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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갈대상자 (출 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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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대상자 (출 2:1~10)


Ⅰ 갈대상자

오늘 본문 3절에 100일이 지나지 않은 어린 모세를 태운 갈대상자가 나옵니다. 여기 갈대는  나일강 진흙밭에 무성했던 파피루스를 말합니다. 

욥기에 “빠른 갈대 배”(9:26)라는 말이 나오는데 중동 사람들은 갈대로 가볍고 빠른 배를 만들곤 했습니다. 
“상자”로 번역된 히브리어 “테바”는 구약성경 전체에서 노아의 “방주”라는 말로, 그리고 오늘 본문 “갈대상자”라는 말로 꼭 두 번 사용된 말입니다. 
이 “테바”를 통하여 노아의 가족이 구원을 받았고 어린 모세가 살아났습니다. 

한동대 김영길 총장의 부인 김영애 교수가 쓴 “갈대상자”라는 책이 있습니다. 오래 전 제가 한동대 집회를 인도하러 갔을 때는 김영길 총장이 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김영길 교수는 과학자로서 카이스트대학 교수 자리를 버리고 당시 대학 경영에 파탄이 난 무명의 한동대 총장으로 부임했습니다. 대학은 부도에 직면하고 행정상 오해를 사 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학생들이 학교를 오고가는 길에 바로 학교 가고, 집에 가는 것이 아니라 꽃 한송이를 들고 교도소를 찾아 가서 교도소 담벼락에 엎드려 기도하고, 꽃 한송이를 꽂고 가는 바람에 교도소 담벼락이 온통 꽃밭으로 변해있었습니다. 실로 감동의 장면이었습니다. 

이 책에서 김영애 사모님은 한동대를 세우고 지탱해 가면서 겪은 온갖 시련과 고통, 그 고난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버텨 갈 때 하나님이 어떻게 도우셨는가, 하나님이 어떤 사람들을 보내서 어떻게 역사를 하셨는가를 감동의 스토리로 엮어 갑니다. 

수학이나 과학은 공식대로 풀어야 풀립니다. 그러나 인생의 난제, 하나님의 뜻은 기도로 말씀으로 풀어야 한다고 그들은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풀어야 풀립니다. 말씀대로 살아보려고 눈물겹게 몸부림하면서 겪는 어려움과 승리를 이 책은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한 서평에서 “갈대상자”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한토막을 읽어봅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
갈대상자는 절망의 상자이며 불행의 절정이다.
갈대상자는 불행한 시대에 어떻게 하다 보니 
태어나 어머니로부터 버림받아
나일강에 버려진 무의미한 상자에 불과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상자.
그러나 갈대상자를 뚫어지게 주목하여 보시는 분이 계셨다.
강에 던져진 갈대상자를 운전하고 계시며
갈대상자가 목적을 향해 안전하게 갈 수 있도록 
바람의 방향과 속도를 조종하는 분이 계셨다.
그분이 우리가 못 견디게 사랑하는 주님이시다.
우리를 주목하여 보시는 분, 
갈대상자는 선장도 없고 키도, 돛대도 없는 이상한 배(?)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 상자 안에는
하나님의 목적이 있으며 이스라엘의 리더십이 있다.
그리고 섬세하신 그분의 손길이 충만한 상자이다.
그렇다.
세상의 끈이 끊어지면, 하나님이 끈 되어 주신다.
갈대상자가 어머니의 손을 떠나는 순간에
하나님이 갈대상자를 장악하시며 개입해 주셨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우리 한사람, 한사람은 갈대상자에 불과하다.
어떻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인지
말도 안 되는 고난의 끝은 언제인지
도대체 하나님은 나를 살릴 것인지 죽일 것인지
이러다가 내 인생이 이렇게 끝나는 것은 아닌지
날마다 불안하고, 날마다 두렵고, 날마다 걱정이 태산이다.

