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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어지고 수가 더하니라 (행 15:36 ~ 행 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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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어지고 수가 더하니라 (행 15:36 ~ 행 16:5)
 

지난 주일에는 안디옥교회에 일어난 다툼과 변론으로 인하여 바나바와 바울 그리고 안디옥교회가 어떻게 움직였으며, 또한 예루살렘교회는 이 일에 대하여 어떻게 결정을 하였는지 말씀을 드렸습니다. 교회는 모든 것을 다 좋다는 의미로 사랑하는 공동체는 아닙니다. 죄를 범하여도 모른척, 잘못을 행함에 있어서도 관계가 없는 것처럼 행동해서는 안되고, 교회에 다른 가르침이 들어왔을 때는 생명을 다하여 싸워야 되며 그 가르침을 이겨내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가 용납해서는 안될 문제들이 있고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지만 교회가 여러 유익을 따라 정해야 되는 일들도 있습니다. 반드시 지켜야 할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교회가 오랜 시간에 걸쳐 예배예전을 갱신해 왔습니다. 예배를 구원받은 자들의 축제요 잔치라고 할 때, 예배의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는 어찌 보면 술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술이 없이 잔치와 축제를 즐긴다는 것은 상상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의 기독교에서는 술이 금기시되어 왔습니다. 교회에 나오려면 반드시 술을 끊고 와야 한다는 생각이 아직도 지배적입니다. 이러한 기독교의 금기사항은 실제 성경의 가르침 때문이 아니라 우리 나라의 선교상황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이러한 법들은 한 번 정해지면 마음에 이것을 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정할 때 거리낌이 있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찬을 바르게 시행하게 되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애찬이나 성도님들 가정에 가서 함께 술을 대할 때도 마음 속으로는 무언가 거리낌이 들게 됩니다. 이런 경우와 같이 교회가 반드시 지켜야 할 것과 지키지 않아도 되는 것들에 대하여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또 하나 예를 들면 추도예배같은 경우입니다. 돌아가신 고인을 기리는 것을 반대하지 않습니다. 어른의 숭고한 뜻과 가르침을 기억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예배라는 형식을 가질 때는 극력으로 반대합니다. 이미 경배의 대상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그런 경우는 목숨을 걸고 반대합니다. 자손들이 모여서 돌아가신 고인의 뜻을 기리는 것은 좋습니다만, 이제 고인을 위하여 예배한다고 했을 때는 교회가 안된다고 규정하는 것입니다.

또 이번에 동계 올림픽을 보면 메달을 수상하는 선수들이 시상대에 올라서고 금, 은, 동 메달 수상자들이 메달을 받습니다. 그런 후에 그 메달을 받는 선수들의 국기가 게양되고 금메달을 받은 선수의 국가가 경기장 안에 울려 퍼집니다. 그 때에 한국 선수들은 국기에 대하여 경례하는 자세를 꼭 취합니다. 그런데 다른 나라 선수들은 국기 게양대 쪽만 바라만 볼 뿐 국기에 대하여 어떤 경배자세를 취하지 않습니다. 우리 나라는 박정희 정권이 강조하며 국민 의식 속에 심어 놓았던 ‘국기에 대한 맹세’가 있어서인지 모르지만, 축구선수나 야구선수나 누구든지 국기에 대한 경배자세를 표하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나라 선수들은 어떤 대륙에 속하든지 그런 경배의 자세를 취하지 않습니다. 우리 나라에 대한 애국심을 가지는 일에 대하여 반대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국기에 대한 경배를 나타낼 때는 교회가 반대해야 하고 그리스도인은 경배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지난 주일 설교본문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교회 성도들 간에 작고 사소한 문제로 인하여 쉽게 갈라서는 일이 생겨납니다. 만약 교회의 진리에 대한 문제라고 하면 크든지 작든지 그건 교회가 반드시 갈라서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그 일이 개인간에 일어난 작고 사소한 일이라면 교회는 갈라서지 말아야 합니다.

