다. 그 첫째가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기본 욕구 가운데 자기실현의 욕구가 강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고 하고 사람들의 시선을 끌려고 하는 마음입니다. 누군가의 관심을 받으려고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본능입니다. 

또 평판이나 칭찬을 받으려는 의식이 있습니다. 자기행위를 통해서 좋은 말만 들으려는 마음입니다. 사실 사람이 살면서 어떻게 좋은 말만 듣고 살겠습니까? 어느 사회학자에 의하면 이것은 80대 20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듣는 말 중에 언제나 80은 좋은 말을 듣고 20은 나쁜 말을 듣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의 마음은 80의 좋은 말을 들은 것에 대한 고마움보다 20의 나쁜 말 듣는 것에 신경 쓰고 잠을 못 잔다고 합니다. 이게 뭐냐 하면 다른 사람의 평판이나 칭찬에 집착하는 데서 오는 인간의 불행입니다. 

세 번째는 무엇에든지 나에게 오는 유익을 의식합니다. 항상 가장 먼저 이익을 계산하는 마음입니다. 내가 이 일을 함으로 인해서 나에게 돌아 올 이익은 무엇인가! 이 만큼의 수고를 하고 나면 나에게는 무슨 보상이 주어질까를 생각하고 일을 시작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성경의 비유 중에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가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봅니다. 여리고로 가는 길에 강도를 만난 사람이 피투성이가 되어 누워있었습니다. 제사장이 보고 그냥 지나가고, 레위 사람이 보고 역시 그냥 지나갔습니다. 마지막에 그 잘난 체 하던 유대인들이 멸시하고 천대하던 사마리아 사람이 지나가다가 그 강도 만나 죽어가는 사람을 돌보았습니다. 

여러분, 왜 제사장과 레위사람은 그냥 지나쳤을까요? 적어도 나름의 이유가 두 가지 정도 있습니다. 그들의 심리가 궁금하지 않습니까? 먼저는 만약에 이 사건이 예루살렘 한 가운데서 일어난 일이라면 분명히 도와주었을 것입니다. 왜요? 많은 사람들이 보니까요. 하지만 이것이 보는 사람도 없고 지나가는 사람들도 거의 없는 산중에서 된 일이니까 모른척하고 지나가버린 것입니다. 이게 이유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의 이유는 자기에게 돌아 올 불이익을 생각했습니다. 다 죽어가는 사람을 만지다가 하필 그 순간 정말 죽기라도 하면 꼼짝없이 시체를 만진 게 됩니다. 유대 법에 시체를 만지면 일주일 동안 성전에 못 들어갑니다. 그러면 제사장의 직무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자기에게 돌아올 불이익을 생각한 나머지 도와주면 충분히 살아날 수 있는 사람을 시체취급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한심한 일입니까? 제사보다 인애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이렇게 모르면서 유대인이라고 자부하고 있다니 가슴 아픈 일 아닙니까? 

자, 그러나 보세요. 사마리아 사람은 생각이 달랐습니다. 나에게 오는 이익이나 불이익을 먼저 생각한 것이 아니라 ‘저 사람을 내가 안 도와주면 죽는다.’는 생명을 먼저 생각한 겁니다. 중요한 건 이겁니다. 내가 어떻게 될까 보다 그 사람의 생명이 더 먼저입니다. 사랑이란 내 욕심을 채우는 것이 우선이 아니라 그 사람의 입장을 먼저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게 인간입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마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유 하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자기 욕망, 자기 명예욕, 자기 허영, 자기위선취향 적 성향, 이런 것들로부터 완전히 자유 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이라고 하는 이 교만으로부터 완전히 자유 할 때 그때가 가장 행복한 때입니다. 

무엇보다 오늘 본문에 말씀하시는 중요한 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 보신다는 사실입니다. 4절을 보면 은밀히 구제할 때에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했습니다. 그리고 6절입니다. 은밀히 기도할 때에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말씀이 8절에 나옵니다.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우리의 실수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 앞에 정보를 제공하려고 하는 기도를 드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르실까봐 알려 드리려고 하고, 어떤 때는 하나님의 고문관이 되려고 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이게 얼마나 불신앙입니까? 이런 것은 열심히 기도하는 것 같아도 불신앙입니다. 

정말 올바른 신앙은 매사에 “하나님이 보신다. 하나님이 아신다.”는 사실을 믿는 신앙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그 말로 충분히 위로가 되고, 어떤 상황에라도 그것으로 충분히 만족하는 신앙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의 깊은 뜻을 아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동기를 아십니다. 내 숨은 마음까지 다 아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이것을 아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이 사실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있어야 됩니다. 이것이 믿음의 현실입니다. 하나님이 채워주시고 하나님이 갚아 주십니다. 

깊이 생각해 보면 신앙인들에게 버려야 할 불신앙이 정말 많습니다. 오늘 본문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누구보다 잘 믿는다는 사람들이었지만은 그들의 믿음에는 결정적으로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빠진 믿음을 누가 올바른 믿음이라고 하겠습니까? 동기가 문제요, 중심이 문제입니다. 그들은 자기 의를 믿었고, 결정적으로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다가 씻을 수 없는 죄인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참 믿음, 참 자유, 참 행복 그것은 은밀한 가운데, 그리고 비밀한 가운데 깨끗한 하나님께 향한 믿음을 가지고 나아갈 때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또 지혜도 있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여러분의 것이기를 바라고 오늘 이 믿음 앞에 육신의 연약한 질병으로 인하여 기도하는 분들의 건강이 회복되시기를 빕니다. 말할 수 없는 고민과 어려움으로 갈등하는 여러분들의 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어떤 선행이든, 어떤 의든, 어떤 기도든 하나님이 갚으신다는 것을 잠시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늘에 쌓아 두는 이 모든 것은 반드시 하나님이 갚으십니다. 다만 은밀한 중에 하는 것들이어야 합니다. 곧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어야한다는 사실입니다. 누가 몰라줄까 노심초사할 것 없습니다. 불안해 할 것도 없습니다. 비밀스럽게 은근히 한 일도 하나님이 은근히 갚아 주십니다. 아니 그런 일일수록 더 기뻐하시며 더 큰 것으로 갚아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보상하시는 방법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꼭 기억하시고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내 믿음을 하나님이 보시고 인정하셔서 기뻐하시는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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