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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순절] 밀알 신앙 (요 12:2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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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알 신앙 (요 12:23~28) 


성경을 보면 역설(逆說)이 많이 나옵니다. 흔히 ‘패러독스’(Paradox)라고 하죠. 역설이란 잘 아시는 대로, 얼핏 보면 틀린 말 같은데 사실은 진리인 것을 말합니다. 우리의 인생 가운데 이런 역설적 진리가 많습니다. 특히 신앙의 세계에는 더더욱 많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무수한 역설이 등장합니다. 그 중에 몇 가지만 소개해 드리면 이런 구절들입니다. 막10: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고후12:10 “ ...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행20:35 “ ...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 ”  

오늘 본문에도 보면 역설적 진리가 등장합니다. 뭔가요? 한 알의 밀알이 썩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겁니다. 죽으면 오히려 산다는 진리요, 잃으면 오히려 얻는다는 진리입니다. 이것이 곧 십자가의 진리입니다. 십자가는 역설 중의 역설입니다. 피흘려 죽는데 사는 것이요, 수치를 당하는데 영광스러워지는 겁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이 역설적 진리를 터득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도 예수님처럼 ‘한 알의 밀알’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게 바로 ‘밀알 신앙’입니다. 
  
본문 바로 앞에 20절 이하를 보면, 헬라인 몇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아마 그들은 유대인 교포(디아스포라)를 통해 하나님을 알게 된 사람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유월절에 맞춰 예루살렘에 왔다가 예수님을 찾아온 겁니다. 성경에 나오지 않은 내용이지만, 전승에 의하면 이런 사연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당시 헬라(Greece)의 도시 국가 ‘에뎃사’에서 온 사신들입니다. 에뎃사 왕의 아들이 나병에 걸려 절망 중에 있었는데,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습니다. 각종 병자들을 고쳤는데 특히 나병 환자를 고쳤으며, 심지어 죽은 자를 살린 분이라는 겁니다. 

그 소문을 듣고 그들은 어찌하든 예수님을 모시고 가려 했습니다. 그러면 왕자의 병을 고칠 수 있을 것이고, 더 나아가 나라의 스승(국사)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한 겁니다. 그 때는 유대인 대제사장과 바리새인 등 당국자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해서든 죽이려고 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생각하기에 예수님께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제안을 거절하셨고, 끝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1] 밀알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 십자가 죽음, 부활 승천

본문은 그들이 면담 요청을 했을 때 하신 말씀입니다. 그들이 보기에는 십자가를 피해 그 나라로 가서 호강을 하는 게 영광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히려 십자가를 지는 게 영광임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이를 위해 밀알의 비유를 언급하십니다. 예수님 자신이 마치 한 알의 밀알과 같은 존재라는 겁니다. 

먼저 23절을 보시죠.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인자(人子 Son of Man)는 예수님이 당신 자신을 지칭할 때 사용하는 표현인 것 아시죠. 마치 왕이 자신을 지칭할 때 “짐이 ...” “과인이 ...” 이렇게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까 “... 인자가 ...” 이 말은 “내가 ... ” 그런 뜻이죠. ‘영광을 얻을 때’라고 했는데, 이 말이 무슨 뜻인가요? 십자가 지실 때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십자가를 회피해서 세상의 부귀영화를 선택하는 것을 단호히 거부하신 겁니다. 24절을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 의미를 밀알 비유로 분명히 설명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 진실로 진실로 ...” 

이 말은 헬라어 원어로 “... 아멘 아멘(ajmh;n ajmh;n) ...”인데,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강조합니다. 물론 예수님의 말씀은 항상 진리입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정말 금과옥조처럼 명심할 진리임을 강조하신 겁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자연의 법칙인 동시에 인생의 법칙이요 신앙의 법칙입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 속에 심겨지지 않고 그대로 있으면 한 알 그대로 있습니다. 아무런 가치도 생산해내지 못합니다. 오래 전에 고대 분묘에서 발굴됐는데, 그 가운데 곡식 낟알들이 있었습니다. 신기하게도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썩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고고학적 가치야 있겠지만 곡식이라는 측면에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 낟알들이 땅 속에 심겨졌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그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곡식을 계속 생산해 냈을 겁니다. 남아 있는 게 이익이 아니라, 오히려 엄청난 손실이죠. 