부부가 함께 살 때도 이혼해야 할 정당한 사유가 있을 때에 갈라서는 것이지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문제로 인하여 부부가 쉽게 이혼해서는 안됩니다. 작고 사소한 문제들은 상호간에 서로 살아가면서 덮을 것은 덮고, 고칠 것은 고쳐나가야 할 일이지 이혼까지 이르게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작은 문제로 갈라서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인지 알아야 합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작고 사소한 감정이나 문제로 교회가 서로 멀리하는 경우가 있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서로의 허물을 덮고 용납하며 용서하는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분명 이단의 가르침이나 성령을 훼방하는 일에 대하여는 교회가 단호한 결정을 내려야 마땅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서로 인내하며 믿음의 결실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법적으로 분쟁이 일어날 때는 정당한 교회법 질서를 따라 해결해 나가야 합니다. 개인의 감정과 경험을 앞세워서는 안되고 교회가 회를 통해 바르게 결정한 것을 따라가야 합니다. 아무리 개인의 체험이 옳다고 하더라도 그 모든 것은 교회의 결정을 순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나바와 바울이 선교여행을 통해서 그들에게 함께 하신 표적과 기사, 그리고 이방인들이 구원에 참여하는 일을 모두 보고 들었고 경험하였습니다. 그것이 확실하고 분명하였어도 바나바와 바울은 안디옥교회의 분쟁에 대하여 자기 경험으로만 결정하거나 밀어붙이지 않았습니다. 안디옥교회는 이런 문제를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과 장로들과 함께 의논하려고 사람들을 파송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도회의의 결정을 듣고 순복했습니다. 이러하므로 안디옥교회와 예루살렘교회가 서로 하나로 연합하였습니다. 이런 경우처럼 개인의 경험이나 감정을 앞세우지 말고 늘 교회의 결정이 무엇인지 듣고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질서를 따라 순종하는 것이 바르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헌법정치에도 보면 교회의 질서를 지키지 않는 자가 불의한 자라고 했습니다. 이런 문제가 생겼을 때 신중하게 문제를 처리하도록 교회는 당회와 노회 총회를 통해 해결하는 정치적인 제도를 두고 있습니다.

오늘 사도행전 본문은 여러분이 읽으셔서 아시는 바와 같이 일전에 전도하였던 교회를 다시 돌아보는 일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교회가 굳게 서가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전도하며 세운 각 성의 교회를 돌아보아 그 교회들을 굳게 하려고 했습니다. 15:41절과 16:5절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녀가며 교회들을 굳게 하니라.”,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어지고 수가 날마다 더하니라.” 

그랬을 때 우리는 보통 사도 바울의 전도여행을 1차, 2차, 3차로 이야기합니다. 그렇게 보면 오늘 본문은 2차 전도여행의 시작이라고 봅니다. 이렇게 구분하는 것은 안디옥교회에서 시작하였다가 다시 안디옥교회로 돌아오는 것으로 전도여행을 나누는 것입니다. 2차 전도여행의 끝부분도 한 번 보십시다. 

18:22-23절입니다. “가이사랴에서 상륙하여 올라가 교회의 안부를 물은 후에 안디옥으로 내려가서 얼마 있다가 떠나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을 차례로 다니며 모든 제자를 굳게 하니라.” 그러니까 안디옥교회로 되돌아온 22절이 2차 전도여행의 끝부분이고, 다시 제자들을 굳게 하려고 얼마 동안 안디옥교회에 있다가 떠나는 시점을 3차 전도여행의 시작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복음을 전파하고 그 후에 교회를 굳게 하기 위해 돌아보는 일까지를 전도여행의 한 단위로 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안디옥교회를 시발점으로 다시 돌아오는 시점까지 보는 것도 좋지만, 각 전도여행의 마무리는 각 성에 세운 교회들을 굳게 하기 위하여 돌아보는 것이 되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점을 가지고 서로 목숨을 걸고 어느 것이 전도여행 1차가 맞느냐고 싸울 필요는 없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교회의 아주 중요한 문제도 아니며 사도행전 해석에 있어서 그리 큰 문제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는 단순히 시간적으로 원점으로 회귀한 것으로 보기 보다는 복음 전파를 하고 돌아보는 것까지 한 단위로 하는 것이 더 적당하다고 봅니다. 사도행전을 여러분이 보실 때 그냥 한 가지 의견에만 매이지 말고 제가 보는 관점이 그러하니까 참조해서 여러분이 유익하다고 생각하시는 관점을 정하시면 됨니다.

