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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롬 8:3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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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롬 8:31~39)


한 그리스도인 가정에 자녀가 다섯이 있었습니다. 아들만 다섯이 있었습니다. 항상 감사하며 살았는데 하나 안타까운게 있었습니다. 자기 형님은 아들이 없습니다. 딸들은 많이 있는데 아들이 없어서 형님을 만나면 형님은 늘 푸념을 합니다. “동생 자네는 좋겠네, 아들이 다섯이나 있어서” 지금이야 딸을 귀하게 여기지만 아들을 귀하게 여기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술을 먹고 푸념하면서 “나도 아들하나만 있으면 세상에 소원이 없겠네” 그러는 겁니다. 이 동생이 이말을 듣고 마음이 영 민망하고 안되서 형에게 약속을 했습니다. “우리아들 다섯인데 한명을 형님댁에 양자로 보내겠습니다.” 약속을 했습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 아내와 회의를 하는데 걱정스럽습니다. 어느 아들을 보낼까... 밤에 두 부부가 아이들 중에 한 명을 고르기로 했습니다. 

자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면서 누구를 보낼까 생각하는데 큰 아들을 보니까 이미 많이 성장했습니다. 어깨가 떡 벌어지고 키도 크고 누가보더라도 우리집 기둥감 입니다. 장남은 기둥인데 장남은 보낼수가 없지. 둘째 자는 모습을 보니 둘째는 공부를 그렇게 잘합니다. 학교가서 시험만 보면 일등입니다. 누가봐도 명문대학 들어갈 아이입니다. 크게 될 인물입니다. 얘도 안되겠어 우리집에도 공부잘하는 아이 하나는 있어야지. 옆에 막내가 자는데 막내를 보내면 어떨까... 어리니까... 생각합니다. 막내도 안되겠어. 내가 직장갔다가 퇴근하면 달려와서 아빠목을 껴안고 '아빠' 하면서 안기는게 막낸데 막내만 안으면 하루 피곤이 싹가시는데 이 막내를 보내면 내가 재미없어서 못살지. 

옆에 보니까 셋째 아들이 있습니다. 셋째를 보내면 어떻까. 그런데 셋째는 엄마, 아빠를 그렇게 잘 도와 줍니다. 설거지도 잘 도와주고 시키면 거절하는 법이 없습니다. 이렇게 신실한 아들이 어디 있나. 이런 아들 하나 쯤은 있어야지. 얘도 안될 거 같아. 

마지막 남은게 넷째 아들인데 이 아이는 항상 몸이 약해서 자주 병치레를 하고 병원을 자주 가야합니다. 이 약한 아이를 어떻게 형님댁에 보내나. 이 아이는 우리가 잘 돌봐줘야 해. 그리고 아무리 살펴봐도 보낼 자식이 한 명도 없더란 것입니다. 

그때 그 그리스도인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떠올랐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사랑하시는데 마치 한 사람을 사랑하시는 것처럼 사랑하신다는것이 떠 오르더랍니다. 형님에게는 도저히 안되겠다고 이야기했지만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뿌듯함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을 뜨겁게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결코 한번 택한 사람을 포기하는 법이 없습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지난 한 주간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린 뉴스가 2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법정 스님이 돌아가셔서 그 장례식을 치루는 것이 신문지상에 많이 소개되었습니다. 젊었을 때는 그 분 책을 많이 읽었습니다. 무소유의 삶을 주장하시고 민주운동도 하신 아주 훌륭한 스님이십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소식이 있습니다. 여중생을 성추행하고 살해한 김길태라는 사람의 이야기가 방송에 많이 나왔습니다. 길태라는 이름이 왜 그러냐하니 길에서 태어나서 길태라고 지었다는 겁니다. 교회앞에 버려진 것을 누가 데려다가 키웠는데 이 아이가 성장하면서 자꾸 비뚤어져 나가는 겁니다. 왜 비뚤어져 가는게 살펴보면 자신은 누군가에게 버려진 아이라는게 마음속에 충격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악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누군가에게 버림받았다는 생각이 그의 삶을 악하고 혼란스럽게 이끌어가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을 해 볼 수 있습니다. 

