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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쉽게 드러나지 않는 하나님의 역사 (막 5: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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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드러나지 않는 하나님의 역사 (막 5:21~34)

 
영화 스캇 페이스를 보면 마약상인 주인공 알 파치노가 백만 불 어치의 현금을 돈세탁 하려다가 경찰의 함정 수사에 걸려서 입건됩니다. 경찰은 주인공을 마약밀매 혐의로 고발할 증거는 없지만 세금포탈 혐의로 고발할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죄가 입증되면 주인공은 감옥에 가야됩니다. 그래서 알 파치노가 최고의 변호사를 고용해서 전략을 짭니다. 그의 목적은 벌금을 내더라도 징역형을 피하는 것입니다. 그때 변호사가 주인공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법은 의심의 여지가 없이 유죄를 입증해야 된다. 

나는 그 의심의 여지를 확대하는 데 전문가다. 그러나 백만 불 어치의 현금이 경찰 비디오에 찍혔을 때는 그 돈을 길에서 주웠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니냐.’ 여기 의심의 여지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의심할만한 이유. 변호사는 의심할만한 이유를 최대화 할 의무가 있지만 목사들은 의심의 이유가 아니고 믿음의 이유를 최대화 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믿어야 될 이유. 믿을만한 이유. 

허무는 것은 세우는 것보다 쉽습니다. 뉴욕의 쌍둥이 빌딩이 세우는 데에는 몇 년이 걸렸지만 무너지는 것은 일순간이지 않았습니까. 요즘에 논란이 되고 있는 축구선수들의 기도 세리머니도 비판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골을 넣기는 어렵습니다. 저는 골을 넣은 후에 기도 세리머니를 하는 선수를 비판하는 분들에게 한 마디 부탁하고 싶습니다. 비판을 하기 전에 먼저 자신들이 세계 축구대회에 나가서 골을 넣어보라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어떻게 세리모니를 하는 게 적절할지 결정하라는 것입니다. 해보기 전에는 말을 하지 않아야 됩니다. 

비판하기는 쉬워도 그런 대회에 나가서 골을 넣는 것은 엄청 어렵고 넣은 다음에 만인이 보는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감사하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하라고 해서 그것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 말라고 해서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그런 것이 아니에요. 우리는 열심히 뛰는 선수들을 격려는 못할망정 그들의 기를 죽이는 일은 하지 말아야 됩니다. 누가 이런 말을 했어요. 기도를 하든 안하든 골만 많이 넣었으면 좋겠다. 그것이 현명한 사람입니다. 

간혹 누가 이런 말을 하지요. 예수님이 기도할 때는 골방에 들어가서 하라고 하지 않았느냐. 이런 성경 구절을 인용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성경 구절을 인용하는 사람들 본인이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를 하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트집 잡기 위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늘 골방에서 기도하지 않았어요. 때로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기도하셨습니다. 너희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말씀을 인용하려면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고 인용해야 됩니다. 성경말씀을 인용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반드시 바른 말을 한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마귀도 예수님을 시험할 때 성경구절을 인용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을 어떤 동기로 인용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주장을 펴기 위하여 이용할 수 있는 책이 아닙니다. 그건 설교자인 저도 늘 명심해야 될 사실입니다.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첫 번째 임기 중에 베트남 전쟁 때문에 많은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그럼에도 재선에 성공했습니다. 그는 재선 때 자기를 뽑아준 유권자들을 silent majority라고 불렀습니다. 조용한 과반수, 조용한 다수라는 뜻입니다. 그 말은 평소에는 자기의 뜻을 요란하게 표현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자기의 소신을 갖고 있는 다수의 사람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신앙적으로도 같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가 세속주의이니 포스트모던 시대라고 하지만 전 세계를 대상으로 조사해보면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사람이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보다도 월등하게 많습니다. 월등하게 많은 수의 사람들이 내세의 존재를 믿고 영혼의 존재를 믿습니다. 그들은 장례식 때 종교적인 방법으로 해 주기를 원합니다. 

그들이 다 그리스도인인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종교적인 사고방식에 대해서만큼은 이견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천성적인 종교성을 말하기 이전에 인간에게는 부인할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의식이 있습니다. 그 말은 나는 그분을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그분을 생각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는 얘기입니다. 그분이 내가 문을 닫으면 창문으로 들여다보시고 창문을 닫으면 문틈으로 들여다보시고 내가 그분을 잊을 수가 없어요. 그분을 피할 수가 없어요.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이 계시는 것을 느낍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다음에 나무 뒤에 숨은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숨은 것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을 의식했다는 얘기입니다. 비록 하나님으로부터 숨기는 했지만 하나님을 의식하기 때문에 숨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았다면 숨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 말은 숨으려는 사람도 그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부인할 수는 없다는 얘기입니다. 야고보는 이렇게까지 말합니다. ‘마귀들도 하나님을 믿고 두려워 떠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하여 두려워 떨든, 숨으려고 하든, 하나님이라는 존재는 인간의 의식 속에서 지울 수 없는 분입니다. 

