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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안이 열린 인생 (마 15: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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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안이 열린 인생 (마 15:1~11)


그 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비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거늘 너희는 이르되 누구든지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 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무리를 불러 이르시되 듣고 깨달으라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영적 방향을 잡읍시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영적인 눈이 열려야 제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다른 사람을 올바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세상적인 눈, 지식적인 눈은 열려있었지만 정작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을 보는 눈은 열리지 않아 율법과 정죄를 일삼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예수님께서 책망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들은 영안이 어두워져 있었기 때문에 하는 일마다 하나님의 방향과는 맞지 않는 인본주의적 삶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성도 여러분이 말씀에 담긴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정확히 보는 영안이 열려 천하 만민 가운데 명성과 칭찬을 얻는 현장 전도 제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말씀 보는 눈
 
그 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마 15:1~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등장하면 마치 영화에서 악의 세력이 나타나 긴장감을 조성하는 듯한 분위기를 풍깁니다. 그만큼 그들은 기쁨과 평안을 주는 존재가 아니라 불안과 불편을 끼치는 존재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지금 예수님 앞에 나타났습니다. 
 
사실 그들의 주요 활동 무대는 예루살렘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곳과는 상당히 먼 거리의 갈릴리 지역에서 사역하고 계시던 예수님 앞에 그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사역에 상당한 위기의식을 느껴 어떻게든 제동을 걸려 했음을 보여 주는 대목입니다. 본문을 보면 그들은 마침내 한 가지 꼬투리를 잡게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떡을 먹을 때 손을 씻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생각에 이게 뭐가 그리 문제가 될 수 있을까 싶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철석같이 믿고 따르던 장로들의 전통에 위배되는 행동이었기 때문에 이를 지적하고 나선 것입니다. 본문의 장로는 율법에 능통한 종교지도자를 지칭합니다. 그들은 공식적으로 율법해석의 권리를 가졌는데 그 해석은 하나님 말씀과 동일한 구속력을 가진 것으로 취급되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이러한 전통이 하나님 말씀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지기도 했을 정도였습니다.
 
물론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는 것은 위생적으로 좋은 것이기는 합니다만 이를 종교적 규례로까지 만들어 사람들을 옭아매는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 것일까요? 전통이라는 것이 무조건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 말씀의 본질과는 전혀 방향이 맞지 않을 때 그것은 분명히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모습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본문 14절에서 “마치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뿐만 아니라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도 총체적으로 난국에 빠진 형국입니다. 그대로 두면 결국 지옥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될 것이기에 예수님께서 강하게 책망하신 것입니다. 
 
성경 66권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누구에게나 열려있습니다. 불신자들도 성경을 읽곤 하는데 이들은 성경을 마음의 양식 정도로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기록된 글로써 성경을 우리에게 전해 주신 데에는 단순히 마음의 양식으로 여기라는 정도의 의미가 있는 게 아닐 것입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 20:31)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볼 때 가져야 할 영적인 관점을 밝히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관점, 생명 살리는 관점으로 하나님 말씀을 보아야 합니다. 
 
바리새인 서기관들이 종교생활, 율법생활은 열심히 했지만 이러한 말씀 보는 눈이 없었습니다. 원죄가 무엇인지를 몰랐던 것입니다. 율법이 주어지기 훨씬 이전인 창세기 3장에서 발생한 어마어마한 영적 사건을 그들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영적인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그리스도가 왜 필요한지를 몰랐습니다. 이런 까닭에 그들은 방향을 맞추지 못하고 계속 복음 사역을 방해하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긴장하지 않으면 이처럼 형식적인 전통에 빠지게 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비밀, 마가다락방에 모였던 제자들이 생명 걸고 붙잡았던 복음의 비밀을 삶의 현장에서 풍성히 누리며 영적 비상을 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내면의 변화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 (마 15:3) 바리새인 서기관들의 완악한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아주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너희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인간의 전통을 더 우선시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는 본질을 놓친 것에 대한 책망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지금 남의 꼬투리나 잡을 상황이 아니라는 사실을 예수님께서 한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비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거늘 너희는 이르되 누구든지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마 15:4~6) 이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하나님 말씀을 왜곡하여 자신들의 유익을 추구했음을 꼬집는 말씀입니다. 이 내용은 유대인의 ‘고르반 제도’에 대한 것입니다. 고르반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을 뜻하는데 어떤 물품이든 “고르반 했다”고 말하며 하나님께 예물로 바치면 그 뒤로는 그것을 다른 용도로 절대 사용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제도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타락하여 부모를 봉양하지 않는 구실로 악용되고 있었습니다. 부모를 봉양할 충분한 여력이 있는데도 일부러 자신의 재물에 대해 고르반을 선언하여 그 재물을 부모 봉양에 사용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께 질문을 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결국 하나님 말씀보다 인간이 만든 전통을 더 우선시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라고 책망하셨던 것입니다. 본문 7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외식하는 자들’이라 치욕스러운 별명을 붙이셨습니다. 입술로만 하나님을 부를 뿐 내면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런 모습을 보이는 근본적인 까닭이 무엇일까요? 바로 말씀을 보는 영의 눈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면은 변하지 않고 형식만 남아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에 모여 있던 무리들을 불러 모으신 후 아주 단순하면서도 중요한 교훈을 주셨습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마 15:11) 내면의 변화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속사람이 변화되지 않고서는 사실적이고 지속적인 영향력을 입힐 수 없습니다. 
 
말씀을 받을 때 지식적으로 받아서는 안 됩니다. 내면 깊숙이 잠재의식에 영향을 줄 정도로 말씀의 뿌리를 내리시기 바랍니다. 여기에는 큰 결단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작은 실천으로 가능합니다. 말씀·기도·전도를 하루 5분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중심만 가지고 있으면 삶 자체가 사실적으로 변하게 됩니다. 오늘 내가 붙잡을 말씀, 그 말씀을 붙잡는 기도, 그리고 자신의 오늘 일정 속에서 전도 일정을 잡으려는 생각을 잠깐만 해도 삶이 달라집니다. 사람에 대한 생각과 만남 자체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3년만 지속한다면 엄청난 변화의 물결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이 이러한 사실적인 개인 변화, 현장 변화의 응답을 체험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 

사막을 여행하는 사람이 길을 잃게 되면 스스로 똑바로 걷겠다고 결심하고 걸어도 그 여행자를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계속 큰 원을 그리면서 걷게 되는데 이를 윤형방황(輪形彷徨)이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눈을 가리고 똑바로 걸어보라고 하면 자신은 똑바로 걷는다고 생각하는데도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20m를 걸으면 직선에서 5m의 간격이 벌어지고 100m를 가게 되면 결국 원을 그리면서 돌게 된다고 합니다. 
 
우리의 영적인 삶도 이와 같습니다. 영안이 어두워지면 이런 윤형방황의 삶을 살게 됩니다. 이일 저일 바쁘고 정신없게 일을 했는데도 지나고 나면 결국 전진하지 못하고 제자리걸음인 것입니다. 이런 상태를 넘어서는 분명한 방법이 푯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사막에서 북극성을 바라보면 정확한 방향을 잡을 수 있듯이 영적인 광야인 이 세상에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윤형방황과 같은 헛된 삶을 살지 않게 됩니다. 모든 성도 여러분이 방황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신 푯대를 향해 나아감으로 현장에서 승리하여 명성과 칭찬을 얻는 삶을 살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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