버림 받았다는 것은 굉징히 안타까운 것입니다. 어떤 장로님 부부가 어머님을 모시고 다닙니다. 언젠가 교회마당에서 어머니를 태웠습니다. 누가 창문을 두드리는데 어머니가 내리셨다가 타시는것 같더랍니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 두 부부는 어머니께서 타시려니하고 출발했습니다. 일산을 가는데 자유로쯤가서 어머니가 잘 계시나하고 뒤를 봤더니 어머니가 안타고 계시는 겁니다. 누군가와 잠깐 이야기하시느라 내리셔서 문을 닫으셨는데 타신지 알고 출발한 겁니다. 그래서 찾는데 전화도 안받으시고. 나중에 집에 오셨는데 일주일 동안 말을 안하시더랍니다. 날 버려두고 갔다고 니들이 그럴수 있느냐는 겁니다. 

지금도 이야기하면 웃으시지만 당시는 얼마나 속상했겠습니까. 일부러 그런것도 아니고 내리시고 소리가나 타신지 알고 타신게 아닙니다. 그걸 모르고 확인못하고 떠난 것이죠. 그러나 어머니 입장에서는 세상에 우리 아들이 이럴수가 있나 속상하신 겁니다. 

지난 이야기니까 우리가 재미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겁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버림받았다는 감정 고통스러운 겁니다. 가족에게 버림받았다. 교회에서 버림받았다. 친척들에게 버림받았다. 직장에서 버림받았다. 무서운 겁니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두려운게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혹시 나를 버리시지 않나 하는 겁니다. 혹시 내가 버림받은 존재가 아닌가? 왜? 하나님이 정말로 나를 사랑하신다면 내가 어떻게 병에 걸릴수가 있나. 하나님이 정말 내 편이시라면 직장에서 그만두고 나올 수가 있어. 어떻게 내 사업이 이렇게 어려움 당할 수가 있어. 이런 마음을 마귀가 심어주는 것입니다. 마귀는 오늘도 우리 마음에 속삭입니다. 너는 죄 때문에 벌 받는거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너를 버리신 거야.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신다고 웃기지 마. 그런데 사람들은 이상하게 마귀말은 잘 믿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음성 성령의 음성은 듣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 스스가 괴로워하고 우리 스스로 낙심하고 우리스스로 절망할 때가 얼마나 많으지 모릅니다. 

오늘 성경이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오늘 마귀는 사도 바울을 향해 소리칩니다. 사도바울을 송사하는 것입니다. 너에게 죄가 있지 않느냐. 너는 죄 때문에 망할것이다. 또 정죄하는 행위를 마귀는 공격합니다. 정죄라는게 뭡니까? 재판관이 죄에 대해 판결하는 겁니다. 너는 죄가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 얼마를 살아야한다. 그러니 사도바울이 소리칩니다. 누가 우리를 고발하리요. 주가 우리를 정죄하리요. 또 마귀는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고자 마귀는 애를 씁니다. 바울은 또 소리칩니다. 누가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으리요. 그것이 적신이든 기근이든 고난이든 핍박이든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마귀의 속삭임에 대해 바울은 부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마귀의 속삭임에 넘어가서는 안됩니다. 

한 예를들면 셰익스피어의 유명한 4대 비극이 있습니다. 리어왕, 햄릿, 맥베드, 그중에 하나 오셀로라는 작품이 있습니다. 베니스의 장군인 오셀로라는 장군이 있습니다. 아주 유명한 장군입니다. 그런데 그의 아내가 데스데모나라는 아주 아름답고 정결한 여인이 있습니다. 이 부부가 어느모로 보나 천생배필입니다. 그런데 그 장군의 부관중에 케시오라는 부관이 있습니다. 아주 충성스런 부관입니다. 그 부관자리를 항상 탐내는 사람이 있는데 이야고라는 사람인데 이 사람은 어떻게 하면 내가 부관자리에 앉을까하고 모함을 꾸며서 케시오를 끌어내리려 하는 것입니다. 

