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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당신은 진정, 제자입니까? (요 13:3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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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진정, 제자입니까? (요 13:34~35)


아주 오래 전에 후안 까를로스 오르티즈 목사님의 저서 가운데 [제자입니까?]라는 책을 읽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책 저자의 서문 가운데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성령께서 나를 깨뜨리기 시작했다.  그 분의 첫 말씀은 이것이었다.  '너는 코카콜라 회사가 코카콜라를 파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리더스 다이제스트사가 잡지와 책자를 파는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다.  너는 학교에서 배운 모든 술수를 쓰고 있다.  도대체 네가 하는 일들 가운데 어디에서 나의 손길을 찾아보겠느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이 책을 잃고 난 후 저는 솔직히 많은 고민을 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제자입니까?"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제자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하여 건강한 대답을 드릴 수 없는 솔직한 제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점점 제자답지 못한 목회를 하는 것 같아서 고민스럽고 가슴 아파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음을 고백합니다.  더구나 교회를 개척하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갖게 되는 심각한 고민은 '과연 이것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목회인가?'하는 것입니다.  정말 어떻게 해야 주님의 손길을 찾을 수 있으며, 어떻게 해야 주님의 제자다운 목회인가를 요즘 들어서 부쩍 고민스럽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께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의 제자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모두가 그분의 제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그분을 주님으로 모신다는 말입니다.  이 말의 다른 표현은 그분의 노예로서 그분을 섬긴다는 뜻입니다.  또 다른 말로 표현하면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을 찬양한다는 뜻도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말로는 "주님을 믿는다.  사랑한다.  따른다.  맡긴다.  나는 그분의 종이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솔직히 우리의 삶의 행위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우리 자신이 더 잘 압니다.  나는 교회에서 섬기는 종의 삶이 아니라 어느 정도 인정을 받고 대접을 받아야 합니다.  나는 교회에서 특별한 자리에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관심을 받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와 내 가족은 더 많은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섭섭해합니다.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가리켜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라고 아주 스스럼없이 말합니다.
"나는 예수님의 제자라고…"

교회 역사를 보면, 초기 기독교는 세상으로부터 박해를 받던 처음 3세기 동안에는 모든 신자들이 언제나 믿음을 위해 죽음에 직면해야 한다는 상황 속에서 살아야만 했습니다.  그럴 때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그 믿음을 지키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몸을 던지며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313년에 콘스탄티누스 대제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고, 380년 데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해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세상으로부터 박해가 사라졌습니다.  그렇지만 그때부터 교회는 기득권 논쟁으로 분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교인들은 편안함과 안일함이 주는 세상 속에서의 삶으로 도덕적으로 타락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교회에 와서는 인정받으려고 했습니다.  교회 안에서 자신의 세력을 만들어가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파당을 만들고, 그 파당이 교회의 분열을 가져왔습니다.

이런 모순된 교회와 교인들의 모습은 그 당시에 자주 시장과 극장에서 연극으로 만들어져서 비난과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자신은 스스로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당당하게 말하지만, 그러나 그의 삶의 모습을 보면 결코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없는 사람들.  결코 거룩하지 않으면서도 거룩한 척하는 이중적인 사람들.  그들이 바로 로마 시대에 타락한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묻습니다.  당신은 진정, 예수님의 제자입니까?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 중에는 교인이 있고, 신자가 있고, 제자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교인으로서가 아니라, 신자로서가 아니라, 제자로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교인은 신자가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신자는 제자가 되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제자는 헬라어로  마데테스입니다.  이 말은 '배우다'라는 뜻에서 유래된 '배우는 사람', '지성적으로 따르고 모방하는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제자에게는 그가 따르려고 하는 선생님이 있어야 합니다.  선생님이 있을 때 제자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의 선생님은 누구이십니까?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요한복음 13장 14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기억하십시오.  그저 "이렇게 하라"는 것으로는 선생이 될 수가 없습니다.  "내가 이렇게 하였다.  그러니 너희도 이렇게 하라"는 것이 진정한 선생입니다.  주님은 이런 삶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는 우리들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이러한 주님의 말씀을 따라 행하는 자가 바로 주님의 제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제자인 우리는 마땅히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을 살아갈 때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마음입니다.  그 마음에 그리스도를 닮고자 하는 어떤 노력과 헌신이 없다면 우리는 결코 그를 가리켜서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성경에 보면, 이 마음의 중요성에 대해서 아주 많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고 그 중심의 마음을 보신다고 했습니다.
이사야 26장 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하고 평강하도록 지키시리니."
심지가 흔들리고 기울어지고 늘어진 초는 빛을 내지 못하고 연기만 냅니다.  연기만 나는 초는 메케한 냄새 때문에 사람들의 목과 눈만 아프게 합니다.  그러나 심지가 견고할 때 나도 살고 남에게도 아름다운 빛을 비춰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굳게 세워져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흔들리면 결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마음의 심지가 무너지면 결코 세상에 빛된 삶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바로 세우십시오.  마음이 바로 세워지고서야 다른 일들을 할 수가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마음이 무너지면 모든 것이 다 허물어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어떤 어려운 상황을 만나도 마음이 무너지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견고하게 만드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고난도 내게 주어진 분복이라고 했습니다.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진 고난 앞에서 결코 마음이 무너지지 말아야 합니다.

