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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계 3: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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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계 3:14~22)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들에 대한 주님의 말씀 가운데 마지막 일곱번째 교회인 라오디게아 교회를 항한 말씀을 지난 시간에 이어 계속 드립니다.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분이 교회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히에라볼리스로부터 흘러내려온 뜨거운 온천물이 라오디게아로 오는 도중에 다 식어 미지근한 물이 되었습니다.   

식어버린 물은 온천수로서 치료의 효과가 없고 그렇다고 마실 수도 없는 물이었던 것처럼 라오디게아 교회의 행위가 그렇게 미지근하여 입에서 토하여 내치고 싶을 정도라는 책망입니다.   땅에서 막 솟아난 온천물처럼 뜨겁든지 그렇지 않으면 골로새 지방에서 나오는 생수처럼 사람들의 갈증을 시원하게 해소시키는 차가움이라도 가지기를 원한다는 주님의 비유적 책망입니다.   

자신들의 영적 상태가 이처럼 미지근함을 깨닫지 못했던 라오디게아 교회는 경제적으로 부자요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는 넉넉한 생활을 자랑으로 여기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주님 보시기에는 영적으로 곤고하고 가련하며 가난하고 눈멀었으며 벌거벗은 수치를 드러내고 있는 교회였습니다.   이런 교회를 향한 주님의 권고가 무엇이었습니까?   내게로 와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되고 흰옷을 사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며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자신의 약함과 부끄러움을 제대로 보라고 하십니다.    

그들이 아무리 돈 많은 부자들이라 해도 불로 연단한 금, 곧 순결한 믿음이 있어야 했습니다.   아무리 값비싼 옷을 입고 살지만 주님이 주시는 흰옷, 즉 성도다운 거룩한 삶이 따르는 의의 옷을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가려야 했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세계적으로 유명한 안약 생산지에 살고 있을지라도 병든 영의 눈을 치료하기 위한 안약을 사서 발라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치료제들은 다른 곳에서는 결코 구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구할 수 없는 신령한 것들입니다.  오직 주님 앞으로 나아오는 자들이 얻는 은혜의 선물들입니다.  

우리는 오늘날 영국 교회를 비롯하여 서방교회들의 영적 침체를 눈으로 목격하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침체되고 있으니 눈에 보이는 교회의 모습 역시 허약한 모습입니다. 불과 반세기 전에만 해도 동네마다 세워진 교회들이 교인들로 가득하고 전세계에 선교사를 가장 많이 파송하던 나라가 영국입니다.  그러나 영국 교회가 이제는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습니다. 2004년부터 2009년까지 둘로스호 단장으로 세계 곳곳을 순회하며 수고하신 최종상 목사님이 최근에 발표한 글 가운데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1998년 12월 14일 짐바브웨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WCC)에서 당시 조지 캐리 캔터베리 대주교는 “우리 (영국)교회가 피 흘리며 죽어가고 있다(The Church is bleeding to death)”며 기도와 도움을 요청했다.  이 애절한 한마디가 오늘의 영국 기독교의 현실을 대변하는 것 같다. 세계선교를 주도하던 영국의 국교인 성공회 최고 지도자로서 이런 발언을 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 발언을 한 지 십 년이 지났는데도 상황은 호전되지 않고 오히려 더 악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2000년 고난주일에 더 인디펜던트 신문에 소개된 ‘(영국)교회, 40년 내 사라진다(The Church will be Dead in 40 Years)’는 충격적인 연구보고가 현실화 될까 봐 걱정이다.]

영국교회가 전세계 교회들의 리더 역할을 하고 있을 때 오늘날 이런 모양으로 침체될 것을 상상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부자요 부요하고 부족함이 없어 보이던 영국교회가 이제는 상황이 바뀌어 선교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 화려하고 아름다운 예배당 건물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낡아지고 주일예배 드리러 모인 성도들로 가득찼던 예배당은 날이 갈수록 텅 비어가고 있습니다. 수많은 영국 교회들은 더 이상 큰 건물을 유지할 재정적인 능력도 인적 자원도 없어 예배당을 부동산 시장에 매물로 내놓는 현실입니다.   예배당이 어느날 공동주택으로 바뀌고 극장이나 스포츠 센터, 식당과 펍(pub)으로 바뀌며 심지어 힌두 사원이나 모슬램 사원으로 팔려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수요일 저녁에 성경공부 장소로 빌려 사용하는 OCMS 건물도 본래 North Oxford 지역 성도들의 예배 장소로 지어져 1862년에 봉헌된 St. Philip & St. James Church였습니다. 우리 눈으로 직접 봐서 아는대로 외관상으로는 물론 실내 공간이 정말 아름답게 지어진 예배당입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 영국교회가 점점 약화될 때 이 교회 역시 교인수가 급격히 줄어들면서  1976년에 이웃에 있는 St. Margaret Church와 합병을 하였고 더 이상 예배드릴 교인들이 없게 되자 1982년에 문을 닫고 지금은 OCMS가 인수하여 신학교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배당이 세워진지 120년 만에 문을 닫은 실제적인 예입니다. 그래도 이 건물이 세속적인 용도로 팔리지 않도록 OCMS가 인수하여 세계 각국에서 모인 선교사들과 목회자들을 양성하는 신학교로 사용하고 있으니 감사한 일입니다.   