그러나 염려하지 말라.
당신이 갈대상자라면 소망이 있다.
갈대상자는 보통 상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갈대상자에는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이 충만하다.
그 목적이 이끌어 가는 상자가 갈대상자이다.
이러므로 갈대상자는 하나님의 목적이 이룰 때까지는 
절대로 뒤집히지도 않으며 악어 밥이 되지도 못할 것이다.
다만 죽을 것 같고, 뒤집힐 것 같을 뿐이다.
그것은 느낌이지, 실상은 아니다.
갈대상자는 하나님이 동행하는 상자이다.
사단이 뒤집지 못하며, 세상이 막을 수도 없을 것이다. 

이 서평이 오늘 설교의 주제이며 내용입니다. 

Ⅱ 평범한 그가 위대한 전도자가 되어

출애굽기 1장에서 학대받는 이스라엘 백성을 소개하고, 2장의 문이 열리면 첫 단락 본문에서 모세의 출생이야기를 다룹니다. 
여기에 성령의 놀라운 이야기 방식이 있습니다. 작은 이야기를 우리에게 소개함으로 앞으로 펼쳐질 큰 이야기를 기대하게 하는 방식입니다. 
작은 이야기는 모세의 구원이야기요, 큰 이야기는 이스라엘의 구원 즉, 출애굽 이야기입니다. 
죽음에 직면한 모세 이야기를 통해 이스라엘의 위기를 말하고 있습니다. 
나일강에서 구출된 모세 이야기를 통해서 홍해에서 구출될 이스라엘 백성이야기를 알려줍니다. 
기적적으로 왕의 아들로 입양된 모세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될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야기를 기대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렇습니다. 
평범한 사람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을 때 비범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나약한 사람이 하나님의 손 안에서 강력한 지도자가 될 수 있습니다.
버림받은 백성이 하나님의 손 안에서 제사장 나라가 될 수 있습니다.
“너희는 제사장 나라가 되리라!”
이것이 출애굽기의 이야기요, 성경의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역사요, 나의 이야기, 너의 이야기입니다.  

성경이야기․기독교의 이야기는 평범했던 사람들이, 허점 많고 약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손 안에서 얼마나 강력한 역사를 이루었는가 하는 이야기들이지요. 
모세라는 사람을 탐구해 보면 그도 우리처럼 많은 약점을 가지고 있었고 걸핏하면 실수를 하는 평범한 인물이었습니다. 

80세가 되어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서도 열등감에 이기지 못하여 변명에 변명만 늘어놓습니다.
모세의 많은 실수와 약점을 보면서 우리는 그에게 오히려 친근감을 느끼게 됩니다.
나 자신이 아니라 내 곁의 많은 사람들의 허물과 실수를 보면서 우리도 하나님이 용서하시고 받아주실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하는 인물이 모세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손 안에서 얼마나 영광스럽게 쓰임을 받습니까?
그는 ‘여호와의 종’(신 34:5), ‘하나님의 친구’란 이름을 얻습니다.
“온유함이 모세와 같은 자가 없다.”는 칭찬을 들었습니다.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라고 신명기 34장 10절은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소위 전무후무한 인물이었습니다.
전무후무한 선지자였습니다.
전무후무한 영성적 인물이었습니다. 

모세는 120년을 이 땅에서 보냅니다.
40년은 애굽의 왕궁에서,
40년은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은 출애굽 과정의 광야에서 그 생을 보냅니다.
첫 40년은 나는 대단한 인물이라고 믿고 살았습니다. 

I'm some-body!
미디안광야 40년 그는 절망하고 좌절하던 시기였습니다. 
I'm no-body!
하나님을 만나고 쓰임 받던 마지막 40년에는
I'm every-body!
하나님을 대면하고 그 분 안에서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그는 믿었습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모세는 가장 위대한 역전의 인생, 역설적 존재였습니다. 
종의 아들이 왕의 아들이 되어 살았습니다.
갈대상자에서 건져져 왕궁에서 삽니다. 
애굽에서 교육 받고 애굽을 치는가 하면 이스라엘 목자, 지도자가 되어 살아갑니다.
궁궐을 버리고 광야를 헤매며 사는가 하면, 말더듬이. 
그러나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자로 쓰임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누구보다 약점 많았던 자가 하나님의 손에 붙들릴 때 이 땅에서 가장 강력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Ⅲ 이름대로 아이-모세

