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여호와를 앞에 모심이여 (시 16:8~11)

  • 잡초 잡초
  • 820
  • 0

첨부 1


여호와를 앞에 모심이여 (시 16:8~11) 


벵쿠버 동계 올림픽에서 피겨 스케이팅 역사를 새로 쓴 김연아(金姸兒)는 프리스케이팅을 끝내고 눈물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왜 울었느냐는 질문에 김연아는 자신도 그 이유를 모르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브라이언 오서(Brian Orser)코치가 대답을 내놓았습니다. 스케이트를 그렇게 타면 눈물이 나올 수밖에 없다면서“연아의 눈물은 고된 훈련을 위해 흘린 피와 땀 때문이 아니라 스케이트를 사랑하기 때문에 나온 눈물”이라고 했습니다. 

브라이언 오서는 1988년 캘거리 올림픽에서 0.1점 차이로 금메달을 놓친 쓰라린 경험을 한 사람입니다. 그 패배는 그에게 깊은 상흔을 남겼고, 그 상처를 극복하기까지 10년이 걸렸습니다. 그가 김연아의 코치가 됐을 때 김연아를 행복한 스케이터로 만드는 것이 사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5살의 김연아는 주니어 챔피언이었지만 행복한 스케이터는 아니었습니다. 어머니와 코치로부터 실수한 점프를 계속 반복하도록 강요받는 훈련에 지친 자기 안에 갇힌 내성적 성격의 소녀였던 것입니다. 

그는 연아의 유머와 기질을 끄집어내는 일부터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몸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휴식할 시간을 갖는 게 중요하다는 사실도 가르쳤습니다. 이런 훈련을 통해 김연아는 비로소 자신의 껍질을 깨고 동작과 음악에 대한 감각을 발전시켜 나갔던 것입니다. 누구를 만나느냐가 인생의 밝음과 어둠을 결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금메달은 오서 코치가 김연아를 행복한 스케이터로 만들겠다는 꿈을 품었을 때 이미 준비된 것이었습니다. 성공과 업적이 아니라 생 그 자체를 즐길 수 있을 때 자유롭게 됩니다. 그러기 위해 인생의 주인을 바로 만나야 합니다. 

여러분의 삶은 어떠합니까? 두렵습니까? 흔들립니까? 염려하십니까? 그리스도인은 마음과 삶, 가정과 사업의 주권을 하나님께 넘긴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왜 걱정으로 가득합니까? 예수가 아직 구주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야 합니다. 구원자 예수에서 주 예수까지 가야 합니다. 즉 주인 예수까지 자라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무엇입니까? 지금까지 주인으로 삼고 살았던 것들을 하나 하나 내려놓고 오직 주님만 붙드는 과정입니다. 이 시간 '내가 주인 삼은' 복음성가를 함께 부릅니다.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 내려놓고 내 주 되신 주 앞에 나가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 내려놓고 주님만 사랑해 주사랑 거친 풍랑에도 깊은 바다처럼 나를 잠잠케 해 주 사랑 내 영혼의 반석 그 사랑 위에 서리"

본문은 다윗의 고백입니다.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여기의 '모신다' 는 표현이 히브리어 동사 샤와(shawa)의 완료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영역도 현재완료형 'I have set' 으로 번역하였습니다. 즉 다윗은 여호와를 항상 자기 앞에 모셔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윗이 터득한 진리는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신앙이었습니다. 하나님을 항상 앞에 모시고 산다는 의미는 하나님이 주인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모시고 살아가는 다윗의 고백은 어떠합니까?
 
첫째로 요동치 아니하리라 

초대교회 시절 크리소스톰(John Chrysostom)이 황후 유독시아(Eudoxia)의 간교로 귀양살이를 가게 되었습니다. 그의 마지막 설교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여러분, 저는 지금 예수의 이름으로 고난의 길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주님과 함께 가는 길, 제게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죽음입니까?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내 생명인 걸요. 이 땅에서 쫓겨나는 것이 두렵습니까? 아닙니다. 땅과 그 가운데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요, 이 땅에서 쫓겨나면 하늘이 나를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소유를 빼앗기는 것이 두렵습니까? 내가 가져본 것을 다 빼앗겨도 하늘에 쌓여있을 뿐입니다. 저들이 나를 산으로 몰아내면 나는 엘리야가 될 것입니다. 저들이 나를 구덩이에 던지면 나는 예레미야가 될 것입니다. 저들이 나를 바다에 던지면 나는 요나가 될 것입니다. 저들이 나를 돌로 치면 스데반이 될 것입니다. 저들이 나를 매로 치면 나는 사도 바울의 영광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결코 요동치 않습니다." 