그러면 제가 그렇게 보는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습니다. 사도행전 16:6절에 보시면 성령께서 아시아에서 복음전하는 일을 허락지 아니하시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즉 성령께서 이제 저 유럽쪽, 그러니까 마게도냐 지방으로 복음 전하는 일을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성령이 명령하시는 내용은 전도여행 1차를 시작하는 시점에서도 나타납니다. 13:2절입니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바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그러니까 성령께서 주체적으로 움직이시고 명령하심으로 다음 사역이 결정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은 사도행전의 주제구절인 1:8절에서도 볼 수가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여기서 ‘성령이 임하신다’는 것과 ‘권능을 받는다’라는 표현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의 모습과 같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와 병을 고치는 권능을 주어서 제자들을 보내셨습니다. 

마가복음 6:7-8절입니다.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시고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주머니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이처럼 예수님이 나타내신 권세를 제자들도 가는 곳마다 행할 수 있도록 권세를 주셔서 보내셨습니다.

이런 것은 사실 구약에서도 나타납니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처소인 성소를 완공하면 여호와께서 충만한 영광으로 그 곳에 임하십니다. 이렇게 이스라엘 진 중에 세워진 성소에 임하시면 이제 성소의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시게 됩니다. 구름기둥이 떠오르면 이스라엘은 진행을 하게 되고, 머무르면 이스라엘 백성도 그 곳에 장막을 치고 몇 년이라도 머물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불기둥과 구름기둥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진행해 나가야 할 지, 아니면 머물러야 할 지 결정이 되고 이스라엘 백성은 그것을 보고 따랐던 것입니다.

항상 어느 왕조에서 보더라도 왕이나 황제가 명령을 하게 되면 신하는 그 명령을 따라 자기가 부임해야 할 곳이 정해지는 것입니다. 어느 지방의 관리로 임명되어 파송되는 경우도 이와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본문이 1차 전도여행의 마무리라고 봅니다. 이 교회의 말씀의 직무자로 제가 세움을 입었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어쩔 수 없이 저에게 매여 따라오실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본문 말씀을 1차 전도여행의 결론으로 보고자 합니다.

그랬을 때 민수기 33장을 보시기 바랍니다. 1-2절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와 아론의 관할하에 그 항오대로 애국 땅에서 나오던 때의 노정이 이러하니라 모세가 여호와의 명대로 그 노정을 따라 그 진행한 것을 기록하였으니 그 진행한대로 그 노정은 이러하니라.”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여기까지 오게 된 노정을 다 기록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여기까지 지나 온 길을 어떻게 왔습니까? ‘모세가 여호와의 명대로 그 노정을 따라 진행한 것을 기록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어디에서 진을 쳤으며 어디에서 진행하였는지 말합니다. 

이 노정을 기록한 것을 보면 사도행전에서도 바울이 어디를 전도하였는지 그 노정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민수기의 기록된 노정은 그 정복한 지역을 다시 돌아보거나 굳게 하는 일은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가나안 땅까지 들어가게 되는 일직선의 노정을 노정을 기록하였지 다시 되돌아보는 일이 없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예루살렘을 지나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고 하며 다시 만날 수 없게 된 교회의 장로들을 밀레도에 모아 놓고 그가 떠난 뒤의 교회들을 어떻게 다시 돌아볼 것인지 장로들에게 당부를 합니다.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목회할 때 행하였던 자세와 가르침을 지켜서 장로들도 그렇게 돌아보아 달라고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교회들에 잘못된 가르침이 들어오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은 이방인 족속에 대한 정복 자체로 끝나지만 신약은 그들을 하나님의 나라와 백성으로 돌아보는 일까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도 바로 구약과 신약의 차이입니다. 구약의 하나님 나라는 가나안 땅에 한정되어 있고 그 백성은 유대인입니다. 그러나 이제 신약의 하나님 나라는 온 세상이며 그 백성으로 이방인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차이점 때문에 더욱 교회를 굳게 하기 위하여 돌아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한 가지 풀지 못할 문제가 있습니다. 더군다나 지난 주 설교제목이 무엇이었습니까? ‘교회의 일치’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바로 그 말씀 다음에 바나바와 바울 사이에 심한 다툼이 나오게 되니 난감하게 되었습니다. 여기 ‘심히 다투어’라는 말은 실제 격렬하게 다투었다는 뜻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바나바와 바울 사이의 관계를 이미 알고 계실 터인데, 이렇게 격렬하게 싸우고 결국 갈라서게 된 것입니다.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심히 당혹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런데도 사도행전은 이 다툼에 대하여 더 이상 언급하지 않고, 다른 성경에서도 누가 옳았는가를 말하지 않습니다. 아무 말이 없습니다. 그냥 일회적인 사건으로 지나쳐 버립니다. 그러니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매우 알기 어렵습니다. 

