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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십자가 아래의 백부장 (막 15:3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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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아래의 백부장 (막 15:33~39) 
 
 
❚군대 이야기

한국 남자들은 모이면 세 가지 이야기만 한다고 합니다. 군대 이야기, 축구 이야기, 그리고 또 하나는 뭘까요? 군대에서 축구 한 이야기입니다. 그 정도로 한국 남자들은 군대 이야기를 참 많이 합니다. 저도 가끔 설교 중에 군대 이야기를 인용합니다만 한국 남자들은 모였다 하면 정말 군대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특히 옛날 방위병(정식명칭은 단기사병)으로 군대 짧게 갔다 오신 분들이 군대 기밀은 제일 많이 알아요. 군대에서 겪은 무용담은 또 왜 그리 많은지요. 아무튼 한국 남자들은 군대라면 지긋지긋하다고 하면서도 모이면 군대 이야기가 빠지지 않습니다. 참 이상한 현상이지요.

오늘도 군대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냥 군대 이야기가 아니라 성경에 나오는 군대 이야기입니다. 마가복음 5장 9절에서 거라사의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는데 예수님이 그 사람에게 들어간 귀신에게 묻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러자 귀신이 대답합니다. “내 이름은 군대(軍隊)입니다.” 이 부분을 읽을 때 좀 이상하지 않았습니까? 무슨 귀신 이름이 군대에요? 이 구절은 군대에 대해 알지 않고서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군대 이야기를 하려는 것입니다. 여기서 ‘군대’란 헬라어로 ‘레기온’입니다. 이것은 로마 군대의 군단을 뜻하는데 보통 300~700명의 기병을 포함하여 3천~6천명의 보병으로 구성됩니다. 남자 분들은 이런 말이 좀 익숙하겠지만 여자 분들은 아주 생소하게 들리실 것입니다. 우리나라 군대는 제일 적은 단위가 분대입니다. 분대가 모여 소대가 되고 그 다음이 중대, 대대, 연대, 사단, 군단 이런 식으로 나갑니다. 

이 가운데 거라사 귀신 이야기에 나온 레기온은 우리나라 연대보다는 크고 사단보다는 작은 부대단위입니다. 그러니 이렇게 많은 귀신이 떼거지로 한 사람에게 들어갔다는 말입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요. 그래서 주님이 이 ‘군대 귀신’을 내쫓자 그 귀신이 돼지 떼 2천 마리에게 들어가 돼지들이 다 미쳐서 바다에 뛰어들어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군대에 대해 모르면 이 말씀도 이해하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로마군은 세계를 제패한 최고의 군대였습니다. 지금도 전설적인 세계 최강부대로 이름을 날릴 정도로 로마군은 강했습니다. 로마군의 전술상 기본단위는 ‘소대’인데 소대는 두 개의 ‘100인 부대’로 구성됩니다. 이 100인 부대는 본디 100명의 병사로 구성되었지만 나중에는 말로만 100인 부대지 실제로는 60명 내지 80명의 병사로 구성됩니다. 

이 100인 부대는 막강 로마군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단위이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존재였던 것입니다. 바로 이 100인 부대를 지휘하는 지휘관이 성경에 자주 나오는 백부장(百夫長)입니다. 백부장이 지휘하는 100인 부대가 로마군을 구성하는 핵심부대기 때문에 비록 병사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아도 로마 군대 안에서는 일선 장교로서 로마군의 가장 중추적인 역할을 하면서 가장 실질적인 힘을 가진 지휘관이 바로 백부장인 것입니다.

❚어느 백부장의 고백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장면에도 한 사람의 백부장이 등장합니다. 이 백부장에 대해서 우리는 많은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냥 그가 백부장이었던 것만 알 수 있지 이름이 뭔지, 어떤 백부장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다만 이 백부장은 실제 전쟁터에 나가서 싸우는 지휘관이 아니라 식민지인 이스라엘에 주둔하면서 처형장에서 십자가 처형의 모든 집행과정을 총괄한 책임 장교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로마 총독 빌라도의 명령에 따라 십자가형을 집행하고 예수님의 임종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아니라 이 로마 백부장이었습니다. 

물론 백부장 말고도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 죽음을 십자가 밑에서 직접 목격한 사람들은 많았습니다. 구경꾼으로 온 유대 백성들도 많이 있었고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관원, 그리고 로마 군인들도 있었습니다. 또한 끝까지 예수님의 죽음을 지킨 여인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서 유일하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인정하고 고백한 사람이 바로 백부장입니다.