이런 영국교회를 보면서 한국교회를 봅니다. 한국교회가 지난 반세기 동안 세계교회가 주목하고 놀랄만큼 양적으로 성장하였으며 현재는 세계에서 미국교회 다음으로 선교사를 가장 많이 보내는 교회가 된 것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만일 우리도 정신차려 깨어있지 않는다면 언제 영국교회와 유럽 교회의 약한 모습을 따라갈지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내가 부자요 부요하고 부족한 것이 없다는 자랑은 겉으로 보이는 건물의 화려함이나 교인 숫자 많음과 물량적 풍요함이 아니어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긍휼과 은혜가 차고 넘쳐 세상을 향해 흘러가는 풍성함이 우리의 자랑이어야 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로운 출생을 경험한 성도들이 끊임없이 나타나고 자라가며 성숙해지는 것이 우리의 자랑과 감사가 되어야 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미지근한  행위를 아신 주님은 엄하게 책망하십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상관하지 않고 제마음대로 살도록 그대로 둡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교회를 사랑하시기에 책망하여 징계하십니다. 이것이 자식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사랑이며 자기 목숨을 주기까지 사랑하는 친구의 사랑입니다.   주께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해 하신 말씀처럼 미지근한 태도를 버리고 열심을 냅시다.   뜨겁든지 시원하든지 살아있는 우리의 믿음을 보여야 합니다. 산 것 같지만 죽은 듯 미지근하여 역겨운 태도를 벗어던지고 회개합시다. 이것만이 살 길이라고 촉구하십니다.사랑하는 자가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주님의 심정을  본문 20절에 말씀합니다.   

William Holman Hunt(1827-1910)는 계시록 3:20의 말씀을 그의 그림 ‘The Light of the World’  ‘세상의 빛’이라는 작품에서 상징적 기법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옥스포드에 많은 기독교 역사물과 기록들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Holman Hunt의 그림입니다. 옥스포드대학 Keble College 채플에 걸려있는 유명한 그림을 프로젝트 화면으로 봅시다. 오래 전부터 꼭 보고 싶었는데 옥스포드에 살다보니 언젠가 가겠지 하며 미루었는데 오늘 설교를 준비하다 드디어 가보았습니다. 지난 금요일에 옥스포드대학 물리학 박사 과정에 있는 승주 형제와 함께 Keble College를 방문하여 눈으로 확인하고 사진도 몇장 찍어왔습니다.   기회가 되면 우리 교우들도 키블 컬리지를 방문하여 그림 감상을 하면서 오늘 주님이 하신 말씀을 묵상하는 시간을 갖는 것도 좋겠습니다.   

이 작품에 얽힌 이야기들과 많은 감상평들이 있습니다. 홀만 헌트가 일생 중에 똑같은 그림을 두 번 그렸습니다.   첫 그림은 헌트가 20대의 젊은 시절에 8년에 걸쳐 그렸고 이 그림을 구입한 Thomas Combe 부인이 키블 컬리지에 선물하여 채플에 걸리게 되었습니다. 본래 홀만 헌트는 이 그림이 채플 본당에 걸리기를 원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대신 채플 본당에 부속된 옆방의 작은 채플(side chapel)에 걸렸습니다.   홀만 헌트는 70세가 되어갈  때 원래 작품과 같은 그림을 더 큰 사이즈로 다시 한 번 그렸는데 그 그림이 세계 각처를 여행하며 전시되다가 현재는 런던의 St. Paul 교회에 결려있습니다. 10년 전에 세인트 폴 성당을 방문하였을 때는 이런 내용을 모르고 갔었는데 다시 한 번 가게 되면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려고 합니다.  