본문 8절입니다.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다윗은 많은 고난을 당하며 산 사람입니다. 권력자 사울에 의해 도망자 신세로 살기도 했습니다. 죽음의 위협을 여러 번 겪었습니다. 자식들의 싸움으로 속앓이도 많이 했습니다. 심지어 자식에게 쫓겨나기도 했습니다. 심히 굶주리며 목마르기도 했습니다. 실패한 삶 같았습니다. 이때 다윗의 마음은 어떠했겠습니까? 고난중의 탄식, 죽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습니다. 어찌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그 때 주께서 자신 안에 거하시는 은혜를 경험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을 주장하시기 시작하였습니다. 갖가지로 요동치던 마음에 평안이 밀려옵니다. 요동할 것 같은 상황에서 평안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이요, 세상이 알 수 없는 평안 그 자체였습니다. 하나님이 주장하시면 평안하게 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조롱받으실 때도 평안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자신을 죽이고 조롱하는 자들에게 용서를 선포하셨습니다. 가난하셨지만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실망시켰을 때 그들을 탓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이 자신을 버리고 다 도망쳤을 때도, 홀로 남았음에도 흔들리지 않으셨습니다. 요동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나 평안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마음은 요동치 아니합니다. 요동칠 것 같은 일을 만나도 주되신 하나님께서 절대로 요동치 아니하게 하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기쁨이 가득하리라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Lev Nikolaevich Tolstoi)는 명문 귀족의 아들로 태어나 백작 칭호까지 받은 특별한 신분의 사람입니다. 그는 모태신자로서 교회에 다녔지만 믿음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구원의 확신이 없었습니다. 자연히 많은 죄를 범하게 되고 절망에 빠져 기쁨이 없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가 중년에 접어들었을 때에, 자신의 주위에 사는 돈 많고 세상향락에 빠져 부족함이 없이 사는 귀족들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로부터 멸시와 천대를 받는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농노들 중에 항상 기쁨이 충만하게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톨스토이는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접근하였을 때 그들 모두가 예수 믿는 독실한 신앙인임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톨스토이는 이때부터 신앙에 눈을 뜨기 시작했고 깊은 신앙의 세계로 들어가 그들과 같이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 후 초대 기독교로 돌아가 근로, 채식, 금주, 금연을 표방하는 간소한 생활을 영위하고 악에 대한 무저항주의와 사랑의 정신에 의해 세계복지에 기여하는 톨스토이 주의(Tolstoyism)를 탄생시켰습니다. 옛날 임금이 사는 성에는 깃발이 꽂혀있었다고 합니다. 이는 지금 성안에 임금이 계시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인들도 자기 안에 만왕의 왕이신 주님이 계시다는 표시로 기쁨의 깃발이 항상 펄럭여야 합니다. 

본문 9절입니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쁘고 내 영광도 즐거워하며" 다윗은 하나님이 주장하시는 마음은 기쁨이 가득하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단순히 요동치 않음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쁨으로 채워진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기쁨의 근원이실 뿐 아니라, 기쁨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께서 열병에 걸린 베드로의 장모를 치유하셨습니다. 병으로 근심이 가득했던 가정에 기쁨이 임했습니다. 자식의 질병으로 근심하는 아비에게 치유를 베푸심으로 기쁨을 주셨습니다. 불치병을 앓던 딸을 고쳐주심으로 어미에게 기쁨을 주셨습니다. 삶의 회의를 느낀 자들에게 찾아가서 기쁨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주님은 기쁨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를 모시면 놀라운 기쁨이 생깁니다. 예수를 만나면 항상 기쁩니다. 예수께서 주장하시면 기쁨이 샘솟게 됩니다. 기쁨을 잃은 이유는 아직도 내가 주인이 된 까닭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셋째로 안전히 거하리라

이라크 전쟁 중 사담 후세인(Saddam Hussein)은 5-6m 두께의 특수 콘크리트 지하벙커에 들어가 은신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숨어있던 벙커는 집중적 포탄이나 핵공격에도 무너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후세인은 벙커가 자신의 안전지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곳도 그를 지켜 주지 못하였습니다. 좁은 방공호에서 수염을 기른 채 초췌한 모습으로 잡히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안전한 곳을 찾아다닙니다. 학교폭력의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운 안전지대를 불루 존(blue zone)이라고 부릅니다. 여러분의 블루 존은 어디입니까? 소유로 안전지대를 삼습니까? 소유지수와 안전지수는 비례하지 않습니다. 소유가 많을수록 안정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유력한 사람을 만나면 안전하다고 생각합니까? 사람은 사랑의 대상이지 믿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그 무엇도 안전지대가 될 수 없습니다. 오로지 안전한 곳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로마서 8장 1절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즉 하나님의 품이 제일 안전한 곳이며 안정된 삶을 살 수 있는 지대입니다. 하나님을 주로 모시기 바랍니다. 

본문 9절입니다. "내 육체도 안전히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다윗은 하나님께서 영혼을 보살피시고 자신의 육체 또한 지키신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주인이 되실 때, 책임지시고 지키시며, 심지어 땅에서 삶을 마감한 후 내세까지 지켜 주신다는 고백을 합니다. 하나님을 주로 모시면 영원히 안전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다윗은, 시편 18편에서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라고 노래했습니다. 반복적으로 하나님만이 안전지대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어느 식당이 있었습니다. 입구는 침침했으며 반갑게 맞이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음식도 그저 그랬고, 식당 곳곳이 지저분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주인이 바뀌었습니다' 라는 현수막이 걸렸습니다. 들어가보니 '어서 오십시오' 라고 인사합니다. 내부가 환해졌습니다. 맛도 좋아졌습니다. 깨끗해졌습니다. 모든 변화가 어디서 온 것입니까? 바로 주인이 바뀐 데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인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기 바랍니다. 사업에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십시오. 주가 경영하시면 놀라운 변화가 임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인 되시는 교회가 될 때 분명히 부흥하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주로 모시면 변하는 현실에서 요동치 아니합니다. 날마다 기쁨을 더해 주십니다. 또 안전케 하시기에 결코 두렵지 아니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을 항상 앞에 모시고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광일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