예수님은 자신이 이 세상에 땅 속에 심겨지고 썩어지는 밀알과 같은 존재가 되기 위해 오셨음을 밝히 증거하십니다.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많은 인간을 위해 대속의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이고, 그로 인해 많은 영혼들을 구원하실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예수님 한 분이 피 흘려 돌아가심으로 무수한 인생들이 죄와 사망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2천년 동안 구원의 역사가 계속됐습니다. 앞으로도 십자가 구원의 역사가 계속 될 겁니다. 

이런 사실을 롬5:19에서는 뭐라고 말씀합니까? “한 사람(=아담)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예수님)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무슨 말인가요? 인류의 시조 아담이 범죄함으로 모든 인간이 다함께 죄인이 되었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를 지심으로 많은 사람들이 믿음으로 의인 되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십자가 죽음이 그리 쉬운 게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둔 고뇌를 토로하십니다. 마치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를 연상시키는 대목입니다. 27절~28절 보시죠.

“27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28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하시니 ... ”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신성을 갖고 계시지만, 동시에 인성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생각할 때 정신적으로 큰 고통을 이미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십자가를 지실 것을 결단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그러자 하늘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28절(하). “ ... 이에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하시니” 놀라운 일이죠.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기 직전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 받으실 때도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메시아 구세주로 공식 인정하는 표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계셨기에, 또 십자가 후에 부활과 승천의 영광이 있을 것을 아셨기에 십자가를 당당히 지셨습니다. 히12:2 “ ... 그(=예수)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십자가 자체는 고통이지만, 그 이후를 내다 보셨기에 십자가를 감당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대속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요, 하나님 자녀와 천국 백성이 되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특별히 이 사순절에 그 은혜에 감사 찬송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2] 밀알 신앙의 계승자 그리스도인 : 예수 제자의 길 

십자가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을 따르는 밀알 신앙의 계승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게 바로 예수 제자의 길입니다. 제자의 길을 흔히 ‘제자도’(弟子道 Discipleship)라고 하죠. ‘밀알 신앙’이 곧 ‘제자도’인 것입니다. 

여러분, 밀알 신앙의 소유자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설명해 주셨습니다. 25절 보세요. “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여기서 생명은 육체의 생명을 가리킵니다. 육신의 본능을 위해서 전전긍긍하면 실패하고 망한다는 겁니다. 오히려 육신의 본능을 극복하고 초월하면 승리하고 영생을 얻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삶의 방식을 가리켜 자기부인(自己否認 Self-Denial)이라 부릅니다. 

우리가 아무리 예수 믿는 사람이라도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에는 항상 죄의 본능이 내재되어 시시때때로 솟아오릅니다. 육신의 욕망이죠. 우리가 죄에서 구원받았다는 것은 죄의 책임(죄책)에서 구원받았다는 것이지 죄성 자체가 완전히 없어졌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죄의 본능에 이끌려 살다보면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가기보다 철저히 세속인의 모습으로 살게 됩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구별이 안 됩니다. 예수님이 예비하신 풍성한 축복을 경험하지도 못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하기도 합니다. 결국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자기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면서 육신의 본능과 욕망을 죽여야 합니다. 이미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계속해서 ‘확인사살’(確認射殺)을 해야 됩니다. 갈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sinful nature)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육체’는 죄의 본능 즉 육신의 욕망을 가리킵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가 예수와 함께 새 생명으로 부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육신의 뜻대로 사는 게 아니라, 주님의 뜻대로 사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쉽지 않아요. 정신을 차리고 발버둥치지 않으면 어느새 죄의 본능이 솟아오릅니다. 그럴 때면 이 말씀을 기억하세요! 

마태복음 16장을 보면, 베드로의 신앙 고백이 나오죠. 베드로가 분명하게 신앙고백을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마16:16) 너무 기특해서 예수님이 크게 칭찬하셨습니다. 그 전에는 제자들이 미성숙해서 십자가 고난에 관핸 언급을 회피했었는데, 이때 비로소 십자가를 언급하십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반응이 뜻밖이었습니다. “예수님! 그러시면 안 되죠. 미쳤어요? 예수님이 죽기는 왜 죽어요?” 이런 식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지상의 이스라엘 건국을 꿈꾸고 있었는데,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자기들도 한 자리씩 할 것을 기대했던 겁니다. 그런데 뜬금없이 십자가를 말씀하시니까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겁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베드로를 향해 뭐라고 책망하셨습니까? 