Keble College 채플에 비치된 설명서에 간단한 내용이 담겨있었습니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문 밖은 어둡고 문의 못과 경첩은 녹슬고 낡았습니다. 잡초들과 담쟁이덩굴이 무성히 자라 문을 감싸고 있습니다. 문은 사람의 마음 혹은 영혼을 상징할 때 그 마음의 문이 열린 적이 없다는 의미이며 문 앞에 계신 예수께서 기다린 시간이 오래 되었음을 상징합니다.  

그림 안에 두개의 빛이 있습니다.   주님의 손에 든 등불과 머리 뒷쪽의 둥근 모양의 빛입니다.  손에 들린 등불은 사람의 양심 또는 마음의 빛을 의미하고 머리 뒷쪽의 둥근 빛은 구원의 빛을 상징합니다.   땅에 떨어진 열매와 마른 잡초들은 인생의 가을을 의미하고, 그리스도의 몸 저 뒷편에 밝은 빛은 새벽별이며 새벽 하늘의 빛은 새 날이 밝아옴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그림 아래 액자의 테두리에 요한계시록 3:20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Behold, I stand at the door and knock; if any man hear my voice, and open the door, I will come in to him, and will sup with him, and he with me".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문 두드리는 분은 이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이십니다.   인생의 밤이 깊어갈 때 밤새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새벽 하늘이 환하게 밝아오기까지 문이 열리기를 참고 기다리시는 주님이십니다. 인생의 가을이 깊어가고 거칠고 메마른 잡초들로 무성한 우리의 마음에 찾아와 생명을 나누시려 문을 두드리시는 주님이십니다. 주께서 오래 참고 기다리시며 나를 부르시는데 깊은 잠에 빠져  주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분은 없습니까? 내 집의 참 주인이신 주님을 문 밖에 세워두고 헛되고 거짓된 세상의  즐거움에 빠져 나를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미처 듣지 못하고, 아니 일부러 못들은 척 외면하며 소중한 시간을 허비하고 있습니까?   

내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는 분은 자신을 불태워 이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세상의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이십니다. 나를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주시기까지 하신 그 주님을 마음에 영접하십시오.   굳게 닫힌 마음의 문, 빛을 잃은 마음, 세상의 온갖 잡스러운 죄악과 욕심과 교만의 잡초들로 우거진 내 마음의 문을 열고 빛으로 오신 주님을 맞아들이십시다. 그 길만이 내가 참으로 사는 길입니다.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문의 손잡이가 없습니다.  이것을 알아차린 어떤 사람은 이 그림이 미완성 작품 이거나 화가의 실수라고 비평하였습니다.그러나 그것은 화가의 의도적인 상징기법이었습니다.  

Holman Hunt는 문 밖에 손잡이가 없음은 안에서 문을 열어야 들어갈 수 있다는 의미이고 주님이 강압적으로 열고 들어가지 않으신다는 상징적 표현이라고 설명합니다. 집이 없어 길거리를 헤매는 노숙자가 남의 집 대문을 두드리며 하루 머물 곳을 구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집의 본래 주인이신 분이 그 집의 문이 열리기를 오래 참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하인인 내가 주인 노릇하며 주인을 문 밖에 세워두고 문전박대하고 있으니 상황이 거꾸로 되었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 문을 열면 주께서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마실 것입니다.   주님과 더불어 먹는다는 말씀은 식탁에서의 교제이며 천국잔치 초대입니다.  

낯선 사람과 한 식탁에 앉아 밥 먹는 일이 어디 편안한 일입니까?    ‘언제 밥 한 번 먹읍시다’ 이 말은 ‘우리 서로 잘 지내봅시다’는 초청입니다.   더 잘 알고 싶거나 잘 아는 사이가 되어야 서로 편안한 마음으로 먹고 마시는 사귐이 이루어집니다.   한바탕 싸운 사람과 금방 그 자리에 앉아 밥을 먹으면 밥이 목에 제대로 넘어가기나 합니까?    마음이 불편하여 진수성찬이 앞에 있어도 맛이 없고 소화불량에 걸립니다.    예수께서 나와 함께 먹고 마시겠다는 말씀은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식탁교제를 나와 함께 나누시겠다는 초청입니다.    우리의 친구가 되시는 주님이며 따뜻한 아버지의 심정으로 자녀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황송한 초청입니까?   

이제 마지막으로  주님이 주시는 약속을 봅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하십니다.    세상에 이런 특혜가 또 어디에 있습니까?   주님과 동등한 영광을 누리게 하신다는 엄청난  약속입니다.     성자 예수님과 성부 하나님이 하나 되심같이 우리가 주님과 하나가 되는 영광을 주십니다.    