그런데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정치범을 사형하는 십자가, 그 십자가 처형을 주관하는 백부장이 뜬금없이 십자가 위에 달려 비참하게 죽어가는 한 죄수를 보고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정말 이상한 일입니다. 우리는 믿음이 있어서 다 그대로 받아들여질지 모르지만 백부장이라는 사람이, 그래도 세계최강 로마군대의 실질적인 실세인 백부장이 보잘 것 없는 십자가 사형수를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당시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어떻게 잔인한 로마군이 그런 고백을 할 수 있으며 세계 최강 로마군의 백부장 체면이 있지 그동안 수많은 십자가 처형을 지켜보았을 이 백부장이 단순히 한 사람의 죽음과정을 바라보면서 어떻게 그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할 수 있었겠냐는 말입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요.

성경은 그 까닭에 대해 설명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저 십자가 처형을 감독하던 백부장이 예수님을 향하여 섰다가 예수님이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말했다고만 아주 간단하게 언급할 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성경을 봐서는 백부장이 이런 뜬금없는 고백, 말도 안 되는 고백을 한 까닭을 도무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 글씨로 안 쓰여 있다고 모르나요? 우리는 충분히 그 까닭을 추측하고도 남습니다. 두 가지 이유를 생각해 봅니다.

첫째, 백부장의 태도는 다른 로마 군인들과 처음부터 너무나도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에서 로마 군인들은 한 결 같이 아주 나쁜 인간들로 나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모욕하고, 주님을 왕으로 모시는 거짓 흉내(왕이 입는 홍포를 입히고 머리에 왕관 대신 가시관을 씌우고 오른손에는 왕이 드는 홀(笏) 대신 갈대를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라고 희롱함)를 내면서 조롱했습니다. 침까지 뱉고 손으로 때리고 갈대를 빼앗아 머리를 치면서 또다시 조롱하고 모욕합니다. 

얼마나 악랄합니까? 십자가에 달리기 전 채찍으로 심하게 때리고, 골고다 언덕에 이르러서는 예수님의 두 팔과 다리를 십자가에 못 박고, 십자가 아래서 예수님의 옷을 제비뽑아 전리품처럼 나누어 가집니다. 이렇게 모든 로마 군인들이 다 예수님을 괴롭히고 고통을 주고 조롱하고 모욕한 데는 까닭이 있습니다. 물론 로마 군인들 자체가 성격이 못되고 아주 잔인한 이유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들은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했습니다. 십자가 처형은 아무나 당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범만 당한다고 했지요? 

로마의 권력에 대항한 인간들에게 본때를 보여주는 잔인한 처형방법이라고 말했지요? 그러니 당연히 이런 인간들에게는 최대한의 고통과 희롱과 모욕을 줘야만 했던 것이고 처형을 담당한 로마 군인들이 그 역할을 담당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좋으나 싫으나 그들은 악역을 담당해 어떻게든 죄인을 괴롭히고 고통을 주고 모욕해야 했던 것이지요. 로마 군인은 다 그런 것입니다. 당연히 말입니다.

그런데 이 백부장은 달랐습니다. 똑같은 로마 군인이요, 오히려 부하들을 감독하며 죄수를 괴롭히고 모욕하게 시켜야 할 지휘관인데도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부하들과는 반대로 주님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갖고 영적으로 예민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대개 예수를 잘 믿습니다. 같은 불신자라도 이렇게 열린 마음과 예민한 영적인 마음을 지닌 사람은 다릅니다. 이런 심령은 아무나 갖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어떤 계기만 주어지면 금세 마음을 열어 예수님을 믿고 고백하게 됩니다. 그리고 아주 빨리 급속도로 믿음이 깊어지고 신앙이 크게 됩니다. 마치 물을 좍좍 흡수하는 스펀지처럼 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심령입니다. 백부장은 바로 이런 심령을 가진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과 여섯 시간 정도밖에는 주님을 만나지 못했고 그나마 십자가 위의 죄수와 십자가 아래에서 처형을 관할한 군인 입장으로 만났지만 그 짧은 시간에 예수님을 믿고 고백한 이 백부장이 어떤 다른 사람보다도 참된 주님의 제자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주님의 십자가 죽음 현장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셨음을 고백하고 증거한 진정한 제자였던 것입니다.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는 짤막한 신앙고백은 구원역사의 클라이맥스인 십자가 처형장에서 예수님을 가장 잘 증거한 가장 놀랍고도 위대한 신앙고백이었습니다.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사람은 유일하게 이 백부장 한 사람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이름도 모르는 백부장을 주님의 참 제자라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남다른 죽음