어떤 이들은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냥개에 비교했습니다. 우리를 쫓아오신다는 얘기입니다. 언제까지? 우리가 그분을 인정하고 영접할 때까지.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기 전까지는 마음에 평강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결국 우리 마음의 평강은 스트레스가 없음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휴가를 가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과 화목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한 십 년 전에 저희 교회가 이 건물의 지하만을 빌려서 예배를 드릴 때 이 앞에 다른 건물 2층을 추가로 빌려서 교육관으로 쓰려고 한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건물주와 약속시간까지 잡았습니다. 그런데 약속시간이 됐는데 그분이 오시지를 않는 것입니다. 상당히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는데 전화를 해보니 그분이 마음을 바꿨다고 말씀하시더라구요. 좀 마음이 언짢았지만 어떻게 할 수가 없었지요. 그런데 신기한 일은 그 후에 그 분이 저희 교회 예배에 나오기 시작하시더라구요. 

저는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왜 교회에 방은 안 빌려주면서 우리교회 예배에는 나올까. 그런데 잠시 나오는 것도 아니고 한참을 나오시더라구요. 그런데 어느 날 예배가 끝나고 그분이 저와 악수를 하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제 목사님과 화목했습니다.’ 그때 제가 깨달았습니다. 교회에 임대를 거절한 후부터 마음이 불편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화해를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화해의 뜻으로 저희 교회의 예배에 출석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분이 판단이 옳은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와 화해하기 전까지는 마음에 평강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진정한 화해의 대상은 하나님이에요. 로마서 5장 1절 말씀에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여기에서 열쇠가 되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라는 말입니다. 아무나, 아무렇게나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습니다. 구원이란 하나님과 화목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조용한 다수가 비록 조용하지만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 하나님의 흔적을 느끼고 그리고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멸시하면 안됩니다. 저 사람들은 약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을 거야. 저 사람들은 생각이 부족하기 때문에 교회를 다닐 거야. 저 사람들은 지식이 부족해서 믿음에서 위로를 얻으려고 할 거야. 이런 식으로 그들을 멸시하면 안됩니다. 그들이 믿는 이유는 저마다 믿을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내세우지 않는 것뿐이지 저마다 믿을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캐서린 쿨만 목사는 miracle lady라고 불렸습니다. 그녀의 집회에서 기적이 많이 일어나기 때문에 그녀의 별명이 miracle lady-기적의 여성, 기적의 숙녀였습니다. 이 캐서린 쿨만은 매주 라디오 방송을 진행했는데 그 방송의 제목이 ‘나는 기적을 믿습니다.’였습니다. 한번은 캐서린이 길을 가는데 한 어린 소년이 그를 알아보고 흥분해서 miracle lady 라면서 ‘저도 기적을 믿어요! 저도 기적을 경험한 적이 있어요!’라고 말을 하더랍니다. 

그래서 캐서린이 ‘무슨 기적을 경험했니?’라고 물으니까 그 소년이 대답하기를 ‘한번은 제가 어디를 가는데 25센트가 필요해서 하나님께 간절히 25센트를 달라고 기도했는데 길에 25센트가 떨어져 있었어요.’ 그 아이를 멸시하면 안됩니다. 본인에게는 그것이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암에서 낫는 것이 기적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25센트를 줍는 것이 기적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믿을만한 충분한 증거가 된다면 그것은 의미 있는 경험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열 두해 혈루병 걸렸던 여성 그 여성은 제 설교에 자주 등장하는 손님입니다. 아마 천국에 가서 그 여성을 만나면 저에게 출연료를 달라고 할지도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여성이 아무도 모르게 나았다는 사실입니다.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 여성이 예수님의 겉옷에 손을 댔을 때 아무도 모르게 그 병이 나았습니다. 아무도 몰랐어요. 예수님과 당사자만이 알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경험하는 하나님도 이렇습니다. 그들은 조용히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합니다. 남들은 모르지만 본인은 압니다. 그리고 그것이 믿을만한 충분한 증거가 됩니다. 