출애굽기에서 본문의 주인공 모세라는 이름의 뜻은 이중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1. 애굽말로 모세는 “아들, 신의 아들”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2. 반면 히브리어로는 “물에서 건져내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무조건 나일강에 던져 죽이라는 바로 왕의 법령이 있습니다. 
이토록 어둡고 살벌했던 학정 속에 레위지파의 두 젊은 남녀가 결혼하여 아이를 갖게 됩니다.
뱃속에 있던 이 아이가 아들이라면 어쩌나?’ 밤잠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본문에서는 이 부부가 누구인지 이름이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6장 20절에 가면 숨겨진 이름이 밝혀집니다.
남자 이름은 아므람, 여자 이름은 요게벳. 
이미 태어나 자라고 있던 모세의 형은 아론, 누나는 미리암이었습니다.
바로의 남자아이에 대한 잔인한 살상이 시작된 바로 이 때 태어난 아이가 모세였습니다. 
“물에서 건져내다” - 여기 물은 보통의 물이 아닙니다. 죽음의 물이었습니다. 

대단히 재미있는 사실은 모세가 단지 물에서 건짐을 받았기 때문에 모세라고 불려 졌다면 “물에서 건져냄을 받은 자” 수동태로 되어야 하는데, “물에서 건져낼 자” 능동태로 이름이 바뀌어 져 있습니다. 지어집니다.
인간 누군가가 이름을 지어준 것이 아니라 모세 이름 속에서는 계시적인 의미로써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이 담겨져 있었습니다.

본문 2절 “아들을 낳으니 그가 잘 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겨 키웠다.” 
이 단순한 사실을 믿음의 전당에 오는 사람들을 기록했던 히브리서 11장(23절)은 모세의 부모의 대단한 믿음이었다고 말합니다. 

어떤 믿음이었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와 확신이었습니다. 
창세기 15장 13절에 보면, 일찍이 기록된 내용에 “앞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400년 동안 종살이를 하다가 아브라함에게 약속했던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때는 바야흐로 애굽생활 400년이 차가고 있을 때 모세가 태어납니다. 모세의 부모는 행여나 이 아이가 우리 민족을 구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믿었습니다. 
아니면, 성경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꿈이나 천사가 이런 계시를 통해 이 아이가 장차 민족을 구원하게 되리라는 하나님의 뜻을 그 부모는 알았을 것입니다. 

이 놀라운 사실을 출애굽기는 “아이가 잘생긴 것을 보고 죽일 수 없어 숨겼다”고 기록합니다. “잘 생긴 것을 보고” 
이 말은 문자적으로만 보면 하도 예뻐서 차마 죽일 수 없었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11장 13절에서는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달 동안 숨겼다”고 주석하고 있습니다.
“잘 생긴 것을 보고”라는 이 말을 “아름다운 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요? 사도행전 7:20이 이를 주석하고 있습니다.
“그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잘생겼다’는 말을 ‘아름답다’고 번역하더니 그것은 단순히 외모가 잘생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아 아름답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좀 어렵지만 한 단계만 더 추적해보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어디서 비슷한 말씀을 본 것 같지 않습니까?
이 땅에 천지 우주만물이 처음 창조된 그 날 하나님께서는 매일같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토브!” “토브!” 
정확하게 여기 모세에게 아름답다고 한 이 말과, 하나님 보시기에 천지우주만물이 좋았더라는 이 말이 동일한 단어로 쓰여 지고 있습니다. “토브”

“토브”란 말은 하나님의 목적을 감당하기에 적합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을 수행하기에 합당하다는 신학적 의미를 가진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모세가 태어났을 때, 모세의 부모는 ‘이 아이가 하나님이 쓰실 아이로구나.’ 그들은 알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위해 귀하게 쓰임 받을 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모세의 부모는 하나님의 놀라운 목적을 알았을 때, 바로의 법령과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히브리서 기자는 기록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했을 때,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마음. 이것을 믿음이라고 그들은 말합니다.
아이를 숨겼을 때 온 가족이 능지처참을 당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과 도우심을 믿고 또 다른 계획과 지혜, 하나님의 뜻이 들어 갈 때까지 모세를 숨겨 키웠습니다.