케시오가 억울한 일을 당해서 데스데모나에게 억울한 일을 좀 풀어달라고 부탁을 하는 과정에서 오셀로장군의 아내를 만나게 됩니다. 그때 이야고가 그걸 다 계획적으로 이용을 합니다. 그래서 오셀로 장군에게 당신의 부인이 부관하고 바람이 났다고 질투하게 만듭니다. 모든상황을 의심할 수 밖에 없도록 이끌어 갑니다. 아내를 철썩같이 믿던 오셀로장군의 마음에도 의심이 자꾸생깁니다. 마지막에 그는 침실에서 자기 아내를 칼로 찔러 죽입니다. 죽이고 나니까 모든 진실이 밝혀지는데 자기 아내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너무나 정결하고 아름다운 여인입니다. 케시오라는 부관의 어려움을 도와주려고 하다가 오해를 받아서 이렇게 되었고 모든겟이 이야고의 작당이었습니다. 오셀로는 자기아내를 살해하고 난후에 자기도 자결하고 만다는 비극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이야고의 역할을 누가하고 있습니까? 마귀가하고 있는겁니다. 하나님과 우리사이를 끊임없이 이간질 시켜서 우리와 하나님을 등지게 만들고 낙심하게 만들고 좌절하게 만드는 겁니다. 오늘 마귀는 하나님과 우리사이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람사이를 이간질 시킵니다. 부부사이를 이간질 시키고 가족사이를 이간질시키고 오해하게 만들고 원수가 되게 만드는 겁니다. 사람들이 마귀의 소리를 자꾸 듣습니다. 성령의 음성은 용서하라, 사랑하라, 덮어주라, 이해하라고 말씀하지만 마귀는 미워하라, 복수하라, 오해하라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오늘 마귀의 꾀임에 빠져서 구원에 의심을 가지고 흔들리는 영혼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핍박이 많았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니까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란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엄이나 이 핍박속에 사람들은 도대체 하나님은 어디계신거야 우리가 이렇게 핍박을 당할 수가 없지. 의심하게 만드는 겁니다. 오늘 바울은 의심할 수 없는 구원의 확신에 대해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한번 택함 받은 구원은 흔들리지 않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도바울은 오늘 31절에 말합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해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이게 무슨 이야기냐면 30절에 말씀을 받고 있습니다. 30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미리 정하셨고 우리를 예정하셨고 그리고 때가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것처럼 우리를 불러주셨고 우리를 죄없다고 선언하시고 우리를 영화롭게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구원의 한 과정입니다. 만세전에 우리를 아셨고 때가 돼서 우리를 예정하셨습니다. 구원하시기로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불러주셨습니다. 부르신 우리를 의롭다하시고 거룩게하시고 마지막엔 천국의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구원의 계획입니다.

그런데 종종 사람들은 마귀의 꽤임에 빠져서 천국의 구원의 확신을 잃어버리고 흔들릴때가 종종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오늘 흔들릴수 없는 이유에 대해 설명해 줍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우리편이시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편이시기 때문에 우리 구원은 흔들릴수 없다는 겁니다. 31절 말씀 읽어봅니다. 그런즉 이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이것을 공동번역으로 보면 하나님이 우리편이시면 누가 감히 맞서겠느냐. 하나님이 우리편이시라면 뭐가 두렵겠습니까. 

종종 교인들하고 가끔 윳을 놓을때가 있습니다. 편을 가르다보면 제가 어느편으로 갑니다. 그러면 목사님이 우리편이니까 우리가 이기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가 가는 팀은 꼭 집니다. 누군가가 우리편이 되면 자신감을 갖습니다. 하나님이 우리편이시라면 감히 우리와 맞설자가 누구겠느냐. 사단이 공격을 해와도 우린 두렵지 않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텔레비전을 보니까 사냥개가 호랑이 앞에 섰는데 호랑이 앞에서도 사냥개가 전혀 주눅들지 않습니다. 아주 당당하게 호랑이에게 대듭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그래서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줄 모른다는 속담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무서워하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사냥개 뒤에는 포수가 총을 들고 서 있습니다. 그러니 호랑이가 무섭지 않습니다. 내 뒤에 있는 주인이 아차하면 총쏠테니 말입니다. 포수가 내편이라면 사냥개는 호랑이를 무서워하지 않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편이 되신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인생길을 걸어갈 때 주님이 우리를 붙들고 계신다면 우리를 도우신다면 뭐가 두렵겠습니까. 마틴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킬때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로마 가톨릭에 대항해 교황과 싸우는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특별히 마틴 루터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라는 믿음으로 가지고 돈을 내고 헌금을 많이 하면 면죄부를 살수 있고 죄가 용서받는다는 이 허왕된 교황의 말에 반박해서 그가 종교개혁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교황은 얼마나 힘이 셋는지 모릅니다. 그 당시 왕도 교황앞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러니 교황과 싸운다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격입니다. 그래서 마틴 루터는 종종 낙심에 빠지곤 했습니다. 그 때 마틴루터에게 멜랑히트라는 절친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가 종종 마틴루터를 격려합니다. 자네가 성경에서 발견한 진리를 진리라고 확신할 수 있다면 그 진리는 반드시 이길것을 믿어야 한다네. 자네가 발견한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진리를 확신한다면 이 진리의 싸움에서 반드시 승리할거야. 하면서 마틴루터를 격려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마틴루터를 격려할 때는 31절을 써서 격려했다고 그럽니다. 그런즉 이일에 대해 우리가 무슨 말을 더하리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하나님이 우리의 편이 되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흔들릴수없는 이유는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32절을 읽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하나님께서는 그 외아들 예수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내어 주셨습니다. 아들까지 내어주신 그분이 우리를 위해 무엇을 아끼시겠습니까. 그리스도와함께 모든 것을 은사로 주시지 아니하겠느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고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저의 아버님이 3대 독자이십니다. 어머니께 이야기를 들어보면 저의 할머니가 아버지를 그렇게 사랑하셨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고모님이 5분되는데 아들은 한분이시니말입니다. 그러니 할머니가 3대독자 이 아들을 너무나 이뻐하셨습니다. 어느정도로 이뻐하느냐면, 겨울에 김치를 먹는데 김치에 고춧가루가 있으니까 이쁜아들이 고춧가루 먹고 울까봐 그 김치를 입에 넣어서 쪽쪽 빨아가지고 손으로 찍찍 찢어서 밥에다 얹어서 먹였다고 합니다. 그것만이 아니고 밥이 덜익은거 같으면 먹고 체할까봐 그것을 입에 넣어서 잘 씹으셔서 다시 숟가락에 담에서 먹이시고 이토록 이뻐하셨습니다. 3대독자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데 할머니가 그 아들을 위해 못할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아마 아들이 원하면 도둑질이라도 해서 뭐라도 해줬을겁니다. 아들을 사랑해서 자기 생명까지 내어줄 수 있는 그 할머니 앞에 뭘 아들을 위해 아끼겠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그 외아들을 내어 주셨다면 우리를 위해 뭘 아까워 하시겠느냐 뭐에 인색해 하시겠느냐하는 말입니다. 