그럼 우선 왜 이 두 사람이 다툼을 벌이게 되었는가를 알아보십시다. 37-38절입니다.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즉 마가를 데리고 가야 하느냐, 데리고 가지 말아야 하느냐로 다툼이 생겨났습니다. 바울 쪽의 주장은 이렇습니다. 지난 번 선교하는 도중에 밤빌리아에서 마가가 함께 일하러 가지 않고 돌아가 버렸기 때문에 이번 교회를 돌아보는 일에 함께 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마치 무엇과 같습니까? 싸우러 나선 전쟁터에서 군사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 버린 것과 같습니다. 이런 자를 교회를 굳게 하기 위하여 돌아보는 일에 적당하지 않다고 한 것입니다.

상대적으로 바나바가 왜 마가를 데리고 가야 하는지 그 주장은 사도행전에 기록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의 이런 다툼에 대하여 두 사람을 바라보는 생각들이 존재합니다. 바울은 바나바에 비하여 엄격한 지도자이고, 바나바는 포용력이 있는 지도자라로 보는 것입니다. 마가의 실수를 용납하고 다시 한 번 잘해 보라고 격려하는 자가 바나바이고, 그런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자가 바울이라고 봅니다.

이 본문에 대한 어떤 목사님의 설교 제목을 보니까 ‘신앙과 기질’이라고 붙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기질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를 설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예수를 믿어 변화받았다고 해서 그 기질도 다 바뀌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보면 어떤 사람은 결벽증이 있고 또 다른 사람은 너저분하게 늘어놓고 아무런 생각없이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시간을 정확하게 맞추고 빨리빨리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다른 사람은 만만디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차이가 각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인이라고 해서 이런 기질이 완전히 바뀌는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은 이런 차이를 교회 안에서 어떻게 극복해 나갈 것인가를 테마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본문은 그런 신앙인의 기질 문제를 다루고자 함이 없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이 본문은 교회를 굳게 하는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각 성에 세워진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과 기질 문제에 대하여 다음에도 전혀 언급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더욱 제 의견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를 굳게 하는데 있어 누가 적당한가를 놓고 두 사람이 다투었다고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하튼 이 두 사람은 서로 갈라서게 되었고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를 타고 구브로 섬으로 갔습니다. 그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하게 우리가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 다툼 후에 기록하는 것을 보면 어느 정도 교회가 바울에게 타당성을 주고 있지 않았나 생각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40절에 이렇게 말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았다’고 하는 말은 바나바와 바울이 안디옥교회로부터 파송받을 때에 했던 말과 같습니다. 

14:26절입니다. “거기서 배 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이곳은 두 사도의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 그러니까 이 말씀만 보자면 교회로부터 공적으로 지지를 받은 자는 바울입니다. 안디옥교회가 공적으로 바울과 실라를 파송했다는 말입니다. 더구나 이제 바나바는 더 이상 사도행전에 나오지 않습니다. 전체적으로 그 포커스가 바울에게 옮겨가게 됩니다. 

앞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 두 사람을 엄격한 지도자, 포용력이 있는 지도자로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도 보면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야구 감독같은 경우에 SK의 김성근감독은 엄격한 자로 보고, 전 한화의 감독이었고 국가대표팀을 이끌었던 김인식감독은 덕장이라고 사람들이 봅니다. 그럼 누가 더 절대적이고 옳은 지도자입니까? 이런 질문은 어리석은 질문이지요?! 답이 없습니다.