삶이 어려우면 꼭 두 가지가 생깁니다.  하나는 낙심입니다.  낙심은 자기에게 실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원망입니다.  원망은 남에게 실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를 원망하고, 아내와 남편을 원망합니다.  이웃과 동료를 원망하고, 교회와 성도들을 원망합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낙심과 원망은 불행으로 가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려움을 만날 때 더욱 하나님을 붙잡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내 마음이 무너질 때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무너진 내 마음을 다시 일으켜 세우시기를 바랍니다.  생명의 근원이 마음에 있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장 2절에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마음의 중요성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그런데 1절에 보면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그러니까 교인들에게 어떤 권면이나 위로를 하려고 해도 자신의 마음이 바로 서야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이 바로 서야 사랑을 할 수가 있습니다.  자신의 마음이 바로 서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마음이 하나가 되고서야 뜻을 합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 마음이 무너지고 하나가 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아무리 사람들에게 어떤 권면을 하려고 해도 그 권면이 통하지가 않습니다.  오히려 속으로 이렇게 빈정거릴 것입니다.  "너나 똑바로 해라."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의 마음이 하나가 될 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해야 무너진 내 마음이 바로 세워질 수가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장 5절에서 그 해답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우리의 마음이 바로 세워지고 그래서 하나가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교회가 든든히 세워져가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세상의 마음은 분열시키는 마음입니다.  세상의 마음은 교만해지려는 마음입니다.  세상의 마음은 자기 영광만을 추구하려는 마음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마음은 겸손한 마음입니다.  낮아진 마음입니다.  자기를 죽기까지 복종하는 마음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어지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을 품은 자를 가리켜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기억하십시오.  주님의 참된 제자는 그저 말로만 겸손하자고 외치는 사람이 아닙니다.  말로만 낮아져야 한다고 떠들어대는 사람을 가리켜 제자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가리켜서 주님께서는 외식하는 자요, 회칠한 무덤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제자는 그 마음에서부터 겸손해야 합니다.  진정한 제자는 그 마음에서부터 낮아져야 합니다.  물론 그 마음이 겸손하지 못한 사람도 그의 삶에서 겸손한 모습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마음이 낮아지지 못한 사람도 사람들 앞에 낮아진 모습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평상시에는 괜찮습니다.  그렇지만 문제가 생기고,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게 되면 달라집니다.  그때는 그 마음의 쓴뿌리가 드러납니다.  그래서 그 마음에 섭섭병이 자리를 잡기 시작합니다.  그때부터 그는 마음의 심지가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주변의 사람들을 힘들게 하고 영적 분위기를 무너뜨리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무늬만 제자이지, 그의 실제적인 삶에서는 결코 제자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마음에 그리스도를 품고 살아가는 사람은 다릅니다.  그런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무슨 일을 당해도 겸손과 낮아짐의 삶을 살아갑니다.  초가 자신의 몸을 태워가면서도 그 심지가 무너지지 않듯이 그 마음에 그리스도를 품고 살아가는 사람은 어려운 환경에 처할수록, 문제 앞에 설수록 더 굳게 마음의 심지를 세워서 세상에 빛을 비추려고 합니다.  그런 사람을 만나면 힘이 납니다.  그런 사람을 만나면 영적 분위기가 살아납니다.  그 한 사람 때문에 공동체 전체가 생명력이 넘치게 됩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당신은 진정 예수님의 제자입니까?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하셨던 말씀을 힘써 지키고 행하십니까?