우리교회 한 집사님이 명절이 되면 처갓집에 다녀 오십니다. 그러면 자랑을 합니다. 목사님 이번 시골 전라도 처갓집에 갔더니 장모님이 얼마나 맛있게 해주시는지 잘먹고 왔다는 겁니다. 전 그런이야기를 들으면 부럽습니다. 우리 장모님은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닭도 안키우셨습니다. 이분은 장모님 사위왔습니다. 닭잡아주세요 하면 얼른 잡아서 맛있게 요리를 해주신다는 겁니다. 어떻게 사위가 장모님께 가서 큰소리 칠 수 있는 것입니까. 간단한 겁니다. 물론 사위사랑은 장모사랑이라고 합니다만은 당신의 귀한 딸까지 내어주셨는데 닭한마리 못주겠냐라는 그런 마음입니다. 그러니 당당하게 달라고 요구하는 겁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들까지 내어주신 그분이 무엇을 더 주저하시겠습니까. 그 사랑 때문에 그 은혜 때문에 오늘도 우리는 결코 구원에서 멀어질 수 없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구원이 흔들릴 수 없는 이유 두 번째입니다.

세 번째의 우리의 구원이 흔들릴 수 없는 이유는 무죄를 선언하시는 하나님 때문입니다. 33절입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이는 하나님이시니 고발은 송사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마치 검사가 피의자를 법정에 세우는 것. 이것을 기소라하나요 송사라하나요 고발하는 것입니다. 감히 고발할 자가 없다는 겁니다. 왜? 우리를 향해 무죄를 선언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 때문에. 하나님께서 무죄를 선언하십니다. 너는 죄가 없다고 말입니다. 아무도 우리를 고발할자가 없습니다. 

대통령에게는 사면의 특권이 있습니다. 사형당할 사람도 정상을 참작해서 저 사람을 풀어줘라 그러면 그 죄가 용서받는 겁니다. 대통령에게는 그런 특권이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셨는데 누가 우리를 송사할수 있고 고발할 수 있겠느냐 결코 그럴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믿기전에 우리가 지은 죄들, 누구나 다 있습니다. 그러나 마귀는 송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과거의 죄 때문에 우리는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이미 다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의롭다하신이는 하나님이시니 그런겁니다. 

