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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나를 넘어서는 믿음 (마 15:2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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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넘어서는 믿음 (마 15:21~28)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우리의 생각을 개혁합시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는 기존에 가지고 있는 사고의 틀을 깨야 살아남을 수 있는 시대입니다. 어느 분야에서 일을 하더라도 패러다임의 전환이 일어나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는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인 삶에 있어서도 우리의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합니다.
 
지난주일 설교에서 영적인 눈을 열라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우리가 영적인 눈을 연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기 이전에 가지고 있던 모든 사고의 틀과 행동의 틀을 깨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 생각과 자기 주관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영적 정체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무엇인지 성경적으로 분별하여 거기에 방향을 맞추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인 패러다임 전환이며, ‘나를 넘어서는 믿음’을 갖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 뜻과 계획이 무엇인지 분별하지 못하면 영적 윤형방황 하게 됩니다. 무엇인가 열심히 하는 것 같은데 방향이 맞지 않으니 결국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믿음이 자라지 않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한 여인의 믿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여인의 믿음은 예수님께서도 감동받으실 정도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이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믿음이 업그레이드되어 천하 만민 가운데서 명성과 칭찬을 얻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올바른 믿음의 출발점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마 15:21~22)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비롯한 유대인의 종교적, 율법적 사고의 틀을 깨신 후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가셨습니다. 이곳은 이방 나라로 지금의 레바논 지역에 해당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시 유대인이 금기시 하던 이방 지역으로 가신 까닭이 무엇일까요? 표면적으로는 예수님의 사역으로 인해 궁지에 몰린 유대 교권주의자들이 더 강하게 공격해옴에 따라 그들과의 논쟁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방 영혼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시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백성이라는 철저한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는 큰 착각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역사가 기록된 구약의 출애굽기를 보면 이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애굽에서 종노릇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양의 피를 바른 날 모두 빠져나오게 됩니다. 그런데 당시 애굽을 빠져나온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수많은 잡족과 양과 소와 심히 많은 가축이 그들과 함께 하였으며 (출 12:38) 이 말씀에서 ‘수많은 잡족’은 이방 족속을 가리킵니다. 이들도 양의 피를 바르고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출애굽 했던 것입니다. 
 
이 같은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복음은 어느 한 민족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모든 족속, 모든 민족을 위해 주어진 것임을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원래 하나님의 뜻과 계획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를 놓치고 자신들만의 선민의식에 빠져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이에 대한 영적인 눈이 열리도록 현장에서 직접 보여 주시기 위해 이방 지역으로 가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방 지역으로 들어가셨을 때 악한 귀신들린 딸을 데리고 있던 여인이 예수님께 나아와 간청을 했습니다. 자신을 불쌍히 여겨 딸을 고쳐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소문은 이미 이방 지역에까지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소문을 들은 여인은 갈급한 마음으로 찾아와 간청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을 부르며 무척이나 놀라운 고백을 한 것입니다.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 고백은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주’는 헬라어로 ‘퀴리오스’라고 하는데 이는 하나님을 부르는 대명사입니다. 그리고 ‘다윗의 자손’은 약속된 메시야를 일컫는 유대인 특유의 표현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께서 인류를 구원할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한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인생 모든 문제의 해답이 되신다는 사실을 믿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고백이 우리 믿음과 신앙생활의 출발점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창세기 3장 사건으로 인해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떠나 죄와 저주 가운데 사단 종노릇하다가 영원한 멸망 길로 갈 수밖에 없는 운명에 사로잡혔습니다. 이 가나안 여인의 딸이 귀신들리게 된 까닭이 무엇일까요? 근본적으로 볼 때 창세기 3장의 저주 때문입니다. 여기서 비롯된 문제가 계속해서 인간의 삶을 짓누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저주받은 인생의 운명을 바꾸어 주실 분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본문의 가나안 여인도 이 사실을 분명히 보았던 것입니다. 
 