요즘 우리 주변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신문이나 매스컴에서도 보도가 되고 있는데 불교의 법정스님에 관한 기사입니다. 그가 폐암을 앓다가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주장하고 전했던 무소유의 가르침이 세상 사람 가운데 큰 이슈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지은 책도 자기가 죽으면 절판하라고 했고, 죽어서도 관을 만들지도 않게 했고, 불교의 큰 자랑거리인 다비식도 행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정말 그는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가는 세상 이치를 너무 잘 알고, 빈 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가는 인생에 대하여 잘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에 관한 신문기사를 읽다가 놀라고 화가 난 부분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성경을 읽고 ‘아멘!’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주교의 이해인 수녀, 시인으로 유명하죠, 이 수녀가 이 사람에게 편지를 했다는 내용도 기사에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런 점에 대하여 속을 수가 있습니다. 그가 빈 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가게 되는 자연적인 이치에 대하여 가르침은 맞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 사람의 인생의 마지막 마무리는 이런 무소유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무소유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는 무소유를 말하고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이 사람의 죽음과 예수님의 죽음을 보면 정말 큰 차이가 납니다. 고요히 3만 명의 사람이 그의 마지막을 지켜보는 것과 많은 사람이 업신여기며 침을 뱉으며 십자가에 처참하게 죽는 예수님의 모습은 완전히 다릅니다. 그가 성경 말씀에 ‘아멘’했다는 것은 아마도 성경의 가르침이 옳다고 여겨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오른 뺨을 맞으면 왼 뺨도 돌려대라고 하는 말씀에 대하여 옳다고 아멘을 하였을 겁니다. 그러나 성경의 아멘은 그런 뜻의 아멘이 아닙니다.

제자인 도마가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이 아멘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를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구원하신 세상의 구주이심을 영접하고 그의 말씀에 ‘아멘’한다는 뜻입니다. 그저 사람을 좋은 사람되게 하고 훌륭하고 덕이 있는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좋은 말에 ‘아멘’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어느 집안에 공부 잘하고 밖에 나가서도 예의 바르게 행동하는 자녀가 있다고 합시다. 학교에서나 밖에서나 칭찬을 받는 아이입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아버지를 모른다고 하면 그 아이를 어디에 갖다 쓰겠습니까? 부모를 모르고, 부모를 인정하지 않고 아무리 공부를 잘하고 밖에서 친절하고 상냥한 아이라고 해도 그런 아이가 온전한 자녀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까? 설령 공부를 못하고 밖에서 친절하지 않는 아이라도 차라리 부모를 제대로 알고 섬길 수 있는 아이가 훨씬 더 낫지 않겠습니까? 

성경의 가르침은 그 목표가 착한 아이되라, 돈 잘 벌어라에 있지 않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이 진정 너의 하나님이 되시더냐?’고 묻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는 그의 백성이 되는 언약이 그 주제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하나님을 자기의 왕으로 영접하지 않은 자가 어찌 그의 말씀에 ‘아멘’한다는 것입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버지와 아들로 설정되어지지 않았는데 어찌 그가 성경을 읽고 감히 아멘을 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저는 이런 말에 분노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런 일에 화가 나고 분노한다고 해서 여러분이 저를 보고 다혈질이라고 해도 저는 상관이 없습니다. 제 말 아시겠습니까?

이처럼 사도행전은 두 사람의 다툼에 대하여 이런 저런 판단을 내놓고 있지 않습니다. 즉 관심이 없어요. 누가, 어느 쪽이 좋은 사람 되느냐에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주님이 세우신 교회를 다시 돌아보자는 뜻이었고 그 일에 함께 하는 제자들을 선택하는 문제였습니다. 그런 점에 대하여 우리가 많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16:1-5절에는 바울이 제자 디모데를 선택하는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디모데는 모친은 유대인이었고 부친은 헬라인이었습니다. 바울이 디모데를 데리고 떠나고자 하면서 그에게 할례를 받게 했습니다. 그 이유가 16:3절에 있습니다.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쌔 그 지경에 있는 유대인을 인하여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부친은 헬라인인줄 다 앎이러라.” 바울이 디모데를 할례받게 한 이유가 바로 유대인들 때문이었습니다. 그 지경에 있는 유대인들이 디모데의 출신 배경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아주 상스러운 소리에 가깝게 극한 분노를 나타내는 말을 합니다. 

갈라디아서 1:8-9절입니다.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거듭 반복해서 ‘저주를 받을찌어다’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말로 하면 이 말은 ‘삼대가 다 망할찌어다’하는 말과 같습니다. 이런 극심한 분노를 나타내는 배경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바로 할례에 있습니다. 