그것 만이 아니고 아무도 우리를 정죄할 수 없다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34절입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정죄라는게 무엇입니까? 죄있다고 인정하는 겁니다. 단죄한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됩니다. 마치 판사가 죄인을 놓고 선고하듯이 그 죄에 대한 형량을 선고하듯이 이게 바로 정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아무도 우리를 정죄할 수 없다. 왜정죄할 수 없습니까?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는 예수님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다시 살아나셨고 하나님 우편에 계시며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예수님 때문에 아무도 우리를 정죄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의 문제를 다 해결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피흘리심으로 죄를 다 해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다시 살아나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승천하셔서 하나님보좌 우편에 앉아계시면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신다고 그랬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간구하고 계심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신다 했습니다. 기도하신다 했습니다. 중보기도 하시는 겁니다. 동시에 예수님께서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신다는 겁니다.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시는 주님이 계시는 한 여러분의 구원은 취소될 수 없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게 우리가 가진 확신입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아무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자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35절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라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 누구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자가 없습니다. 그 당시 그리스도인은 환난을 당해, 곤고 곤고는 역경입니다. 박해 핍박입니다. 기근 굶주림이고 적신 헐벗음입니다. 그리고 갖가지 위험속에 던져질 지라도 하나님과 우리의 사랑을 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끈만은 끊을 수 없습니다. 인간은 종종 배신하기도 합니다. 인간은 종종 당신없이는 못산다고 하다가도 없어도 잘 살긴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합니다. 때로 하나님의 사랑에 등질때에도 게을러빠질때에도 우리가 범죄할 때도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그 사랑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폴리캅이라는 유명한 주교가 있었습니다. 로마 황제가 그를 심판하려고 체포명령을 내렸습니다. 그가 체포되어서 재판관앞에 섰습니다. 재판관이 폴리캅을 보니 연세가 87세인데 이 노인을 죽여서 뭐하나 생각합니다. 또 이노인은 아주 존경받는 어른입니다. 재판관이 말합니다. 선생님 제발 한마디만 하십시오. 나 예수 안믿는다 한마디만 하시면 선생님 여생을 편히 살수 있는 조치를 다하도록 하겠습니다. 부탁을 했습니다. 폴리캅 주교가 한마디로 거절합니다. 87년간 살며 예수님은 나를 한번도 배신한 적이 없는데 내가 어찌 예수님을 배신할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다는 겁니다. 결국 그는 화형을 당해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끝까지 품고 주님을 사랑하려다가 마지막 순교당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39절에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주 그리스도 예수안에있는 하나님의 사랑안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그 사랑의 줄만은 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다른 것 다 잃어버려도 주님의 사랑안에 있었기 때문에 그가 견고히 설수 있었던 것입니다. 건강도 잃어버렸습니다. 그 육체에 안질이 있고 때론 가시가 있다고 그랬습니다. 때론 안전함도 잃어 버렸습니다. 질병으로 고통당합니다. 믿던 사람들이 그를 떠납니다. 그러나 바울은 끝까지 주님만을 사랑하고 주님을 배신하지 않았습니다. 왜? 나를 향한 변치않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게 중요한것입니다. 

바울은 마지막에 이렇게 고백하며 노래합니다. 37절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가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이시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즉 이 모든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턱걸이 구원이 아닙니다. 제가 어렸을 때 보면 중학교 가기전에 체력장하는데 턱걸이 합니다. 어떤 친구들은 그게 힘들어 겔겔합니다. 그런데 어떤 친구들은 턱걸이를 잘해서 쭈욱올리면 가슴까지 올라갑니다. 넉넉한 겁니다. 우리의 구원도 아슬아슬한게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 때문에 넉넉히 승리하고 넉넉히 구원받는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지난번 동계올림픽을 보니까 김연아 선수가 금메달을 땄는데 김연아선수의 점수하고 아사다마오선수의 점수하고 아슬아슬한 차이입니까 아니면 큰 차이입니까. 큰차이입니다. 넉넉히 이겼습니다. 첫날 쇼트프로그램은 4점차이났지만 둘째날은 10점 이상 차이가 났습니다. 넉넉히 이겼습니다. 우리도 사탄과의 싸움에서 넉넉히 이길수 있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구원은 넉넉히 얻어진 것입니다. 아슬아슬한게 아닙니다. 그것을 아셔야합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의로운것이 없지만 예수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구원이 우리의 편에 있지 않고 주님의 편에 있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은 변하지 않습니다. 오늘 이 사랑과 이 은혜 여러분 마음속에 깊이 새기시기를 바랍니다. 

마틴부버라는 신학자는 그런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나를 아는 것보다 나를 더 잘 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나를 더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나는 나에대해 절망하기도 하지만 그리스도는 나를 절대 포기하시지 않습니다. 나는 오히려 필요없는 존재라고 생각하지만 오늘도 주님께서는 나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나는 오늘도 감사할 수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은혜, 흔들리지 않는 구원 이 주의 마음을 여러분 마음에 품으시고 주님앞에 어떻게 보답하며 살아가시겠습니까. 이 사랑안에 감사하며 찬양하며 또 복음을 증거하며 살아가는 우리모두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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