내가 이긴 것이 곧 주님의 이김이 되고 주님의 기쁨이 되십니다.   주님과 나의 하나됨입니다.   내가 이긴 것이 어찌 내 힘으로 한 일입니까?   내가 무엇을 하였기에 이런 영광을 누립니까?   다만 그 음성을 듣고 문을 열고 주님을 영접한 일 밖에 없습니다.    내 죄를 회개하고 주님 앞에서 성도로 열심히 산 것 뿐입니다.    제 잘난 맛에 착각하고 사는 라오디게아 교회는 일곱 교회들 중에 가장 엄한 책망을 들은 교회인 것 같지만 가장 사랑스런 약속을 받은 교회입니다.   가장 못된 인생이었으나 가장 존귀한 자로 받아주십니다.   그것이 곧 저와 여러분입니다.    이 어찌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고 가능할까요?  

안경 돗수가 잘 안맞으면 사물을 보는데 불편합니다.   그러면 두말할 것 없이 안경을 바꿔야 합니다.   눈병으로 시력에 문제가 생깁니다.   그러면 안과에 가든지 안약을 사서 발라 잘 보이도록 해야 합니다.   영혼의 눈이 어두워 진리의 빛을 볼 수 없다면 주님이 주시는 안약을 사서 그 눈에 발라 보아야 합니다.    지금 아쉬운 것 없이 잘 살고 있으니 겁날 것 없다고 장담하십니까?    그 즐거움의 날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리라 생각하십니까?   지금 건강하고 내 지혜와 지식과 경력이 남달라 무슨 일을 하든지 자신있다고 큰 소리합니까?    언제 그 지혜가 멈추고 최고와 최상의 자리를 남에게 내어주어야 할 때가 올지 예측할 수 있습니까?     

뛰어난 재능과 기술과 학문과 통찰력으로 남보다 먼저 최고의 자리, 부러움의 자리에 올랐던 사람들이 왜 한강으로 뛰어들고 목을 매며 절벽과 건물 아래로 몸을 던집니까?    나는 부자요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외칠만한 사람들인데 어찌 그리 허무하게 인생을 마감하고 맙니까?   자신의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수치를 모르고 살다가 어느 순간 그것을 깨달았는데 깨달음으로 그치고 치료와 회복의 길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너무 자존심이 강하고 자존감이 높다보니 다른 사람 앞에 자신의 약함을 보이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심지어 만물의 주인이요 머리가 되신 주님, 내 인생의 주인이신 주님 앞에서조차 그 자존심을 버리지 못하고 꼿꼿이 머리들고 살다가 스스로 삶을 마쳐버리는 가련하고 곤고한 인생의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징계를 감사함으로 받으십시오.   사생자가 아니라 친 자녀이기 때문에 뼈아픈 눈물과 고통스런 징계를 통해 회개의 기회를 주십니다.    열심을 내고 회개합시다.   주님 앞에 회개하는 것은 자존심 문제가 아니라 영원한 생명이 걸린 문제입니다.    헛된 것에 목숨을 걸고 열심을 내는데 정작 영원한 생명이 걸린 일에는 냉담한 반응을 보입니다.    의도적으로 무시하려들고 나중으로 미루기도 합니다.    지금 주의 음성이 들리는 이 자리에서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모시기 바랍니다.   그가 내 마음의 문을 두드리십니다.   생명을 주시는 그분이 나를 찾으시는데 언제까지 못들은 체 하겠습니까? 

아시아의 일곱 교회들에게 말씀하실 때 다른 교회에게는 ‘내가 네게 임하리니’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내가 속히 임하리니’ 하셨지만 라오디게아 교회에게는 ‘보라, 지금 내가 너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하십니다.   벌써 내 곁에 찾아오셔서 나를 부르고 계십니다.   곧 먼동이 터옵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남은 시간이 생각처럼 그리 많지 않습니다.     

찬송가 318장에 ‘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 그 음성 부드러워 문 앞에 나와서 사면을 보며 우리를 기다리네 오라 오라 방황치 말고 오라  죄 있는 자들아 이리로 오라  주 예수 앞에 오라’ 는 말씀이 있습니다.   세월이 살같이 빠르게 지나고 쾌락은 금방 끝이 납니다.   사망의 그늘이 모든 사람 앞에 둘리며 가리웁니다.   더 이상 방황치 말고 내게로 오라 부르십니다.   주께서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시고 경고하시며 약속하실 때 그 음성을 듣고 열심을 내십시오!    회개하십시오!    이것이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근본 이유이고 참 목적입니다.    내 마음에 주님을 모시고 내 인생 속에 주님을 참 주인으로 모심으로 이 땅에서 주님과 함께 천국잔치를 미리 맛보며 영원한 그 나라 시민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귀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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