둘째, 예수님의 죽음이 너무나도 남달랐기 때문입니다. 백부장은 십자가형을 수없이 집행하면서 십자가 위에서 죽어가는 죄수들을 계속 지켜봤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죄수들은 십자가 위에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며 잘 견뎌내지 못합니다. 아무리 독한 죄수라도 십자가에 달려 시간이 지나면 못 박힌 손과 발의 고통뿐 아니라 호흡곤란 때문에 수시로 반복되는 경련과 발작 때문에 제발 빨리 좀 죽여 달라고 사정하기도 하고, 혹은 로마 군인이나 다른 사람들을 격렬하게 비방하고 저주하기도 하며, 미친 사람처럼 비명을 지르다가 울부짖거나 흐느껴 울기까지 합니다. 

백부장은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죽음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약해지는지 뼈저리게 느끼면서 죽음 앞에는 제아무리 대단한 사람도 아무 것도 아님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옆에서 십자가에 함께 달린 강도 하나도 역시 예상을 빗나가지 않고 옆에 달린 예수님을 조롱하고 비방했지요. 그런데 오늘 십자가에 달린 이 예수라는 사람은 뭔가 특별한 데가 있었습니다. 뭔가 다른 이들의 죽음과 달랐고 범상치 않은 느낌을 주었기에 백부장은 처음부터 이 범상치 않은 인물이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모든 과정을 유심히 관찰한 것입니다. 39절에서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라는 말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다른 죄수들도 있었지만 유독 그 가운데 예수님을 향해 섰던 까닭이 이 죄수가 뭔가 달라 보이고 범상치 않게 보였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라는 죄수는 십자가에 여섯 시간 동안 달려 있었습니다. 주님이 제삼시, 즉 오전 아홉시에 십자가에 못 박혀(막 15:25) 제구시, 즉 오후 3시에 돌아가셨으니 꼬박 여섯 시간 동안 십자가에 못 박혀 계신 것입니다. 십자가 처형은 이렇게 죄수를 단번에 죽이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매달아 진을 뽑아 죽이는 처형 방법입니다. 죄수는 탈진하고 호흡곤란으로 오랜 시간 고통 받다가 죽게 됩니다. 정말 잔인한 사형 방법이지요. 

그런데 예수라는 죄수는 여섯 시간이나 십자가에 못 박혀 그 큰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단 한 번도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종교지도자들이나 자신을 조롱하는 백성과 관원들을 원망하거나 저주하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물론 고통에 부르짖거나 울지도 않았습니다. 단지 죽기 전 아람어로 단 한 마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34절)라고 외쳤을 뿐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딱 이 한 마디만 부르짖고 숨을 거둔 이 범상치 않은 죄수는 백부장의 눈길과 특별한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습니다.

백부장은 십자가 아래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보며 많은 고민을 했을 것입니다. 물론 내색은 안 하고 속으로 말입니다. “저 사람이 도대체 누구기에 저럴 수 있을까?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인 죄패를 보니 틀림없이 반란죄 같이 큰 죄를 지은 정치범인 것 같은데 여느 정치범들과는 너무나 다르다.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어떻게 저렇게 큰 고통 가운데서도 참고 저토록 담담하게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말인가?”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백부장의 궁금증과 신기함은 곧 엄청난 놀라움과 충격으로 변하게 됩니다. 바로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자신을 놀리고 조롱하는 무리와 자신을 사정없이 때리고 십자가에 못 박은 로마 군인들을 향해 이렇게 기도할 때였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정말 백부장은 십자가 아래에서 이 말을 듣고 엄청난 충격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어떻게 십자가에 달린 죄수가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사람이 자기를 십자가에 달고 조롱하는 원수들을 향해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지금까지 백부장은 전쟁터를 누비며 많은 사람의 죽음을 보았을 것입니다. 또 십자가 처형을 관장하면서 수많은 십자가 위의 죄수들이 마지막을 맞는 모습을 보았을 것입니다. 대부분은 고통을 못 이겨 참혹하게 죽어가면서 발악을 하며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을 저주하며 죽어갑니다. 