성경은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히 12:2)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믿음의 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믿음의 원천이며 출발점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참된 믿음이 시작됩니다. 태양을 등지고 있으면 앞에는 그림자만 나타납니다. 예수님을 등지고 있으면 불안과 공포, 슬픔과 걱정의 그림자 속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태양을 바라보면 그림자가 물러가고 빛이 나타나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모든 어둠의 그림자가 물러가게 됩니다. 이때 비로소 오직 예수, 항상 예수, 완전한 예수, 영원한 예수가 사상화되고 체질화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이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천하 만민 가운데 명성과 칭찬을 얻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나를 넘어서는 믿음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마 15:23) 예수님께서는 가나안 여인의 간구에 일언반구도 대꾸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도 이 여인은 계속해서 간청했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빨리 이 여인을 보내자고 예수님께 요청합니다. 이 여인의 계속된 간구가 귀찮으니 예수님께서 빨리 요구를 들어 주시고 보내달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의외의 답변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마 15:24) 이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자면, 여인의 간구를 들어 주는 것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과는 맞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답변에도 이 여인은 예수님께 나아와 절하며 다시 자신을 도와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더 심한 표현으로 대답을 하셨습니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마 15:26) 어떻게 예수님께서 이렇게까지 말씀하실 수 있었는지 의문이 들 정도의 대답입니다. 
 
마틴 루터는 이 상황에 대해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녀의 마음을 그리고 그녀의 믿음을 산산조각 나게 했다.”고 표현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개와 같은 취급을 당한 것과 같으니 이 여인이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을까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표현하신 것은 단순히 이방 여인을 배척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일종의 테스트였습니다. 이 여인이 자기 자신을 넘어설 수 있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를 시험하신 것입니다. 인간이 인내할 수 있는 가장 마지막 관문인 자존심을 건드리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이 시험을 아주 멋지게 통과합니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마 15:27) 이는 예수님을 감동시킨 믿음의 고백이었습니다. 자신은 개에 지나지 않으나 개들도 주인의 상에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으니 그러한 부스러기 은혜라도 자신에게 베풀어 달라는 것입니다. 여인은 이러한 고백으로 자신을 넘어서는 믿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딸을 고쳐 주실 것이라는 분명한 믿음의 확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예수가 그리스도, 인생 모든 문제 해결자’라는 올바른 믿음 위에 꽃피운 또 다른 믿음의 고백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놀라운 믿음의 고백을 들으시고는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마 15:28)며 즉시로 딸을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방 여인을 향하여 “네 믿음이 크도다.”라는 칭찬을 해 주셨습니다. 이를 원어 표현대로 해석하자면 “네 믿음이 메가톤급이다.”라는 말과 같습니다.
 
이러한 메가톤급 믿음을 소유하는 것은 결코 어렵거나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본문의 가나안 여인과 같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면 됩니다. 문제와 사건 속에서 실망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더욱더 예수님께 다가서는 것이 메가톤급 믿음인 것입니다. 설령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 일어난다 하여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힘으로 자신을 넘어서는 것이 큰 믿음입니다. 모든 문제와 사건을 믿음의 성장 발판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이 천하 만민 가운데서 명성과 칭찬을 얻도록 믿음의 성장을 이루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 

조엘 오스틴 목사는 그의 저서 <최고의 삶>에서 “하나님을 제한하는 것은 오직 우리의 생각뿐이다.”라는 짧지만 의미 있는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믿음의 역사를 체험하지 못하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우리의 생각으로 하나님 능력의 통로를 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창고는 항상 풍성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불신앙, 부정적 생각으로 하나님 능력을 제한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부정적인 생각을 오늘 완전히 뒤엎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지금 처한 형편과 배경을 바라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능력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 없이는 우리는 아무것도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믿음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언약을 붙잡고 새롭게 변화된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해야 변할 수 있을까요? 우리 힘으로는 하지 못합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우리를 이끄시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말씀을 따라가고, 예수님을 따라가면 됩니다. 그러면 새 힘을 주실 것입니다. 이를 통해 받은 하나님 자녀의 신분과 권세를 가지고 승리의 삶을 살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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