마16:23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사람의 일’은 죄의 본능 즉 육신의 욕망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일’은 주님의 뜻이고 십자가의 길입니다. 그럴 듯하게 신앙 고백을 했지만 베드로의 마음속에서 죄의 본능이 솟아오르는 것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사단의 시험에 넘어진 겁니다. 예수님이 오죽하면 “사단아! 내 뒤로 둘러가라!”고 하셨겠습니까? 

육신의 욕망을 제어하는 것은 너무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는 게 제자의 길이요, 예수님을 섬기는 길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시고, 진정한 승리의 삶이 펼쳐지게 됩니다. 

본문 26절을 보세요.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예수님을 섬기는 것은 제자로서 육신의 욕망을 이기며 밀알 신앙을 실천하는 겁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십자가 없는 축복, 십자가 없는 영광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어요! “십자가 없이는 면류관도 없다.”(No Cross, No Crown)(스펄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겉모습은 신앙인의 모습으로 바뀌었지만, 속은 여전히 옛사람의 모습으로 남아 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내용물은 그대로이고 포장지만 바뀐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속사람, 내면의 영혼이 지향하는 방향이 달라져야 합니다. 세속인들처럼 무조건 복만 받겠다고 아우성치는 이른 바 ‘수복(受福)의 신앙’을 탈피해야 합니다. 복을 받는 것보다 우선되어야 하는 것은 고난을 당하더라도 주님의 뜻을 따라가는 겁니다. 이게 ‘자기부인’(自己否認)이요 고난을 불사하는 ‘수난(受難)의 신앙’입니다. 

이런 삶을 살다 보면 순교도 가능합니다. 기독교 2천년 역사는 순교의 역사입니다. 그래서 신학자 터툴리안이 이런 말을 했어요. “순교의 피는 교회의 밑거름이다.” 오늘날도 전 세계적으로 보면 곳곳에서 순교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은 순교를 하고 싶어도 기회가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흔히 순교 하면 신앙을 지키다 피 흘려 죽는 것을 말합니다. 이를 가리켜 ‘적색순교’(赤色殉敎)라고 합니다. 그런데 또 다른 순교가 있어요. ‘백색 순교’(白色殉敎)입니다. 이것은 살아 있는 동안 주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복음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눈물과 땀을 흘리며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건 순교가 아니죠. 그러나 평소에 이런 삶을 살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적색 순교를 할 수 있겠습니까? 적색순교를 한 사람들은 예외 없이 평소에 백색순교를 실천한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육신의 본능조차 이기지 못한 사람이 결코 피흘려 순교할 수 없습니다. 그런 뜻에서 백색순교라는 말을 사용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순간순간 솟아오르는 육신의 욕망을 십자가를 의지함으로 이겨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한 알의 밀알로 드려야 합니다. 이게 바로 헌신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희생은 결코 손해 보는 게 아닙니다. 더 큰 영광과 더 큰 축복 경험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밀알 신앙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요? 몇 가지 소개해 드립니다. 

① 기도의 밀알 :

그리스도인이라면 기도해야 되고, 기도하는 게 좋은 줄은 다 압니다. 그러나 기도가 잘 안 됩니다. 왜냐하면 육신의 본능으로는 기도하기 싫거든요. 요리조리 핑계대고 빠져나가려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이런 본능을 이기십시오. 그리고 기도하십시오. 그럴 때 비로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냥 막연히 축복을 구하고 기적을 바라지 마십시오! 그것은 기복 신앙이요 수복의 신앙입니다. 기도의 수난을 각오해야 비로소 축복의 문이 열리고 기적의 문이 열린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에스더 4장을 보면, 바사 왕국에 포로로 집혀 있는 유대인들이 큰 위기를 만나죠. 간신 하만이 모르드개를 미워해서 아예 유대인 전체를 학살하려고 흉계를 꾸밉니다. 그때 모르드개와 유대인들이 금식하며 기도합니다. 그 소식을 들은 에스더 왕후가 고민합니다. 왕에게 탄원하면 좋겠는데 불가능한 상황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왕실의 경호법으로는 왕이 부르기 전에 왕후조차 먼저 찾아갈 수 없습니다. 육신의 안일을 위해서는 숨을 죽이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에스더가 결단합니다. 에4:16 “당신(=모르드개)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 결국 금식하며 기도하고 나아간 에스더가 승리합니다. 자기도 살고 유대 민족도 살았습니다. 그 이전보다 더 존귀해졌습니다. 자신을 기도의 밀알로 바쳤을 때 하나님의 영광과 축복을 경험할 수 있었던 겁니다.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의 밀알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가정이 잘 되기를 소원합니까? 교회가 잘 되기를 소원합니까? 나라가 잘 되기를 소원합니까? 세계가 잘 되기를 소원합니까? 그냥 편하게 앉아서 되는 게 아닙니다. 기도의 밀알로 썩어지고 죽어야 합니다. 육신의 안일을 떨쳐 버리고 줄기차게 기도해야 됩니다. 아무쪼록 기도의 밀알이 되셔서 나도 살고 남도 살리는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② 전도/선교의 밀알 :