“믿음으로 모세가 났을 때 그 부모가 아름다운 아이임을 보고 석달동안 숨겨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아니하였으며”(히브리서 11장 23절)말씀입니다.

Ⅳ 하나님이 하셨다.

모세의 부모는 아이를 최선을 다해 숨겨보았으나 석 달 이상 더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얻은 지혜가 갈대상자를 만들어 나일강가 갈대밭에 내려놓는 일이었습니다.

한동대학이 재정악화로 마지막 숨통을 조여 오고 있을 때, 학생과 교수들이 발 벗고 나서 “한 계좌 천원 운동”을 벌입니다.
대학은 이 운동을 이름 하여 “갈대상자”라 불렀습니다.
갈대 한 올은 약하지만 수많은 갈대가 모여 우리시대 나일강에 던져진 모세를 지킬 바구니를 만들 수 있다고 그들은 믿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지금 대학이 풍전등화로 쓰러질 위기에 놓였습니다. 우리가 한 올 갈대에 지나지 않는 연약한 운동을 펼칩니다. 그러나 하나님 이 대학을 살려주신다면 나라의 민족의 동양들을 리더를 길러내는 갈대 바구니 역할을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이번만 살려주신다면 이 대학을 통해 자라는 모든 젊은이들이 나라를 살리고 상처난 영혼을 치료하는 놀라운 민족의 지도자가 되도록 우리는 눈물로, 기도로 가꾸게 될 것입니다. 주여! 도와 주시옵소서.” 

이것이 갈대상자였습니다. 
저자는 그의 책에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모세가 태어날 무렵 애굽에서 태어난 히브리 남자 아이는 모두 죽임을 당했다. 모세의 운명도 폭풍속의 촛불 같았다. <우리 품에서 키운 이 아이를 더 이상 숨길 수 없어 하나님 앞에 드리는 마음으로 강물에 띄워 보냅니다.> 모세의 부모가 갈대를 꺾어 아기를 누일 바구니를 엮던 그 밤. 그들은 눈물로 통곡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시는 하나님께서는 죽어야 할 아기를 바로 공주의 손을 통해서 기적적으로 살리셨다. 뒷날 민족의 지도자로 모세가 서는데 이 갈대 상자가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다.”

우리가 생명을 걸고 전도했던 한 영혼이 이 나라를 세워가는 갈대상자 역할에 한 올 갈대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눈물이 모이고 모여서 이 시대의 갈대상자를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연약하고 연약한 존재이지만 약하고 약한 갈대 한 올에 불과하지만  눈물과 헌신으로 희생할 때에 비전채플은 갈대상자가 되어 그 곳에서 모세가 자라나게 될 것입니다.
이 시대를 살리고 도시를 구원하고 민족을 구원하고 세계 열방을 살려내는 갈대상자로 만들어져 가게 될  것입니다. 

갈대상자를 만들어 나일 강변에 띄웠을 때, 하나님의 위대한 간섭이 시작됩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갈대상자를 만드는 일이요, 역사는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갈대상자가 놓이는 그 정확한 시간에 바로 공주가 나일강에 목욕하러 나옵니다.
너무 빨리 와도 안 되고, 조금만 늦게 와도 안 되었습니다.
그 정확한 시간에 맞춰 바로 공주가 나타납니다 . 
이 일을 두고 어찌 그 누가 우연이라 말할 수 있을까요?

할 일도 많고 볼 것도 많았건만 공주의 눈은 정확하게 갈대상자에 멈추었습니다. 
“갈대상자를 열어보니 아기가 우는지라 그가 그를 불쌍히 여겨 이르되 이는 히브리사람의 아기로다.”
공주는 이 아기가 히브리 사람의 아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봅니다. 
어떻게 금방 알아볼 수 있었을까요?
히브리아이들은 난 지 8일 만에 모두 할례를 받습니다.
그러나 애굽 아이들은 14세가 되어야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니 정확하게 히브리 아이임을 알 수 있었죠. 
이것이 기회가 될 수 있었을까요? 아니면 위기가 될 확률이 더 높았을까요?
히브리 아이인 것을 안 애굽 공주가 “아이, 재수없어 물에 엎어버려!” 
시녀들에게 얼마든지 명령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아니면 “불쌍하기는 하지만 우리아빠 바로 왕이 노하실거야. 버려!” 