5:2절입니다.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이상하다고 하는 점은 바로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극한 분노를 나타내는 바울이 어찌하여 디모데를 할례를 받게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갈라디아서에서는 이방인이 다시 할례를 받아 옛 신분 곧 종으로 돌아가는 문제에 대하여 바울이 분노를 나타냅니다. 그러나 디모데는 유대인에 속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할례를 받게 합니다. 사실 할례를 받는 거나 받지 않는 거나 구원에는 별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이방인이 할례를 받으려 하면 그는 다시 유대인으로 돌아가려 하는 것이기 때문에 바울은 전적으로 반대합니다. 

이렇게 할례를 받게 함은 바울은 무엇을 생각하기 때문입니까? 교회를 굳게 하는 일에 디모데를 제자로 함께 하기 위해서입니다. 교회를 돌아보는 일에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마가를 데리고 가지 않겠다거나 디모데를 할례받게 하는 일이 서로 그 목적한 바를 위한 행동에 있어서는 일치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가를 선택하지 않은 이유는 교회를 굳게 하는 일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보았고, 디모데를 할례받게 하는 것은 교회를 굳게 하는 일에 도움이 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의 생각은 일관성이 있다는 말입니다.

디모데를 데리고 교회를 굳게 하는 일에 제자를 삼았다 하면, 바울이 이제 돌아보는 교회 가운데 유대인들로부터 아예 외면을 당할 것입니다. 바울로부터 한 마디도 들으려 하지 않고 내쫓거나 보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혹 교회를 굳게 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방해가 될까봐 바울은 디모데를 할례받게 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 대하여 어떻게 움직일 것인지 알려주는 바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본문 16:4-5절입니다. “여러 성으로 다녀갈 때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의 작정한 규례를 저희에게 주어 지키게 하니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어지고 수가 날마다 더하니라.” 교회가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을 전하고 그로 말미암아 모든 교회가 일치를 이룹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를 이루었던 것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심히 다투고 갈라섰던 이유는 교회를 굳게 하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실제로 바울과 마가는 이런 일이 있다고 해서 영원히 갈라섰다고 생각하면 큰 오해입니다. 바울이 옥에 갇혔을 때 마가를 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디모데후서 4:11절입니다.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이렇게 바울은 디모데가 올 때 마가를 데리고 오라 하는데 그가 바울의 일에 유익하다고 합니다. 

교회는 여러 사람이 함께 하는 곳입니다. 야만인이나 지혜있는 자나,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모두 함께 하는 곳입니다. 성격도 다르고 태어난 배경도 다른 자들이 함께 합니다. 그럴 때 교회가 하나 되는 것은 그저 성격 좋은 착한 사람으로 하나가 되자는 말이 아닙니다. 주의 일에 협력하고 하늘과 땅을 상속하는 일에 하나가 되자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사 우리를 하나되게 하심은 우리에게 성령을 부으셔서 주의 일에, 주님의 나라 일에 하나가 되어 협력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남전도회나 여전도회에서 매월 월례회를 열어서 회의를 합니다. 왜 이런 회의를 하는 겁니까? 서로 모두 주의 일을 위하여 모이고 힘을 쓰자는 것으로 회의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회의에서 서로 다른 의견이 나오고 반대 의견이 나왔다고 해서 서로 척지거나 갈라설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거기서 내가 똑똑한 사람이어서 내 의견이 잘 받아들여지고, 나는 그렇지 못해서 의견이 받지 아니했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 저 사람은 내 의견에 줄줄이 반대만 하는가 하고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 회의를 통해서 여러분이 무시되거나 추앙을 받거나 하는 의도를 애시당초 갖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서로 의견이 안맞은 이후로 서로 발걸음이 뜸해지고 이야기도 나누지 못할 만큼 되어진다면 이걸 무엇으로 설명해야 하겠냐는 말입니다. 내 편을 만들고 내 적수를 만들려고 그 회의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내가 감독이 되어서 자기 팀의 선수를 택한다고 할 때 많은 선수 중에서 자기에게 맞는 사람을 선택하는 권리는 오직 감독에게 있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선수를 뽑아 훈련시켜 경기에 뛰게 하는 것입니다. 그 선택에 대하여 이것이 옳다, 저것이 옳다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확실한 절대적인 선택이 존재하는 것도 아닙니다. 