주님은 지금도 우리들에게 높아지려면 낮아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상전이 되려면 먼저 종이 되어라고 하십니다.  대접을 받으려면 먼저 대접하라고 하십니다.  겉옷을 달라고 하면 속옷을 주라고 하십니다.  오리를 가자면 십리를 가라고 하십니다.  미워하지 말고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선을 베풀만한 힘이 있거든 아끼지 말고 실천하라고 하십니다.  거짓을 말하지 말고 참된 것을 말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는 이것을 말로만 끝난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스스로가 그 모든 것을 행동으로 실천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위대한 제자를 만들려면 위대한 지도자가 있어야 합니다.  뒤에서 채찍질하는 선생이 아니라 앞에서 스스로 십자가를 지고 가는 선생입니다.  세상에서는 이런 선생을 찾아보기가 너무나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런 선생이 계십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선생님이신 주님께서는 제자된 우리가 구체적으로 어떤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우리는 제자들이 가져야 할 삶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성경에서 찾아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일평생 믿음의 여정을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의 삶의 기준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가 걸어가야 할 세 가지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셨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의 말씀에 거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8장 3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여기에서 '거하면'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메이네테인데, 이 말의 기본 뜻은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그리고 말씀을 따라서 살기로 결심하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영원히 예수 그리스도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복종할 것도 함께 수반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에 거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과 예수는 결코 구분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 안에 거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직 말씀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성경을 읽고 말씀을 묵상하는 것은 참으로 귀합니다.  설교를 듣는 것은 최고의 은혜요 축복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내 안에 거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정 예수님의 제자는 이것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지 않고 설교를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리면서도 설교를 경청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교인일 수는 있어도 제자는 못됩니다.  제자는 예수님의 말씀에 거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저 단순히 예수님의 말씀에 거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 마음에 예수님의 말씀이 거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내 안에 거할 때 나는 변화가 됩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내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삶을 우리는 믿음의 삶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축복입니다.

가만히 보십시오.  신앙 생활을 하면서도 자아를 변화시키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에 나와서 직분을 받고 헌신하지만 한번씩 무너지고 넘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작은 실개천 바람이 불어와도 민들레 홀씨처럼 멀리 나가떨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그 마음 안에, 그가 말씀 안에 거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그는 아직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의 말씀 안에, 예수님 안에 거하는 신실한 믿음의 생활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진정 예수님의 제자는 서로 사랑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본문 34절과 35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이 말씀을 역설하면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에게 주신 가장 아름다운 새 계명입니다.  계명을 사랑하고 지키는 자는 복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사랑을 하되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절대적인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가 자기를 배신할 것을 벌써 아셨습니다.  베드로가 자기를 부인할 것을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실 때까지 그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이기적인 사랑이 아니라 모든 것이 상대방을 위한 절대적인 사랑이었습니다.  나를 사랑하는 것만큼만 사랑하는 상대적인 사랑은 결코 예수님의 사랑이 아닙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결코 예수님의 제자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는 그가 나를 사랑하든 하지 않든 상관하지 않고 절대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둘째는 자발적인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때때로 인간적인 고뇌를 겪으면서도 인류를 사랑하시는 그 고난의 십자가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자발적으로 십자가를 짊어지셨습니다.  여기서 행동하는 사랑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대가를 바라는 사랑은 참 사랑이 아닙니다.  나는 희생되더라도 진정 상대방을 사랑한다면 나는 고난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사랑이 참 사랑입니다.

물론 세상적인 사람들도 사랑을 합니다.  평안할 때에는 서로를 사랑하고 위로합니다.  그러나 문제가 생기고 결정적인 순간에 그들은 자신을 희생하지 않습니다.  세상적인 사람들도 화목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에 공동체의 화목을 위해서 자신의 십자가를 지지 않습니다.  오늘 이 시대의 비극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자기에게 유익이 되지 않으면 찬 겨울의 눈보라보다 더 매섭고 차갑게 배신하는 것이 세상적인 인간의 사랑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마치 껌과 같은 사랑을 하고 있다고 생각을 해 봅니다.  껌은 단 맛이 있을 때에는 입에 넣고 씹습니다.  그렇지만 단 맛이 없어지고 쓴 맛이 나기 시작하면 미련 없이 내 뱉어버립니다.  우리는 지금 그렇게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의 제자는 그렇게 살아서는 안됩니다.  주님의 제자는 쓴 맛이 나도 자기를 희생하면서 사랑해야 합니다.