얼마든지 이럴 수도 있었습니다.
모세의 생명에 절체절명(絶體絶命) 위기가 왔습니다.
그러나 바로공주는 이 아이를 불쌍히 여겼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간섭이 없이 어찌 이 마음을 간직할 수 있었을까요?

순간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던 모세의 누나 미리암이 달려 나가 유모를 구해 주겠다고 나섭니다. 놀랍게도 바로 공주는 이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모세의 어머니는 어린아이를 강물에 버리고 얼마나 가슴 태우며 기다렸을까요?
그러나 보십시오. 

갈대상자에 담아 버린 아이를 다시 되돌려 받아서 품에 안고 젖 삯을 받아 가며 정당하게 모세를 키울 수 있었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건이었습니까?   
이것이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간섭 없이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갈대상자에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오늘 본문 성경을 읽어가노라면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나중에 알려지게 될 아기의 엄마 아빠 이름이 무명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모세를 입양한, 당시 유명했을 왕의 무남독녀 공주의 이름도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후에 많은 역할을 감당하게 될 아기의 누나, 형의 이름도 숨겨져 있습니다.
왜일까요? 이 엄청난 구원 역사의 주인공을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그가 누구인가요?
하나님.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구원할 계획을 세우시고 구체적으로 역사하시고 빈틈없이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이 주인공이셨습니다.
오늘 본문 9절에서 바로공주는 말합니다.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삯을 주리라” “나를 위하여 내가 삯을 주리라. 물에서 건진 모세는 내 것이다.” 라고 주장합니다. 
내가 모세를 건져냈다고 끊임없이 공주는 주장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합니다. “NO! 하나님이 하셨다. 모세는 하나님의 사람이다. 하나님의 역사를 위해서 쓰임 받게 될 것이다.” 할렐루야!

“짐은 곧 국가다”라는 유명한 말로 “태양왕”이라 불리던 루이 14세를 아시지요. 17-18세기를 걸쳐 무려 72년간이나 프랑스 왕위에 있던 그도 죽어 장례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유언에 따라 그의 시체는 호화로운 옷을 입고 황금관 위에 누워 대성당 중앙에 안치되었습니다. 
상당 내 모든 불은 꺼지고 왕의 영광과 권위를 상징하는 큰 초 한 자루만 빛나고 있었습니다.
유럽 모든 국가의 왕들과 왕후, 귀족들이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장례를 집례하던 사제가 장례 절정의 순간 “후~” 촛불을 꺼버렸습니다. 
그리고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왕이시다. 오직 하나님만이 위대하시다. 오직 하나님 
만 이 세상을 다스리신다!”

우리의 갈대상자를 운행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 이십니다.
모세를 구하고 이스라엘을 구하고 당신을 구하고, 
당신을 만든 그 목적대로 바른 길로 인도하시고 간섭하시고, 하나님이 계획하신 그 영광스런 목적지에 다 도달할 수 있도록 인도하실 분이 바로 전능하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이십니다. 출애굽의 주인공은 하나님이시듯, 당신 구원사의 인생의 주인공도 하나님이십니다. 

일엽편주(一葉片舟)! 
당신의 갈대상자를 오늘도 하나님은 지켜보고 계십니다. 

넘실대는 나일강물 파도 속에 행여나 삼켜지지나 않을까? 내 인생이 뒤집혀지지나 않을까? 이러다가 잘못되지는 않을까? 염려하며 달려 나오신 여러분을 하나님이 지켜보고 계십니다. 
우리가 기도의 갈대상자를 만들면, 믿음의 갈대상자를 만들면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간섭하시고 역사하시고 하나님이 계획하신 아름다운 목적지로 향하여 여러분의 인생을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 

망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아름다운 종착점에 도착하도록 하나님이 역사하여주실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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