저는 도리어 바나바와 바울처럼 주님 나라의 일에 격렬하게 다투는 일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주님을 위한 열심히 크면 그리하겠습니까? 나라에서도 여당과 야당이 나뉘어 싸울 때도 어디까지나 국가를 위한 일이지 개인의 자존심이나 명예를 위해서 싸워서야 되겠습니까?

교회의 각 기관을 위해 일할 일꾼을 뽑는 일에 있어서도 마치 무슨 큰 욕심이 없는 사람인 것처럼 겸양을 나타내서 그 일꾼되는 일을 사양한다면 그게 무슨 덕이 되겠습니까? 오히려 적극적으로 선거운동을 해서 자기를 뽑아달라고 하는 것이 더 좋지 않겠습니까? 디모데전서 3장에 말씀하듯이 ‘감독이 되려 하는 선한 일을 사모한다’고 하는 것처럼 주의 일에 더 책임을 지고 더 많은 짐을 질 것을 각오하는 그런 사람이 교회에 더 덕을 끼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서울대를 가는 일에는 거의 모든 사람이 열심을 내고 모든 방법을 다 강구하는데 주님의 일을 하는 신학교에 가는 일에는 겸양하는 자세를 보입니다. 이게 저는 도리어 교만이라고 봅니다. 이것이 맞고 이것이 틀린가 하는 ○, ×의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7장에 말하는 것처럼 ‘네가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입었는가?’, 아니면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입었는가?’라고 하면서 부르심을 받은 위치에서 하나님을 순종하라고 말씀합니다. 네가 종의 신분에서 자유인이 되려고 하는 일을 위해서 전력을 투구하지 말아라. 기회가 있다면 자유인이 되는 것이 좋다. 하지만 그것이 일차적인 목표가 되어서는 안된다. 종이 좋으냐, 자유인이 좋으냐 이 얘기가 아니라 어디에 어떤 위치에 있어서나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 사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직업을 선택함에 있어서도 무엇이 좋으냐고 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어느 직업이 하나님을 섬기기에 좋은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저 돈을 많이 받는 직업이어야 되겠다거나, 명예를 얻기에 좋은 직업이어야 하겠다거나 해서는 안됩니다. 오직 주의 일을 위하여 방해가 되지 않는 일을 선택하셔야 합니다. 본인 자신이 분명 생각하고 선택해야 합니다. 

그랬을 때 교회가 복음전파의 전초기지로써 이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교회를 돌아보고 굳게 하는 일을 열심히 감당해야 합니다. 이미 해온 일들을 돌아보고 그것을 굳게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이 참된 마무리이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성경학교를 마치면 강평회를 하지 않습니까? 강평회를 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서로 잘못한 일을 따지자는 것이 아닙니다. 주께 감사한 일이 무엇인가 생각하고 다음에 이런 성경학교를 할 때 더욱 굳게 잘 봉사하는 것이 무엇인지 돌아보는 것입니다. 
 
어느 나라이든 군대의 총사령관이라면 자기 군대를 돌아보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습니다. 전쟁에서 이기는 군대로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 그와 같이 바나바와 바울은 그들이 전하여 세운 교회를 돌아보아 영적 전투에서 승리케 하려는 것입니다. 

교회의 성경모임의 각 조에서도 그리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분량을 마쳤으니, 오늘 진도 나갔으니 더 이상 볼 필요가 없는 것처럼 해서는 안됩니다. 다음에 서로 다른 조가 되었더라도 서로 돌아보고 굳게 하는 일을 게을리해서는 우리가 승리할 수가 없습니다. 

이 복음을 알고, 이 복음을 깨달았으면 서로 돌아보가 굳게 세우는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부활의 증거를 제자들에게 보이신 것으로 만족하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을 거듭거듭 찾아오셨습니다. 디베랴 바닷가에 고기를 잡으러 간 제자들을 돌아보셨습니다. 그들에게 사랑의 고백을 받으신 후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승천하신 후에도 제자들을 그대로 세상에 방치하신 분이 아닙니다. 아버지께로부터 성령을 받아 교회에 성령을 부으셔서 언제나 함께 하셨습니다. 이것이 교회를 굳게 세워 악한 권세로부터 노략질당하지 않은 일이 되었습니다. 이제 성도들을 찾아가십시오. 더 돌아보셔서 우리가 서로 함께 이 하늘의 전쟁에서 복음으로 승리하는 교회를 세워나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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