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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의 애끓는 심정으로 (눅 23:2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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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애끓는 심정으로 (눅 23:26~31)


로마총독 빌라도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으신 예수님은 그가 달리실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가시게 됐습니다. 이미 결박당하신채 이리저리 끌려 다니셨습니다. 잠도 주무시지 못하고 심문을 받으시며 많은 매를 맞으셨습니다. 기운이 다하여 더 이상 십자가를 지고 처형장까지 가실 수 없게 되신 예수님을 본 로마 병사들은 가까이에 있던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 하나를 붙들어 예수님 대신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게 했습니다(본문 26절). 

구레네는 예수님 당시 이집트의 서쪽에 접해 있던 북아프리카의 로마제국 영토로서 오늘날의 리비아에 해당하는 지역의 이름이기도 하고 지중해 해안 가까이 있던 그 주된 도시의 이름이기도 했습니다. 여기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와서 정착해 살고 있었습니다. 시몬은 아마도 구레네에 살고 있던 유대인으로서 유월절을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에 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생각해 보면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달려 돌아가실 십자가를 예수님 대신 지고 가는 일이란 보통 영광스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안 사람들이라면 서로 메겠다고 난리가 났을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예수님과 삼년간 동고동락한 최측근 제자 열두 명은 다 흩어져 도망갔고 뜻하지 않게 구레네에서 온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는 독점적 영광을 누릴 기회를 얻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결박을 당하신 채 로마 병사들에게 끌려 십자가의 길을 비틀거리며 걸어가고 계실 때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다 예수님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이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호기심 때문에 지켜보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아니면 예수님에 대해 적대감을 갖고 그를 조롱하며 그가 죽는 것을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고자 쫓아가고 있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예수님이 받으시는 고난과 그가 당하실 십자가의 죽음 때문에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큰 무리의 여인들도 있었습니다(본문 27절). 그 여인들이 가슴을 치며 슬피 운 것도 모두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야이신 이의 부당하고 억울한 고난과 죽음 때문이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저 귀한 교훈과 놀라운 사랑의 이적을 많이 행한 한 고결한 인격자가 겪는 고초 때문에 가슴을 치며 슬피 운 여인들도 물론 있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마지막으로 던지신 말씀은 바로 그 여인들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네 복음서 중에 오직 누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 28-31절입니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들에게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하셨습니다. 사실 냉정히 생각하면 예수님을 위해서는 울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는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신 메시야이시며, 그가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길은 그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주신 사명을 완수하는 영광의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장사되신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예수님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라오는 여인들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머지않아 로마 군대에 의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게 철저히 파괴될 것이고 참혹한 재앙이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닥쳐올 것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셨습니다. 그때는 참된 믿음의 준비가 없는 사람에게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무서운 재앙의 날이 될 것임을 주님께서는 비통해하신 것입니다. 본문 29-31절을 다시 봅니다: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머지않아 예루살렘에 닥칠 그 재앙의 날이 되면 사람들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원래 아이를 잉태하고 해산하고 그 아이에게 젖을 먹일 수 있는 것은 히브리 여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누리는 최대의 행복이었습니다. 그 반대는 그들에게는 저주받은 인생과 같게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머지않아 닥칠 재앙이 얼마나 크고 무서운지 피할 수도 없고, 그 아이들을 데리고 숨을 길도 없으며, 그 아이들을 먹일 수도 없고, 그 아이들이 겪을 고통을 참을 수도 없으며, 온 식구가 함께 그 재앙을 당하기가 너무나 고통스러울 것이기에 사람마다 “차라리 아이들이 없었더라면”이라고 탄식하며 아이 없는 사람들을 부러워할 만큼 비참한 상태에 놓이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비참한 상황을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가능한 한 빨리 죽는 것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하게 될 것이고, 그래서 크고 작은 산들을 향하여 호소하기를 “우리 위에 무너지라”,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는 것입니다. 무너져 내리는 산에 덮쳐 순식간에 목숨을 잃는 사람이 제일 행복한 사람으로 여겨질 만큼 그날의 재앙은 무서운 것이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끝에 하신 말씀 즉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신 말씀은 해석이 분분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 메시지는 분명하다고 봅니다. “푸른 나무”는 생명의 주가 되신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른 나무”는 즉시 불에 타 없어질 나무 곧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따르지 않아 하나님으로부터 죄의 용서를 받지 못하고 심판의 불을 이기지 못할 모든 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신 말씀의 뜻은 무엇이겠습니까? 

자신은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인데도 세상의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분노를 대신 담당하며 이런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고 있다면, 하물며 그를 믿지 않고 결과적으로 그를 십자가에 못 박는 편에 서는 모든 자들이 당할 고통은 극심하기 이를 데 없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애끓는 심정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형장으로 가시며 얼마 남지 않은 짧은 시간에 하신 마지막 말씀이기에 더 간절하기 그지없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하신 뜻은 무엇이겠습니까? 그 여인들과 그들의 자녀들이 당할 재앙을 생각하며 슬퍼하고 탄식하라는 뜻이겠습니까? 그런 것이라면 굳이 미리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어차피 하게 될 것인데. 예수님의 말씀은 그런 재앙을 당할 것을 걱정하고 그 재앙을 피하도록 하라는 뜻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는 일은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고 주후 70년에 실제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재앙을 피하라는 말씀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진짜 더 무서운 재앙은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가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길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모든 이에게 죄의 용서와 구원과 영원히 복된 삶을 주시는 유일하신 주님으로 믿고 받아들이며 그를 따르는 것입니다. 그 믿음은 이 세상의 모든 재앙과 공포와 고난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입니다. 그 믿음을 갖고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무서운 재앙을 피하라고 예수님께서는 애끓는 심정으로 마지막까지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그 애끓는 심정으로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과연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믿음과 고백이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의 그 애끓는 심정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고 있는가? 구원의 복음 전도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까지도 애끓는 심정으로 행하신 일이라면 우리 또한 힘껏 행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가장 가까운 식구들, 친척들, 친구들이 그 무서운 재앙의 길에 서있는데 우리가 예수님의 애끓는 심정으로 그들에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고 있어서 되겠습니까? 

그들이 산들을 향하여 “무너져 나를 덮어 달라.” 절규하도록 내버려두어야 하겠습니까? 그들이 죽고 나면 더 이상 구원받을 길도 없고 기회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애끓는 심정으로 복음 들고 세상 모든 사람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가 됩시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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