한 영혼이 주님께 돌아와 구원받기까지 얼마나 많은 수고와 헌신이 요구되는지 모릅니다. 내가 구원받은 것도 누군가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저 자신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대학 3학년 때 복음을 받았는데 한 마디로 ‘뺀질이’였습니다. 친구가 전도할 때 너나 믿으라며 핀잔을 주며 여러 차례 거부했습니다. 대학생 선교단체에 인도됐는데 거기서도 많은 형제자매들의 수고를 무시하고 거절했습니다. 핑계를 대고 뛰쳐나왔는데, 계속 인내하면서 전화도 하고 편지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들의 수고를 보신 하나님께서 강권하셔서 저를 변화시켜주신 겁니다.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체포되기 전 밀레도를 거쳐 가는데 그곳에서 고별설교를 합니다. 그 가운데 이런 고백을 했죠. 행20: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이러한 희생들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에게까지 복음이 다가온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최초로 입국했던 선교사들의 희생을 기억해 봅니다. 최초로 언더우드와 함께 온 아펜젤러 선교사(Henry Gerhart Appenzeller 1858~1902)가 생각납니다. 그분은 배재학당과 정동교회 설립자로 유명하죠. 특히 성경 번역을 위해서도 많은 공헌을 한 분입니다. 그는 군산 앞바다에서 선박 사고로 순교했습니다. 성경 번역을 위한 회의 참석을 위해 제물포에서 배를 타고 목포로 가는데, 군산 앞 바다에서 선박 충돌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본인은 살 수 있었는데 몸을 던져 조선 소녀 한 명을 구하고 순교하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보면 비효율적인 것 같지만, 한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 사람이 많은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는 겁니다. 사춘기 아들은 아버지의 죽음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철이 든 후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게 되었고 그 역시 이 땅을 위해 헌신합니다. 그가 노년에 신병 치료 차 한국을 떠나면서 유언을 남겼습니다. “내가 죽으면 미국에 묻지 마십시오. 꼭 한국 땅에 묻어주십시오.” 그 유언대로 그는 지금 양화진에 묻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 아버지 아펜젤러의 기념비가 서 있습니다. 

이제 우리도 내가 다른 이들의 헌신으로 구원받은 것처럼 다른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해 전도와 선교의 밀알이 되시기 바랍니다.
  
③ 사랑의 밀알 :

세상의 이치는 희생이 있어야 그 결과가 생긴다는 사실입니다. 자식이 잘 되는 것도 부모의 희생이 전제됩니다. 공동체가 잘 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이 잘 되려면 누군가, 교회가 잘 되려면 누군가, 나라가 잘 되려면 누군가의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말했습니다. 갈4: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옛날 영국의 웨일즈 남부 지방에 눈보라가 치던 날이었습니다. 한 여인이 길에 쓰러져 얼어 죽은 채로 발견됐습니다. 민망하게도 옷을 홀딱 벗은 모습이었습니다. 그 옆에는 젖먹이 아이가 작은 소리로 울고 있었습니다. 그 여인이 아이를 위해 옷을 다 벗어 덮어주고 자신은 얼어 죽은 겁니다. 그 아이가 철이 들자 양부모가 그 사연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는 친부모로부터 아무 것도 받은 게 없었지만, 그 사랑을 받았기에 훌륭한 크리스천으로 자랐습니다. 그가 바로 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의 수상을 역임한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David Lloyd George 1863~1945)입니다. 부모가 사랑의 밀알이 되는 한 자식은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사람들이 무조건 편안함과 안일함만을 추구합니다. 그 가운데 살다보니까 우리 자신도 모르게 이기적이 되어가고 육신의 욕망에 이리저리 끌려 다니게 됩니다. 이 사순절에 나 자신 속에 있는 육신의 욕망을 죽이고 한 알의 밀알이 됨으로 나도 살고 많은 사람들을 살리는 풍성한 열매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홍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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