그러면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그 얘기를 해주면 좋지 않겠느냐. 말을 안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첫째는 굳이 물어보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고 또 말을 해도 남들이 수긍할 것이라는 확신이 없기 때문이고, 또 말을 하기에는 너무 귀중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고, 아니면 말을 하면 섣불리 말을 했다가 그 효력이 떠나가면 어떡할까 이런 염려를 하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습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이 여성도 예수님이 물어보시기 전까지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누가 나를 만졌느냐’ 예수님이 물어보시기 전까지는 이 여성이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굳이 누가 나를 만졌느냐고 물어보셨을까. 성경학자들은 이런 질문을 합니다. ‘예수님이 모든 것을 아신다면 누가 당신을 만졌는지를 모르셨을 리가 없는데 왜 물어보셨을까?’ 왜 예수님이 물어보셨겠습니까. 알고 싶으니까 물어보신 것입니다. 예수님도 인간으로 오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모든 걸 다 파악하고 계셨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도 식사를 안하면 배가 고프시고 목마르시고 피곤하시고 주무시고 누가 섭섭한 말을 하면 마음이 아프시고 또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면 물과 피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누가 나를 만졌느냐고 알기 원하시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면 안됩니다. 

그럼 왜 예수님이 누가 당신을 만졌는지를 알기 원하시고 그 여자를 찾으셨느냐. 하나님의 역사는 개인이 혼자 간직하고 있기에는 너무 귀중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나누어야 많은 사람들이 힘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여성을 고쳐주셨지만 이 여성만을 위하여 고쳐주셨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이 여성에게 하신 일에 많은 사람에게 주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믿음을 나누고 전하는 신앙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복을 주시는 것은 내게 복을 주시지만 나만을 위해서 복을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은혜를 주시고 내게 성령을 부어주실 때 내게 주시는 것이지만 나만을 위하여 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이 한 사람에게 은혜를 부어주시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거기에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아마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이 세상의 모든 혈루병 환자가 낫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병자가 낫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똑같은 성령의 은사를 경험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몇몇 사람이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러한 은혜를 경험했다는 것으로도 족할 수 있는 것은 비록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은 은혜를 경험하지는 않더라도 몇몇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것과 같은 것이고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거기에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고 하나님이 어떠한 분인가를 알 수만 있다면 비록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은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지 않고 -그럴 수도 없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그럼에도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일반적인 한결같은 메시지를 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모든 사람들의 신앙이 도움이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내게 역사하시는 것을 나만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내게 주신 것은 귀중한 것이고 이것은 하나님이 내게 이러한 은혜를 주신 다음에는 나에게 사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많이 주신 자에게 많은 것을 기대하십니다. 축복이든 그것이 은사든 재능이든 어떤 것이든 하나님이 내게 주셨다고 믿는다면 그때부터는 나의 인생에 그전에 없었던 사명이 따라온다는 사실을 믿어야 됩니다. 그 사명은 굳이 내가 가진 것을 남에게 주기 위한 게 아니에요.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내가 가진 것을 주어야 된다. 그 얼마 되지도 않는 것을 누구에게 준다고 그러세요. 그게 아니고 하나님이 나에게 이렇게 역사하셨다는 사실을 남들이 알게 될 때 그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믿음에 힘이 되고 그들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믿음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아, 나도 기도해야 되겠구나. 나도 의심을 버려야 되겠구나.

의심의 여지는 이 세상에 많습니다. 사방에, 나무에도 의심이 걸려있고 사람들의 마음에도 의심이 들락날락 합니다. 주가처럼 어떤 날은 의심이 올라갔다가 어떤 날은 떨어졌다가. 예, 의심이라는 것은 사방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도 때로는 의심과 씨름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입니다. 우리는 서로 믿음을 돕기 위해서 애써야 됩니다.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그것입니다. 서로의 믿음을 돕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대화할 때 쓸데없는 것에 시간 허비하지 말고 연예인들에 대해서 대화하지 말고 서로의 믿음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말을 하는 법을 배워야 됩니다. 그건 단순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역사하신 것을 나누면 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함으로 구원에 이른다고 했습니다. 내 마음에 믿는 것을 입으로 시인하는 지혜로운 방법을 배워야 됩니다. 자랑하라는 얘기가 아니에요. 나의 의로움을 사람들에게 드러내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이 여성이 두려워하면서 예수님께 나와 예수님 겉옷에 손을 댔더니 나았다고 고백한 것처럼 내가 이전에 이런 아픔이 있었는데 예수님께 구했더니, 예수님께 나왔더니 그것이 나았다! 내가 깨끗함을 얻었다! 주님이 나를 변화시키셨다! 그것보다 강력한 증거는 없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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