셋째는 능동적인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짊어지시기 전 마지막 만찬을 하시는 자리에서 대야에 물을 들고 수건을 허리에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이것은 사랑의 절정입니다.

당시에 제자들은 후일에 누가 더 큰 사람이 될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서로를 견제하고 있었습니다.  서로가 보다 높은 자리에 있게 될 것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그들의 마음에는 섬기고 사랑하고 낮아지는 것은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때문에 그들은 지금 3년을 같이 동고동락을 했으면서도 마음이 흩어졌습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경계와 미움으로 가득했습니다.  서로가 자신이 높다고 생각한 나머지 대접을 받으려고만 했습니다.

그 순간에 예수님께서는 조용히 일어나셔서 종들이나 할 수 있었던 모습을 보이셨던 것입니다.  그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당황스러웠으면 베드로가 황급히 "주여,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십니다"라고 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능동적인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그렇게 사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 몸소 실천하시며 우리에게 가르치셨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서로를 사랑하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자신을 낮추시며 종된 삶을 사셨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낮은 자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기억하십시오.  교회는 결코 섬김을 받기 위해서 나오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나보다 더 연약하고 부족한 성도들을 돌보고 섬기는 곳이어야 합니다.  있는 사람들의 손은 한 번 더 잡으려고 하고, 없는 사람들의 손은 외면하는 그런 곳은 결코 교회가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은 결코 주님의 제자가 아닙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최초의 살인자인 가인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없는 사람의 것을 빼앗았다는 것입니다.  없는 사람의 인격을 짓밟았다는 것입니다.  아십니까?  우리가 있는 사람에게 더 찾아가는 그 마음은 가인의 마음입니다.  부끄럽게도 우리들에게는 이런 가인의 마음이 다 있습니다.  그래서 있는 사람에게는 한 번 더 얼굴을 보이려고 하고, 없는 사람들은 외면을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결코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왜 예수를 믿었는지를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라고 한다면 제자의 올바른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종의 자세로 낮아지고 더 낮아져서 섬김으로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제자는 열매를 많이 맺는 생활을 해야만 합니다.

여기에서 과실, 즉 열매는 두 가지로 이해됩니다.  첫째는 개인적으로는 새 사람다운 신령한 자세와 성품으로 변화되는 것을 뜻합니다.  둘째는 복음 증거의 차원에서 이해한다면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진리에로 인도하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중요한 것을 한 가지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은 내가 변화되지 않고는 다른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죽지 않고서는 결코 다른 사람을 살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현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중병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나는 전혀 변화되지 않았는데 자꾸만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려는 헛된 노력을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변화되지 않는 상대방을 놓고 불평하고 낙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작 중요한 자신은 조금도 변하지 않은 채 말입니다.  그러나 내가 변하면 자연스럽게 나와 관계되어지는 모든 사람들이 변화됩니다.  그것은 은혜스럽게 변화됩니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변화되지 않은 사람일수록 자기는 대단히 변화된 사람으로 착각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리새인들의 특징입니다.  자기들의 속 사람은 썩어서 무덤 같은데 외적인 모습은 의롭고 거룩한 것처럼 행동합니다.  누가복음 11장 52절에 보면 주님께서 이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교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서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다"
자기도 천국에 들어가지 않으면서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들도 막았다.