간혹 마지막 순간에 “유다 독립만세”를 외치고 장렬하게 죽는 애국투사도 보았겠지요. 하지만 지금까지 한 사람도 이런 죽음을 맞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 누구도 자기를 그토록 고통스럽게 처참하게 죽이는 자들을 용서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누구도 그 엄청난 고통의 순간에 자기를 조롱하고 멸시하는 자들을 향해 그런 기도를 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아니, 사람이라면 그럴 수 없습니다. “저 놀라운 기도는 무엇이란 말인가? 저 놀라운 용서와 사랑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백부장은 고민 끝에 이런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이 분은 분명 사람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말대로 하나님의 아들임에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는 절대 저런 죽음을 맞이할 수 없다”고 말입니다. “바로 저것이 저 분이 그토록 말씀하던 ‘사랑’이라는 것이로구나” 하고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 누구도 저런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적 사랑이 아닌 신적인 사랑(아가페)입니다. 우리 죄 많은 인간을 사랑하사 자기 몸을 십자가에 죽도록 내어준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가능한 사랑임을 그는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것이지요.

❚무명의 제자들의 특징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까지 우리는 사순절을 맞아 무명이지만 주님을 참으로 따른 제자들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쯤에서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누가 주님의 참 제자입니까? 도대체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제대로 따른 참 제자라는 말입니까? 3년 동안이나 주님을 따라다니며 말씀을 친히 듣고 수많은 기적을 두 눈으로 목격하며 직접 신앙훈련 받은 열두 제자들입니까? 아닙니다. 심지어 그들 가운데에는 예수님을 은 삼십 냥에 팔아먹은 배신자도 나왔습니다. 그렇다면 유대교에 정통하고 모든 유대인의 존경과 인정을 한 몸에 받던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 대제사장 같은 종교지도자들입니까? 물론 아닙니다. 

그들은 오히려 자신들의 종교적 편견과 자리를 위협받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데 가장 앞장섭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의 제자 됨은 열두 제자들처럼 얼마나 교회 오래 다녔느냐, 얼마나 신앙생활 오래 했느냐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 주님의 제자 됨은 유대 종교지도자들처럼 전문성이나 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나 어떤 자리나 위치, 혹은 목사 장로 집사 권사 같은 교회의 직분 등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주님과 십자가에 함께 달린 강도나 십자가 아래서 주님을 고백한 백부장은 불과 몇 시간밖에 주님을 만나지 못했는데 참 제자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들은 성경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도 없었고 그 어떤 그럴듯한 지위를 누린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마지막 십자가 죽음의 현장에서 주님의 참 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열린 마음입니다. 내 고집이나 주장, 내 경험을 앞세우다가 주님을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내 자리가 위협 받을까봐 두려워서 주님을 배척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내가 피해 볼까봐 손해 볼까봐 무서워 주님을 배신하고 도망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들 그렇게 닫힌 마음으로 주님을 조롱하거나 배신할 때 이 이름 없는 무명의 제자들은 열린 마음으로 주님을 맞이하고 인정했습니다. 백지처럼 깨끗한 마음을 가지고 말입니다. 특히 백부장은 “하나님의 아들”이니 이런 말을 했다가 무슨 봉변이나 피해를 당할지도 모르는데 자신이 믿어지는 대로 그대로 고백한 사람입니다. 이게 열린 마음입니다.

또 그들은 열린 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처럼 성경에 대한 전문지식을 배운 것도 아니고 열두 제자들처럼 3년이나 신앙훈련을 받은 것도 아닌데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알아보고 인정할 수 있는 탁월한 영적인 눈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깨끗하고 열린 마음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특별한 은혜입니다. 나는 교회 오래 다니고 직분도 받았는데 왜 은혜를 못 받지?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은혜 안 주신 게 아니라 내가 은혜 못 받은 것입니다. 

열린 마음, 열린 눈이 없어 은혜 못 보고 영적인 세계를 못 봐서 그런 것입니다. 내가 요즘 왜 이리 쳐지고 영적으로 부진할까? 점검하십시오. 혹시 내 마음이 닫히고 영적인 눈이 닫힌 것은 아닌지요. 이 사순절, 주님의 고난과 죽으심을 묵상하고 동참하는 소중한 절기에 여러분 모두가 이 무명의 제자들처럼 열린 마음과 열린 눈을 가짐으로 주님을 고백하고 감사 감격하여 참 제자의 길을 걷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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