사랑하는 여러분, 진정 예수님의 제자는 열매를 맺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15장 16절 이하의 말씀에 보면 우리는 그 내용을 더욱 자세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주님이 우리를 제자로 선택하신 것은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함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일회적으로 한 번 열매를 맺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항상 열매가 있게 하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대로 받게 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제자된 삶이 중심적인 내용이 무엇입니까?  서로 사랑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제자의 과실은 사랑의 열매를 뜻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으로 내가 변화를 받고 그 변화의 주체가 되는 예수님을 많은 사람에게 증거하여 그들로 변화된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장 8절에서는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하셨고, 마태복음 28장 19절에서는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목사인 저는 언제나 두 가지의 작으면서도 큰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 교인들의 가정이 평안하여 기쁨과 찬송이 넘치는 가정이 되기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여러분의 가정을 향해 드리는 중보 기도의 내용입니다.  교인들의 가정이 평안하고 기쁨이 넘쳐야 교회가 평안하고 기쁨이 넘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의 가정과 여러분들이 하시는 사업과 직장이 든든해서 날마다 번창하게 되는 놀라운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두 번째는 우리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세워져가기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모두가 같은 마음과 같은 말과 같은 뜻을 가지고 공동체의 비전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들에게는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가 있어야 합니다.  교회 부흥에 한 생명을 걸고, 그럼으로써 여러분의 자자손손이 하나님이 주시는 분복을 누리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기억하십시오.  가정의 축복은 교회의 부흥과 함께 옵니다.  교회가 부흥되어야 여러분의 가정이 복을 받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 시대에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부흥시킨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어쩌면 로마의 박해 시대보다 더 힘들고 어려운 시대에 우리는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로마 박해 때에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그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기꺼이 자신의 몸을 던지며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세상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국교가 되면서 교회와 교인들은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타락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연극을 통해서 타락한 교회와 교인들을 조롱했습니다.  더 두렵고 떨리는 것은 주님께서 그들의 교회에 세우셨던 촛대를 옮기셨다는 사실입니다.  초대교회 3, 4세기에 부흥했던 교회의 중심지가 지금은 모두가 이슬람 세력으로 넘어갔습니다.  그리고 당시의 교회는 흔적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것은 오늘 우리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경고의 메시지라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이것을 빨리 깨닫는 자와 교회와 나라는 복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지금은 우리가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제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무리 유라굴로 태풍과 같은 어려움이 닥친다고 할지라도 바울 같은 믿음만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은 이 민족을 축복과 평안의 항구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사랑하는 여러분, 기도하십시오.  우리가 쉬지 말고 기도를 해야 하는 이유는 주님의 참된 제자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기도하지 않고 쫓아다니다 보면 무늬만 제자일는지 몰라도 참된 제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주님의 제자에게 있어서 제일 무서운 죄악은 시험에 들기 전에 기도를 하지 않은 것입니다.

가룟 유다의 잘못이 무엇입니까?  주님의 제자들이 기도할 때 그는 그곳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해야 할 때 기도하지 않으면 엉뚱한 짓들을 많이 합니다.  그래서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은 다 시험에 듭니다.  그러므로 기도하십시오.  여러분이 엎드리는 순간 하나님의 능력이 임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진지하게 기도하는 순간 살아 계신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는 기도하는 사람이 세워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교회는 기도하는 일꾼들이 모여야 합니다.

초대교회사에 보면 4세기에 알렉산드리아의 감독이었던 아타나시우스라는 주님의 제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교회가 국교가 되면서 교회와 교인들이 도덕적으로 타락해 갈 때, 교회와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거대한 세상 세력과 거짓된 이단들에 맞서서 싸웠습니다.

그는 복음의 순수성과 바른 믿음을 지키려다가 20년 동안 6번나 도시로부터 추방을 당해야 했습니다.  심지어는 이단들과 타락한 교회와 로마의 황제는 자객을 보내서 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그를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 아타나시우스"

당시에 아타나시우스를 지켜보았던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는 그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정말 겸손하고 낮은 데 마음을 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덕행은 비길 데 없을 정도로 숭고했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정중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쉽게 그에게 올 수 있었습니다.  그는 설교시 온유했고, 친절했고, 열정적이었고, 그리고 상냥했습니다.  더욱이 그의 삶은 천사적 삶이었고, 자신을 비난하는 자들에게 항상 부드러웠습니다.  결코 난폭한 대응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삶은 항상 설교의 현장이었습니다.  누구든 그를 닮고 싶어했습니다.  항상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부유한 자들의 부정을 지적하는데 주저하지 않았고 겸허한 자들에게 늘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오늘 주님의 이름으로 이 성전에 나오신 사랑하는 여러분, 언젠가 우리도 이 땅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그 때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어떻게 이야기할까요?
그들은 나를 가리켜서 그는 참으로 주님의 제자였다고 이야기해 줄까요?
아니, 지금 당장에 나 자신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나를 아는 사람들, 그들이 내 가족일 수도 있고, 내 이웃일 수도 있습니다.  혹은 그들이 내 친구들일 수도 있고, 우리와 함께 하는 믿음의 가족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저와 여러분에 대해서 어떻게 이야기해 줄 것 같습니까?
저들이 당신을 향해서 그는 참으로 그리스도의 신실한 제자였다고 말할 것 같습니까?
아니 제자는 고사하고 교인이었다고 말해 주겠습니까?
혹여 이런 소리는 하지 않겠습니까?
"저게 무슨 교인이라고"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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